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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솜사탕





* * *





다음 날, 페로와 포이를 옆구리에 낀 채 침대에서 아침을 맞이한 저는, 알코올의 잔재가 선사하는 두통 속에서 어제를 반추했습니다.

그리고 후회로 축축하게 젖었습니다.


다 말하라고 해서, 그게 조건이었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따를 필요는 없었는데.


아무리 알코올이라는 훌륭한 수단이 있었다고 해도 밝힐 것이 따로 있었던 겁니다.


다시 어제의 저를 그려봅니다. 어제의 저는 분명 "폐하와 하우스키퍼 님의 관계가 박살나길 바랐어요." 라고 지껄였습니다.


발톱 선 포이의 앞발이 잠옷의 소매에 걸렸습니다. 배가 고파서 그런건가 싶었는데 더 자라는 듯이, 시선만 올려 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옆으로 삐딱하게 누운 채로.


……다 지껄여놓고 후회해봤자 소용 없습니다. 침대맡의 협탁에 있는 시계가 오전 6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15분이나 늦잠을 잤기 때문에 서둘러서 환복하고 카페를 나섰습니다. 애매하게 서늘한 새벽과 아침 사이의 시간대엔 옅은 안개가 끼어있습니다.


화단을 낀 테라스에서 간단하게 스트레칭하고 달립니다. 목적지는 그 아무도 찾는 이가 없는 공원. 잠에서 깨어나는 중인 주택가를 가로질러 도착하면, 그 곳의 부지를 한시간 가량 뺑뺑 돕니다. 이것이 남자가 준 유치한 디자인의 일과표에 따른 하루의 시작입니다.


남자는 어제 "운동 거르지 마." 라며 제게 일과표를 상기시켰었죠. 일과표를 제대로 따르지 않고 있다고 짐작하듯이. 만약 정말로 그렇게 짐작했다면, 그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카페에서 지낸지 두 달. 그 두 달 동안 저는 남자가 건넨 일과표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오늘과 같이 늦잠을 잔 적은 몇 번 있었어도, 결코 귀찮거나 피곤하다는 이유로 한두가지 빼먹거나 넘겨버리지 않았던 겁니다. 두 달 넘게 무단결근 중인 너 치고는 의외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죠. 딱히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닙니다. 마이너스보단 플러스가 낫다고 생각했을 뿐.






* * *







06시.


아침이 되면 페로와 포이와 함께 일어납니다. 운동하기 좋은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가면 난장판이 되어있습니다. 오밤 중에 일어난 전투 때문이지요. 3달 째,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저지르는 걸 보니 단순한 전투가 아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떠한 의례행위일까요. 사료알갱이를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바닥에 흩뿌려놓는 것은, 녀석들에게 주술적인 의미가 담긴건지도 모릅니다.




07시 30분. 


카페를 정리하고 (운동 중에 전투를 벌일 때도 있어서, 카페정리가 나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운동을 마친 뒤 돌아오면 1층을 대략적으로 점검합니다. 점검이 끝나면 흑색 앞치마를 두르고 원두를 볶습니다. 청이가 와서 볶을 때도 있지만 출근이 좀 늦어지는 경우에는 제가 합니다. 천장 모서리에 달린 스피커에서 앤 마리의 '2002'가 흘러나옵니다. 사장 님이 설정한 플레이리스트 중 첫번 째 곡입니다. 


집회소엔 언제나 같은 음악만 흘러나옵니다. 사장 님이 절대 못바꾸게 하거든요. 한 1년 전에 백이가 지겹다고 바꾸자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사장 님은 정색하셨다는 듯 합니다. 청이는 사장 님이 플레이리스트에 아주 진심이시라고 축 쳐진 콧숨을 뱉었습니다. 


이 시간대엔 아무도 없지만, 남몰래 스피커 속 앤 마리를 따라 가사를 읊어봅니다.

후렴구에 집중하느라 원두를 태워먹었습니다.

얼마만에 저지른 실수일까요. 




09시 30분.


청이와 백이가 오랫만에 다퉜습니다. 이 둘은 다투는 것에 '오랫만'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물론 서로는 아직도 부정합니다만, 보고 있으면 '이제 머지 않았다.' 라는 분위기를 팍팍 풍깁니다. 너희는 도대체 언제 사귀는거냐고 놀려봤습니다. 반응한 건 백이 뿐이었습니다. 혀를 따라 몸도 꼬였는지 한동안 계속 허둥댔습니다.




10시.


이틀마다 방문하는 노부부가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께느른한 오전의 봄을 만끽 중입니다. 10분 지나면 이제 6살된 남자아이와 함께 주부 한 명이 찾아옵니다. 항상 마시는 건 에스프레소고, 어릴 때부터 커피 맛을 알게해주고 싶다며 아이 몫의 라떼도 한 잔 주문합니다. 곤란합니다. 커피는 어린아이에게 우울증이나 당뇨, 불면증을 유발한다고 하니까요.


