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로vs레아

슬레이프니르vs키르케

리리스vs리제 part.1

리리스vs리제 part.2

유미vs로크 part.1

유미vs로크 part.2

팬텀vs발키리




“녹화! 다다다, 당연히 녹화는 가능한 거죠?!”


“어차피 결과야 뻔한데 굳이 볼 필요 있을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너도 어서 여기 앉아서 응원할 준비나 하라고.”


저마다의 특색으로 무장한 호드의 대원들이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다. 전투의 결과야 뻔하다는 듯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모양.


“자, 자~ 그러면 어떡할래? 평범하게 승패로 나누는 건 재미 없을 테니- 시간으로 쪼개볼까? 너희들 생각은 어때?”


손에 든 주사위를 딸깍이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샐러맨더에게 손을 저어가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하이에나. 그런 그녀의 모습을 실눈에 담은 샐러맨더의 입꼬리가 휘어진다.


“언니들~ 슬슬 시작할 거니까 자리에 앉아줘~ 들뜬 건 알겠지만 너무 떠들면 안 된다?”


““““네에---!!””””


떠들썩한 그녀들에게 주의를 준 닥터는 곧 눈앞의 스위치에 손을 가져다 대며 옆에 선 사령관을 올려다본다.


***


【아, 아~! 내 목소리 잘 들리지? 장소가 장소인 만큼 서로의 GPS는 작동 불가로 설정해뒀으니까~】


건조해진 공기와 축축한 곰팡이가 어울리는 이곳.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발랄하기 짝이 없는 닥터의 목소리가 주위로 퍼져나간다.


【눈과 귀를 활짝 열어야겠지~? 그럼, 시작!!】


***


“일전의 통신병과 로크가 교전한 곳... 의 지하인가?”


어둑어둑한 통로에 도열 된 미약한 빛만이 녹슨 철로 이루어진 바닥을 비춘다. 그런 지하 통로의 중앙엔, 위쪽의 도시에서 흘러들어온 담수(湛水)가 칸의 무릎 높이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조명과 조명 사이의 거리는 어림잡아 5m 정도. 제법 촘촘하나 밝기가 약해 시야가 나쁘군.”


주변을 둘러보는 칸의 시야가 찌푸려지며 전방의 어두운 공간을 응시한다. 그리 크진 않지만 좁지도 않은 통로는 어림잡아 지상의 터널과도 비슷한 규격. 하지만 그런 장소완 어울리지 않는, 심장을 옥죄어오는 강철의 소리가 칸의 신경을 곤두세운다.


“흠, 좋지 않은데. 뭐, 피차 마찬가진가.”


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끝도 없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흑마(黑馬). 푸른 불빛을 일렁이며 통로의 정중앙에 기세등등이 등장한 라인리터의 동체가 잔잔히 흐르는 물을 철썩인다.


『과연, 그대 같은 전사와 맞붙는데 전장 따윈 중요치 않지.』


“동감이다. 기왕이면 좀 더 넓은 곳이었으면 했는데.”


더스트 스톰의 바퀴가 잔잔한 수면에 물결을 일으킨다. 동시에 칸의 뒤쪽에서 피어나는 새하얀 물보라의 꽃.


『신성한 결투에 서론은 무가치. 기사 라인리터의 란체를 받아, 그대의 명예를 증명하시오!』


라인리터의 앞발이 하늘로 솟구치더니 이내 바닥을 박찬다.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분쇄할 기세로 쇄도하는 거구의 AGS에 맞서 허리춤의 로켓을 점화시켜 폭발하듯 질주하는 칸.


이내 둘의 거리가 좁혀지며 서로의 무장이 불을 뿜는다.


***


‘떠보기라도 할 셈인가…?’


칸의 의문대로 눈앞의 라인리터는 올곧이 자신을 향해 전진해 오고 있다. 2m가 넘는 거구의 질주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협을 주기엔 충분. 칸의 눈이 가늘어진다.


‘가상이라곤 하나, 괜한 자존심에 기회를 놓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지. 그렇다면 먼저-’


코앞까지 다가온 라인리터의 앞발을 향해 스치듯 무장을 내뻗는 칸. 총구의 끝을 밀착시키다시피 들이댄 그녀는 달리는 속도를 줄이지도 않은 채,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쾅!


격발 음이라곤 생각지도 않은 거대한 소음이 지하 수로에 울려 퍼진다. 서로의 자리를 벗어나 반대쪽 위치로 자리 잡은 둘. 공격을 성공한 칸도, 피격당한 라인리터조차 미동이 없다.


“역시, 쉽지는 않을 것 같네.”


『기사의 갑주는 살아있는 명예의 상징. 쉽게 뚫을 순 없을 겁니다.』


라인리터의 전면부가 붉게 빛나고 양측에서 돌출된 뾰족한 송곳에선 푸르스름한 스파크가 일렁인다.


『제 차례군요. 지혜를 짜내 거리를 벌리는 선택도 좋을 것이며, 정면으로 달려들어 용기를 증명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네 개의 다리가 회전하며 굉음을 토해낸다. 수면을 거칠게 파헤치던 그것은 일순간 폭발하는 힘과 함께 라인리터의 동체를 쏘아지듯 발사시킨다.


『-결과는 정해져 있을 테니까!』


칠흑의 흑마가 돌격하자 답지 않게 동요하는 칸. 수면 위를 미끄러지나 싶더니 땅을 차며 달리기 시작한 라인리터의 속도가 예사롭지 않다.


