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 뽀끄루와 봉봉 대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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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의 도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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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유령들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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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장! 오르카 유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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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플레이어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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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주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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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아닌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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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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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대와 함께 한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군."


  푸른 머리칼의 소녀가 사령관을 마주 보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녀의 말에 사령관이 차를 건네며 능청스레 대답했다.


  "뭐... 긴 시간이라고 한다면 긴 시간이다만... 앞으로 함께 할 시간에 비하면 짧은 시간 아니겠어?"


  사령관의 대답에 소녀가 살포시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기쁜 소리를 해 주는군."


  사령관이 내민 차를 홀짝 마신 소녀가 말을 고르는 듯 찻잔을 매만지다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대와 함께하면서 많은 일이 있었지. 즐거웠던 추억도, 슬픈 나날도, 두려웠던 시간도, 부끄러웠던 기억도.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 그러한 나날 덕분에, 지금의 나는 그대와 만나기 전의 나보다 더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소녀가 지나간 많은 날을 회상하듯 창가 너머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차를 들고 그리운 과거를 회상하듯 하늘을 바라보는 소녀에게서 어린 외견과 맞지 않는 어른스러움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감정이 복받친 듯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소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의연하게 행동하려는 듯 감정을 티 내지 않는 그녀의 얼굴과 다르게 떨리는 손에 찻잔과 찻받침이 달그락거리며 부딪혔다.


  "아무리 나라도 저것은 몹시 부끄럽다..."


  LRL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안을 휘젓듯이 뛰어다니던 칸이 왼눈에 두 손가락을 맞대고 크게 외쳤다.


  "작렬하라, 사안이여! 파멸의 멸절의 봉인을 푸노라!"



  *

  겨울이었다.


  하늘이 수평선과 맞닿아 하늘과 바다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살을 에일 듯이 싸늘하게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도 햇빛만은 아직 쇠할 겨를이 없다는 듯 여름처럼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던 사령관이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비단 배가 항해 중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 하여 으레 좋은 말처럼 여겨지고는 한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티끌이 무엇이냐는 것이리라.


  그 티끌이 서류라면, 그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것을 누가 좋다고 할까.


  산타가 어른에게 줄 것은 선물이 아닌 서류라고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연말을 맞아 무지막지한 양의 서류가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책상에 쌓고 쌓다 더 이상 쌓지 못해 바닥에 놓기 시작했음에도 천장에 닿을 때까지 쌓아 올려진 서류에 사령관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일전에 이프리트가 훈련 중 정말로 산을 없앨 기세로 삽질을 하였다 투덜거렸지만 쌓여있는 게 무엇이든 산을 없앤다는 점에서 사령관의 처지도 그리 다를 바가 못 되는 나날이었다.


  그렇게 끝도 없는 서류와의 전쟁 속에서 올해 마지막 서류에 사인하고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건만 이 모양 이 꼴이다.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갈색 머리의 여인과 얼마나 부끄러운지 귀까지 빨개진 푸른 머리의 소녀를 보며 사령관이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서... 네가 칸이라고?"


  "믿기 힘들겠지만 그렇다. 그리고 저기서 뛰어다니는 게 내 몸의 탈을 쓴 LRL이지."


  사령관이 의뭉스러운 눈으로 LRL과 칸을 번갈아 보다 이내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런 사령관을 본 LRL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납득해 주는 건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이렇게 선뜻 믿어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만."


  "납득하고 자시고 말이지..."


  사령관이 두 눈을 빛내며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칸의 모습 한 LRL을 바라보았다. 한껏 방정맞은 어린아이 같은 그 몸짓에 사령관이 저도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두 눈을 빛내면서 아이처럼 내 방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것보다는 몸이 뒤바뀌었다는 게 납득하기 더 쉬울 뿐이지."


  그래. LRL이 칸이고 칸이 LRL이라 이거지. 헛웃음을 흘리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고민하며 골머리를 싸매고 있으니 LRL이 사령관의 품으로 몸을 던졌다.


  "사령관! 이거 봐봐! 내가 칸 언니가 됐어! 나 무지무지 커졌다?!"


