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 https://arca.live/b/supernerimk2?category=%EC%86%8C%EC%84%A4&target=title&keyword=%EC%A1%B0%EA%B8%88+%EC%9D%B4%EC%83%81%ED%95%9C


모음 : https://arca.live/b/lastorigin/207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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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 ...”

 

 

 

아냐고? 당연히 알지.

오히려 모를 리가 없는 아이였다.

게임 속에선 몰라도 게임 외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아이였으니까.

 

나름 열심히 얀데레 컨셉을 잡으려고 하지만 이마에 키스 한 번 받으면 쓰러지는 순수한 아이.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좋다고 안겨오던 작은 요정 같은 아이.

그 묘한 갭을 좋아하지 않았던 플레이어는 단 한 명도 없었으리라 자신할 수 있다.

 

 

 

“... 알지. 아는데 갑자기 왜...”

 

“그럼 혹시, 그 아이의 얼굴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얼굴이라면... ...

...

... 그래. 봤지.”

 

 

 

내가 이 함선으로 처음 빙의했을 무렵,

나를 경멸과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던 수많은 아이들 중 리제가 섞여 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날의 트라우마, 더치걸의 가죽으로 장식됐던 비밀의 방에서의 기억이 아직까지도 씻겨지지 않고 남았던 탓인지, 유독 리제의 그 새빨간 눈동자가 뇌리에 박혀 있었다.

 

하지만 마치 들으면 안 될 말을 들었단 듯이, 레아가 화들짝 놀라며 내 말을 끊었다.

 

 

 

“보셨다고요?!

어, 언제 보셨죠...?”

 

“옛날에.”

 

“아...

... 그럼 혹시 옛날이라고 하면...”

 

“리리스도 나를 믿지 못했던 아주 먼 옛날.

거의 초창기였다고 봐야겠지.”

 

“... ...”

 

 

 

뭔가를 기대했던 것 같은 레아의 눈빛에서 희망이 씻겨져 나간 듯했다.

잠시 의자에 앉아 천천히, 고개를 떨군 채 바닥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레아를 보고 심상치 않은 뭔가가 있음을 직감했다.

 

난 고개를 돌려 내게 안겨 있는 리리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이제 뭘 말할 건지 알고 있는 듯이 리리스는 심하게 떨었다.

그런 리리스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어주자, 리리스의 얼굴에 자그마한 평화가 찾아왔다.

 

 

 

“리리스.”

 

“... 시, 싫어요... 주인님하고 떨어지는 건...”

 

“아주 잠깐이야.”

 

“그... 그러다가 또 다치시면...”

 

“괜찮아. 괜찮아.

안 다치게 조심할게.”

 

“... ...”

 

“설령 다치더라도 바로 리리스한테 달려올 테니까, 이번 한 번만 꾹 참아보자.”

 

“... ... 주인님...”

 

“그래, 그래. 착하지.”

 

“주인님... 주인님... ...”

 

 

 

리리스의 가장 커다란 피해 망상 중 하나는 내가 자신의 품을 떠나면 인격이  뒤바뀔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내 의식이 사라졌을 때도 누구보다 내 옆에서 자리를 지켰고, 내가 다치고 나서도 어느 누구보다 마지막까지 수복실의 불빛을 지켰다.

그 모든 게 전부, 내가 사라질까 봐 하는 걱정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한 번만 더 나를 믿어줘. 리리스.

난 절대로 널 어디 두고 가지 않을 테니까.”

 

“... ...”

 

 

내 진심이 통했던 걸까, 리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내 무릎에서 떨어졌다.

내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있던 것을 보니, 또 속으로 삼키지 못한 눈물이 떨어졌던 모양이다.

그러는 모습이 참을 수가 없이 애처로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건 이렇게 쏟아내지 않으면 절대로 극복하지 못할 정신병이니까.

 

 

 

“주... 주인님...

이번... 진짜 이번 한 번만 더 믿어볼 게요...

믿기 싫지만 리리스는 착한 리리스니까... ...”

 

“... 그래. 고맙다.”

 

“...

... ... 그럼 이만...!!”

 

 

 

눈을 꼭 감은 채, 리리스는 내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네고 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우아하다거나, 리리스다운 기품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러는 것이 더 솔직한 것이라 느껴져 나도 시린 가슴을 조금은 진정시킬 수 있었다.

 

혀 끝이 바싹바싹 마르듯이 초조해진다.

이는 애석하게도 내가 리제의 성격을 이미 잘 알고 있던 탓이리라.

리리스 못지 않게 주인님을 향한 집착을 보이는 리제. 그 아이가 여기서 무엇을 겪었든 정상적인 것은 아닐 것임을 속으로 잠잠히 생각해 봤다.

부디 이 아이가 당한 일을 들었을 땐 이미 내 마음이 준비되어 있길 바라며.

 

 

 

“... ...”

 

“리리스는 이제 갔어. 레아.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편하게 말해도 괜찮아.”

 

“... ... 고맙습니다... 주인님...”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레아도 리리스와 같이 커다란 눈물을 눈썹 끝자락에 모아두고 있었다.

단 한 마디만 더하면 떨어질 듯한 아슬아슬함 속에서 레아는 눈물을 손으로 훔쳐 추하게 떨어지는 것을 막아냈다.

저것도 맏언니로서의 자세였던 걸까, 리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레아의 입에서 굳건한 결의가 돋보였다.

 

 

“... 리제는...

... ... 리제는 죽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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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았다?

안심하라 하는 말인 걸까? 

왠지 모르게 그 말 한마디가 등골을 차가운 칼로 저미는 듯했다.

