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리콘 511호는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저 멀리 소와 목장이 보이는 푸른 들판에 서 있었고, 옷도 늘 입는 타이즈형 전투복이 아니라 한번도 입은 적 없는 사복 차림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뒤에서 부르는 이가 있었다.


"레피. 뭐 해?"


어디서 들어본 듯한 남성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니 뜻밖에도 사령관님이 서 있었다. 그녀 같은 일개 보병장은 항상 스크린이나 연병장 먼발치서나 뵐 수 있던, 오르카호 저항군의 총 사령관이자 세계 유일의 인간 남성이었다.


어째서 이 분께서 내게 말을 걸어 주시는가. 레프리콘이 영문을 몰라 얼떨떨하게 서 있으니, 남자는 씩 웃으며 그런 그녀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가자. 가만 있으면 아까운 시간이 흐른다고."


어리둥절했지만, 그녀로서는 하늘보다도 높은 분이 이끄는 대로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제 보니 남자뿐만 아니라 그녀가 눈을 마주치기도 힘든 존재가 둘이나 더 따라온 참이었다.


일행은 얼마 가지 않아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다다랐다. 남자를 따라온 경호실장 블랙 리리스가 돗자리를 폈다. 레프리콘은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도 반사적으로 리리스를 도왔다. 만년 하급자로서 몸에 밴 태도라고나 할까.


"뭐 해, 앉지 않고."


식사 준비를 마치자 남자가 웃으며 레프리콘에게 권한다. 레프리콘은 우물쭈물하며 남자와 경호실장 그리고 무적의 용을 번갈아 보았다.


"그, 그렇지만 제가 같이 앉아도 될지."


"뭘 그리 눈치를 보는가. 어서 앉도록 하게. 오늘은 자네의 날이야."


모든 레프리콘들이 존경하는 참모총장인 무적의 용이 친히 앉도록 권하고, 경호실장까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프리콘은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남자와 같이 식사를 하게 되다니 일생일대의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 황송하게도 무적의 용과 경호실장은 남자의 가장 가까운 자리를 레프리콘에게 권했다. 저항군 수뇌부가 일개 상병에 불과한 자신에게 지나치리만큼 친절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 투성이었다.


"레피. 받아. 다리 부분이 맛있다고."


높은 분들과 마주 앉아서 밥이 넘어갈 리 없었다. 자리가 불편한 와중에 남자가 로스트 치킨 다리 부분을 건넸다. 레프리콘은 눈치를 살피다가 감사히 받아서 베어물었다.


남자가 먹는 음식이라도 배식으로 나오던 로스트 치킨과 크게 다른 맛은 아니었다. 도시락이라서 그런 것인가. 레프리콘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레프리콘을 제외한 모두가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어째서인지 남자는 물론이고 무적의 용, 경호실장까지 레프리콘에게 있던 일을 소상히 알고 화젯거리로 삼았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중대 게임 대회에서 이겨 가던 중에, 브라우니가 실수해서 지지 않았던가?"


"호호호. 그때 중대 분위기 참 나빴던데. 레프리콘 양도 고생이에요."


"이거 이거, 브라우니 군기 좀 잡아야 하는 거 아니야?"


"아, 하하…… 그, 그렇습니다."


레프리콘은 어색하게 웃었다. 언제부터 자신의 주변사가 이런 높은 분들에게까지 알려진 걸까.


대화가 잠시 끊어질 무렵 남자가 레프리콘에게 또 로스트 치킨을 건넸다.


"레피. 받아. 다리 부분이 맛있다고."


레프리콘은 의아한 듯한 눈으로 사양했다.


"아, 괜찮습니다. 저도 다리 부분 먹었습니다."


"레피. 받아. 다리 부분이 맛있다고."


그녀는 뭔가 이상했지만, 계속 주는 걸 거절할 수도 없어서 다시 받아먹었다.


