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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하늘 사이로 페레그리누스가 시원하게 날고 있었다. 마치 모든 하늘의 자신의 영역인 것 처럼. 물론 그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어찌되었든 ‘하피의 왕’이라는 직책을 부여받았던 AGS였으니까. 녹색과 하얀색의 날개를 곧게 펴고 창공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왕. 그 자체였다.


그는 몇 번 하늘을 빙빙 돌더니 내가 서 있는 갑판으로 천천히 모습을 바꾸며 다가왔다. 날개가 접히고 뾰족한 발톱이 숨겨지며 사람의 모습으로 바뀐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무언가 속에서 끓어오름을 느꼈다. 분명 이 느낌은 남자의 로망을 바로 보았을 때 느껴지는 고양감이었다.


“뭐야. 친구. 일 다 끝났어?”


“뭐. 어느정도는.”


“그래? 그런데...”


“그런데?”


“나한테 뭐 바라는거 있어?”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내 눈빛만으로 알아차리다니. 인간 보다 더 인간스러운 AGS였다. 페레그리누스도 아마 입이 있다면 미소를 지었을 것 같은 분위기를 띄우며 말했다.


“정의에 어긋나는 일만 아니라면, 내가 해줄 수 있는 선에서는 뭐든 해줄게.”


“당연히 그런건 아니지. 그냥, 한 가지 물어보고 싶어서.”


“그정도야 뭐. 간단하지.”


나는 목을 조금 가다듬으며 말했다.


“너에게도 추억이라는게 있어?”


잠시 우리 사이에 침묵이 있었다. 페레그리누스는 팔장을 끼고 가만히 서 있었고 나는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다, 구름 하나가 해를 반쯤 지나갈 때 즈음에 침묵을 깬 것은 나였다.  


“일단 좀 걸으면서 말할까?”


페레그리누스는 아직도 묵묵부답이었다. 내 옆을 걸으면서도 고개를 갸웃하는 기미 없이 목석 같은 그는 사뭇 진지하게 보였다.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었나 싶었지만.


“친구. 종종 너는 나와 ‘너’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어. 아. 이건 인격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심리적 거리감을 이야기 하는거야. 즉, 너는 나를 ‘인간’처럼 대해주지. 그것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종족은 초월한 우정이라니. 멋진 울림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다음 말을 내 뱉을 때에는 조금 체념이 담긴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로봇이야. 인간의 손에 만들어져 명령에 따르는 광대이자 배우며 도구야. 조연이기도하고. 주인공은 아니라는거지. 게다가 바이오로이드가 아니고. 뭐... 이런건 넘어가자. 우울해지잖아?”


페레그리누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의 녹색빛 눈이 몇번 점멸했다.


“어쨌든, 나에게도 기억이라는 것은 있어. 만들어지고 난 이후, 드래곤 슬레이어에서 연기를 하고 인간들의 멸망을 지켜보고 글라시아스 누님에게 붙잡혀 다니다가 너를 만나고. 그 동안의 모든 기억이 이 머리속에 있다는 말씀.”


그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치며 말했다. 팅팅 하는 철의 울림이 울리고 어깨가 으쓱하고 움직이는 것을 본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추억은 없는거야?”


“글쎄? 이제 그 대답을 하자면... 기억은 있어. 분명 이건 내가 살아온 증거야. 하지만 추억이라면 글쎄. 내가 느끼는 것이 과연 추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에게는 프로그래밍 된 감정밖에 없으니까. 누군가의 말을 빌리자면 기억하지만 추억하지는 못한다라는 말이 맞는 것 같네.”


나는 그 말을 듣고 조금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기억은 하지만 추억하지 못한다. 그 말이 너무나도 아련하게 느껴졌기에. 하지만 페레그리누스는 호탕하게 웃으며 팔장을 풀고 으쓱거렸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친구. 그래도 어렴풋하게, 비슷한 느낌은 있다구. 예를 들자면... 그 진조 꼬맹이가 연기 할 때와 안 할 때의 차이? 배역을 맡을 땐 그 누구보다 신중하고 강인하던 아이가 한 순간에 풀어지면서 내 등에 매달려 태워달라거나, 더운 날에는 글라시아스 누님 옆에 척하고 달라 붙어서 하루 종일 자고 있지를 않나. 시즌이 끝나는 날에는 나랑 누님한테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가지 말라고 사정을 하기도 했지. 이미 다 지난 일이지만.”


“그리운거야?”


페레그리누스의 발걸음이 멈췄다. 나도 멈춰서 그를 바라보았다. 하피의 왕은 그렇게 고개를 한 번 갸우뚱거리더니 납득이라도 한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뭐, 그런거 같아. 요즘 들어 그런 기억들이 새어나오는 게 추억의 편린이라면, 나도 추억 한 두개정도는 있는거라고 하자고.”


“대충이네.”


“원래 완벽한 영웅은 없는 법이야. 이게 ‘인간미’라는걸까?”


“그럴지도.”


“그래. 그렇다고 하자고. 정의를 지키기도 바쁜데, 이런 일에 머리쓰기는 싫어. 이젠 내 기억 모듈은 좋은 것만 받아들이는 부품이 되어버렸거든. 그래서 요즘은 꽤나 재밌게 살고 있어. 지켜야 할 게 많아져서 시간도 없다니까.”


“멋대로구만.”


나는 페레그리누스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도 나를 보며 녹색빛 눈을 몇 번 점멸 시켰다. 그러고는 다시 걸었다. 그러고는 다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여기와서 불편한 점이라던가 이 오르카호에서 제일 빠른 이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녀가 과연 제비인가 펭귄인가. 뭐, 그런류의 잡담들이었다.


“인간! 그리고 하피의 왕이여!”


순간적으로 들려온 목소리에 우리 둘 다 고개를 뒤로 돌렸다. 역시나 뒤에 있던 것은 눈을 반짝이며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적힌 소방 도끼를 품에 꼭 안은 LRL였다. 그제서야 나는 페레그리누스가 말한 지켜야 하는 것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어린 소녀의 꿈을 그 자체 였다는 것을.


“무엇인가. 계약자여.”


그는 능숙하게 연기톤의 목소리로 LRL에게 말했다. 역시나 발을 동동 구르며 찰싹 달라 붙는 소녀를 떨쳐낼 정도로 모진 로봇은 아니었다.


“짐은 지금 지켜야 할 이 세상을 순찰하고 싶도다! 이 사이클롭스 프린세스의 두 눈으로 세상을 담을 것이니, 협조하도록 하여라!”


“흠. 좋아. 정의를 관철하려는 마음! 잘 받았다.”


LRL는 자연스레 나에게 도끼를 건네고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그녀가 올라오기 편하게 숙인 페레그리누스의 가슴으로 꾸물꾸물 기어 올라가려 했다. 팔이 감기고 그녀를 안다시피 굽어지는 팔이 교차된 순간, 페레그리누스는 자신이 자랑하는 날개를 쭉 펼치고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저 하늘 멀리의 페레그리누스와 LRL. 나는 나름 행복해 보이는 둘을 보며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이게 추억이야.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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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누펀치! 페누펀치!


그는 신이야!


진짜 캐릭터성부터 서사까지 거를 타선이 없다. 그는 신이야!


이번 이벤트 보자마자 삘 받아서 바로 씀. 이건 무조건 써야했음 그래서 외전 느낌으로 써봄


읽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