 

 

 

“... 죽지 않았다고?

갑자기 그게 무슨...”

 

“... 아니, 이것부터 이야기하도록 하죠.

리제는 착한 아이였어요.

어쩌면 제가 그 아이의 언니였기에 그렇게 보였던 것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리제는 정말 착한 아이였어요.

... 어리석을 정도로 착하기만 한 아이였죠.”

 

“... 무슨 뜻이야?”

 

“리제는... 언제나 자신의 주인님의 총애를 원했어요.

가끔은 언니인 제가 보기에도 조금 섬뜩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아이였죠.

주인님을 위해서라고 자신의 손을 자르고, 피로 바다를 만들고, 다리를 잘라 벽 한 쪽 면을 장식했을 정도로요.

...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요.”

 

 

 

레아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조금씩 굳어가는 내 얼굴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이야기.

내가 오기 전, 이 지옥이 어떻게 그 질긴 생명줄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건지, 그에 대한 이야기였으니 그러는 것이 당연했다.

 

 

 

“리제는 양산형 모델이었어요.

저희 페어리 대부분이 그렇긴 하지만, 리제는 조금 유별났죠.

자신이 어떤 등급의 바이오로이드인지와 무관하게 주인의 사랑을 갈구하게 만들어졌으니까요.

좋게 말하면 사랑을 원했던 거고, 나쁘게 말하면... 주제 파악을 못 하는 아이죠.”

 

“그게 뭐가 나쁘다고...”

 

“... 인간분들은 다들 그러시죠.

고급 바이오로이드가 자신을 따르기를 원하긴 하지만, 저급 바이오로이드의 욕망 따위는 알 바가 아니라고.

멸망 전에도 대부분의 리제는 부자들을 위한 정원사라기보다는 그저 대형 시설관리용으로 만들어졌어요.

그러니 누가 주인인지, 하물며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인간 분이 존재하기나 하는 지, 어느 것 하나 알 수가 없었죠.

...

그냥 원했던 거에요. 누군가가 자신의 주인이길.

그러지 않게 말렸어야 하는데...”

 

“... 왜 그래. 안색이... ...”

 

“... ...”

 

“레아?”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레아가 미친 듯이 손을 떨었다.

기대고 있던 테이블이 흔들릴 정도로 강렬하게 떠는 레아는 내가 그 손을 잡아주자 천천히 호흡하며 원래의 맥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괜찮아?”

 

“... ... 주인님.

...

... 주인님이라면 이미 아시겠죠.

이전 사령관님이란 인간이 그런 리제를 어떻게 대했을 지...”

 

“...”

 

 

 

부정하고 싶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악행이 기록물 보관소에 쌓여 있다.

익숙해질 때까지, 보고서 종이에 베인 상처가 곪아 진물이 날 때까지 일고 또 읽으면서 나도 이젠 경험이 생겨 버렸다.

 

감히 인간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바이오로이드.

그러면서 고작해야 양산형 모델인 싸구려 바이오로이드.

그 개새끼 앞에서 이 둘이 결합되었을 때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지는 너무도 뻔한 것이었다.

 

 

 

“리제는... 주인님을 너무나 사랑했어요.

그러면서 순수했죠. 자신의 고통까지 견뎌낼 정도로 순수하고... 사랑했어요.

보는 저희가 무서워 떨릴 정도로.”

 

“... 그럼 적어도 멀쩡하진 않았겠네...”

 

“... ... 그럴 수 밖에 없었죠.

팔이라면 팔, 다리라면 다리.

... 비밀의 방, 기억하시나요? 특히 그 문...”

 

 

 

기억하냐고? 어떻게 안 할 수가 있을까.

좆 같은 색종이로 꾸며놓았던 밖과 달리 마네킹 다리 같은 살덩이들이 피를 뚝뚝 흘리면서 아치를 이루고 있던 그 그로테스크한 것들.

지옥의 한 장면을 툭 때어다 논 것 같은 그 문짝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가 있었겠냔 말이다.

 

 

 

“그 문을 꾸몄단 다리 중 절반 이상은... 리제의 것이었어요.

그렇게 죽은 리제만 하더라도 수십은 됐었겠죠.”

 

“... ...

그래도 그 정도까지 했다면 리제도 정신을...”

 

“...”

 

 

 

레아는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물어보는 것은 그녀에게 너무 큰 상처가 될 것 같아 나는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 리제는 주인님의 사랑을 갈구했어요. 

언제나요.

... ... 언제나.”

 

“하지만 그 정도 일을 겪었는데 대체 어떻게...”

 

“망가져버린 거죠.

경호대장님처럼 몸이 튼튼했던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공장에서 뽑아낸 저급 모듈을 쓰는 아이였으니까요.

하물며 자원난에 허덕이던 이곳에서 만든 리제는 오죽 했을까요.”

 

“... ...”

 

“사랑해주지 않는 주인님.

그걸 받아들이기에 리제는 너무 약했어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설령 주인님이란 존재를, 사령관이란 자를 사랑한다고 해도 어느 순간이 되면 스스로 그 사랑을 포기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새끼에게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으니까.

 

하지만 정말로 그런 어리석은 아이가 있었다.

그 놈에게 자기 팔과 다리를 다 바쳐가며 그저 자신의 주인님이란 공백을 채워주길 바랬던 바보 같은 아이가 있었다.

그게 무슨 멍청한 짓이었는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힘들어 했던 아이가 있었다.

 

바보 같은 짓일 테니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현실을 직시하기엔 이 지옥은 리제에게 너무나 끔찍한 공간이었다.