어린아이에겐 라떼도 쓸 것 같아서, 신경써서 만들다보면 라떼가 아니라 커피맛 우유를 만들고 맙니다. 거품으로 고양이 얼굴은 제대로 그렸으니 괜찮겠지, 하면서 넘깁니다. 그래도 걱정은 됩니다. 어린나이부터 커피 맛을 알려주겠다니, 무슨 생각인건지. 


그렇게 모자를 관찰하고 있으면 괜한 걱정을 한건가 싶습니다. 아이가 꽤 맛있게 홀짝이는 겁니다. 

그래. 맛있게 먹으면 됐어. 한 잔 더 만들어서 저도 마셔봅니다. 처음 커피를 내렸을 때보다 맛있어진 것 같아 살짝 우쭐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12시.


청이가 데이트를 권유해왔습니다. 일주일 뒤에 오겠다던 사장 님은 한 달이 넘어도 안오니, 자기랑 같이 놀러가자면서요. 이것저것 재밌는 걸 많이 알려주겠다네요. 아무래도 청이는 틈나면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제가 나이대에 맞지않는 식견을 가지고 있다 판단한 것 같았습니다. 이쪽 시간대에서 2년 넘게 지내며 꽤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하긴, 그렇습니다. 올해로 28살인 ―서류상― 여자가 누구라도 알만한 걸 모른다고 하면, 그것도 같은 여자가 그렇다고 한다면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될 겁니다. 저는 수락하면서 백이는 버리는거냐고 물어봤습니다. 청이는 싸늘하게 피식거리며 저를 쏘아봤습니다. 그게 웃겨서 더는 묻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15시.


이 시간대면 잠시 3층에 다녀옵니다. 오늘도 이런저런 이유로 다녀왔는데, 그 사이 백이의 상태가 이상해졌습니다. 제가 1층으로 돌아오자 괴상한 소리를 내며 갑자기 다가와서는 이것 좀 보라며 스마트폰을 들이민 겁니다. 뭔가 하고 보니까, SNS에 게시된 짧은 동영상이었습니다. 그 동영상 속에 제가 있습니다. 동영상의 제목은 고양이 카페 여신이 어쩌고 저쩌고 입니다. 그렇군요. 저번 주말엔 손님이 꽤 많았으니 그 중 누군가가 도촬이라도 했나 봅니다.


하트 수가 몇 개고 댓글이 몇 개고 백이가 떠들었지만 저는 SNS는 안하는지라 그게 많은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리 매장 유명해지는거에요!?" 라면서 백이가 좋아합니다. 왜 좋아하는 걸까요. 지금같이 인간 손님보다 고양이 손님이 더 찾아오는 편이 덜 바쁠텐데. 그리고 여기서 더 바빠져봐야 백이의 월급은 같을 겁니다.


왜 나같은 것에 관심을 갖는걸까. 도촬 당했다는 것도 짜증났지만 기운이 빠졌습니다. 여기는 고양이들과 잠깐 동안이라도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이들을 위한 곳입니다. 고양이들 때문에 매출이 오르는게 아니라 저 때문에 매출이 오른다면 그건 잘못된 겁니다. 만약의 이야기지만, 그렇게 된다면 고양이들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자리할 곳이 없어졌다 여기게 될 수도 있는거니까요.


 

  

16시.


다음 날, 난리가 났습니다. 저희 매장은 따로 브레이킹 타임이 없지만, 이 시간대가 되면 인간 손님도 고양이 손님도 각자의 이유로 자리를 비우는지라 매장은 한산해집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습니다. 이 시간대만이 아니라 아침부터, 그것도 제가 아침운동하고 돌아온 순간부터 손님들이 몰려든 겁니다.   

 

덕분에 따뜻한 적막을 자랑하던 '집회소'는 필요 이상으로 떠들썩해져 버렸습니다. 이변을 감지한 고양이 손님들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찾아왔더라도 곧바로 도망치듯 떠나버렸고요. 인간과 고양이의 비율이 어긋난게 마음에 안들었습니다. 평소의 집회소가 가지던 풍경과 괴리가 느껴져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게 표정에도 드러난건지 백이가 좀처럼 제 눈을 마주치질 못합니다. 저는 그걸 가지고 놀릴 겸 기분을 풀어주려 하는데,


"이야. 왜 이렇게 북적거려? 나몰래 뭐 대단한 기획이라도 한거야?"


그가 나타났습니다.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도 더 넘겨서.


"사장 님." 청이가 사장 님에게 앞치마를 휙 던집니다. "저기 싱크대에 쌓인거 보이시죠? 설거지 좀 하세요."


"오. 맡겨 줘."


