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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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 오래전에 끊겨 전등이 켜지지 않는 어두운 편의점에서 우리는 어색함과 정적 속에서 서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 쪽에 앉아있는 나와 바이오로이드인 그녀를 나누는 좁지만 한없이 넓은 계산대 사이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식어버린 내 커피잔. 유리창을 통과하는 태양은 비구름 사이에서의 존재감을 과시하듯 우리 둘을 비춰주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두 사람의 정적을 따뜻한 햇살과 커피향이 이 공간을 채우고 두 사람의 정적의 끝을 포트에서의 물 끓는 소리가 그녀로 하여금 입을 열어주었다.

"...인사가 늦었네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블랙리버사의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소속. 기종명 T-12 칼라아흐 베라입니다. 저를 부르실 땐 베라로 불러주세요."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우리 군인들에겐 극지의 사신들이라 불렸던 소대의 일원. [척안의 명사수]였던 T-8W 발키리의 단가가 비싸서 대량생산된 대체품. 여태 봐왔던 대량생산되는 바이오로이드는 공포심을 줄이기 위해 성격이 올곧거나 지나치게 밝음에 틀림없었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한 마디에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고,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일련번호는... S-2077-002입니다."

일련번호의 시작 S. 그것은 폐기처분될 불량품의 Scrap의 앞글자를 따서, 대부분 민수용이나 뒷세계로 들어갈 용도였었다. 고블린의 폭동사태 이후로 오리진더스트는 남성호르몬의 증대 및 활성화가 급격하여, 여성의 육체로 바이오로이드를 만들었고. 이를 토대로 사회의 기반을 닦아나갔다. 하지만 그의 이면에선 인간은 또 다른 불안을 잠식시키기위해 불량품은 폐기하거나 또는 품질에 따라 민수용 및 성처리용으로 뒷거래한다는걸 내 후임으로부터 들었기에 큰 동요없이 그녀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마실 것을 만들고 있었다.

"제가 제조될 당시 폐기대상 조차 전선으로 내몰릴만큼 상황이 급박하였고, 형식상 폐기됬어야할 저는 전투모듈을 별개로 달고 전선을 향해 나아갔지만, 눈 앞에서 전우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고, 그만... 무서워서 탈영했습니다."

표정이 굳어가며, 총을 들고있는 그녀의 손은 떨고 있었고, 시선에는 안개가 껴있었다. 불량품이었던 그녀는 원래 폐기되거나 민수용으로서 이야기의 막을 내렸겠지만, 세상은 불완전한 그녀를 사지로 이끌었구나라고. 나는 그녀에게 컵을 그녀쪽을 향해 밀어주었고, 본능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하던 그녀는 멀뚱히 컵 속의  핫초코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입가로 가져가는것을 보고, 나는 식어버린 내 커피를 털어넣었다. 홀짝이던 그녀가 컵을 내려놓고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할아버지께선 절 경멸의 눈으로 보지 않으시네요...? 저를 바라보던 자매와 동종들은 반푼이를 바라보던 시선이었습니다. 아까도 군인답지 못한 행동으로 잘 못 하면 민간인을 위험에 빠트릴 뻔 했습니다."

"별로 그런 생각이 안 드는구나. 너의 앞에 있는건 한낱 늙은이니까. 도움을 필요해보이면 누구든 몸을 던져줬을거란다."

나는 컵을 내려놓고, 등 뒤의 재생목록 끝까지 가서 멈춰버린 MP3를 재기동해 다시 틀기 시작했다. 그녀는 방금은 촌스럽다곤 했지만 싫은 내색은 하지 않았다. 사람의 얼어버린 마음을 녹이는 데엔 따뜻한 마실 것과 부드러운 음악이라고 과거 어느 문헌에서 봤던 글이 상기된다.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이야기를 계속해왔다.

"저는 전쟁터를 뒤로 하고, 하릴없이 앞만 보고 달려서 도망친 곳에 있던, 텅 빈 벙커에서 남은 식량을 소비하며, 위에서 들려오는 진동이 멈추고도 좀 더 기달렸습니다. 저를 쫓아와서 군법위반으로 처형할 자매들의 손아귀도 무서웠지만, 어둠 속에서 지낸 긴 시간동안 저를 괴롭혀왔던 것은 저의 존재의 의미였습니다. 원래였으면 폐기처분대상이었던 저는 전쟁터로 끌려가서 누군가를 위해 죽어가던 그녀들의 발목을 잡았고, 그조차도 감당이 안 되서 도망쳐온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도망치고 살려고 발버둥쳤는지 말이에요."

그녀는 계산대에 코코아를 놓고, 두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말하기 힘든 진실들을 내게 고했다.

"이런 실패뿐인 저 조차도 계속 살아도 되는걸까요...?"

그녀의 허벅지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며, 먹먹한 목소리로 만난지 얼마 안 된 나에게 무거운 질문을 꺼냈다. 익숙치도 않는 전투모듈을 들고 몸만큼 큰 총을 잘 쏘지도 못했을테니 전우들로부터의 시선이 달갑지 않았겠지. 그저 살기 위해. 앞에 있는 것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라는 막연하지만 당연한 사실 사이의 무거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망쳐 나온 그녀는 자신을 옭아메며 스스로의 정신을 갉아먹어온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나지막히 이야기했다.

