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영감님 이지경이 되어서도..."


나 하피의 왕... 아니 가변형 특수 촬영용 AGS 페레그리누스는 건설 보조업체로 시작해 굴지의 엔터 기업이 된 비스마르크의 회장 앞에서 진땀을 빼고 있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는가? 하피의 왕"


회장은 늘 그렇듯 연기자 같은 중후하고 과장된 발성으로 되물었다. 


회장은 턱수염과 이어지는 구렛나루를 멋들어지게 기른 40대 중반의 중후한 매력을 지닌 미중년 처럼 보이지만 

실상 오리진 더스트로 강화한 그의 육체는 아무런 시술을 거치지 않은 20대 청년 보다도 생동감 있고 단단했다.

저 수염만 좀 어떻게 하면 최소 30대로 보일텐데...


"영감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곧 주 방위군도 싹 밀릴거 같다니까요;; 얼른 짐싸서 저랑같이 누님 곁으로 갑시다. 별로 짐이랄 것도 없잖아요.  저도 그렇지만 누님은 겁나게 쎄니까 저희 둘이 있으면 영감님 하나 정도는 건사 할 수 있을거에요"


내가 기동을 시작해 처음 대면했을 때부터 회장은 늘 같은 모습이었다. 가족은 없었지만 친구가 많았고 눈동자엔 항상 장난기가 가득했다.  피터팬이 책장 밖으로 튀어나왔다면, 같은 말이 딱 어울리는 애어른이 거기 있었다. 

그는 내가 다그치는 소리가 들리긴 하는지 수영장 한켠의 선배드에 반바지만 걸친채 누워있는 자세로 반쯤 몸을 일으켜 꼬냑을 한잔 따랐다.


"허허 세상의 끝으로 도망친다 한들 잠의 신이 친히 마중을 올텐데 볼품없게 허둥 거려서야 되겠느냐? 

내가 가진건 별로 없다만 날 레테의 강가에 카론의 곁으로 안내해줄 녀석에게 좋은 술이라도 한잔 내줘야 체면이 서지"


얼씨구 거기서 멈추지 않고 칼로 시가 꼭지를 똑 따더니 야무지게 불까지 붙인다.

한모금을 정말 깊게 빨더니 후우... 내뱉는다 그리고는 표정이 풀린다. 연기가 끝나는 것처럼


"매번 불 붙일때마다 생각나는건데 너한테 라이터 모듈 하나는 심어둘걸 그랬다." 


진중한 얘기를 하기전엔 평소의 연기하는 기색을 싹 걷어내는 것이 회장의 평소 습관이었다. 이때만큼은 그의 어린아이 같은 성품이 말에 그대로 묻어난다.


"오버사이즈에요, 제가 붙여주면 폼이 영 안살걸요?"


"그래서 너의 사람 사이즈 바디도 하나 제작해 보려고 한건데... 에휴 덴세츠가 판만 안 엎었어도 다 되는 거였는데 말이야"


"...덴세츠가 영감님의 실체를 제대로 본거죠. 돈때문에 판을 벌이는게 아니라 판을 벌이는거 자체가 관심사의 전부니까 계속 같이 일하는 리스크가 감당이 안됐을 거에요"


"야 그래도 드래곤 슬레이어는 재밌었잖아 ㅋㅋ"


"영감님... 그건 덴세츠에서 큰돈 들여서 데려온 각본가를 냅두고 몰래 자필 각본으로 바꿔치기 했는데 고소 안당한걸 다행으로 알아야 하는거 아닙니까?”


"얘는 낭만이 없어... 21세기 초만 해도 일본인들도 그런 감성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임마 그리고 내 각본이 20배는 더 좋았어"


그는 계속 농담조로 이야기 하지만 당시엔 정말 보통일이 아니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개봉 직후 실상을 깨달은 덴세츠로 부터 살해협박을 포함한 무언의 압박을 수차례 받았지만... 

결과는 드래곤 슬레이어의 메가히트, 덴세츠는 차기작을 백지화 하는 정도로 물러났었다. 물론 수익의 상당 부분을 더 떼어내 주어야 했지만.  회장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 한심한 것들은 작품이 개봉을 할때까지 검수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오히려 덴세츠 고위층을 비웃었다.


"... 너도 알다시피 난 영화가 좋아서 이 일을 시작했다."


"영감님 지금 그런 이야기 할때가..."


"..."


마음이 급해진 나는 이야기를 멈추고 싶었지만 내 카메라 센서를 또렷이 응시하는 그의 눈을 보고 생각을 고쳤다.