싫은 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사장 님은 의외로 고분고분 따랐습니다. 어디 햇빛 쨍쨍한 곳이라도 놀러갔다 온건지 백색에 야자수 무늬가 들어간 하와이안 셔츠 차림으로 고무장갑을 끼고서, 묵묵히 설거지를 하고 있습니다. 하와이안 셔츠라. 그러고 보니 다음 달이면 벌써 6월인가요. 이제야 6월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여름이라고 불러도 좋을 시기가 옵니다.






20시.


매장은 19시 전후로 마감합니다. 카페 치곤 꽤 이른 시간에 하지요. 집회소의 매출이 좋지않은 것은 이 이유없는 이른 마감 때문이기도 합니다. 잘 벌면 20만원, 못 벌면 10만원도 안됩니다. 그런데 오늘은, 100만원을 훌쩍 넘겼습니다. 빵이나 고양이 간식같은 사이드 메뉴도 재고가 동이 나 버렸고 저나 청백이의 기력도 동이 나 버렸지요. 이른 시간에 마감하는 것을 감사히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만… 이제… 못 뛰겠어요…"


"으응? 얼마나 뛰었다고? 엄살 그만 떨고 빨리 가요. 한 바퀴 더 추가할까?"


쉬어도 모자랄 판에 남자는 저를 끌고 공원으로 가, 테스트해보겠다는 명목으로 조교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겁니다. 일과표에 따른 생활을 착실히 했다면 문제 없을거라나요.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밤 운동은 똑바로 했을텐데. 손에 이런 무거운 걸 던져주지 않았더라도 잘만 했을텐데. 등에 제 몸보다도 큰 걸 달아두지 않았더라도 잘만 했을텐데.


처음에는…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나타난 걸 보니 정말 하와이에서 놀고 오기라도 했냐고 따져물을 생각이었습니다.


남자는 아직도 제가 좀 더 뛰기를 바라는지 짓궂게 웃다가 스마트폰을 꺼냈습니다. 오늘 매출이 200에 근접했다고 좋아합니다.

그 얼굴이 보기 싫어서라도 좀 더 뛰기로 했습니다.


제 손에 들린 건 대물 저격총. 등에 멘 건 커다란 가방입니다. 남자는 각각 아스날과 실키라고 부르며 제게 던졌습니다. 가방은 피했는데, 남자가 노렸던 건지 각도 상 저격총은 피할 수가 없어서 받아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받아내는 순간, 후회했습니다. 차라리 가방에 맞고 저격총을 피하는게 정답이었다고요. 제 생각보다 저격총의 무게는 훨씬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양 팔뚝에 조금 커다란 멍이 생겨버렸습니다. 남자는 그것에 아랑곳 않고 곧장 뛰라 지시하고는, 지금까지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것들을 입에 욱여넣고 있습니다. 보란 듯이. 지금의 제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것들을.


가방에 짓눌린 폐가 저격총을 따라 앞으로 기울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뛰는 건 처음이라 호흡이 제대로 안됩니다. 머리가 핑핑 돕니다. 다리는 진즉에 풀렸고 달리기에는 동원되지 않을 부위들마저 비명을 질러댑니다. 이상하네. 하고 멍해진 저는 생각했습니다. 달리기만 한 건 아닌데. 그가 줬던 건 일과표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운동이 가장 중요하다며, 자기가 거느렸던 마이티R이 쓴 거라고 책도 한 권 건넸었던 겁니다.


그 책이 지시하는 방법으로도 해왔었는데.


더는 못 뜁니다. 


"ㅋㅋㅋ 아유~ 우리 딸. 힘들어요?"


어느덧 공원에서 분홍색과 노란색은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하면서 공원 한복판에 널부러져있는데, 남자가 다가왔습니다. 


"…닥치고 벤치에나 앉아있으면 안 돼?"


가방에서 팔을 빼고 상체를 일으켰습니다. 남자는 벤치로 돌아가진 않았지만 닥치고는 있었습니다. 제 몸이 식을 때까지. 고맙다면 고마운 일입니다만, 몸이 식어감에 따라 고통이 커져 갔습니다. 다리는 경련하고 어깨는 펼 수가 없었습니다. 작열통과도 같은 감각이 온몸을 내달리고 있었습니다.


폐에 충분히 공기가 돌고나서야 몸을 가눌 수 있게 됐지만, 저는 다시 공원 바닥에 드러누웠습니다. 상대적으로 광공해에 덜 오염된 공원의 하늘에는 수줍게 자기주장을 하는 은빛이 드문드문 보였습니다.


"술이나 담배도 안한 것 같고. 기대 이상이었어."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제 옆에 누웠습니다. 


"뭐 아직 시작도 안했지만."


축 늘어져 있는 것보단 나으리라 생각해서 따른건데, 이것의 어디가 폐하를 다시 뵙는데에 도움이 된다는 걸까요.


불만의 고개를 내립니다. 도와달라고 한 건 접니다.

때이른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귀가하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결국 저는 공원 한복판에서 잠들어버렸습니다.

그랬을 겁니다. 다음 날의 제게는 제 발로 귀가한 기억이 없었거든요.