"베라야. 저기 가판대의 감자칩 하나 들고오련?"

그러자 그녀는 일어서서 눈물을 닦고 몇 걸음 뒤에 쌓여있던 감자칩을 하나 들고왔다. 나와 그녀 사이의 계산대의 위에 감자칩을 뜯어서 올려놓았다. 한 없이 멀었던 우리 둘의 사이를 그저 한 봉지의 과자가 쌓이니 훨씬 가까워보였다. 나는 여러방향으로 흩어진 과자 중 한 개를 들고 그녀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이 감자칩이 보이니? 너도 알다싶이 이 감자칩의 재료는 이 지구 어딘가에서 재배된 감자란다."

베라는 나의 눈을 보며 경청하듯이 정자세로 응시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흘러내리지 못하고 고여있는 눈물, 상기되어 붉게 달아오른 눈가, 자세히보니 보이는 다크서클이 그녀는 여지껏 쌓여있던 울분이란 감정을 나에게 비언어적인 형태로서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감자라고 모두 매끈하게 생기지 않았단다. 조금 못생겼을 수도 있고, 재배과정에서 상처가 나서 상품가치가 떨어질 수 있단다. 마치 지금의 너 처럼 말이다."

그녀를 지칭하는 이야기가 나오자 움찔했다. 스스로를 옭아매던 단어가 그녀로 하여금 방어기제를 보이게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그녀에게 이야기를 해야한다.

"그런 상품가치 없던 감자들도, 눈 앞의 감자칩이 되어 지금을 살고있는 우리의 배고픔을 채워주고 있지. 얘야. 너는 그 전선에서 실패해서 도망쳤지만, 살아있기에 지금 이 늙은이의 말상대를 하고있단다. 너의 존재의의는 전쟁터에서 그저 소모될 도구가 아니었기에, 지금 내 눈앞에 있단다. 삶의 의미는 지금을 살아가며 찾아보면 되는거란다."

태어난 이상 우리는 죽음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발버둥쳐야하는 신의 슬픈 피조물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들은 돈을 벌고, 명예를 쌓고, 권력을 얻는등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죽음을 보다 편안하게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해온다. 비록 그 사이의 사고나 자살등으로 몰려진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지언정, 우리는 우리의 미래가 저렇지 않기 위해 그저 기도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소비해왔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사명이 주어진 그녀들에게 있어서도 공통된 주제라고 생각한다. 소모품이었던 그녀들이기에 더더욱이 세상의 무게는 가혹하고 처절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내 눈앞에서 울먹이는 그녀에게 살아갈 희망을 주고 싶어졌다.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께선 저를 책망하지 않으실건가요? 다른 이들보다 모잘랐고, 그 누구도 지켜주지 못한채 도망쳐 나온 저를요?"

그녀의 눈에 생기가 빛났다. 햇빛이 고여있던 눈물을 비추었고 처연히 볼을 따라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럼. 지금 내 눈앞에 있는건 불량품도 탈영병이 아닌, 그저 겁 많은 소녀인걸. 난 그렇게 생각한단다."

내 말이 끝나자 떨고있던 그녀는 나에게 달려들어 안겨 울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과자가 날리고 핫초코는 쏟아졌지만,  억누르던 슬픔을 토해낼 수 있는 따뜻한 품 속에서 여한없이 울고있는 그녀는. 세상에 필요했기에 태어났지만, 생각과는 다른 태생에 발버둥치며, 자신의 선택이 과연 맞는가를 수도 없이 되물어가며, 때론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버텨온 그녀는 지금 겨우내 자신을 자신으로서 봐준 존재 앞에서 다 토해낼 수 있게 된 거 같다. 나는 그저 이 슬픔이 작고 여린 소녀의 몸에서 더 이상 오래 남아있지 않게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는 것말고 해줄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좀 진정이 된 그녀는 지쳐 잠들었고. 적당히 박스 위에 눕혀주고 입고있던 일회용 우비를 그녀에게 덮어주고 잠시 밖으로 나와서 벤치에 앉았다. 안주머니의 담배가 있을까 찾아봤지만 아무래도 아까 접전에서 다 젖어버렸다. 혹시 살릴 수 있는 것이 있을까봐 벤치 위에 비닐을 올리고 그 위에 담배를 하나하나 꺼내서 말리기 시작했다. 제발 살아나주길 빌어본다.

아까 그녀의 이야기에서 존재의의에 대한 해답을 찾아주듯이 이야기했지만, 사실 나라고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나는 인간이지만, 그녀는 바이오로이드. 즉 인공생명체다. 인간이 아니기에 지닐 수 있는 슬픔과 방황을 이해할 수 있을리가 없다.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고민이 있듯이 그녀는 그녀이기에 할 수 있는 고민을 늘 어깨에 메고 살아가야한다. 그것은 태어난 생명이 지닌 공통된 숙명인 것이며, 단지 그것을 공유하고 다른 시선에서의 해결할 수 있는가를 찾고 고뇌하는 무한한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는 덧없는 존재다.

