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 https://arca.live/b/lastorigin/1507448 




 “그래요. 쉬운 길이 있어요. 예전처럼 키리시마 의원, 당신이 가져온 소스와 제가 취재한 자료를 토대로 기사를 쓰면 당신이나 나나 윈윈이겠죠. 그 기사. 아직도 기억해요. 얼마만에 기사를 쓴 것으로 칭찬을 들었는지 몰라요. 제 별명이 뭐였는지 아세요? 기사에만 나오는 기자였어요. 기사는 쓰지 못하고 사고에 휘말려서 기사에 제 이름이 나온다고요.”

 이제는 들을 수 없는 별명이었다. 당시에는 듣고 싶지 않았던 별명이었지만 지금와서는 추억에 잠겨들만한 별명이기도 했다. 키리시마 의원이 아니었다면 마츠시타는 여전히 그 별명으로 불리웠을 지도 몰랐다.

 “쥰, 그거에요. 쥰과 제가 함께하면 뭐든 할 수 있어요. 아직 이 나라에는 문제가 많아요. 그 문제들을 함께 해결해나가는 거에요!”

 “...”

 마츠시타는 고개를 저었다. 마츠시타의 의도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마츠시타가 하고 싶은 말은 키리시마와 함께 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차라리 그 시절로 돌아가는게 나았어요. 당신과 협력했다는 것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어요. 키리시마 의원, 저는 당신을 믿었어요. 그 배신감이 얼마나 컸는지 아나요? 당신의 일본을 바꾸겠다는 말을 저는 진심으로 믿었어요. 더 나은 일본이라는 게 이거였나요? 이런 일본의 어디가 좋다는 거죠?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쳐야 일본은 유토피아에 도달하는 거죠? 그 유토피아는 죽은 사람들의 인생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거였나요?”

 “쥰!”

 키리시마 의원은 자신의 예상과 다른 대답에 놀라며 외쳤다. 마츠시타는 굴하지 않았다. 야쿠자의 위협에도 키리시마 의원의 회유에도.

 “예전에말이에요. 한 영화를 보았어요. 에도 시대에 기독교도들이 박해받던 영화였어요. 저는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왜 크리스트가 새겨진 목판을 밟지 않는건가 하는 거였어요. 당시 기독교도들은 크리스트를 믿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잃었어요. 목판을 밟는 것은 자신이 믿지 않는다는 증명이었어요. 자신이 믿는 사람을 발로 밟을 신자는 없다고 생각한 거였죠.”

 후미에. 악명높았던 일본의 기독교 박해의 상징이었다. 예수가 새겨진 목판에 침을 뱉고 발로 밟아 일종의 모욕을 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을 거부하면 신도라는 이유로 잔혹하게 처형당했고 침을 뱉고 발로 밟는다면 살려주는 것이었다.

 “물론 박해가 오래되면서 박해하는 막부도, 신자들도 결국 이 행위 자체는 형식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막부는 기독교도들을 줄였다는 명분을 세울 수 있었고 신자들은 목숨 부지를 위해 그 자리에서 배교하는 척만 하면 되는 거였어요. 심지어 로마에서도 후미에는 배교가 아니라면서 일본내 신자들에게 살기 위해 밟으라 말할 정도였죠.”

 그저 하나의 행위에 불과했다. 그러나 행위에는 의미가 부여되기 마련이었다. 사람이 그려진 목판을 밟는다. 그저 그 뿐이었다. 새겨진 사람의 얼굴이 예수와 같은 얼굴도 아닐 것이었다. 인자한 얼굴의 서양인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행위에는 자신이 믿는 존재에 모욕을 가한다는 의미가 부여되었다. 그 의미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저 목판을 밟는 것 뿐이었어요. 살기위해서라면 그정도 일은 할 수 있었어요. 매년, 매분기마다 온다 해도 그저 똑같은 행위를 하면 되는 거라고요. 중요한 건 마음이잖아요. 신앙은 행위가 아니라 마음에 있는 거니까요. 그저 마음속에서 신앙만 이어가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만일 어제 제게 물어도 똑같은 답을 할 거에요. 그냥 겉으로만 행동하고 속으로는 신념을 이어가면 된다고요.”

