썼던 것 모음 : https://arca.live/b/lastorigin/31751038




피드백 환영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


"허어..."


나는 레오나가 구상한 테스트 로드맵을 보고 경악했다. 테스트 개요 자체는 3층 남짓한 폐건물을 수색하는 간단한 임무였지만, 그 안에 있는 철충들의 구성이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오이칙에, 스펙터에, 어휴... 되게 빡빡하네?"


연결체가 포함된 야전에서도 쉽게 보지 못 할 조합. 그나마 야전에서는 지휘 개체들의 전술 보조와 공중 병력들의 압도적인 화력 투사로 극복할 수 있었겠지만, 테스트 장소는 건물 안이었다. 함내 모든 부대원들을 차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작전 짜느라 머리 좀 아플 조합인데, 이 조합을 예비 부대원들로만 상대하라니.


"아무리 테스트 기획에 자율권을 부여하기는 했지만, 이건 너무한데."


"그러게요. 레오나씨답지 않게 감정적이네요."


레모네이드 알파가 커피를 가져다주며 내 말에 동의했다.


"어쩌면, 그만큼 제임스 씨가 가지는 영향력이 크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요. 레오나 대장 뿐만 아니라 다른 대장들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제임스씨를 경계하고 있잖아요?"


"그건 그렇지."


나는 제임스 씨의 처분에 대한 회의를 했을 때, 그리고 테스트 직후 테스트실을 나서는 제임스씨를 바라보던 지휘관들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 표정들 아래에 무슨 감정들이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순 없었지만, 그 감정들이 제임스씨에게 부정적이라는 건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만약 제임스씨가 이번 테스트에서도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지휘관들이 가만있진 않을텐데요."


"그렇겠지, 아무리 과거의 기억들을 잊어버렸다해도 멸망 전 인간이라는 꼬리표는 함내에 불안감을 가져다 줄 꺼고, 여차하면... 내쫓아버리자는 이야기도 나올 수 있을꺼야."


"주인님께서는..."


알파는 잠시 말을 아끼더니,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임스 씨를 함내에서 내보내는 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조심스럽게 꺼낼 수 밖에 없는 주제에, 난 조심스럽게 답했다. 혹여나 누가 들을까봐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서.


"제임스 씨가 안 나갔으면 좋겠지, 난."


"그런가요?"


"일단 인류를 부흥시킨다는 우리들의 목적에는 남자가 한 명일 때 보다는 둘이 여러 방면에서 나을테고, 일하는데 있어서 내 일을 분담시켜줄 수도 있겠지. 전술에 대한 이해가 다소 부족하다면 그건 배우기만 하면 해결되는거고. 게다가..."


나는 마지막 이유를 말하기 전,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 사람이랑 남자들만이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


알파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결코 가벼운 이야기도 아닌데, 이런 이야기는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으니까.


"혹시 저희와 같이 지내면서 뭔가 부족했거나 말 못할 불편함이 있었나요?"


"어? 아냐아냐, 그런 의미가 아니고... "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머리를 굴렸다. 이 애매모호한 걸 어떻게 오해 없이 설명하지?


"어... 너희들도 내가 없을 때만 서로 나누는 이야기가 있을 거잖아.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얻는 감정이나 경험 같은 것도 있을거고. 물론 너희들이랑 같이 지내면서 행복한 건 맞지만, 동성 친구 사이에서 나눌 수 있는 대화라든가 경험은 할 수 없었잖아. 난 제임스 씨가 내게 그런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런가요..."


알파는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냥 제임스 씨에게 일 맡겨놓고 놀고 싶으신건 아니고요?"


"그... 것도 아주 거짓말은 아닌데, 그것만이 제임스 씨를 함내에 남길 이유는 아니라 이거지."


나는 알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제임스 씨가 우리가 발견한 마지막 멸망 전 인간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멸망 전 인간을 만나고 함내에 들일수도 있어. 지금 이렇게 제임스 씨를 그대로 내보내버리면 우리는 혹여라도 나중에 발견할 생존자와 대화하고 공존하는 법을 배울 기회를 잃어버릴지도 몰라. 내가 멸망 전의 그 쓰레기들을 존중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제임스 씨는 그 사람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잖아."