그 남자가 업어다 옮겨두기라도 한 거겠죠. 다시 06시. 침대에서 일어난 저는 페로를 데리고 1층으로 향했습니다.


"딸. 이제야 일어났니? 하루 웬종일 쳐 자빠져 자는게 아주 잠자는 공주 님이 따로없구나."


청백이는 어디로 간 걸까요. 카운터에서 혼자 앞치마를 두르고 서있는 남자가 캣타워 옆의 시계를 가리켰습니다.


오전 11시 입니다.


"이거 마시고 씻으렴. 땀 냄새가 여기까지난다."


보통 저런 말을 들으면 몸 여기저기를 맡아가면서 체취를 확인할 겁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습니다. 어제 분의 땀이 오늘까지 남아있는 건 이 남자 탓이기도 하니까요.


"사장. 잘 마시고 가. 오랜만에 맛 봐서 좋았어."


집회소의 오전 풍경 중 하나인 노부부가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출입구로 향합니다.         


"내일도 와주실거죠?"


남자가 묻습니다.


"그럼. 사장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없어도 두 분이서 오시는지 아닌지는 다 알고 있답니다."


노년의 여성이 호호 웃으며 뒤돌았습니다.


"궁금하네. 어떻게 아나요?"


"저는 두 분을 사랑하거든요."


어머머, 하고 여성은 좀 더 신난 듯 웃었습니다. 직원들에게 들었을 거라는 생각은 못하나봅니다.


그들이 뭐라 떠들든, 저는 카운터에 올려진 제 몫의 커피에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오랫만에 맛 봤다고?


"…거짓말."


이 남자가 일하는 건 어제 설거지할 때 뿐이었는데. 커피를 내리는 건 본 적도 없었는데.


"맛있니?"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로 맛있다고, 절대로.







* * *







이 곳에 다시 발을 들인 순간부터 빨리 돌아가고픈 마음뿐이었습니다.


시끄럽게 웅웅대는 작은 냉장고.

이물질과 시간에 누렇게 변한 매트리스.

반쯤 열려있는 화장실 문.

불규칙한 리듬으로 물방울을 떨구는 수전.

차마 다 버리지 못한 남성용 겨울 옷.


듣자니 이 원룸 건물은 남자의 소유라는 듯 합니다. 그 말인 즉, 제가 내왔던 월세들은 모두 다 이 남자의 계좌로 들어갔단 것이지요. 그런 거야 어쨌든, 이 곳에 다시 온 건 못챙긴 물건을 챙겨오자는 남자의 권유 때문이었습니다.


서쪽으로 향하는 해가 창에 드리우며 냉장고에 삐뚤삐뚤한 주홍색 사각형을 그렸습니다. 그 냉장고를 지나 세탁실로 들어가서 옷가지가 담긴 플라스틱 케이스를 엽니다. 계절별로 세벌 씩만 챙겨온 캐리어에 담고 출입문에 서있는 남자에게 돌아왔습니다.


"그거면 됐어요?"

"됐어요."


여기선 더 이상 대화하고싶지 않다는 의미를 담아 단숨에 답했습니다.


남자를 지나쳐 나가기 전, 다시 돌았습니다. 


냉장고를 제외하면 작은 방은 어디고 상관없이 그늘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무력하고 추하기만 했던 과거의 제 그림자 같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폐하를 떠나보내고 자포자기식으로 흡연했던 흔적도 아직도 천장에 남아 있었습니다. 끈적끈적, 저 얼룩이 머금은 건 니코틴만이 아닙니다.


공포를 위시한 역겨운 자기상의 발로들. 분에 넘치는 것을 바란 자는 저런 색의 얼룩 밖에 남길 수 없음을 통감합니다.


"안가봐도 되나요?"


"네."


방을 나섰습니다.


캐리어가 계단에 부딪히는 소리를 죽여가며 내려가는데, 남자가 불렀습니다.


"나중에라도 좋아요. 말만 하면 당신의 폐하가 잠든 곳에 데려가 줄테니까. 언제든, 언제든 말해요."


"바다라면서요. 그러고나서 두 달이야. 지구 한 바퀴는 거뜬히 돌아서 사라졌을텐데요?"


"바다는 맞는데 누가 뿌렸대? 가루로 만들 순 없어요. 아니 뭐 만들 순 있는데 번거롭고… 몰라? 바이오로이드의 골격은 금속으로 되어있잖아."


"사양할게요. 어차피 내가 가봤자, 폐하께서도 불쾌하기만 하실거거든."


그 뒤의 남자는 손을 올리다 내리다 머뭇거렸습니다. 더 할 말이 있었나 봅니다.


정말로 할 말은 내 쪽에 있을텐데.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입을 열어선 안된다는 고집에 지나지 않습니다.

폐하를 보내줘서 고마워요. 그 한마디를 도저히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야 그렇지요. 마땅히 제가 했어야 했던 일이니까.


