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만드는 것이 이렇게나 힘들 줄이야.

 

 새벽같이 나를 깨운 LRL은 눈을 굴려달라고 했다. 눈이 쌓인 곳에서는 눈사람을 만드는 것이 “국룰”이래나. 심지어 LRL과 함께 온 안드바리마저 “무조건이에요!”라며 거들었다. 매일 티격태격하던 둘이 이렇게나 합심하다니. 비몽사몽인 와중에도 작게 감동한 나는 도와주겠다고 즉답했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오르카호 밖으로 나왔다.

 

 스발바르제도의 살을 에는 바람을 맞으니 잠이 번쩍 깬다. 두꺼운 털옷도 소용이 없었다.

 “얘들아..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아뇨. 조금 더 굴려주세요. 제 키 정도는 되어야 해요”

 “크크크... 창고의 마녀는 쉽게 만족하지 않느니라”

 “..너희 둘이 죽이 참 잘 맞았구나?”

 나는 다시 몸을 숙여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눈사람 만드는 것이 이렇게나 힘들 줄이야. 몸을 숙인 채로 차가운 눈을 끝없이 굴리고 있다. 아무리 오리진더스트로 강화한 신체라도 슬슬 허리가 아파져 온다.

 그때, 구원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와드릴게요, 사령관”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티아멧이었다. 아침해가 떠오르는 설원에 연한 파스텔 색감의 머리칼이 휘날리는 모습은 꽤 아름다웠다. 가녀리지만 앙다문 입술에서 느껴지는 결연함은, 마치 메리가 언젠가 그렸던 뜻 모를 풍경화를 보는 법했다.

 

 “피곤하세요?”

 티아멧의 질문에 가출했던 넋이 돌아온다.

 “너 때문이야”

 “네?”

 “아, 아니. 도와주면 고맙지 뭐. 하하”

 ‘시티가드, 내 혼을 쏙 빼놨던 범인이 여기있어요’라고 말하지 못한 채, 나는 티아멧에게 눈을 굴리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럼 하나는 제가 만들게요”

 “괜찮겠어? 합쳐서 안드바리 키 정도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 정도는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티아멧은 의기양양하게 답한다.

 “그럼, 머리 쪽을 굴려줘. 지금 굴리는 이건 몸통으로 만들 테니까”

 나는 내 앞에 있던 덩어리를 탁탁 치며 이야기한다. 티아멧이 도와준다면 아침식사 시간에 늦지 않을지도.

 

 한편, 내게 새벽 운동을 시키는 아이들 그룹은 어느새 엘리와 타치, 아쿠아가 가세했다. 내 고생은 아는지 모르는지, 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하고 있었다. 쟤네 진짜 사이좋네.

 나는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른편엔 티아멧이 있었다. 내가 크게 걸으며 눈을 굴리면 티아멧은 빠르게 두 걸음을 달렸고, 내가 잠시 허리를 펴면 티아멧도 멈췄다. 그녀는 내 보폭을 완벽히 따르고 있었다.

 “저기, 티아멧은 웬일로 새벽같이 나온 거야?”

 “스트라이커즈 훈련이 있거든요”

 “특별훈련?”

 내가 되묻자 티아멧은 답했다.

 “설원에서만 할 수 있는 특별훈련이에요”

 공을 굴리느라 손을 쓸 수 없던 티아멧은 고개를 들어 턱으로 저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점퍼를 입은 두 명의 스트라이커즈 멤버, 랜서 미나와 우르가 있었다. 그런데, 한명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저기, 미나의 표정은 왜 저래? 무슨 일이 있어?”

 미나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한걸음한걸음을 걸어가고 있었다. 우르는 미나의 손을 꽉 잡은 채, 미나가 걸음을 내딛어야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미나는 정글에서 활동하던 바이오로이드이니까요. 아무래도 눈이 익숙지 않은가 봐요”

 확실히. 미나는 정글을 헤치며 사람을 구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다. 하지만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그녀는 창과 방패를 들었다. 여기에 오르카 호에 합류하면서 정글을 벗어나게 되었다. 눈과 설원이 익숙하지 않은 것도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저렇게 눈에 익숙해지겠다면서 아침식사 전까지 눈 위를 밟아보다 가요”

 미나는 발이 생각보다 깊게 빠졌는지 “꺅!”소리를 내면서 우르의 팔에 매달린다. 우르는 괜찮다는 듯이 미나의 어깨를 다독이며 격려한다. 뭔가 반대로 된 것 같은데?

