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한쪽 눈에 안대를 끼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아무도 없는 빈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문을 잠그고, 주머니에서 검은 비닐봉지와, 본드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그 본드를 검은 비닐봉지 안에 마구 뿌렸다. 그다음 그녀는, 그 비닐봉지에 코를 박고 본드냄새를 마구 들이마셨다. 그렇게 한참 본드를 맡은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눈 앞에 타이런트가 날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 타이런트가 떨어지자, 방이 흔들리면서 큰 굉음이 울렸다. 그 순간 껌껌한 방이, 그대로 빙글빙글 돌았다. 그래서 놀란 그녀는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타이런트가 사라져있었다. 


샤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을 남겼다. 이를 쉽게 설명하면 의자나 다른 사물과는 다르게, 인간은 일단 만들어진 다음, 목표를 찾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말은 바이오로이드와 인간의 차이를 나타내었다. 브라우니는 스틸라인의 병사가 되려고 태어나고, 좌우좌는 조명을 비추려 태어나지만, 인간은 무엇을 위해 태어나지 않는다. 만약 팔 다리가 잘려, 병사일을 할 수 없는 브라우니와 섬광을 잃어버린 좌우좌에게 무슨 가치가 존재할까. 그리고 저격을 할 수 없는 발키리에게는 무슨 가치가 존재할까.

이 고민은 결국 발키리의 심장에 대못을 박고 말았다. 그녀는 펙스와의 전투에서, 기습적인 폭격으로 인해 눈을 다쳤다. 하지만 전투중이라서 치료가 늦은탓에 그녀는 결국 저격을 위한 눈을 영원히 잃고 말았다. 처음에 수복실에서 사령관의 위로를 받을 때에는, 그와 옷을 벗고 서로 관계를 맺을때에는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격수의 역할을 우르가, 부관의 역할을 님프가 대체할 때 부터 그녀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레오나를 억지로 따라가려다가 반려되었고, 남은 한 쪽눈으로 저격을 시도하는 것은 잘 안 되었다. 물론 그래도 아직 그녀는 조그마한 고민 정도로 끝났었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발할라라는 자리가 있었기에. 오르카호의 유일한 발키리이자, 사령관의 총애를 제일 많이 받았던 소녀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령관의 지원을 받아, 발할라의 참모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비극은 금방 찾아왔다. 어느 순간부터, 사령관은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발할라의 멤버들도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에 의문을 가졌고, 우연히 사령관의 방 문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문이 벌컥 열리자, 자신과 똑같았던 존재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마치 과거 거울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 직후 그녀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녀의 저격능력도, 발할라의 부관이라는 역할도, 그리고 오르카호에서의 유일한 발키리라는 자리도, 그리고 사령관의 총애를 제일 많이 받은 존재라는 것도 한 순간에 한낱 먼지덩어리처럼 사라지게 되었다. 그녀는 사령관의 사랑 앞에서 잊고 있던 것, 즉 그녀 스스로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제서야 다시 알게 되었다. 그래도 그녀는 아직 마지막 희망을 잃지 않았다. 

"저. 3개월 전 알비스와 안드바리가..."

남은 희망은 발할라와의 추억이었다. 겉은 냉철해보였지만 속은 따듯한 레오나, 항상 귀엽지만 사고뭉치인 알비스, 매일 창고에서 고생하던 안드바리, 다이어트를 시도하고 실패하고를 반복하는 님프, 기계를 좋아해서 항상 탑돌을 데리고다니던 그렘린, 비관적이지만 그래도 착한 샌드걸, 그리고 알비스를 매일 혼내던 베라와의 추억들이 존재한다는것은 그녀의 하나 남은 존재의의가 되었다.

"어. 사령관실 앞에서 싸웠었죠."

하지만 이미 본인의 기억 모듈은 새로 만들어진 발키리도 가지고 있었다. 새 발키리가 별 생각없이 뱉은 말에, 원래 발키리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모두 잃고, 결국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새 발키리는 순식간에 발할라에 적응하였다. 그동안 원래 발키리는 정신을 놓은듯 움직였다. 자신이 한낱 대체품에 불과하다던 사실은 결국 그녀를 괴롭혔다. 그래서 그녀는 어느 순간 그 고통을 잊으려 했고, 결국 본드에 빠지게 되었다. 이는 그녀가 아무도 없는 시커멓고 차가운 방바닥에서, 홀로 누워있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