카페로 돌아갑니다.


카페로 돌아가자마자 남자는 다시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달 뒤에 나타납니다. 그런 사이클의 반복이 계속되었습니다. 나타날 때마다 남자는 테스트라는 명목으로 저를 공원으로 끌고갔고, 끌려간 저는 차라리 의식을 잃는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굴려졌습니다. 바닥에 쓰러져있으면 다가와서는 파괴욕구를 일으키는 표정을 짓고서 고작 이 정도냐며 열받게 합니다. 열을 받아 동력을 찾으면 다시 뛰거나 온몸을 비틀어대며 지시하는 동작들을 수행했지만, 달이 지날수록 강도는 심해져 더 이상 운동이라 부르기엔 과도했습니다.


"그만."


이게 몇 번째로 찾은 공원일까요. 한 달 전만해도 분홍과 노랑이 바람 속에서 향연을 펼쳤으니 아마도 열 두번 째가 아닐까요.


"고생했어요."


드러누워있는 제게 남자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달릴 때는 밤바람마저 장애물로 여겨졌는데, 오늘따라 시원하게 느껴집니다.

남자의 손을 잡…으려다가 말고 자력으로 일어났습니다.


손을 바지에 턴 남자는 뒤돌며 말했습니다.


"합격."


카페로 다시 돌아오자 남자는 저를 끌고 3층으로 가 전신거울 앞에 세웠습니다.


"상의 벗어봐요."


전신거울 앞이 아니었다면 거절했을 겁니다.

의도를 파악할 것도 없었어서 저는 거리낌 없이 상의를 벗어재꼈습니다.


드러난 스포츠브라 아래의 몸은 작년보다 조금 울퉁불퉁 했습니다. 복부엔 낮은 계곡같은 11자가 새겨져있고 팔뚝은 조금 거칠어진 듯 했으며 그보다 위에는 작은 동산이 하나 생겼습니다. 남자의 테스트를 거친 직후 임에도 몸은 가볍기 그지없습니다.


세계에서 도망치듯 담배와 술을 탐하던 저와, 지금의 저는 다른 인간이며, 그 때의 저는 마냥 잿빛만 보고 있었다면 지금의 저는 다른 색을 머금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폐하의 눈부시던 시절에 어울리는 여자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말했습니다. 아직 시작조차 안했노라고. 


그랬습니다. 이것은 시작조차 아니었습니다. 저는 남자의 테스트에, 테스트라는 명목의 도움을 받을 출발선에, 이제야 설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 때의 저는 그것을 잊고 말았습니다. 남자가 그런 말을 했었다는 걸, 조촐한 성취감에 젖어있느라 떠올리지 못했던 겁니다.


이렇게 1년.


2023년. 6월.


저는 아주 조금 더 변해버렸습니다.







* * *





남자와 저는 다시 공원을 찾아 벤치에 앉았습니다.

 

"뭔가를 이루면 그에 맞는 상을 줘야겠죠? 좋은 아버지라면 그렇게 할거에요."


이 날은 주말이었기에 카페를 열지 않았었습니다. 따라서 테스트를 조금 일찍 진행하게 되었었지요.

초여름의 공원은 아직 어스름으로 물들지않아,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에 알맞은 분위기와 온도를 품고 있었습니다. 

  

"뭘 줄건데요?"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이 1년간 남자가 제게 준거라고는 "더 뛰어." "자세 똑바로 해." "10번 추가." 같은 개같은 지시 뿐이었습니다. 그런 지시들을 내리면서 음료수를 홀짝거리거나 동네 아이들을 데려와서는, 같이 쭈쭈바를 쪽쪽 빨면서 길거리 기인공연이라도 보는 양 지켜봤던 겁니다.


충분히 거리를 벌려 앉아있던 남자가 조금 가까이 다가와 허공을 노크하듯 손짓했습니다.


무얼 하려는 건지 알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그녀'들 중 하나를 꺼내겠지, 싶었는데 남자가 말했습니다.


"자, 여기봐요."


남자가 자신의 바로 귀 옆을 가리킵니다. 아지랑이 치듯 일렁이는 공간에서 푸른 색 빛이 새어나옵니다.

구분이 어려워 멍하게 보고 있으면, 아지랑이가 퍼렇게 일렁인다고 착각할 것만 같은 광경입니다.


"보고 있어요?"


남자가 확인하듯 재차 물었습니다.


"네."


"……응. 좋아요." 스마트폰을 꺼내 조작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잘 다녀와요."


어딜? 이라고 물어보려던 때였습니다.


"…아르망."


"어?"


파란 아지랑이가 급격히 커져 사방으로 퍼져나갑니다.


남자가 사라지고,


"아르망."


공원이 일변했습니다.






* * *






여긴…


"아르망."

      

어디지.


"아르망."


누가 날 부르는 거지.


"아르망."


누구의 손을 잡고있는거지.


"아르망. 무슨 생각하길래 멍하게 있어?"