기묘한 위화감이 드는 찰나에 무적의 용이 다시 게임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중대 게임 대회에서 이겨 가던 중에, 브라우니가 실수해서 지지 않았던가?"


"호호호. 그때 중대 분위기 참 나빴던데. 레프리콘 양도 고생이에요."


"이거 이거, 브라우니 군기 좀 잡아야 하는 거 아니야?"


레프리콘이 불현듯이 눈을 들어보니, 남자와 용과 리리스 모두 방금 전과 똑같은 말,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게 아닌가.


머리가 식은 그녀는 일행을 찬찬히 뜯어보던 와중 무언가 확실해진 것이 있었다.


아아, 바로 그런 거였구나. 어쩐지 머리 한 구석이 뿌연 것 같더니만.


이건 역시 꿈이었다. 정확히는 가상 현실이라고 해야 되었다.


그리고 레프리콘이 그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돌연, 눈앞이 캄캄해지며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캡슐에서 일어나 HMD를 벗어 보니 바로 선실 안이었다. 레프리콘은 사복이 아닌 일과용 체육복 차림이었고, 주변에 놓인 캡슐들엔 다른 대원들이 HMD를 쓰고 잠들어 있었다.


"아하하……."


그녀는 헛웃음지었다. 그녀와 남자가 피크닉을 떠난 것도, 존경하는 무적의 용과 경호실장 등이 그녀에게 잘해준 것도, 높은 분들이 그녀의 일상을 안 것도 결국 가상현실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레프리콘이 허탈한 기분으로 HMD를 살펴보고 있으려니, 기술사관인 포츈 6호가 다가왔다.


"괜찮니? 방금 전에 오류가 있었거든? 강제 종료하긴 했거든."


"아…… 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면 좋겠거든."


"……."


포츈이 HMD를 들고 잠시 나갔다 오더니, 새걸로 바꿔주었다. 레프리콘은 다시 가상현실에서 남자를 만났다.



* * * *



오르카호에서 시범적으로 운영되는 가상현실 캡슐방은 장병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인간처럼 바이오로이드 역시 내밀한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어 하는 것이다. 특히, 갑갑한 일상을 반복하는 대원들에겐 도피처로 더욱 안성맞춤이었다.


레프리콘 511호 역시, 가상현실 기기에 접속하는 것이 새로운 일과가 되었다.


전에는 자유 시간에 로맨스 소설이나 영화 따위를 보는 게 전부였지만, 가상현실은 그런 대리만족과 차원이 달랐다. 하루에 몇십 분만 쓰더라도 오랜 시간을 보낸 듯한 기억이 머리에 생생히 남는 것이다.


그녀는 40km 전력질주와 PT체조 8시간과 같은 체력 단련이라든가, 쉴새 없이 벌어지는 모의 전투 훈련, 각종 준비태세 점검 등으로 고단한 와중에도 머리에는 가상현실이 떠나지 않았다.


아니, 때로는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정말로 그것이 가상일까. 어쩌면 이 오르카호의 군생활 자체가 꿈은 아닌 것인가.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인류가 모두 멸망한 수십년 뒤 침략해온 금속 생명체들과 전쟁 중이란 이 상황이, 정말 현실인 것일까.


레프리콘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퍼뜩 놀라거나, 멍해지곤 했다.


"이봐, 상병!"


훈련을 지휘하던 임펫 상사의 말이 귓가를 때렸다. 멍해져 있던 레프리콘은 정신을 차리고 차렷 자세를 취했다.


"상병 레프리콘!"


"왜 그러고 서 있어. 어디 아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임펫은 레프리콘의 얼굴을 살폈다.


"……힘들거나 아프면 바로 말해라. 넌 우리 중대에서 제일 성실하니까. 조금 힘 빼고 해도 괜찮아."


"감사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레프리콘은 버릇처럼 FM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일과를 마치고 씻자마자 곧장 가상현실 체험기로 달려갔다. 