 지금의 마츠시타는 다른 대답을 할 것이었다. 다른 대답을 마츠시타는 말했다.

 “어째서 후미에를 밟지 못했는지. 그건 단순히 신앙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밟는 건 순간이고 사는 건 끝을 알 수 없어요. 그런데 왜 그 순간을 견디지 못했을까요. 그건 단순한 거였어요. 그 굴복. 비참함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는 것은 그 자리에서 죽는 것만 못했으니까에요. 고개를 숙이고 살려달라고 하면 살려준다고요? 그 말을 하고 평생을 비참하게 사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겠어요. 키리시마 이치카. 당신이 바라는 일본은 이상향이 될 수 없어요. 저는 그 세상에 순종하고 살 순 없어요.”

 마츠시타의 대답을 들은 키리시마 이치카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의 숨은 떨렸다. 그녀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쥰, 저는 쥰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제대로 된 친구를 사귀지 못했어요.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 저는 제 자신도 희생해야 했어요. 제가 원하는 걸 이뤘지만 막상 제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쥰이 좋았어요. 쥰이라면 제 속내를 터놓을 수 있었으니까요. 쥰이라면 제 친구가 되어줄 수 있었으니까요. 쥰을 처음 만났을때 쥰이 저를 친구라 불러주었을때, 제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저는 쥰이 여기서 죽는 걸 바라지 않아요. 제가 할 수만 있다면 저 야쿠자들을 물려서 쥰을 살려보내주고 싶어요. 하지만 쥰, 저는 그럴 수가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쥰을 설득하는 것 뿐이에요. 쥰의 말대로 그저 한마디만 해주면 되는 거에요. 다시는 덴세츠 사이언스의 비리를 파헤치지 않겠다. 그렇게만 말하면 되는 거라고요. 어째서 그러지 못하는 거에요! 쥰, 제발, 부탁이에요. 여기서 쥰을 죽일 순 없어요.”

 죽고 싶지 않았다. 마츠시타는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을 리가 있겠는가. 마츠시타 역시 이곳에서 살아서 나가고 싶었다. 키리시마와 타협을 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싫었을 뿐이었다. 마츠시타는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쓸 기사도 많았다. 그리고 토모와 하지 못한 일도 많았다.

 유언을 남길 시간이 있을까. 유언이 전해질 일이나 있을까. 마츠시타는 이 빌어먹을 일본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 죽어야 할 수많은 사람중 하나에 불과했다. 마츠시타의 죽음은 기사에 실릴 일도 없을 것이었다. 누구도 모른채 조용히 잊혀지겠지.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그렇지 않은 죽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그녀를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그녀의 적인 키리시마 이치카뿐이라는 것이 마츠시타에게는 어이없게 웃길 뿐이었다.

 “마츠시타! 내가 구해줄게! 내가 할 수 있는 것 무엇이든 할 테니까 마츠시타를 구해줄게!”

 토모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래. 토모. 마츠시타는 키리시마와의 대화로 토모를 잊고 있었다. 마츠시타가 죽는다면 토모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마츠시타와 같이 죽게 되는 것일까. 그것만은 싫었다. 마츠시타가 좋아할만한 것은 이 자리에 없었다. 어째서 이 이야기는 이렇게 비극으로 끝나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토모는 예전으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요정에서 일하던 날로. 원래 있어야할 그녀의 자리로. 차라리 그렇다면 다행일지도 몰랐다.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런

 “쥰, 저 바이오로이드의 말을 들어요. 쥰의 선택으로 저 바이오로이드가 폐기되게 할 건가요? 쥰, 당신이 정말로 바이오로이드를 아낀다면 저 바이오로이드의 목숨 역시 아껴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쥰, 잘 생각해줘요. 쥰, 저는 쥰이 죽는 걸 바라지 않아요!”

 키리시마는 토모를 가리키며 말했다. 토모 역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토모는 마츠시타가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다. 마츠시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을 굳힌 마츠시타였지만 그 마음의 틈새에 토모가 파고들었다. 그리고 토모는 마츠시타의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난 마츠시타의 의견을 존중하겠어. 마츠시타가 뭐라 하든 나는 마츠시타의 결정에 따를 거야. 하지만 난 마츠시타가 죽게 내버려둘 수도 없어. 마츠시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마츠시타를 구해줄게. 그러면 마츠시타도 목숨을 걸 필요가 없어.”