 

 

 

“... 그럼 그 새끼는... 리제를 어떻게 한 거야...”

 

“... ...”

 

“정상적인 짓을 했을 거란 기대는 안 해.

... 무시하지도 않았겠지. 리제 성격 상 주인님이라고 매번 따라 다녔을 테니까.

팔, 다리도 자기가 직접 잘라다 바쳤다고 했으니 웬만한 고문도 다 당했을 테지...”

 

“...”

 

“나도 예전에 보고서로 봤던 적은 있었어.

애들 몸에서 나오는 피로 연못을 만들겠다는 계획서도 사령관 패널에 적혀 있었고.

그런 걸 계획했을 놈이 어지간한 걸 했을 거라곤 생각 안 할게.

레아도 그걸 말하고 싶어서 온 거잖니.”

 

“... ...”

 

 

 

당황하지 않겠다. 이 빌어먹을 곳을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곳으로 바꾼 지도 이젠 몇 달, 아니, 거진 년 단위의 시간이 지났다.

나도 이곳에서 충분히 성장했고, 그 놈이 했던 것에 놀라지 않을 만큼 익숙해져야 할 것에 익숙해졌다.

사령관이 알아야 하는 것들, 잊으면 안 되는 것들을 전부 기억해주기 위해 노력했고, 그 때문에 아이들도 내게 마음을 열었다.

 

죽은 아이들의 사진, 영상, 유언.

내 실수로 사지를 잃고 고통 속에 몸부림쳤던 이들의 비명.

잘리고 구더기가 들끓어 불어터진 살점 너머로 눈동자를 반짝이던 그 아이들.

 

이제 그 불쌍한 아이들을 향해 슬픈 마음을 감출 수 있을 만큼 나도 철이 들었다.

더 이상 예전의 그 문을 보고, 문 틈에 걸린 채 흔들리던 팔을 보고 놀라지 않을 만큼 스스로를 키워왔다.

그 팔의 주인들이 나를 보고 위안을 얻을 수 있게.

 

그러니 지금, 나는 리제의 이야기에서도 기 죽지 않으려 했다.

그랬다간 내가 그 아이를 봤을 때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것 같아서.

 

 

 

“... 주인님.”

 

“응.”

 

“주인님만큼... 이전 사령관을 잘 알고 계신 분은 없으시겠죠.

이리 말씀 드리는 건 싫지만, 그래도 주인님의 안에 그 인간이 들어가 있으니까...”

 

“그래. 나도 알고 있어.”

 

“그럼 그 인간이... 리제에게 어떻게 했을 지도 아실 수 있으신가요?”

 

 

 

레아는 떨리는 손가락을 품 안으로 숨기며 내게서 보이지 않게 하려 애를 썼다.

그런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나도 내 목구멍에서 꺼내고 싶지 않은 말을 억지로 끄집어냈다.

내가 말하는 게, 레아가 말하는 것보단 덜 고통스러울 테니까.

 

 

 

“... 그래, 그 놈이라면 어떻게든 다가오지 못하게 했겠지. 

팔을 자르든, 내장을 파먹든, 뭐든 해서.

아니면... 리제처럼 순수한 애들은 싫어했을까...?

아스널 같은 애들만 봐도 기 센 애들은 싫어하는 거 다 보이니까.”

 

“... ...”

 

“... 내가 너무 쉽게 말했니...?”

 

 

 

움찔거리는 레아의 모습 속에서 나는 내가 뱉은 말을 셀 수도 없이 되새김질 했다.

리제가 어떤 짓을 당했을까, 몇 마디 적혀 있지도 않았던 보고서를 계속 되뇌며 레아가 말할 차례가 오지 않도록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그 놈이라면. 그 놈이라면.

 

...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이상 떠올릴 수가 없었다.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그 아이가 웃는 미소에 먹칠을 하는 듯해서, 칼로 자르고 불을 지펴 재로 만드는 것 같아서 못하겠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나 상상력이 부족했던 사람이었나. 스스로 착잡한 마음을 혀를 씹으며 삼키고 레아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 주인님이 다 맞아요.

처음에는 그렇게 하셨죠. 

리제의 배를 날이 선 식칼로 저미고, 눈동자를 손으로 뽑아내고, 귀찮다면서 그냥 불 속에 집어 던져 버리고.

그리고는 그냥 새로운 아이를 만들어 버렸죠.

그 아이는 언제든 다시 만들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으니까...”

 

“... ...”

 

“... 하지만 주인님도 아시겠죠.

리제는 언제나 주인님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였답니다.

새로 만들어진 리제도 늘 똑같았어요.

제조 캡슐에서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인간에게 무작정 사랑을 갈구했어요. 그게 누군지도 모르고...”

 

 

 

익숙해져야 한다. 익숙해야 한다.

레아가 내게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도 전부 내게 기대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참아야 한다.

 

끝 없이 속으로 다짐하며 올라오는 헛구역질을 참아냈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눈동자 위로 참혹했던 그 때의 풍경을 띄워주는 듯했다.

아니, 그 때의 감정을, 경멸, 무시, 공포, 모든 것을 내게 쏟아내었던 아이들의 감각을 내게 각인시키는 듯했다.

 

그래도 참아냈다.

이 아이들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작정했으니까.

 

 

 

“... 그렇게 되다 보니 어느 날, 이전 사령관도 자신의 귀찮음보다 리제를 먼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래서 직접 고문하기 시작했어요.

비밀의 방에서 직접 만든 고문 기구들을 가지고 리제의 온 몸을 희롱했죠.