옛 이야기에 나오던 "왕자님과 공주님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문구를 퇴색시키듯 그 뒤의 이야기를 보여주지 못하고 세상은 멸망해버렸다. 나를 바에서 반갑게 맞이해주던 지미도. 이 편의점에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손님을 맞이했던 알바생도. 전쟁터에서 시민들을 지켜주던 이들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인간을 지키기 위해 대신 희생당하던 바이오로이드들의 수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패배했다. 겨우 살아남은 나조차도 지금도 철충이라는 보이는 적과, 휩노스 병이라는 보이지 않는 적을 마주하며 나의 마지막을 정리해야만했다.

축축한 바람이 불어온다. 마치 누군가의 울음을 끝맺는 한숨을 느끼는 기분이다. 흐리던 하늘도 어느샌가 먹구름이 지나가며 푸르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이 곳에 온 이유는 베이스캠프의 식재조달 및 연료보충. 예상치 못한 만남이 있었지만 보급을 소홀히 할 수 없었기에, 주변 마트에서 보존식품들과 종자들. 주유소에 남아있는 기름을 담아서 내 짐 옆에 두었다.

우연히 만난 그녀였지만. 내가 혼자서 담당하던 가사와 보급, 수리 및 전투를 도와줄 수 있는 그녀가 나를 따라와줄 수 있다면 매우 감사할 것이다. 만약 같이 돌아가서 날 도와줄 수 있다면, 그녀가 알던 초고도문명사회에서 조금은 후퇴한 삶의 방식을 배워야하지만, 분명 그녀는 따라와줄 수 있을 거라 믿고있다.

그렇게 그녀의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해질녘이 되어 푸른 하늘을 붉게 수놓기 위해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인사를 고할 때, 편의점 속에서 그녀는 주섬주섬 일어나서 내 곁에 다가와 앉아서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구석구석 보다가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오냐."

"그... 자고 일어나서 바로 할 말은 아니지만, 수염 좀 깍으세요."

아까의 그 어두운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밝은 얼굴에서 나오는 첫 한 마디가 신랄한 잔소리였다. 기운을 되찾아보여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첫마디가 턱수염이야기란 점에서 굉장히 충격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잠시만. 이 턱수염 멋있지 않나? 마을에 살던 영감들한테는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수염이 멋있게 자라는건 유전자의 특혜니까말이야. 그렇게 기운차려서 턱수염을 쓰다듬는 나에 대해서 잔소리하는 기운을 되찾은 그녀를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 속에 말이 참을성없이 튀어나와버렸다.

"...참으로 잘 어울리구나."

"그러니까... 네?"

한창 잔소리를 하던 그녀의 말이 끊기며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녀의 두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

"너의 머리칼의 색이 해질녘과 같이 부드럽구나. 마치 이 늙은이의 시간과도 같은 색이야."

그런 이야기를 듣자 얼굴이 태양보다 빨개진 그녀가 어버버 거리기 시작한다. 늙은이의 말재간도 못 받아채는거보니 놀리기 좋아보인다. 잔소리 할 때마다 끊기 용이할 것이다. 옆집 할망구가 잔소리할 때 쓰던 방법인데 젊은이에게도 통할 줄은 생각치도 못했다. 울그락불그락 고추잠자리보다 빨개진 얼굴에 눈에 소용돌이 모양 만들어내며 나에게 달려드는 그녀를 잡아서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이런 시간이 앞으로도 계속되리라 생각하고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너만 괜찮다면 내 베이스캠프로 같이 가주겠니?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고있어서 말이야."

그녀는 우물쭈물거리다 나지막히 내 양 볼에 손을 대며 말했다.

"칼리아흐 베라 기종이 얼마나 깐깐한지 느끼게 해드릴거니까요. 평상시의 나태한 생활방식은 안 봐드릴거에요!"

아까까지만해도 울었던 걸 숨길려 드는 그녀의 허세가 그저 귀엽게 느껴졌던 나는 허탈하게 웃고 일어나서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녀는 갑작스런 스킨쉽에 발버둥쳤지만 이내 내 허리를 감싸고 사람의 온기를 느낀다. 이 작은 아이에게 세상은 너무나도 무거운 시련을 내려줬던 것임을 새삼스래 느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짐을 챙겨 해를 등지고 걷는 우리의 앞을 가리키는 그림자는 어둡고도 길다. 그림자의 끝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는 때론 난관에 부딪히기도 쓰러지고 좌절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그림자가 비추는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직면하는 것 조차도 살아있기에 할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런 특권을 난 이기적으로 그녀와 함께 남은 생애동안 누려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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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멸망 후 일상을 적어보고 싶어서 계속 써보게 되네요.

주인공 할아버지는 키 193의 근육질 거구여서 162인 베라보다 많이 큽니다. 체격적으로 차이가 꽤 나는 느낌으로 가볼려 합니다.

전투를 두려워하는 불량품 바이오로이드와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인간의 이야기를 지켜봐주시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