 마츠시타는 토모의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구해준다. 지금의 토모라면 무리였다. 그러나 토모는 확신하고 있었다. 만일 블랙리버의 서버에 접속해 자신의 모든 기술을 습득하면 마츠시타를 구해줄 수 있다고.

 그 대가는 그 선택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토모가 블랙리버의 서버에 접속하면 블랙리버는 토모의 위치를 특정할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덴세츠 사이언스에 더불어 블랙리버까지 마츠시타와 토모를 노릴 것이었다.

 마츠시타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무사히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는 토모 뿐이었다. 마츠시타는 어차피 죽을 것이었다. 입막음 당할 것이었다. 먼 미래에 에도강에서 물에 불어터진 신원미상의 시체로 발견되겠지.

 토모에게는 가능성이 있었다. 폐기당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보내질 가능성이. 비록 키리시마법이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토모는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었다. 마츠시타는 그 가능성에 걸고 싶었다. 토모를 위해. 세상의 모든 바이오로이드를 구해줄 수는 없었지만 마츠시타는 한 바이오로이드만은 구해줄 수 있었다.

 “키리시마 의원님, 여기까지입니다. 안타깝게도 기자의 설득은 실패한 모양이군요.”

 한 야쿠자가 다가왔다. 젊은 야쿠자는 마츠시타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짧은 단도가 들려있었다. 키리시마는 그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아직이에요! 아직 쥰을 설득할 수 있어요. 쥰이 취재를 포기하게 할 수 있다고요. 쥰을 여기서 죽게 내버려둘 순 없어요!”

 “전 시간을 충분히 주었어요. 여기서 더 질질 짜다간 눈물에 빠져 익사하겠어요. 간단히 끝낼 수 있는 일이에요. 감정따윈 필요없죠. 시간도, 힘도 들지 않아요. 그럼 의원님,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으신가요?”

 야쿠자는 키리시마의 앞에 멈추어섰다. 키리시마 의원은 마츠시타를 돌아보았다.

 “쥰, 정말로 마지막 기회에요. 쥰, 제발요. 제발 죽겠다고 말하지 말아요. 그냥 예전으로 돌아갈 뿐이에요. 우리가 친구였던 시간으로요.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저를 계속 적이라 생각해요. 그냥 덴세츠에 대한 조사만 안하면 된다고요. 블랙리버든 펙스든 삼안이든 뭐든 좋으니까 그런 회사들 비리를 파헤치면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제발요.”

 마츠시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키리시마는 슬프다는 듯, 분하다는 듯 입술을 물었다. 그녀의 입에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더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걸어갔다. 마츠시타에게서 멀어졌다. 그녀는 모두 포기했다는 양 마츠시타를 떠났다. 기둥 너머로, 어둠속으로 키리시마 이치카는 사라졌다.

 “직업상 많은 사람을 만나봤지. 한가지 안 건 말이야. 설득이라는 건 효율이 많이 떨어진다는 거야. 사람을 말로 감화시킨다는게 말이 쉽지, 그게 자리에 앉아서 한번에 될 수 있는게 아니거든. 그래서 보통은 말에 윤활유를 칠하지. 돈, 혹은 진짜 기름. 후자의 경우에는 손에 라이터를 들겠지. 뭐, 지금 기름을 붓겠다는 건 아냐. 이렇게 바닥에 물이 가득한데 불을 질렀다가 어떤 일이 일어나겠어. 그렇지 않아?”

 야쿠자는 웃으며 마츠시타에게 다가왔다. 낯익은 남자였지만 여전히 마츠시타는 그가 누군지 떠올릴 수 없었다.

 “돈을 줄 것도 아냐. 미쳤어? 그게 아니지. 나는 여기에 당신을 설득하려 온 게 아냐. 이미 의원님이 말했듯, 여기가 당신의 마지막이야. 이 긴 여정이 끝날 순간이지. 알겠어? 마츠시타 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