갈고리가 걸린 꼬챙이로 리제의 눈 아래를 찌르고, 콧구멍을 쑤셔 넣어 비강이 전부 피로 잠기게 하고, 질벽을 칼로 잘라내고, 나오는 피를 스스로 마시게 했죠.

...

...”

 

“... ... 하...”

 

 

 

참아야 한다. 당황하지 않기로 했잖아.

 

 

 

“... 하지만 불행하게도 리제의 애정 결핍은 그 아이의 목숨보다도 질겼어요.

온 몸이 핏덩어리가 될 때까지도 주인님께 사랑을 갈구했죠. 

자기 몸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누군지, 뻔히 다 봤으면서...”

 

“... 그게... 가능한 거야...?”

 

“... ...”

 

“... 

... 아냐. 계속해줘.”

 

 

 

저 상황에서도 주인을 찾아댔다는 그 말이 왜 이렇게나 마음 위로 쏟아지는 건지.

단 한 번 봤던 그 빨간 눈동자가 자꾸만 머리에 아른거렸다.

 

 

 

“... 그러다 보니 이전 사령관도 오기가 생겨버렸죠.

리제가 먼저 굴복하든, 자기가 먼저 포기하든, 둘 중 하나가 끝을 볼 때까지 해보겠다고 저희에게 엄포를 놓았어요.

모두 리제를 사랑하는 자매로 여겼지만,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을 꺼낼 수 있었겠나요.

아무 것도 모르고 방긋거리던 리제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조차 몰랐죠.

이미 뇌에 있는 모듈이 고통을 수용하지 못하고 터져버렸었거든요.”

 

“... ...”

 

“그렇게 하루, 또 하루.

... 계속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리제는 끝도 없이 죽어갔어요.

...

... 그 전에.”

 

 

 

그렇게 말하던 때에, 레아가 갑자기 뜬금 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주인님이시라면 바이오로이드의 제조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알고 계시죠?”

 

“어... 일단은...?

나도 제조실에서 나오는 애들을 보긴 하니까.”

 

 

 

각인 효과라는 말이 있지 않나.

맨 처음에 제조실에서 나오는 아이들은 자신이 따를 인간이 눈 앞에 있을 때 더 편안함을 느낀다.

그 때문에 제조 일정이 잡힌 날엔 나도 다른 아이들과 같이 제조실에서 처음 세상에 발을 디딘 아이들을 껴안아준다.

 

브라우니부터 시작해서 페로 같은 고급 바이오로이드까지.

캡슐 안의 안정제와 여러 가지 액체들이 찐득하게 묻은 살덩이들을 편안하게 쓰다듬어주다 보면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들이 먼저 내게 기대어 온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애처롭기도 하고 아릿한 냄새가 피어올라 나는 꼭 그 과정을 빼놓지 않고 한 명 한 명 전부 안아 옷을 매만져 준다.

 

그러니 제조 과정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지.

 

 

 

“보통... 자원을 집어넣고, 어쩔 때는 특정 모듈도 함께 집어 넣잖아.

그럼 안에서 자동으로 모듈을 프로그래밍 하고, 그 이후에도... 뭐, 있긴 하지.”

 

“... 잘 아시네요.”

 

“그래,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내가 레아에게 묻자, 레아가 의미 심장한 말을 건넸다.

 

 

 

“... 

... ... 모듈이 바이오로이드 안에 들어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에요.

자기 눈 앞에 자기랑 똑같이 생긴 존재가 돌아다니는데 그 모두를 자기라고 생각하면 생체 두뇌로는 감당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 그렇지. 닥터가 그런 말을 해주기도 했었어.”

 

“... 그럼 한 가지 여쭤볼게요.

... 과연 모든 바이오로이드가,

...

...

제조되는 모든 바이오로이드가 전부 서로를 남이라 생각할까요?”

 

“... 뭐?”

 

 

 

레아의 실없는 말에, 왠지 모를 오한이 솟구쳤다.

저 말이 지금의 맥락에서 대체 왜 나오는 건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 자기와 다른 누군가.

인간도 아니고 AGS도 아닌 바이오로이드에겐 너무나 어려운 개념이다.

나는 뭐고, 내가 아닌 건 누굴까.

나 같은 놈이 생각하기엔 너무나 철학적인 질문이라 그런 걸 생각하는 내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 나는 나, 남은 남. 보통은 그러는 게 기본이죠.

제가 다른 레아를 보고 저라고 생각하진 않으니까요.”

 

“그, 그러지. 근데 그게 왜...”

 

“...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다른 레아를 보고, 저라고 생각하는 방법이.”

 

 

 

장갑을 낀 손에서 검지 손가락을 들어, 레아는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바이오로이드에겐 기억의 저장을 담당하는 보조 모듈이 존재해요.

대부분은 생체 두뇌가 일을 하니 평소에는 말 그대로 ‘보조’ 모듈에 불과하죠.

하지만 거기에 약간의 개조만 거쳐주면 주기억장치로 바꿀 수 있어요.”

 

“... ...”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생체 두뇌가 필요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복잡하게 연결된 생체 두뇌에서 어느 한 부분이 사라지면 다른 부분에도 영향이 가니까요.

그러니까 쉽게 말씀드리면...”

 

 

 

틱.

 

레아의 손가락 끝에서 불꽃이 일었다.

한 뼘 정도 되어 보이는 불꽃은 이리 저리 일렁이며 활활 타올랐다.

 

 

 

“이게 보통의 두뇌라고 생각해보세요.

열심히 타오르는 불꽃은 활동하는 상태인 거죠.

근데 여기서...”

 

 

 

틱. 틱. 틱.

 

레아는 수 차례 손가락을 팅겼다.