가상현실에서는 어떤 걱정도, 힘든 일도, 부조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덕분에 그녀는 그 세계가 진짜 현실이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많아졌다.


현실에서는 언제나처럼 판에 박힌 일상이 계속되었다. 외부 경계 근무를 설 때도, 힘겨운 체력 단련 시간에도, 후임병 탓으로 단체기합을 받는 중에도, 레프리콘은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도 레프리콘이 가상현실 체험방으로 들어오는데, 카운터에 있던 포츈이 문득 불러 세웠다.


"얘. 레피야."


"네? 무슨 일이십니까?"


"그, 체험방은 오늘이 마지막이거든. 그동안 이용해 줘서 고마운 거거든."


"엣, 어째서입니까."


"그게. 너도 그렇지만 애들이 하도 가상현실 체험기에 매달린다고, 클레임이 많이 들어온 거거든. ……지도부에서 내린 명령이니까. 체험은 오늘까지만이래."


"그런……."


"미안해. 하지만 언니도 어쩔 수 없는 거거든."


포츈도 미안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레프리콘은 아쉬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HMD를 쓰고 캡슐 안에 들어갔다. 마지막 날인 만큼 더 충실히 즐기면 되겠지.


이윽고 정신을 차려보니 초원에 서 있었다. 저 멀리 목장이 보이고, 소가 풀을 뜯고, 풍차가 보이는 풍경. 레프리콘이 가상현실에서 남자와 첫 피크닉을 왔던 바로 그 장소였다.


레프리콘은 어쩐지 멍한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것도 그때와 같았지만,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


"뭐 해?"


돌아보니 사령관 각하 - 남자가 서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레프리콘은 얼굴을 붉혔다.


"가자. 오늘은 할 이야기가 있어서 수행원도 물렸어."


"네. 잘 부탁드립니다."


레프리콘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남자의 손을 잡고 따라갔다. 기분이 점점 들떠왔다.


나란히 풀밭에 앉은 둘은 사소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었다.


레프리콘은 머리 한 구석이 멍한 채로,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사실 이야기는 대부분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이 기분 좋은 나른함 속에서 머무르고 싶었다.


이야기가 잦아들 무렵 남자가 문득 무언가를 꺼냈다.


"레피…… 있잖아. 나 할 말이 있는데."


레프리콘은 남자가 꺼낸 작은 상자를 보았다. 이에 그녀는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이윽고 상자가 열리니, 반지가 드러났다. 그 전설처럼 내려오는 서약의 반지인 게 틀림없었다.


"내 마음을…… 받아 주겠어?"


레프리콘은 목이 메어왔다.


"가, 각하.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될는지."


"왜 안돼."


"하지만 전 고작."


"신경쓰지 마. 그런 건."


남자는 레프리콘을 따뜻한 눈길로 응시했다. 이에, 레프리콘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용기를 냈다.


"그럼 각하.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말해 봐."


"각하와, 계속 함께 있어도 되겠습니까?"


"그럼."


레프리콘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꿈이라도 좋으니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하고 바랬다.


그녀는 자기 머리색만큼이나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중얼거렸다.


"그, 저어. 그렇다면, 키스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싱긋 웃은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레프리콘의 뺨에 키스를 했다.


이윽고 모든 것이 하얗게 물들었다.


순간, 레프리콘이 들어간 캡슐에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캡슐 바깥으로도 보일만치 큰 불꽃에 이어 연기가 올라왔다.


포츈은 깜짝 놀라서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녀는 구조 요청을 울리는 동시에 얼른 전원을 내린 뒤, 캡슐을 긴급 개방했다.


"아아, 어쩌면 좋아!"


잠든 대원들이 투덜대며 하나둘 깨어났다. 캡슐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얼른 HMD를 벗기니, 레프리콘 511호는 세상 편한 모습으로 의식을 잃고 있었다.


이때 레프리콘의 얼굴은, 무척이나 편안하고 행복한 미소로 가득했다.