"그러니, 조금은 더 지켜보고 같이 생활하고 싶으시단 말씀이신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알파는 작은 끄덕임으로 내 주장을 받아주었다.


"아주 일리가 없는 말씀은 아니에요. 위험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신중히 지켜보기로 결정하셨다면 그 위험을 감수해보도록 하죠."


알파는 마치 수면을 휘젓듯 허공에 손을 저었다. 그러자 홀로그램으로 된 패널이 떠올랐고, 그 앞에 레오나가 제출했던 테스트 장소가 떠올랐다.


"그래도 괜히 목소리가 커지면 귀찮아질테니, 조금 손을 써 두는게 좋을 것 같아요."


그녀의 손길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테스트장과 철충들, 알파는 작업에 열중하다 말고 나를 돌아보았다.


"정말로 허락하시는거죠, 주인님?"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


"두 번째 테스트 말입니까...?"


사령관의 호출을 받고 찾아간 나에게 떨어진 그 말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응, 저번 회의에서 제안된 것처럼 레오나 대장이 테스트 로드맵을 구상했어. 이번 테스트 결과에 따라..."


사령관은 열심히 다음 테스트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지만, 나는 사령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테스트라는 말에 잔득 움츠려들어있을 뿐. 또 테스트를 본다고? 저번에도 그렇게 곤혹을 치뤘고 아직 해결도 못 봤는데, 어떻게 해야하지? 이번에도 기준에 미달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한기가 온몸을 움츠려뜨렸고, 손끝이 떨려왔다. 나름 최전선에서 많이 굴러서 더 이상 지휘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실패는 여전히 두려웠고, 단지 성공이 너무 익숙했을 뿐.


당연히 이 네 모습을 사령관이 못 볼리 없었다. 그는 떨리는 내 손 끝을 보고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의자를 끌어와 내 옆에 앉았다. 뭘 하려는가 싶어 멀뚱멀뚱 그 모습을 쳐다보는 나의 손을 꼭 잡아주는 사령관.


"제임스 씨, 내 눈 봐요."


나는 턱을 들어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굳은 의자가 엿보였다.


"불안한 거 알고 있어요. 지금 지휘관들이 제임스 씨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고 있고, 이번 테스트로 제임스 씨의 거취가 결정될 수 있으니까요. 심하면 이 잠수함에서 쫓겨날수도 있을거에요."


쫓겨날 수 있다. 그 말에 가슴이 턱, 막혀왔다. 철충들이 득시글거리는 밖으로 쫓겨난다는 건 사실상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 내 속을 아는지, 사령관의 다른 손이 내 손 위에 겹쳐졌다.


"하지만 난 제임스 씨를 믿어요. 저번 테스트에서 제임스 씨가 보여준 전술은 분명 대충 끼워맞춘 임기응변이 아니라, 제대로된 작전 교육을 받은 사람의 전술이라는 걸 확인했어요. 저번 테스트에서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이번 테스트에서 실패하란 법은 없잖아요, 안 그래요?"


사령관은 나를 격려하며, 테스트장으로 나를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마치... 거기에 나를 위해 무언가 선물을 준비해 놓은 것처럼.


"저번에 보여주지 못 했던 모습, 이번에 보여주면 돼요. 알겠죠?"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그가 힘내라고 말하며 어깨를 툭 친 것을 신호로 사령관실을 나왔다. 내 손에는 위쪽에 테스트 조건-각 부대 당 한 명씩만 차출해서 해결할 것-이 적혀 있는 포스트 잇이 붙어있는, 다음 테스트와 관련된 자료가 담긴 테블릿이 들려있었다.


"하아..."


이렇게, 나는 좋든 싫든 다시 한 번 시험받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눈을 감고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마치 물 없이 쌓은 모래처럼 바람에 흩어지고 날아가려는 마음을 다잡으려는 것은 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다잡지 않는다면 그 모래들은 다 날아가고 바닥에 후회라는 글자만을 남길 것을 알았기에,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잡고 테스트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실패는 다시 딛고 일어설 수 있다면 완성되는게 아니니까.


그건 그렇고, 사령관은 왜 이렇게 나를 신경써주는 거지?

설마... 사령관의 취향이 그 쪽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