처음에는 제법 크기가 있었던 불꽃이 더 사그라들더니, 이내 거의 보이지도 않는 수준이 되었다.

 

 

 

“이게, 보조 모듈을 주기억장치로 사용하게 되는 두뇌가 되는 거죠.

대부분의 기능과 영양분을 모듈에게 빼앗기면서 점점 영향력이 줄어드는 거에요.

물론, 불이 꺼지면 그 부분의 두뇌 기능도 함께 꺼지는 거고요.”

 

 

 

싱크대로 걸어간 레아는 그 작은 불꽃 위에 물을 부었다.

무자비하게 불꽃을 덮치는 물 세례에 붉은 기운은 속절없이 사라져버렸다.

 

 

 

“... ... 이게... 대체 뭐야?”

 

“... 결론은, 바이오로이드의 기억을 그 작은 모듈 하나로 전부 옮길 수 있다는 뜻이에요.

하나의 바이오로이드가 자기 평생에 걸쳐 기억했던 모든 기쁨, 슬픔, 분노, 희열.

그 모든 걸 이 작은 모듈 하나로 담을 수 있다는 거죠. 어느 정도 개조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근데 그걸 왜 지그... ...

...

... 어?”

 

 

 

아까 레아가 물었다.

같은 기종의 바이오로이드가 서로를 다른 존재라고 인식할 수 없게 만들 수 있을 지.

일반적으론 불가능한 일이다. 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갑자기 등골을 타고 한 가지 생각이 흘렀다.

저 기억 모듈을 주입한다면?

한 바이오로이드의 인생이 담긴 저 기억의 조각을 새로 만들어지는 아이에게 전달한다면?

 

 

 

“나와 다른 존재.

‘나’와 ‘나’가 아닌 존재를 구분하는 건 주인님껜 너무나 당연한 일이잖아요.

어쩌면 제가 너무 당연한 질문을 드리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네요.”

 

“... ...”

 

“하지만 바이오로이드는 그렇지 않죠.

피와 살, 뼈와 근육, 모든 것이 실험실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생산되죠.

고급 바이오로이드드 복잡한 규칙에 따라, 저급 바이오로이드는 간단한 규칙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에요.

저 역시 그렇고요.”

 

“...”

 

“그럼, 그 상태에서 질문을 바꿔보죠.

이렇게 모든 기억을 전수 받은 바이오로이드가, 

이전 바이오로이드의 삶을 타인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요?

그 두 삶을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가 구분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레아의 손이 다시금 파르르 떨렸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느끼던 오한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리제는, 죽지 않았어요.

그저 자신의 기억을 무한하게,

끝도 없이 계속 키워나갈 뿐이었죠.”

 

“... ... 그러면... 아까 팔 다리를 잘랐다는 건...”

 

“이전 사령관님은 늘 궁금해하셨어요.

리제라는 아이가, 주인님이라면 언제나 좋아해주는 이 착한 아이가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리제의 사랑은 팔 다리 조금 잘리는 것 정도로는 사그라들지 않았어요.

애초에 고급 모델도 아니었기에 이전 사령관의 고문을 견디다가 죽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게 애매한 고통으론 리제의 사랑을 끊을 수 없었죠.

 

그래서 저희에게 생각해내라 하신 거에요.

리제가 죽어도 죽지 않을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자기가 다시 고문하는 건 귀찮으니, 그걸 죽어도 다시 기억할 수 있게 만들어 오라고.”

 

“... ... 하...”

 

 

 

미친 놈.

 

 

 

“... 그렇게 해서 그 새끼가 몇 번이나 죽였는데.”

 

“...

... 100번은 넘었죠.”

 

“하하... 하...”

 

 

 

내가 과연 너를 무어라고 평해야 할까?

내가 너 같은 놈을 어떤 새끼라 칭해야 할까?

 

 

 

“하하하... ...

...”

 

 

 

미쳤다? 아니면 악마 같다?

아니, 고작 그런 단어로는 이 광기를 설명할 수가 없다.

 

대체 왜? 이젠 그냥 그것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대체 이 애들이 뭐를 잘못했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떠올린 거지?

아니, 대체 왜 그런 걸 떠올리라고 하는 거지?

 

 

 

“... ...”

 

 

 

기가 찬다. 정말 기가 차.

... 지친다.

 

레아가 내게 말을 걸었다.

대답해야 할 텐데, 그럴 기운이 나지 않았다.

 

 

 

“... 리제는 죽어서도 다시 깨어나 셀 수 없이 많은 고문을 당하고, 또 그 고통을 기억했죠.

43번째 회귀가 되어서는 말을 잃어버렸고, 68번째 회귀에선 주인님이란 단어조차 까먹어버렸죠.

127번째에서 시각, 미각 부분의 모듈이 회복 불가 판정을 받았고, 187번째에선 결국 죽은 인형처럼 변해버렸어요.”

 

“... ...”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

인형처럼 반응이 없어져 버린 때부터 이전 사령관님의 관심이 끊어져 버렸고, 그 틈을 타 저희는 리제를 살리려고 노력했어요.

물론... 평범한 방법으로는 살릴 엄두조차 못 낼 만큼 망가져버렸지만...”

 

“... 어떻게 했는데.”

 

“... ... 안정제를 치사량까지 주입하고, 그렇게 죽게 되면 다시 기억 모듈을 회귀시키고,

다시 안정제를 넣고, 수면제도 넣고, ... ...

...

... ... 그렇게 계속 무한히 반복했죠. 리제가 안정제에 익사할 때까지 말이에요.”

 

“... ...”