* * * *



레프리콘이 눈을 뜨자, 수복실의 하얀 천장이었다.


일전에 전투하다 다쳐서 실려온 적도 있어서 전혀 낯선 장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왜 수복실에 누워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는 그때 찌릿한 두통이 파고들었다. 윽- 참을성 강한 그녀도 신음할 만큼 머리가 아팠다. 철충의 기관포에 스쳤을 때도 이 정도로 아프진 않았다.


레프리콘이 이마를 싸매자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돌아보니 자신의 직속 상관인 임펫이었다.


"상사님……."


"고맙다. 깨어나 줘서."


눈시울이 붉어진 임펫이 레프리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리둥절해진 레프리콘은 정신을 잃기 전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별로 생각나는 게 없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전…… 가상현실 기기를 쓰려고 캡슐에 들어갔었는데."


"아아, 그게 말이야. 하필이면 네가 쓴 기기에서 고장이 나서…… 자칫 잘못하다간 뇌를 다칠 뻔했다지 뭐야."


"예? 그게 정말입니까?"


"아, 제가 말씀드릴게요."


뒤이어 간호사인 다프네가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레프리콘은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야 가상현실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죽을 뻔했다는 말도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간 가상현실 속에서 겪은 기억도 모두 사라진 모양이었다. 뇌에 충격이 가해진 탓이라 했다.


이야기를 마친 다프네가 임펫에게 눈짓한다. 임펫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참. 널 보고 싶어하는 분이 계시더라고. 이번 일을 사과할 겸 해서 오신대."


"예?"


임펫은 미소를 띤 채 일어서서 수복실을 나섰다.


레프리콘이 어리둥절해 하다가, 두통 때문에 다시 누운 그때였다.


이번에는 수복실 안으로 사령관 각하가 들어섰다. 레프리콘은 놀라서 얼른 일어나려고 했지만, 또다시 두통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아아, 가만히 있어도 돼.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들었어."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레프리콘 옆에 앉았다.


수복실에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레프리콘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저, 사령관 각하……."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내 불찰이야."


"예?"


"그거 때문에 네가 죄없이 죽을 뻔했으니 말이야. 미안하다."


남자는 그러면서 고개를 숙였다. 이러자 주변의 경호원들은 물론 레프리콘까지 놀라서 허둥지둥했다.


"아, 아니. 전 괜찮습니다. 이러지 않으셔도……."


"자세한 이야기는 다프네한테 들었겠지만, 무사해서 다행이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각하."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안 괜찮았으니 이러지. ……그러니까, 음. 그 보상이라긴 뭣하지만. 오늘은 옆에 있어줄게."


레프리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정을 취해야 되니까 어디 데려가 줄 순 없지만, 옆에 있어줄 순 있어. ……아, 혹시 다른 원하는 게 있으면 이야기해도 좋아. 일테면 휴가라든가……."


"아, 아닙니다! 저는 사령관 각하께서 곁에 계셔 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 아얏." 레프리콘은 부동 자세를 취하려다 또 이마를 짚었다.


"어허. 안정을 취하라니까. 페로, 먹을 것 좀 가져다 줘. 얘 좋아한다는 책이라든가 다른 것도."


"알겠습니다."


레프리콘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노릇으로 남자를 살펴 보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미안함 섞인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어쩐지 그의 눈빛이 낯익다고 생각했지만, 어디서 그와 만났는지까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착각한 것이려니 했다. 설마, 자신 같은 하급 보병이 남자와 자주 만났을 리 없지 않은가.


아마도 이 또한 꿈 같은 일이고, 다시는 오지 않을 행운이라고 레프리콘은 스스로를 설득시킬 따름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남자는 가상현실 체험기 개조를 담당한 마키나와 닥터, 포츈 등을 모조리 견책했다. 마키나의 환상 장치를 안전하게 개량했다고 자신하던 제작진은 묵묵히 혼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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