 

 눈을 굴려야 한다는 사명도 잊고 미나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우르와 눈이 마주친다. 멀수록 눈이 밝은 우르가 나의 모습을 확인하고 작게 손을 흔든다. 그리곤 미나한테 작게 귓속말을 한다. 미나는 깜짝 놀라더니 우리의 모습을 확인하곤 “싫어! 그냥 돌아갈래!”라고 외친다. 하지만 오르카 호로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다. 이미 짧지 않은 거리를 걸어왔다. 미나는 바닥으로 주저앉는다. 여전히 한손은 우르의 손을 잡고 있다.

 나는 안드바리를 향해 손짓한다. 총명한 안드바리는 자기를 부르는 것을 깨닫고는 총총 뛰어온다.

 “안드바리, 저어기 미나에게까지만 굴리면 되지 않을까?”

 안드바리는 눈으로 대충 거리를 가늠해보곤 답한다.

 “그렇네요. 그렇게 마무리해주세요”

 저건 알렉산드라한테서 배운걸까 레오나한테서 배운걸까? 안드바리는 깐깐한 표정으로 허가를 내준다. 나는 티아멧과 눈을 맞춘 후 눈을 굴리기 시작한다.

 나와 티아멧이 다가오는 걸 깨달은 미나 역시 걸음을 떼는 간격이 짧아진다. 이윽고, 나는 스트라이커즈 모두와 접선한다.

 “사령관! 어째서 여기있는거야!”

 미나가 얼굴이 벌게진 채 추궁한다. 이 날씨라면, 그럴만도 하지.

 “미나, 많이 추웠나 보구나. 고생했어”

 미나의 볼을 어루만져주자 미나는 양팔을 벌린 채 펄쩍뛰며 쓰러진다. 우르는 어느 새 내 팔에 안겨져 있었다.

 

 우리 앞에는 1미터는 족히 넘는 눈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알비스를 마지막으로 꼬마들도 전부 모였다. 나는 마른 나뭇가지를 꺾어 눈사람의 팔을 만들어주었다. 더치는 이 모습만으로도 신기한지 눈사람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려본다. "더치도 눈이 처음이지?"라고 작게 물으니 "응. 그래도 돌맹이보단 푹신해서 좋아"라고 작게 답한다. 이때, 안드바리와 LRL의 무리에 가운데로 나온다. 이번 눈사람 제작의 책임자들이다.

 “후후후.. '설원감시자 프로젝트'의 완성이 눈앞이도다"

 "그럼 다들, 준비해온걸 꺼내보도록 할까요?"

 총감독처럼 보이는 안드바리가 모두를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나는, 오드리의 재봉도구 정리를 돕고 단추를 받았다”

 타치가 주머니 안에서 단추를 꺼냈다.

 “오오, 이건 ‘설원감시자’의 안구! 상등품을 가져왔구나~”

 LRL은 타치 손바닥 위에 놓여있던 단추를 획 뺏어가더니 눈덩이에 박아넣었다.

 “푸하하! 벌써부터 웃겨!”

 LRL과 아쿠아는 무엇이 재밌는지 벌써부터 웃기 시작했다. 더치와 안드바리 또한 웃음을 참기 힘들었는지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다. 엘리는 손을 입을 가렸지만 미소는 숨길 수 없었다. 그저 타치 만이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다. 나는 타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오드리네 옷방에는 바늘이 많아서 위험했을 텐데”

 “날붙이는 제 전문입니다 마스터. 그 정도 암기쯤이야. 오드리도 제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잘했네”

 “감사합니다”

 추운날씨에 느껴지는 무색무취의 답변이었다. 더치는 타치의 손을 잡으며 축하한다고 말했다. 어째서?


 “아쿠아 씨는 무얼 가져오셨나요?”

 합류는 늦었지만 어느새 언니 역할을 도맡는 엘리가 아쿠아를 보며 물었다.