그는 결코 여기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회장이 술에 취할때마다 듣는 이 이야기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돈도 없는 주제에 연기에도 소질이 없으면서 막무가내로 들어간 영화판... 세트장을 짓고 부수는 것으로 커리어를 시작했지.

AGS는 아직 군용으로만 운영하던 시절이었고. 섬세하든 무식하든 작업을 하는데는 아무래도 사람이 더 싸게 먹혔거든"


그의 눈은 어느덧 수십년 전의 그 시절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람이 싸다보니 생기는 문제가, 얼마 안되는 돈때문에 사람이 다치거나 심지어 죽는일이 너무 많아.

일하겠다는 사람은 너무... 정말 너무 많은데 일자리는 정해져 있으니 너나 없이 자기 목숨을 더 싸게 경매에 붙여, 경쟁적으로"


술을 한모금 넘기고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현장이라는 건 참으로 평등한 장소지. 

나이가 뭐냐 성별이 뭐냐 바이오로이드가 뭐냐 하다못해 사지가 멀쩡하지 않아도 받는만큼 일만 똑바로 하면 1명분으로 취급을 해주니까"


무심하게 부는 찬바람에 테이블에 올려둔 시가가 데굴데굴 아무데나 굴러가 버렸다.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내가 일하던 현장은 누님이 지휘를 했거든, 말만 지휘하는게 아니라 한창 시기의 젊은 것들 보다 힘도 잘썼어

그 작은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건지... 

지금 생각해보면 어디 몰락한 재벌집 딸이라 몸에 더스트라도 주입받은걸수도 있겠군"


회장은 다시 입에 술을 한모금 머금고 와인을 음미하듯 굴린다.


"무엇보다 그... 미소가 일품이지"


그가 그리운듯 풀어진 표정으로 씨익 웃는다.


"현장에서 사람을 제일 많이 살리는건 바로 그 미소다. 웃음이 없는 현장은 죽을날만 기다리는 시한부 병동이야.

그 웃음이 우리로 하여금 돈 몇푼에 목숨을 바치는 노예가 아니라 정말 위대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예술가라고 마치 영혼으로 돌을 깎는 미켈란젤로의 후손이라고 느끼게 해줬다... 그리고는"


마저 한모금 더 넘기고


"...죽어버렸지"


"영감님..."


"중간에 이런 저런일은 모조리 건너 뛰고, 내가 돈을 만지자 마자 바바리아나를 만든 이유는 현장의 한복판에 그녀를 다시 되살려 내고 싶어서 였다."


"... 바바리아나는 그냥 영감님이 매드맥스랑 쿵퓨리 광팬이라 그렇게 디자인 한거 아니었어요?"


"그것도 조금은 있지 ㅋㅋㅋ"


그는 멋쩍게 웃었지만 난 스스로 내뱉은 말과는 반대로 그의 말에서 묵직한 무언가를 느낄수 있었다.

회장이 의도 했던대로 바바리아나는, 테러리스트가 출몰하던 그 살벌한 시기의 건설 현장에서도 절대 웃음을 잃지않는 믿음직한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했다.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를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가시적으로 떨어지는 사상자의 숫자를 보면서 건설사들은 뱃머리에 여신을 새겨놓듯 앞다퉈 그녀를 현장에 투입했다.


"아무튼 페그야, 천국에서는 영화 만들기 빡세겠지? 그도 그럴게 천국에 먼저간 거장들이 많잖아. 히치콕이나 스필버그, 조지 밀러 같은 사람들이랑 붙어야 하잖냐"


"그래도 로만 폴란스키나 쿠엔틴 타란티노, 그리고 크리스토퍼 놀란 같은 사람들은 없을 테니까 크게 나쁜건 아닌거 같습니다. 보통은 무신론자들 중에 똑똑한 사람들이 많잖아요"


"흠 그래도 톨킨이랑 붙을 깡은 없는데 말이야..."


중앙 정부는 마비 됐고, 사람들은 희망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무언가를 안은채 집을 버리고 떠나고 있다. 

부자들은 자기들만의 쉘터에 틀어 박히거나 저 멀리 외딴 섬으로 떠난지 오래였다.


그러나 이곳 할리우드에 미관 이외의 아무런 기능도 없는 단독 주택에 펙스 7대 기업의 일원 비스마르크의 회장은 홀로 남았다.

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그를 피신 시키기위해 급히 이곳 그의 저택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하지만 회장은 여기서 끝을 볼 생각이다. 아마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본인의 직감에 의해 휩노스 병을 피할수 없을거라 판단한 모양이다.