  "L... LRL! 다른 사람의 몸으로 그렇게 방정맞게 굴면 안 된다!"


  LRL이 사령관의 무릎 위에서 방방 뛰자 칸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LRL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강화된 칸의 몸으로 날뛰는 LRL을 한낱 어린아이의 몸으로 어찌 할 수 있을 리 없다. 결국 LRL에게 매달려 그녀를 말리던 칸이 LRL의 몸짓에 튕겨 날아갔다. 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것을 본 사령관이 LRL을 옆에 내려놓고 몸을 던져 테이블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히기 직전에 간신히 받아낼 수 있었다.


  "후우... 큰일 날 뻔했구만."


  내용물은 칸이라도 몸은 LRL이니 자칫 잘못하다가는 크게 다칠 수 있다. LRL도 지금 자기 몸이 얼마나 강한지 잘 모르겠지. 조심해야 할 것이 산더미 같다는 사실에 사령관이 암담한 한숨을 내쉬었다.



  "저... 저기 사령관... 미안해..."


  쭈뼛거리며 사과하는 LRL을 보며 사령관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칸의 모습을 하고 저렇게 행동하고 있으니 혼낼 마음도 싹 사라지는군. 하긴. 애가 잘못한 게 뭐가 있나. 사령관이 LRL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 보였다.


  "네가 사과를 왜 하냐. 이 소동의 범인을 잡아야지."


  "사령관. 아마도 범인은..."


  "닥터겠지. 그 녀석 말고 범인이 누가 있으려고."


  칸을 일으켜 옷의 먼지를 툭툭 털어낸 사령관이 칸이 마시고 남은 차를 한입에 털어 넣고 입맛을 다셨다.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다?


  "우선 리앤을 찾아가 봐야겠군.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정보가 필요해."


  기지개를 켜고 방을 나서려 일어나는 사령관을 따라 칸과 LRL이 몸을 일으켰다. 사령관의 뒤를 따라 몇 걸음 걷던 LRL이 발을 헛디디며 비틀거렸다.


  "LRL의 몸이 적응이 안 되나?"


  사령관이 넘어지려는 칸을 받아내며 묻자 칸이 조금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부끄럽지만 부정할 수 없군. 몸이 작아진 데다 한쪽 눈을 가리고 있으니 말이야. 적응이 되었다 싶다가도 이러는... 우왓!"


  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령관이 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어린아이를 안는 것처럼 칸을 품에 안은 사령관이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이러면 됐지?"


  순식간에 높아지는 시야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칸이 가까워진 사령관이 얼굴에 조금 붉어진 얼굴로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나쁘지 않군."



  *

  칸을 품에 안고 리앤을 만나러 가는 도중에 사령관은 온갖 기괴한 상황을 마주했다.


  포티아의 얼굴로 한껏 인상을 쓰고 다니는 티타니아.


  아르망의 몸으로 한참을 뛰어다니다 체력이 부족해 바닥에서 헐떡거리는 켈베로스.


  금란의 감각에 적응하지 못해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멀미하는 드리아드.


  히루메의 꼬리를 움직이는 법을 몰라 꼬리를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는 발키리.


  복도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자신의 가슴을 주무르며


  “이게... 가슴?”


  이라고 중얼거리는 세크메트 속에 들어간 나이트 앤젤이라던가.


  사령관이 세크메트의 가슴을 만지며 복잡한 표정을 짓는 나이트 앤젤에게 차마 말을 걸지 못하고 지나친 것은 비단 그녀가 안쓰럽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를 마주했을 때 웃음을 참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렇게 웃어넘길 수 있는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령~관!”


  어딘가에서 사령관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며 육중한 무언가가 뛰어오는 듯 복도가 쿵쿵거리며 울리기 시작했다. 사령관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리기 전에 프리가가 사령관을 향해 몸을 던졌다. 사령관이 목소리의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마자 눈앞에 가슴이 닥쳤다. 난데없는 가슴의 습격에 사령관이 품에 안은 칸을 LRL에게 던지자마자 사령관의 얼굴이 가슴에 파묻히고 사령관을 품에 안은 프리가가 복도 벽과 충돌했다. 중장비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오르카 호를 뒤흔들고 프리가의 품에 안긴 사령관이 비명을 내질렀다.