내 옆의 이 남자는 누구…


"……폐하?"


폐하?


"폐하라니. 우리 호칭정리 한 게 언젠데."


뭐?


"잠깐… 방금까지 나는…"


"자, 아르망. 다시 불러 줘."


…나는 어디에 있었지?


"…오빠?"


……아, 그래.

이 남자는 내 오빠지.

내가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이지.

더는 폐하가 아니야.


그래. 그렇게 부르겠다고 한 게 작년 크리스마스였다. 딱 1년 전이다. 나도 참. 그런 대사건을 잊다니.


내 부름에 오빠는 배시시 웃는다. 미심쩍다는 기운이 섞여 있었는데도 그마저 사랑스럽다는 듯이.

나도 웃는다. 그마저 사랑스럽다고 여겨지는 여자란게 기뻐서. 그의 여자란게 기쁘고 기뻐서.


우리는 주홍색 알갱이를 머금은 가로수가 같은 간격으로 한없이 늘어서있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니까. 저 알갱이에 표정을 부여한다면 그대로 잭 오 랜턴으로 변신해 오늘은 할로윈이 될지도 모른다며 오빠는 농담을 했다. 나는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최초에 내가 눈을 뜬 날은 바로 할로윈이었다. 나나 오빠에게 마땅히 생일이라고 부를 날은 없지만, 각자가 처음으로 세계를 인지한 날을 생일로 하자고 정했더랬다. 그러니까, 할로윈이 내 생일이다.


그 생일 날에, 나는 알코올에 의지해 오빠에게 몹시 서툰 스킨십을 시도했더랬다. 우리는 다음으로 넘어가는데에 너무 미적거렸다. 연인이면 연인다운 것을 한 번이라도 해보자고 마음 먹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시도한 최초의 스킨십은 참으로 하잘 것 없겠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하잘 것 없는 것에서 단숨에 그보다 더한 짓을 하게 된다면 나는 기쁠 것이다.


오빠도 같은 마음이라는게 알코올에 발그레진 뺨과 동요하는 눈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허벅지에 손을 대보고, 팔뚝을 쓰다듬었다. 고개를 가까이해 조금 축축해진 것도 같은 눈에 눈을 똑바로 맞추며, 코가 맞닿기 직전에 살짝 틀어서, 그대로…


"또 무슨 생각 해?"


그 뒤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계속 떠올려보려 해도 기억은 나지않고, 그 추억의 이미지가 꽤 명료해지려하면 노이즈가 낀다. 왜일까. 나는 조금 불안해져 오빠 안에 파고들듯 팔짱을 꼈다.


"옛날 생각."


어리광부리듯 뺨을 팔에 비볐다. 겉옷에서 느껴지는 오빠의 냄새는 거리를 채색한 주홍빛 같이 너무나 따뜻했다. 오빠는 말없이 따뜻한 웃음소리를 흘리고 따뜻한 냄새가 나는 따뜻한 팔로 따뜻하게 나를 안았다. 한동안 그렇게 걸었다.


조금 더 걷자 끝없이 늘어서있을 것만 같던 가로수가 사라지고 인파도 줄어들었다. 여기면 괜찮겠다 싶어서 나는 내려간 셔터 앞에 쌓인 눈더미로 다가갔다. 눈사람을 만든다. 묵묵히 몸통을 만들고 머리까지 만들고있자 오빠도 옆에 와서 눈사람을 만든다. 내가 만드는 것보다 좀 더 커다란 크기로. 몸통과 머리를 다 만들고서 나는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려 챙겨온 이목구비를 꺼낸다.


파란색 단추는 눈, 오빠는 재색이다.

분홍색 코팅지는 입, 오빠는 재색이다.

고깔모양으로 자른 살색 종이는 코, 오빠는 재색이다.

귀는 못챙겼다. 그래도 오빠 귀는 재색이다.


마지막으로 목에 감고있던 연지색 머플러를 벗어 파란색 단추 눈을 가진 또 다른 내게 감아준다.

오빠도 머플러를 벗어 또 다른 오빠에게 감아준다. 역시 오빠의 머플러는 재색이다.


왜 오빠 것은 전부 다 재색일까?

나는 오빠에게 재색만큼은 주지 말자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그렇고, 완성이다. 완벽한 한 쌍이다.

소원이었다. 오빠와 연인이 된다면, 손을 맞잡고있는 눈사람을 오빠와 함께 만드는 것이.


"예쁘다. 그렇지?" 물어볼 것도 없지만 확인하듯 물었다. 그리고 작은 고백도 곁들였다. "소원이었어."


"ㄱㅡ…렇ㄱㅜ나…"


"오빠. 나 슬슬 추운데, 좀 더 가다가 카페가자."


"ㄱㅡ… ㄹㅐ… ㅋㅓ피…"


오빠는 웃는다. 


나는 다시 오빠에게 팔짱끼고 걸었다.  