 

“... 저희의 행동이 바보 같았다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네요.

그냥 새로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 아니면 그 기억 모듈만 없애버리면 되지 않느냐,

그것도 안 되면 그 모듈 안의 내용만 슬쩍 바꿔버리면 되지 않겠느냐...

...

...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봤죠.

하지만 시간도, 자원도, 그런 걸 해줄 인력도 부족한 마당에 제 동생을 다른 누군가에게 넘길 수는 없었어요.

넘겨 받을 분들도 없었고요.”

 

“...”

 

“아니면...

... 저희도 그 기억 모듈이 리제라고 생각해버린 걸지도 모르겠네요.”

 

 

 

... 무한.

그건 그저 단어일 뿐이다.

무한한 고통이란 것도 결국 의미 없는 서술에 불과하다.

 

모든 고통의 가장 마지막 종착역은 죽음이다.

죽음은 살아가는 생명체에게 삶을 영위하게 하는 마지막 보루이고, 모든 고통을 견뎌내게 하는 최후의 방어선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죽으면 끝이니까.

 

... 하지만 그 죽음을 박탈 당했을 때의 기분은... 뭐라 설명해야 할까?

영원히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을 거란 절망에 빠지게 되면, 그걸 우리는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매에게 영원히 간을 쪼아 먹히는 프로메테우스, 끝 없는 언덕 위로 돌을 굴려야 하는 시시포스,

애초에 영원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는 이것을 신화라고 불렀다.

하물며 인간의 상상 끄트머리에서 펼쳐지는 장대한 소설에서조차 영원은 그저 단어에 불과하다.

그걸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누군가 그랬다.

100년에 한 번, 다이아몬드 산에 부리를 가는 작은 새가 그 산을 전부 깎아버릴 때가 되어서야 영원의 1초가 지난다고.

그렇다면 리제에게는, 몇 초나 되는 영원이 흘렀던 걸까.

 

 

 

“... 주인님께서 보셨던 건 197번째 리제였을 거에요.

그리고 주인님께서 그 아이를 보셨던 날, 리제는 저희에게로 도망쳐왔죠.

너무 무서워서, 주인님이란 사람이 너무 무서워서 홀로 열심히 날개짓을 해 날아온 거에요.

그러니... 아마 지금까지 그 아이를 보지 못하셨겠죠.”

 

“...

... 그럼 지금은 거기 있다는 뜻이지?”

 

“... 네. 이미 섬 안에 들어가 있을 거에요.”

 

“지금은 몇 번째야?”

 

“... 241번째요.”

 

“그 상황에서도... 

...

... 움직일 수는 있구나.”

 

“187번째부터 241번째까지 회귀시키면서 저희가 어떻게든 기억 모듈을 지워버렸으니까요.

... 더 나은 방법이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언니로서, 페어리의 맏이로서 레아는 말하는 와중에서 눈물을 흘렸다.

자기 동생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던 언니, 한 번도 아니고 54번이나 죽여야 했던 언니.

말하며 떨리는 말투 하나에서조차 동생을 아낀다는 것이 느껴지는데, 안정제에 리제를 빠뜨려야 했던 저 심정을 나는 감히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 ...”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은 누굴까.

그 아이들 자체일까? 아니면 그 아이들의 기억을 담고 있는 살덩어리일까?

쓸데 없는 정보들이 머리 속으로 미친 듯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들이 자꾸만 내 무릎을 꿇게 만든다.

 

... 아냐, 침착하자. 이제 당황하면서 말을 더듬기엔 너무 많이 봐왔잖아.

비밀의 방도, 앨리스 이야기도, 죽어가는 아이들의 사진도, 지겨울 만큼 봤고, 들었고, 생각했다.

씹고, 또 씹고,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죽어간 아이들을 이를 악 물며 내 머리 속에 집어넣었다.

다시는 어물쩡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한 시라도 빨리 그 애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그렇게나 나 스스로를 단련시켰는데, 이제 와서 다시 무너질 수는 없다.

내가 무너지는 거야 말로 이 개새끼가 가장 바라는 것일 테니까.

 

 

 

“... 떠올리기 고통스러울 거란 건 아는데, 지금 리제가 어떤 상황인지 말해줄 수 있겠니, 레아?”

 

“... ...”

 

“힘들다는 건 알아.

하지만 이렇게 내게 말해준 것도 뭔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 그런 거잖아.”

 

“... ...”

 

“원하는 게 뭔지는 물어보지 않을게.

그냥 내 생각대로 날 이용하면 돼.

내가 아는 레아는, 자기 동생을 끔찍이도 아끼는 둘 도 없는 언니니까.”

 

“... ...”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있던 휴지를 뽑아 건넸다.

팔랑거리며 흔들리는 얇은 휴지, 레아의 곁에 다가가기만 해도 파르르 떨리며 바람에 휘날린다.

 

레아가 자신의 눈물을 천천히 닦아냈다.

하지만 어차피 닦아도 닦아도, 안 지워질 것이란 걸 알고 있기에 그녀는 팔을 더 움직이지 않았다.

눈물에 반짝이는 파란 눈동자가 너무나 처량하게 보였다.

 

 

 

“... 리제는... 거의 모든 기억을 잃었어요.

자기가 누구였는지, 어디 소속이었는지, 자기 주인님은 누군지...

... 자기 언니가 누구인지.”

 

“... ...”

 

“... ... 제가 아끼는 동생이지만... 후회는 없어요.

저를 기억해주는 것보단 그 끔찍한 기억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라도... 그 때의 기억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

...

... 후회는 안 할래요.”

 

“... 수고했다.”