  “사령관! 나 엄청 커졌어! 이거 보이지?! 이제는 나이트 앤젤보다도 크고 사령관보다도 크다고!”


  “으부부붑! 으극! 으그그그극!”


  사령관이 내지른 비명과 통곡이 프리가의 거대한 가슴 사이에 파묻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가슴골 사이에서 메아리가 되어 흩어졌다. 사령관이 간신히 가슴을 헤치고 가슴골 사이로 얼굴을 내밀자 한껏 천진난만한 웃음을 띤 프리가의 얼굴이 보였다.


  “너.... 메이냐?”


  “흐흥! 사령관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커진 거구나! 자고 일어났더니 이렇게 커져 버린 거 있지! 나도 이제 꼬마가 아니거든!”


  메이가 활짝 웃으며 사령관을 꼭 껴안았다. 억센 두 팔이 사령관을 끌어안자 사령관의 몸에서 뼈가 부러지는 듯이 우둑우둑 소리고 울려 퍼졌다.


  “갸아아아아아악!!!!”


  뼈가 뒤틀리고 폐가 쥐어짜이는 감각과 함께 사령관의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사령관이 메이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프리가의 몸에 들어간 메이의 억센 팔을 이길 수는 없었다.


  “바보 메이!!!!”


  사령관의 메이의 품속에 갇혀 의식이 서서히 희미해져 갈 때쯤 저 멀리서 카랑카랑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령관을 품에 안고 방방 뛰던 메이의 머리에 샌들이 날아왔다. 머리를 때리는 샌들에 메이가 고개를 돌리자 가슴께 아래로 붉은 머리의 작은 소녀가 화가 난 얼굴로 메이를 올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에? 에...? 에에에?!”


  메이가 사령관을 품에 안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메이를 보고 비명을 내질렀다. 그 모습을 본 작은 메이가 지끈거린다는 듯 관자놀이를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자기가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그냥 좋다고 달려온 거군요... 빨리 주인님을 내려놓으세요, 이 바보가!”


  카랑카랑한 작은 메이의 목소리에 사령관이 간신히 메이의 품속에서 벗어나 캑캑거리며 작은 메이를 바라보았다.


  “너... 리리스냐?”


  “어휴. 제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주인님께서 저 바보에게 허리가 부러지셨겠죠.”


  리리스가 한숨을 내쉬며 메이에게 거울을 내밀었다. 리리스가 내미는 거울을 받아든 메이가 거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프리가의 얼굴을 보고 비명을 내질렀다.


  “에에에에에에에?!”


  리리스가 사령관을 일으키며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메이에게 눈짓했다.


  “따라오세요, 바보 메이. 주인님을 죽일 뻔한 건 나중에 책임을 묻도록 하겠습니다.”



  *

  “왓슨도 눈치챘겠지만, 이 사태는 닥터의 소행이야. 며칠 전에 닥터가 왓슨 몰래 우리를 찾아왔던 적이 있거든.”


  그렇게 말하는 리앤이 자기 목을 툭툭 건드렸다.


  “잘 안 보이겠지만 지금 우리 목에는 초커가 달려있어. 크리스마스를 맞아 사령관에게 깜짝 파티를 해 주겠다고 우리에게 초크를 건네줬지. 원래는 검은색이었는데 차는 순간 피부색으로 변하더라고. 닥터가 만든 거니까 맨눈으로 구분은 불가능해. 피부의 질감까지 구현한 물건은 아니라서 만지면 아무래도 조금 티가 나기는 하지만.”


  리앤의 말에 사령관이 품에 안고 있던 칸의 목을 쓰다듬었다. 오. 확실히 만지니까 뭔가 있기는 하군. 리앤이 스크린을 두들기자 스크린 위로 복잡한 수식과 그림이 펼쳐졌다.


  “원리는 간단해. 그거랑 반대로 도대체 이런 물건을 어떻게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간과 달리 바이오로이드는 뇌에 칩이 들어간다는 거 알고 있지? 칩은 제거해도 무방하니까 지금은 뇌에 칩이 들어있지 않은 바이오로이드도 많지만, 칩이 들어갈 파츠와 관련 시스템은 존재하고, 바이오로이드는 신체를 움직이는 기능 상당 부분을 이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어.”


