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이 세상을 하얗게 물들인다. 겨울의 눈꽃이란 항상 이렇게 아름다울까? 언제나 익숙한 겨울의 설원에서

맞이하는 이 풍경이란, 매일 색다른 정취를 풍겨오며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무엇인가 있으리라.


소복히 눈이 쌓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다 보면 뽀드득 뽀드득 압착되는 눈들이 느껴졌다.

외롭게 걷는 이 길을 함께 걷는 이들이 없다는 것이 다행일까.


'두렵지 않아.'


두렵지 않다. 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니.


'발할라'라는 명예로운 전사들의 전당이란 고고하게 솟아 오른 저 설산의 정상에서 웅장한 자태를 드리우고 있을테니.

수많은 이름 없이 떠나간 자매들 역시, 이 길을 걸어 그 곳으로 향했으리라.


'그래도...'


다시 한번 보고 싶다. 내게 사랑을 속삭이던 그 사람을


'괜찮을까.'


전사들의 전당으로 향하는 것은 분명 명예로운 일이지만, 미련이 남는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남겨진 미련이란

손쉽게 털어내지 못하는 것일까.


'다시 한번 볼 수 있다면.'


"미련이 남는 거야?"


"...네."


앞장서서 선도하던 대장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물어왔다. 그 질문에 즉답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솔직한 마음을 담아 대답했다.


"돌아가. 애초에 이곳은 네가 있을 장소가 아니었어."


"대장.."


하얀 입김에 실려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꽂혀왔다. 차가운 시선이 마치 총알이 피부를 꿰뚫듯이 

박혀 들었고, 차갑게 식은 바람이 몸을 때려왔다.


"처음부터 이 길은 우리들이 갈 길이었어. 무엇보다 넌 아직 차례가 오지 않았고."


"하지만..!"


내 대답을 중간에 자르며 대장의 고개가 좌우로 살며시 흔들렸다. 내 차례가 되지 않았다는 대장의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을 고민하기엔 주어진 시간이 촉박했고 대장 역시 처음부터 대답을 원치 않았다는 듯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넌 나중이야. 지금은 아니야."


완곡한 태도, 칼로 자르듯 선을 긋는 어조. 더 이상 설득의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며 대장이 다른

자매들을 이끌고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아..!"


"내가 말했지. 넌 아직이라고. 네 차례가 아니라고. 이건 명령이야, 돌아가.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항명으로 간주하겠어."


검은색의 권총이 내 이마에 겨눠지고,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전달되었다. 전시의 항명이란 있을 수 없는 일.

처음부터 설득의 여지는 없었던 것이다. 다른 자매들 역시 냉랭한 태도를 보이며 내 어깨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기, 기다려... 기다려!"


필사적으로 손을 뻗으며 그들에게 달려갔지만, 아무리 달려도 그들과 가까워질 수 없었다. 마치 깊은 수렁이 내 뒷덜미를 붙잡아

잡아 당기는 것처럼, 어두컴컴한 심연이 흰 눈들을 집어 삼키고 나 역시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기다려! 날 홀로 남기고 떠나지 마!"

 

공허한 외침만이 어두운 심연에 울려 퍼지고,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모든 자매들이 내게 손을 흔들며 눈물 짓는 것이었다.




"헉! 허억!"


지독한 악몽 끝에 눈을 뜨니 하얀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은연중에 풍기는 알코올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고

푹신한 침대가 느껴졌다.


"아... 여긴..."


"발키리 씨? 앗! 정신이 드셨어요? 어, 언니! 어서 주인님을! 발키리 씨가 깨어나셨어요!"


곁에 서있던 흐릿한 인영이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가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깨어났다? 그럼.. 자고 있었던 것일까.

손을 더듬으며 몸이며 얼굴을 더듬으니 덕지덕지 발라진 붕대들이 느껴졌다.


"발키리!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가.. 각하.."


자매들과 눈길을 걸으며 계속해서 그립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릿한 시야 때문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그리워한 그 목소리를 잊을 만큼 정신이 없지 않았기에 허공에 손을 뻗어 그를 찾아 움직였다.


"정말... 정말 다행이야... 네가... 네가 살아남아서..."


살아 남았다. 그가 한 말 한마디로 이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살아남은 것이다. 

깊은 수렁으로부터, 머나먼 발할라로 향하는 여행으로부터, 나는 살아남았다.


그제야 마지막 기억들이 돌아왔다. 분명, 임무 중에 모든 발할라 자매들과 함께 포위되어...


"다른.. 자매들은..."


"......미안해."


결코 원하지 않던 답이 각하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드디어 대장이 했던 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난 아직 차례가 오지 않았다...'


발할라의 전당으로 향하는 길에서 자매들이 남긴 그 말의 뜻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차가운 눈보라 속에서 언젠가 찾아올 명예를 기다리며, 그녀들은 떠나갔고 나는 홀로 남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