 “나는 당근을 가져왔어! 눈사람코!”

 아쿠아는 당근을 꺼내 흔들며 말했다.

 “농장에서 몰래 가져오신건 아니겠죠?”

 금새 날카로운 눈매로 변한 안드바리가 물었다.

 “쯧쯧쯧. 레아 언니랑 리제 언니가 지키는 농장에서 훔쳐오는 건 바보같은 짓. 나는 식당 테이블을 청소하고 당근을 얻어왔단 말씀!”

 아쿠아가 가슴을 펴며 답했다.

 “그 넓은 테이블을? 아이 팔로는 다 닿지 않았을텐데?”

 미나가 묻자, 아쿠아는 허리에 장치한 날개 모듈을 파닥거리며 “히히”웃었다. LRL은 “그건 반칙아니냐..”라며 황당한 눈치를 보였다. 아쿠아와 미나, LRL의 모습을 번갈아보던 나는 아쿠아에게 부탁했다.

 “아쿠아, 이 당근 미나 언니보고 꽂아보라고 하면 안될까?”

 “응? 안될거 없는데 왜?”

 “미나 언니가 새벽부터 고생을 했거든”

 “윽...”

 “그럼 미나, 몇 걸음 정도는 걸을 수 있겠지? 자, 얼른 꽂아주세요”

 “으으...”

 미나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당근을 받아든 채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발을 옮기고,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날 때 마다 미나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윽.. 당근 하나 때문에.. 나도 비행모듈 가져올걸...”

 “반칙인 것이 당근이지”

 우르는 작게 키득였다. 이윽고 눈사람의 코가 완성되자 아이들은 다시한번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아쿠아는 날개를 파닥파닥거리며 웃었다. 노란점퍼까지 어우러져, 마치 길을 잘못 찾아 설국까지 와버린 꿀벌같았다.

 “뭐가 그렇게 웃긴거야”

 “왜? 우스꽝스럽잖아”

 미나의 혼잣말에 티아멧이 답했다. 미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단 표정이다. 한편 우르는 기특하던 표정으로 미나의 등을 두드려준다.

 “그럼 알비스, 눈사람의 모자는 준비해왔겠죠?”

 안드바리가 알비스를 째려보며 말했다. 안드라비에 있어 알비스는 가장 가까운 전우이자 요주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럼! 물론이지!”

 알비스가 가슴을 펴며 답한다. 신체적 특징 때문인지 아쿠아 때와는 다른 박력이 느껴진다.

 “짜잔! 바께쓰!”

 “플라스틱 양동이이에요. 표준어를 써주세요”

 엘리가 작게 주의를 시킨다. 알비스는 “알써알써”라며 파란색 양동이를 머리에 씌운다. “오오! 설원감시자의 완성이도다!”라며 LRL은 되뇌더니 곧 웃음보가 터진다. 이윽고 아이들 모두의 웃음보가 터지고 스트라이커즈 역시 작게 미소를 짓는다. 나 역시 바닐리가 지키고 있을 아침시간에 늦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얼굴이 풀어진다.

 

 한참을 웃어대던 안드바리는 알비스한테 묻는다.

 “그런데, 이 양동이는 어디서 가져온거에요?”

 “이거? 빌려왔지”

 “빌려왔다고요?”

 “응. 레오나 대장님 욕실에서”
 순간적으로 모두가 얼어붙는다.

 

 “뭐, 뭐, 뭐라고요???”

 “어차피 대장님 쉬는 날엔 늦게 일어나시잖아”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아아, 또 내가 생각없이 내용물 다 뒤집고 가져왔을거라 생각했지? 걱정마. 면도기랑 샴푸 가지런히 놔두고 왔어!"

 "그래도 알비스. 말도 없이 그러면 안되는거야"

 더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알비스를 타이른다. 하지만 알비스는 표정변화 하나 없이 답한다.

 "괜찮아! 편지도 남겨놨거든"

 “편지요?”

 

 “응. 안드바리가 사령관님 깨워서 눈사람 만든다길래 빌려간다고”

 “아...”

 안드바리는 작게 탄식했다. 나는 어느새 미나처럼 우르의 오른팔에 매달려있었다. 우르는 괜찮다는 표정으로 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