  리앤이 스크린에 또다시 복잡한 기호들이 스쳐 지나갔다. 인체 해부도의 뇌 부분이 확대되고 뇌의 한 부분에 설치된 기계 부분이 확대되었다.


  “그렇다면 이 부분의 신호를 해석하면 바이오로이드의 신체를 타인이 조종할 수 있지 않을까? 멸망 전 인류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돌기도 했어. 실제로 연구에 상당한 금액이 투자되었지. 연구가 상당히 진행되었을 때 철충과의 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해 버렸지만. 닥터가 그거에 관련된 정보를 어떻게 손에 넣은 모양이야. 이 목에 있는 초크는 뇌에서 신체로 내려지는 명령을 분석해서 다른 초크에 전송하는 역할을 해. 현재 상태는 실제로 육체가 바뀐 것이 아니라 초크에 의해 신체를 움직이는 여러 명령이 다른 초크로 날아가서 다른 몸을 움직이게 되는 거지. 내가 파악한 건 여기까지야. 뇌의 전기 신호를 원격 신호로 변환해서 지정된 다른 초크로 전송해 해당 육체를 움직이게 만든다. 도대체 이런 걸 어떻게 만든 건지 모르겠네. 시각 정보를 원격 신호로 다른 사람에게 전송하는 건 어떻게 하는 건지 감도 안 잡혀."


  닥터의 말도 안 되는 기술력에 리앤이 혀를 내둘렀다. 리앤의 말을 전부 다 이해하지 못하고 대충 감만 잡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사령관이 문득 떠오른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만 있어 봐. 그러면 컴패니언 애들은 어떻게 되는데? 꼬리나 날개가 없던 애들이 꼬리나 날개를 움직일 수 있을 리 없잖아?”


  사령관이 리앤에게 오기 전 히루메의 꼬리를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던 발키리를 떠올렸다. 사령관의 질문에 리앤이 골머리를 싸맸다.


  “아아... 오면서 봤나 보구나. 그 경우는 컴패니언의 몸에 들어간 사람은 별로 문제가 없어. 꼬리나 귀를 못 움직이기는 하겠지만. 문제는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간 컴패니언 쪽이 문제인데...”


  리앤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갈색 머리의 여인이 뛰쳐 들어왔다. 사령관의 품에 몸을 던진 갈색 머리의 여인이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었다.


  "발키리?"


  아니, 발키리는 오는 길에 히루메의 몸에 들어가 있었다. 그렇다면...


  "히루메구나?"


  사령관의 말에 퍼뜩 놀란 히루메가 고개를 들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새하얗게 질린 발키리의 얼굴이라니, 이건 또 보기 드문 모습이군.


  "소첩의... 소첩의 귀와 꼬리가..."


  히루메의 모습을 보며 리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컴패니언이나 히루메 입장에서는 팔다리가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니까. 페로나 하치코도 극심한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어."


  평소의 푼수끼 넘치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패닉에 빠져 부들부들 떠는 히루메의 모습을 본 사령관이 그녀를 품에 안고 토닥거렸다. 히루메를 어르고 달래고 있으니 사령관의 품속에서 무언가가 부스럭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사령관과 히루메의 품속에서 간신히 몸을 빼낸 칸이 조금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사령관을 올려다보았다.


  "푸하! 조금은 이쪽도 신경 써주는 게 어떤가, 사령관..."


  "아차. 면목 없네. 조금 전까지 내가 깔려 죽을 뻔했는데 미처 신경을 못 썼군."


  사령관의 말에 메이가 사령관의 등 뒤에서 볼을 부풀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알기는 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어쩌면 자기 얼굴로 죽일 듯이 맹렬히 노려보는 리리스가 무서워서일 수도 있겠다. 작게 한숨을 내쉰 칸이 리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너는 정말로 리앤이 맞는 건가?"


  칸의 질문에 리앤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


  "아니.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것 같다만, 워울프의 모습으로 그렇게 어려운 설명을 하고 있으니 위화감이 굉장해서 말이다."