사실 나의 회로가 연산한 논리적 사고를 종합해 보아도 그의 말이 얼추 맞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럼에도,


"... 나도 영감님이랑 나중에 만나서 영화... 만들 수 있겠죠?"


"...?"


"그... 영감님이 직접 만들었으니까 잘 알거 아니에요. 저나 누님이나 위성으로 정신이 연결되어 있고 

이 작은 단말기로는 담을수 없을 만큼 똑똑하니까 확신은 못해도 그... 우린 천국에 못가지 않을까 아니 애당초 천국이 없진 않을까 싶거든요"


"...그런데?"


"그래도 영감님이 얘기해주면 왠지 데이터랑 달라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달까

...그니까 영감님이 보기엔 어때요? 우리 또 만날수 있는거죠? 제대로 얘기 안해주면 나도 영감님 말 안듣고 여기서 버틸겁니다??"


진심이었다. 불가사의 하게도 그의 통찰은 가끔 내가 생각하는 '이성적'인 판단보다 앞설때가 있으니까

그는 잠깐 영문을 몰라 얼빠진 표정을 했지만 금방 내말을 이해하곤 씨익 웃었다.


"...당근이지 임마 ㅋㅋ 내가 이 세기말을 살아가는 신앙인의 관점에서 알기쉽게 얘기 해줄게 

우린 모두 주님의 손으로 만들어진 주님의 자녀다 

고리타분한 유대교 랍비들이 아니고서야 요즘엔 진화도 인공지능도 자연과 사람의 손을 빌려 일어난 주님의 대리 창작이라고 인정해준다 이말이야

그러니 주님의 손으로 만들어진 내가 창조한 너 역시도 나의 형제고 같은 주님의 자녀다"


이 와중에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그는 재잘재잘 말을 이었다.


"전에 나랑 같이 세트장 찍던 우리 A팀 인원들이랑 너랑 같이 뛰었던 드래곤 슬레이어 스텝들이랑 

다같이 손풀면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넌 임무 완수하고, 세상을 좀 보다가 느긋하게 와...

너무 늦게 오지는 말고... 그 뤽배송은 손푸는 동안"


"알아요 그 아저씨는 손풀면서 레옹을 찍었잖아요"


"ㅋㅋ 그래 기가막힌 대작이 나올수 있으니까 임무 끝나고 ‘아 지금인가?’ 싶을때 넘어와...

와서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지 꼭 얘기해주고... 

괜찮은 이야기 같으면 첫작품은 각본도 네가 쓴걸로 찍어보지 뭐"


회장은 놀라움과 자랑스러움 그리고 어린아이의 장난기 같은 온갖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날 지긋이 쳐다봤다.


"... 알겠습니다, 영감님, 아니 나의 주군이시여"


처음부터 그를 설득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건 아니었다 단지 아쉬운 마음을 달랠 시간이 필요했을 뿐


"다시한번 정식으로 명령을..."


컵에 남은 액체를 완전히 비우고 그가 결연한 의지를 담아 나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나의 충직한 신하, 페레그리누스여

그대는 지금부터 평행세계로 부터 넘어온 혹한의 용, 미드가르드의 수호자, 글라시아스와 합류하여 다음의 임무를 수행해 주기 바란다"


"인외의 존재로부터, 인간을..."


명령을 내리다 말고 그가 미간을 찡그렸다.


"아니지..."


"인외의 존재로부터, 인간과... 그리고 인간이 남긴것을 수호하라"


"인간이 남긴...것 입니까?"


그가 다시금 웃는다


"그래, 너의 형제들과 우리의 문화와 우리 모두가 이곳에서 울고 웃고 그리고 함께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모든것이다."


나, 비스마르크제 특수 목적 자율학습형 초고도 AGS 프로젝트 : 하피의 왕 원 오프 타입 정찰 기동 머신 페레그리누스는 

주인의 명령을 온전히 이해하여 저 천공에 떠있는 나와 내 동포들의 모든 심층 의식에 주인의 명령을 소중히 새겨 넣었다


"하피의 왕, 주군의 명령 이행하겠습니다"


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난 스타워즈가 1편부터 다시 시작되는 꼴은 못보겠거든, 리부트 보다는 그래도 항상 시퀄이 낫다고 생각한다"


판타스틱 4를 바로잡을 기회였는데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미련이 없어 보이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 하늘로 날아 올라 매의 형상으로 그의 주위를 한 바퀴 선회하고 베링해협으로 향했다.


안녕 영감님, 다시 만났을때 꼭 영화 같이 만들어야 해요... 난 각본보다는 주인공 체질이니까 꼭 주연 시켜줘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