우리는 주홍색 알갱이를 머금은 가로수가 같은 간격으로 한없이 늘어서있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니까. 저 알갱이에 표정을 부여한다면 그대로 잭 오 랜턴으로 변신해 오늘은 할로윈이 될지도 모른다며 오빠는 농담을 했다. 나는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최초에 내가 눈을 뜬 건 바로 할로윈이었다. 나나 오빠에게 마땅히 생일이라고 부를 날은 없지만, 각자가 처음으로 세계를 인지한 날을 생일로 하자고 정했더랬다. 그러니까, 할로윈이 내 생일이다.


그 생일 날에, 나는 알코올에 의지해 오빠에게 몹시 서툰 스킨십을 시도했더랬다. 우리는 다음으로 넘어가는데에 너무 미적거렸다. 연인이면 연인다운 것을 한 번이라도 해보자고 마음 먹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시도한 최초의 스킨십은 참으로 하잘 것 없겠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하잘 것 없는 것에서 단숨에 그보다 더한 짓을 하게 된다면 나는 기뻤을…


"어라…"


방금, 노이즈가 낀듯 한…


그런데 지금, 걷고있지 않았나.


왜 카페에 있지.


"왜 그래? 아르망?"


오빠가 바닐라 라떼를 조금씩 홀짝이며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거품이 묻은 오빠의 입꼬리가 지직거린다.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잖아.


"…오빠."


"응?"


"너."


"너?"


오빠라고 불린 인간이 당황한다.


"……너 이 씨발새끼. 너 누구야. 누군데 폐하의 얼굴을 하고있어."


내가 누군데.


나는 아르망인데.


그런 과거가 있는 년인데.


"내가 모를 줄 알아?"


구분 정도는 할 수 있어.


"여기 어디야. 어디냐고!"


자리에서 일어나 멱살을 잡았다. 정확히는 멱살이라고 짐작이 되는 것을 잡았다. 폐하와 닮은 무언가는 지직거리고 있어서 어디가 팔이고 어디가 다리고 어디가 얼굴인지 가늠이 안된다.


"꺼내 줘! 당장 꺼내 줘! 꺼내달라고!"


알 수 있다. 가짜다. 이건 가짜다.

나는 외쳤다. 당장 꺼내달라고.

계속. 


어떤 개 씨발새끼인진 모르겠지만 이 따위 가짜로 나를 속일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나는 그 누구보다 폐하를 잘 안다. 폐하가 머금고 폐하를 머금던 풍경도 잘 안다. 날 속일 수는 없다. 헤매는 일도 없다.

그런 내게, 여러 의미에서 이런 가짜는 모욕에 지나지 않는다.


노이즈 인간의 윤곽이 흐려져 거의 다 사라질 때가 됐을 때, 카페의 풍경까지 지직거렸다.

외친게 효과가 있었나보다.


노이즈가 심해진다. 카페가 사라지려 한다.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시야가 암전됐다.   



     


  


* * *




"폐하!"


암전이 있었습니다. 찰나의 눈깜빡임같은 암전이었습니다. 그 암전 후에 발견한 것은 번화가를 달리고 있는 저였습니다. 왜죠. 저는 왜 달리고 있는거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달려야합니다. 저는 웬만해선 이렇게까지 다급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달리는데엔 다 이유가 있겠죠.


"폐하!"


아하. 입이 폐하라 발음을 하는 것을 보니 폐하를 찾고 있었나 봅니다. 이상하네요. 폐하는 떠나셨는데. 왜 암전 후의 저는 폐하를 찾고 있는 걸까요? 이유가 있겠죠.


"폐하!"


그러고 보니, 이 거리는 어디선가 봤던 것 같습니다. 추억인지, 환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익숙합니다. 다른게 있다면 온도일까요. '그 때'는 겨울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초여름입니다. 그 온도차가 불안해 저는 속도를 높입니다. 인파를 해쳐나가며 몇 번이나 어깨를 부딪힙니다. 쓴소리를 하는 인간도 있고 오히려 사과를 해오는 인간도 있었습니다. 다 거슬렸습니다. 조금 더 달리면 폐하를 뵐 수 있다는 강한 직감 앞에선, 모든게 장애물이었습니다.


아, 조금 더 앞에, 발견한 것 같습니다. 


"폐하아!"


심장은 터질 것 같고, 폐가 공기를 강하게 원하고 있지만 저는 더 속도를 높였습니다. 아르망이라는 개체가 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괴상한 숨소리가 들렸습니다. 상관 없습니다. 저 앞에 폐하가 있는데, 끙끙대든 짐승처럼 울든 추잡하게 신음하든 대수입니까.

저는 달려야합니다. 


오직 달려야만 하는데 머릿 속은 상황에 어울리지않는 태평한 환희로 젖어갔습니다. 폐하를 뵙는 건 오랜만인데, 첫인사를 어떻게 가져가지? 먼저 말씀을 꺼내시길 기다려야하나? 아니, 아니다. 그 무엇도 정답이 아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마디라도 튀어나온다면, 거기서부턴 자연스럽게 흘러가리라.