  칸의 말에 사령관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령관을 본 리앤이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도대체 워울프 이미지가 어떻길래 그래?


  "게다가 리앤의 행세를 하는 닥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칸의 말에 사령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칸과 사령관의 눈초리에 리앤이 한숨을 내쉬었다.


  "믿어줄지 말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진짜 리앤이야. 그리고 칸의 말은 확실히 큰 문제지. 닥터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누가 닥터일지도 모르고, 닥터가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단순히 두 사람이 바뀌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만... 메이와 리리스의 경우를 보면 또 모르겠군. 몇 명이 뒤바뀌는지도 알아야 할 것 같은데. 리앤 네 쪽에서 이 시스템을 건드려 볼 수는 없나?"


  사령관의 말에 리앤이 고개를 내저었다.


  "힘들겠지. 연구실에 들어가는 건 왓슨의 권한으로도 가능하지만 닥터의 자료를 뒤지는 데는 닥터의 생체 정보가 필요해. 시티 가드 시설의 내 컴퓨터를 이용한다면 어느 정도 이 시스템을 분석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내 생체 정보가 필요한 거라서... 게다가 내가 직접 분석한다고 해도 시스템의 핵심적인 부분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충분해. 우선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리앤의 몸을 찾는 거로군. 그 전에 발키리를 데려다가 히루메 옆에 붙여놓기라도 해야겠는데. 히루메가 너무 패닉상태야." 


  사령관이 히루메를 품에 안고 어르고 달래는 모습을 본 리앤이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잘 이해가 안되네. 닥터가 말한 대로 깜짝 파티이기는 한데, 닥터는 왜 이런 짓을 벌인 걸까?"


  리앤의 당연한 의문에 사령관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나는 대충 뭔지 알 것 같다."



  *

  시간을 거슬러 대략 두 달 전. 할로윈을 며칠 앞두고 탈론페더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사령관 앞에 나타났다.


  "곧 할로윈이에요, 사령관님!"


  "그래. 그래서 내가 지금 서류에 파묻혀 살고 있잖니."


  시큰둥한 사령관의 반응에도 탈론페더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을 펴고 선언했다.


  "트릭 오어 트리트! 할로윈은 자고로 장난을 치는 날이죠! 제가 사령관님이 오싹해질 만한 장난을 치겠어요!"


  "숨쉬기만 해도 무슨 사고가 터지지 않을까 오싹한 애들이 몇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너라도 가만히 있어 주면 안될까?"


  끝까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건성으로 대답하는 사령관을 향해 탈론페더가 뾰로통한 얼굴로 다시 한번 외쳤다.


  "그렇게 시큰둥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도 지금 뿐이라구요! 할로윈 때는 공포에 벌벌 떨게 만들어 드릴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탈론페더가 방문을 닫고 사라지고, 사령관은 탈론페더의 발언을 그녀가 사라진 지 두 시간 만에 깔끔하게 잊어버렸다. 사령관이 탈론페더의 선언을 기억해 낸 것은 할로윈 당일 식당 게시판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벽보를 보고 난 뒤였다.



  ★제 1회 할로윈 맞이 사령관님과의 관계 횟수 랭킹 발표★

  * 1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사령관님과 가장 많이 관계를 맺은 사람의 랭킹입니다.

  * 해당 랭킹은 실제 횟수와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자세한 사항은 탈론 허브에서 조회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 지나친 격차로 인해 로얄 아스널은 해당 랭킹에서 제외하였습니다. 궁금하시다면 탈론 허브를 이용해주세요.


  1위. 뽀끄루

  2위. 페로

  3위. 발키리

  4위. 이그니스

  5위. 바닐라

  6위. 1274번 브라우니

  7위. 포이

  8위. 캐럴라이나

  9위. 보련

  10위. 후사르



  탈론페더의 발표로 인해 오르카 호가 발칵 뒤집혔다.


  로얄 아스널을 제외한 주요 부대의 대장 중 누구도 순위권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는 것. 


  모두가 예상했던 주요 후보조차 포이 외에 누구도 순위권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는 것.