 

 

 

내게 소중한 누군가 나를 잊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행복하길 바라지만, 나 없이 행복해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슬프다는 것을, 우리는 전부 다 알고 있다.

죽은 브라우니들이 그랬고, 벽에 걸려 있던 더치걸들이 그랬고, 앨리스의 아이가 그랬으니까.

 

치매 걸린 할머니들도 꼭 그랬지 않나.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네도, 그 얼굴에는 자기 자식이 아닌 타인을 위한 미소가 서려 있다.

처음 보는 듯한 눈동자, 어색하게 움직이는 손, 그 모든 것이 나를 부인하는 듯한 것이, 그게 얼마나 서글픈 것인지,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지금의 레아가 그런 감정이지 않을까, 자기 동생에게 부정당하는 레아가 그런 기분 아니었을까.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이 입을 대신해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너무나도 슬프다고.

 

 

 

“... 그러니까 주인님께서 다가가셔도 괜찮을 거에요.

예전 기억은 거의 사라졌을 거고, 회귀의 부작용으로 어린 아이처럼 변해버렸거든요.

게다가 안정제에 익사하면서 계속 회귀했던 것 덕분에 기억 모듈이 다시 활성화되는 것도 막을 수 있었으니까요...

... 대신...”

 

“...”

 

“... ... 그 아이를 만지시면 안 돼요.

자기 몸에 살이 닿는 것만으로도 예전 기억을 떠올려 버리니까...”

 

“... 살에 닿으면 그렇다고?

그냥 살만 닿으면...?”

 

“... 어떤 유기물이든 몸에 닿는 것을 봐버리면 경기를 일으켜요.

자신의 잘린 팔을 이전 사령관이 다시 실과 바늘로 꼬매고, 다시 자르고...

그걸 반복하면서 생긴 살의 감각들이 트라우마처럼 남아버렸거든요.

 

“그럼 장갑을...

...

... 아냐, 됐다.”

 

 

 

우스운 소리도 정도가 있지, 장갑이라니.

이 애들이 이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슨 짓인들 안 해봤겠나. 

장갑이 뭐야. 천이란 천은 다 가지고 와서 해봤겠지.

내가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도 레아의 마음은 찢어질 거다.

 

 

 

“... 사람 뿐만 아니라 저희 같은 바이오로이드도 리제를 도와줄 수가 없었어요.

전에 실수로 다프네가 밥을 건네주다가 리제의 머리에 난 상처를 건든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기억 모듈이 다시 켜져버려서... ...”

 

“... 회귀시켰구나.”

 

“네...

...

... 죽여야 했죠.”

 

“... ...”

 

“자기 팔이 잘리고, 붙여지고...

수백 번이나 그걸 반복하면서... 살이라는 것 자체에 두려움이 생긴 거에요.

하얀색의 고기덩어리가 리제에겐 가장 무서운 것이 된 거죠.”

 

“... ...”

 

“그래서... 말씀 드리는 거에요.

부디 이번에... 리제를 조금만이라도 도와달라고...

...

... 부탁드릴 게요. 주인님...”

 

 

 

... 머리가 잠시 아찔해진다.

레아가 이렇게 내게 말을 걸었을 때부터 짐작은 했다. 나보고 도와달라 할 거라고.

 

하지만... ... 이건 가능할 지 어떨 지 모르겠다.

여기 와서 처음으로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이 느껴진다.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트라우마가 아니라고.

 

이제 와서 더 이상 당황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는데, 이제 더 당황할 건 없을 줄 알았는데.

... 모르겠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고작 당황이라는 걸로 표현할 수 있는 건지.

 

 

 

“... 말은.”

 

“네...?”

 

“말은... 할 수 있겠지?”

 

“대화 정도는 할 수는 있겠지만... 정신은 온전하진 못해요.

혼자 있을 때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해지니까...”

 

“... 후우.

그래도 말은 걸 수 있다는 거네?”

 

“그렇... 죠.”

 

“...

...

... 그래, 그럼 알겠다.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

 

 

 

솔직히 자신은 없다. 

리제가 사람 뇌파를 보고 어떻게 반응할 지도 모르겠고, 내 목소리를 듣고 어떻게 생각할 지도 모르니까.

 

기억 모듈이 그 모양이 됐으면 다른 모듈들도 정상일 리가 없다.

눈 앞은 보일까? 내 말이 들리기는 할까? 꽃 냄새는 맡을 수 있을까?

...

... 아니, 어차피 안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없다.

 

 

 

“... ... 죄송해요. 주인님.

제가 괜한 부탁을...”

 

“아니, 차라리 잘 됐네.

이 기회에 나도 정신 좀 차려야지.”

 

 

 

나도 그 동안 너무 꽃밭에서만 살았다.

모든 게 해결될 때까지, 내가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절대 잊지 않겠다 다짐했건만 이리도 쉽게 흔들리는 게 나란 인간이다.

 

어쩌면 리제 같은 다른 아이들이 더 있을 수도 있다. 더 심한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적어도 나는 이미 그런 애를 한 번 만났던 것 같으니까.

 

 

 

‘... 발키리.’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를 죽이려 한 아이.

아무리 정찰을 하고 수색을 시켜도 발키리는 단서조차 찾을 수 없게 한반도에서 깔끔하게 도망쳤다.

이전에 정박해 있었던 곳이 그쪽 부근이었기에 멀리 가진 않았겠거니 싶었지만, 아예 다른 나라나 대륙으로 가버린 듯하다.

반군에서의 일 때문일까, 아니면 멋대로 내게 사상자 보고서를 보여준 탓일까.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이젠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앨리스 같은 일도, 리제 같은 일도 있었는데 어떻게 이 애들이 인간이란 족속을 믿을 수 있었겠나. 