그런 확신이 듭니다.

폐하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나니까.



마침내 따라잡았습니다.


최대한 숨이 찬 기색을 내보이지 않으려 호흡을 고르고, 어깨에 손을 댔습니다.

폐하가 뒤로 돕니다.


"폐…"

"누구세요?"


그 한 마디에 깨달았습니다.


그 한 마디가 들려오는 것보다도 빨리, 알아챘습니다.


폐하가 아니야.


그냥 외모가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적은 부분만.

저는 그런, 아주 적은 부분에도 이렇게 발작하듯 반응한 걸까요.


"…저기, 놔주실래요?"


만약, 제가 뚱뚱하고 못생긴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추한 여자였다면, 좀 더 다른 반응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어깨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서, 무례하게 고개를 들이밀고 확인하듯 눈을 빤히 맞추기라도 했다면 폭력을 행사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러고 있다는 걸 깨닫자 뒤에서 어깨를 잡혔습니다.


"아, 미안해요. 우리 딸이 갑자기 아는 사람을 봤다고 달려나가서."


외국생활 중에 사귄 친구를 봤다더라고요. 라는 임기응변식 변명을 대신 해주는 남자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러는 과정을 거치는 제 모습을, 시야 끄트머리에 걸린 신발가게의 쇼윈도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우스운 움직임인지. 꼭 실끊긴 마리오네트 같은 꼴이었습니다.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이 분노가 향하는 정확한 방향은 모릅니다. 지금 막 떠나가기 시작한 폐하를 닮은 남자일 수도 있고, 옆에서 미안하단 듯이 웃는 남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제 머리는 그간 쌓여온 능멸과 관련된 지식을 꺼내, 가장 뛰어나고 적절한 표현을 찾아 문장을 조립합니다. 

조립을 마치자, 입이 열렸습니다.

남자가 말을 꺼낸 것과 거의 동시였습니다.


"아르망, 미안해요. 나는 그냥 당신을 위…!"


입이 열렸다고 생각했는데 움직인 것은 손이었습니다.


뺨을 강타당하는 남자가 보였음에도 지나가는 인간들은 그냥 지나갈 뿐입니다. 참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안심했습니다. 말리러 다가오는 인간들이 있었더라면 이번엔 그 인간들이 강타당했을 테니까요.


뺨을 치고나서 기억났습니다.


그 푸른 빛.


그게 원인입니다.


"……마키나에요." 원인의 정체에 남자가 살을 붙였습니다. "보다 진보된 마키나. 당신의 내면에 잠재된 열망을 토대로 현실보다 현실같은 세계를 보여주죠."


"…아, 그게, 상이었어?"


"갑자기 그렇게 발작할 줄은… 오류가 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너 이 개새끼…" 저는 까치발까지 서가며 남자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한 번만 더… 그딴 짓 해 봐. 그 때는 진짜로 네 씨발골통을 박살내버릴거야. 알아들었어?"


"미안해요."


"꺼져."


남자를 밀치듯 지나갔습니다.


……솜사탕.


그것은 마치, 솜사탕 속을 헤엄치고 나온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환상이란 건 압니다. 거짓이란 건 압니다. 남자의 말대로 제 내면에 잠재된 열망이었다는 것도 압니다. 과거의 제가 그런 것을 품었었다는 걸 압니다. 그렇게 확실히 자각하고 있는데도, 그 환상은 제 뇌리에서 아직도 유리되지 못한 채 달콤하게 떠다녔습니다.


그래서 역겨웠습니다. 그 달콤함이, 너무나도 역겨웠습니다. 이제는, 아니, 아직은 존재하지않는 폐하에게 달콤한 것을 느낀 저는 더 역겨웠습니다.


너란 년은 정말이지. 변함없는 스스로에게 기가막혀, 거리를 가득 메운 인간들을 신경쓸 수 없었습니다.

가는 내내 어깨고 얼굴이고 계속 부딪혀댔습니다.


깜빡잊고 말씀드리지 않은게 있습니다.

약과 술로 억눌러오던 발작은 폐하의 죽음으로 사라졌었다는 것.

네. 소위 말하는 충격요법이라는 겁니다. 절대 원하지 않았기에, 예상조차 못했기에 그 죽음은 굉장한 충격이었으니까요.

불경스럽게도 폐하의 죽음으로 사라졌던 발작이었는데, 그 마키나라는 푸른 빛이 다시금 발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후, 저는 꽤 오랫동안 고생하게 됩니다만, 그래도 시간은 흐른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았습니다.






* * *



 


미안해 ㅜㅜ 1주일에 2편을 쓰자고 마음 먹었는데 좀처럼 시간이 안난다 ㅜㅜ 사축은 괴롭다


다음주엔 꼭 두 편을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