  10위권 내에 들어간 이름이 대부분 상상도 못 했던 사람이었다는 것.


  너무나 예상과는 다른 이름에 벽보가 걸리고 모두가 벽보의 내용을 반신반의하며 웅성거리고 있을 때 지나가던 로얄 아스널이 벽보를 보고서는


  "음. 역시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올라 트월킹을 추는 법이지."


  라는 괴상한 말과 함께


  "그나저나 확실히 사령관의 침대 위에서 자주 마주쳤던 이름들이군."


  라는 충격적인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다른 누구도 아닌 로얄 아스널의 발언에 탈론페더의 발표는 신빙성을 얻고 순식간에 오르카 호로 퍼져나갔다. 포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페로에게 졌다는 사실에 질투심에 미쳐 날뛰고 리리스는 페로에게 배신당했다는 충격에 벽보 앞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레오나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발키리를 보았으며, 브라우니는 마리에게 호출까지 당했다. 뽀끄루는 모모에게 같이 데려가 주지 왜 혼자서만 갔냐고 질책을 들은 듯하다.


  벽보를 목격한 사령관도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사람들의 경쟁심을 불러일으킬 것은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쟁심을 불태운 누군가는 사령관의 침실로 향할 것이고.


  사령관은 벽보를 보고 닥쳐올 두려운 미래와 한없이 깊은 탈론페더의 악의 넘치는 장난에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그가 벽보 구석에 적힌 작은 글귀를 보기 전까지는.



  특이사항


  LRL: 7회

  더치: 11회

  안드바리: 4회

  에이다: 1회



  말도 안 되는 내용에 사령관이 새하얗게 물든 머리로 열심히 이해하려 하고 있으니 누군가가 사령관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사령관이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돌아보니 싸늘한 웃음을 띠며 그를 노려보는 세 명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에이미.


  세이프티.


  사디어스.


  그 셋의 얼굴을 본 사령관은 그제야 탈론페더가 말한 오싹하게 할, 공포에 덜덜 떨게 할 장난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그리고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도.


  "결백을 주장한다!"


  "죄를 지은 자는 모두 그리 말한다, 사령관."


  사디어스의 날카로운 말과 함께 어디서 번갯불이 튀어 오르는 듯한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세이프티가 차가운 눈초리로 수갑을 꺼내며 사령관을 향해 다가왔다.


  "죄를 뉘우치고 벌을 받으십시오, 사령관님."


  "그러니까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다니까!"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는 사령관을 향해 에이미가 화가 난 얼굴을 들이밀며 사령관을 압박했다.


  "자기, 저 가녀린 아이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요. 설마 그쪽 취향인 건 아니겠죠? 이건 교정이 필요할 것 같군요."


  사령관을 압박하는 세 여인을 보며 사령관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제발 이 셋이 화내는 것까지 탈론페더가 준비한 장난이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그저 여기서 모든 것이 웃어넘길 수 있는 장난으로 끝나기를 빌면서.


  허나 사태는 사령관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저게 무슨 소리야, 오빠?"


  므네모시네의 숨결보다 차가운 목소리가 세 여인의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심장마저 얼어붙을 듯이 싸늘한 목소리에 세 명이 저도 모르게 물러나자 서슬 퍼런 눈빛의 닥터가 나타났다.


  "저거 진짜야?"


  사령관을 올려다본 닥터가 싸늘하고 분노에 가득 찬,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사령관에게 물었다.


  "내가 유혹했을 때는 거들떠도 안보더니 다른 애들이랑은 저렇게나 많이 한 거야?"


  닥터의 말에 사령관이 목이 꺾일 듯이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니, 애초에 에이다가 저기 있는 부분에서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라고."


  "잘 만든 AGS를 보면 흥분하는 게 당연하잖아!"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상상도 못 한 닥터의 대답에 사령관이 저도 몰래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령관의 외침에 닥터가 퍼뜩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사령관이 내미는 손을 피한 닥터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사령관을 향해 소리쳤다.


  "오빠는 바보! 오빠 정말 미워!!"


  뒤돌아 달아나는 닥터의 발소리와 사령관의 부질없는 외침만이 잘게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