오히려 믿어준 아이들이 이상하게 보였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 그 애도 그렇게나 절박해야 했던 이유가 분명 있었겠지.

...

... 씨발... 좆 같은 세상.’

 

 

 

당황하지 않겠다. 머뭇거리지도 않겠다.

그리 다짐했고, 실제로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억울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세계를 이렇게 역겨운 시궁창으로 만든 녀석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 잡고 싶고, 누구보다 죽이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힌 세상 둘도 없는 개새끼니까.

 

튀어나오는 욕을 속으로만 씹었다. 이 애들이 이런 더러운 말을 들을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숨을 들이 마시고, 다시 내쉬자. 그럼 조금은 편안해진다.

 

 

 

“... 지금 있는 리제가 몇 명이나 된다고 했지?”

 

“한 명...

다른 리제들은 전부 죽었어요.

... 이전 사령관님은 그 이상 만들지 않으셨거든요.”

 

“한 명... 한 명...

...

...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내가 이곳에 왔던 그 첫 날,

그 날 봤던 리제에게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면 이렇게까지 오진 않진 않았을까.

그런 의구심이 머리 속에서 싹을 피웠다.

 

내가 조금만 더 침착했더라면, 조금만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텐데.

그럼 쓸데 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대회는 네게 맡길게. 레아.

페어리 아이들이라면 누구든 멋진 정원을 만들어낼 테니까 페어리 맏언니한테 맡기는 게 최선이겠지.

아마 다른 부대 애들도 같이 참여할 거야.

잘 정리 좀 해줘.”

 

“... ...”

 

“대회 상품도 원하는 대로 알아서 정해.

데이트권이든 동침권이든 내가 줄 수 있는 건 다 해줄 테니까.”

 

 

 

애들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리제를 만나게 된다면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은 없을 것이다.

대회 심사는 물론이고, 애들 작품 하나 보는 것조차 할 수 없겠지.

 

하지만 아이들은 그저 이 아름다운 섬에서 아름다운 기억으로 과거를 씻으면 되는 거다.

꽃을 가꾸고, 섬이 주는 선물을 만끽하면 그걸로 족하다.

더러운 건 내가 마주할 테니까.

 

 

 

“애들 반응 시큰둥하면 더 큰 거 걸어도 되고.

뭐, 사령관 직위 그런 건만 걸지 마.

그랬다간 우리 오르카 다 망할 거 아냐. 하하.”

 

“주인님...”

 

“... 괜찮을 거야.

지금까지 다 그랬고, 나는 변함없이 너희를 사랑하니까.

... 그거면 되겠지.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으니까.”

 

 

 

아니, 돼야지.

이 별 거 아닌 사랑을 어떻게든 가지고 설득해야지. 그러라고 가는 거니까.

 

 

 

“... ...”

 

“리제는 이미 섬으로 갔다고 했지?

그럼 나도 그쪽으로 데려다 줄 수 있을까?

그 이후에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가서 준비하고 있을 테니... 편하게 오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레아는, 반짝이는 날개를 떨며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잠시 빈혈을 느낀 것인지, 눈을 감고 비틀거렸다.

빨갛게 충혈된 레아의 눈동자가 그녀가 얼마나 울었던 건지 내게 말해줬다.

 

 

 

“... 주인님.”

 

“응? 왜?”

 

“... ...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부탁을 드려서...”

 

“괜찮아.”

 

“...

... 주인님이시라면 이렇게 말하는 걸 싫어하시겠죠.

죄송해요. 그렇게나 주인님을 봐왔는데.”

 

 

 

땅 위로 사뿐히 올라온 레아가 나를 꼭 끌어 안는다.

레아의 팔이 부드러운 살결을 기대오며 내 옷깃을 세우고 목덜미를 감쌌다.

 

이렇게나 부드러운 몸. 따뜻한 품.

이것에마저 두려워했던 리제는 대체 어떤 기분이었을까.

...

상상하지 말기로 했다. 내가 감히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아서.

 

 

 

“감사해요. 주인님.

... 제 모든 걸 다해서 감사해요...”

 

“역시 미안하단 소리보다는 고맙다는 게 듣기 좋지.

레아는 날 잘 아는구나.”

 

“... ...

더... 더 드려야 하는데... 부탁 밖에 못하고...”

 

“괜찮아. 나도 요정 마을에서 레아에게 부탁했잖아.

이렇게라도 갚을 기회를 줘서 고맙지.”

 

“... .. 사랑해요.

더 드릴 게 사랑 밖에 없어서... ...”

 

“나도 사랑해.

나도 줄 게 그것 밖에 없네.”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레아를 달래 주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꿋꿋이 버틴 언니로서의 역할을 이젠 내려 놓을 때도 됐으니까.

 

그리고 이젠 그 짐을 내가 대신 짊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해피 엔딩은 오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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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붕이들의 성원으로 500번 죽었을 리제가 200번으로 줄었읍니다.

내용 상으로 분량을 자르다보니까 이번 화도 2만자네 어우...

(그리고 이번 에피소드에는 생각도 못한 캐릭터가 나올 예정이니 좋게 말하면 기대해도 좋고, 나쁘게 말하면 막 이상해도 참고 봐줘.)


제목 정할 때 더 어그로 끌릴 만한 걸로 할 걸 그랬다

역시 장편은 조회수가 잘 안 나와...

대신 개추 한 번만 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나도 200개 받고 시퍼... 앨리스 편이 진짜 인기 좋긴 했더라..



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