급히 출력을 반전시켜 거리를 벌려본다. 길게 묶을 머리가 뺨에 날려 시야를 방해함에도 라인리터의 전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만큼은 놓치지 않는 그녀.


“…칫!”


페이스를 빼앗겨 버렸다. 라인리터에게서 솟구치는 빔이 곧장 자신을 추격하기 시작하자 공격받을 경로에서 눈을 떼지 않는 칸.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면 위를 미끄러지는 그녀의 시야로, 달려드는 두 개의 칼날이 슬로우 모션처럼 재생된다.


『역시나 상대로선 부족함이 없다! 허나-』


라인리터의 뒷발이 바닥을 깨부수고 비상한다. 이윽고 칸의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거구가 그녀를 앞질러 착지하자, 곧장 푸른빛의 열선이 칸을 향해 모여드는데.


『벗어날 순 없을 겁니다!』


예기를 머금은 두 개의 창에도 눈 하나 꿈쩍 않고 마주하는 칸. 이내 시야 한가득 밝은 빛이 채워지자, 지체 없이 몸을 숙인 그녀는 곧장 라인리터의 아래를 향해 미끄러진다.


-쿵!!


바닥을 긁어가며 하부로 파고든 칸이 단숨에 라인리터의 복부로 리볼버 캐논을 격발시킨다. 거구의 AGS가 들썩일 정도의 제로 거리 사격. 필시 만만찮은 충격을…


“-흡!!”


숨을 집어삼킨 칸의 눈앞으로 쇄도하는 강철의 톱날. 라인리터의 뒷다리가 자신의 미간으로 향하자 눕다시피 상체를 비틀어 공격을 피해낸다.


넘어지는 상황에서도 후속타를 대비해 덤블링을 한 그녀는 자세를 낮추곤 상대의 움직임에 신경을 곧추세우는데-


『조금 실망이군요. 가진바 모든 걸 걸고 부딪히는 그런 그림을 기대했는데.』


“안타깝게도 이쪽은 한번 부서져 버리면 그걸로 끝이거든. 이해해주게.”


『흠, 아무리 가상세계라 할지라도 실전과 다를 바 없다는 겁니까? 좋은 자셉니다. 좋은 자세지만-』


문득, 라인리터의 동체에서 불길한 기계음이 토해진다.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려 접힌 무언갈 튕겨내는 듯한 소리.


『몸풀기는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죠. 부디 이 공격이 당신의 진심을 이끌어내기를. 그러니- 처음은 서비스입니다.』


“…?”


한순간이었다. 굳게 선 라인리터의 발이 접히더니 후방에서 거대한 창이 피어난다. 차가운 예기를 담은 그것은 곧 전방을 향해 존재감을 과시하더니, 주변의 약하디약한 빛마저 흡수해 일직선으로 뻗어 나간다.


***


기업 전쟁 당시, 칸이 마주한 라인리터란 본디 후방에서 아군의 지원 포격을 위해 배치된 AGS에 불과했다. 이처럼-


“-전방으로 발사한다고? 전면전을 고집하는 시점에서 눈치챘어야 했는데…”


굉음과 함께 터져나간 새하얀 섬광은 어두운 지하수로를 둘로 양분하며 주변의 기척마저 모두 무로 되돌려버린다. 자신의 뺨을 스치듯 지나간 그것은 칸의 오른쪽 얼굴을 태워버림과 동시에, 부위의 시야와 청각마저 앗아가 버렸다.


상처 부위를 손으로 감싸려다 끝내 손을 떨구고 마는 칸.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만한 부상에도 끝끝내 무장을 치켜드는 그녀의 모습에 라인리터의 전면부가 밝게 점등한다.


『본래라면 이런 용도가 아니지만… 뭐, 사용하기 나름이겠죠. 명실상부 기사라면, 어떠한 전장이라도 명성에 맞는 무위를 보여야 하는 법.』


자세를 되돌리는 라인리터. 뻗어 나온 포신은 다시금 뒤편으로 수납되었지만, 칸의 모든 신경은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뭐, 그것 역시도… 제, 별난 요구사항을 들어준 사령관님의 넓은 아량 덕분이지만요.』


자신만만히 말하는 라인리터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섣불리 다가서지 못한다. 그 정도 거리에서의 일격도 무위로 돌아갔다면 남은 방법은….


더스트 스톰의 숨겨진 블레이드가 좌우로 펼쳐지더니 동시에, 각반에서 뻗어 나와 칸의 중심을 받쳐주던 뒷바퀴가 맹렬히 회전해 물보라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역시 포기를 모르는가. 그렇다면 이 몸이 그대를 전설로 인도할지니-!!』


다시 앞다릴 들어 올려 땅을 차는 라인리터. 그로 인해 지하도의 바닥이 궤도의 모양 그대로 깊게 파였으나 전혀 개의치는 않는 모양.


‘단순하게 스펙에서부터 부조리함이 느껴지는군. 그나마 다행인 건…’


칸의 온전한 왼쪽 눈이 철렁이는 지하수도의 수면을 응시한다.


“오만함의 대가는… 항상 무거운 법이지.”


-파앙!


칸의 각반에서 사출된 블레이드가 로켓의 불꽃에 힘입어 수면 아래를 가로지른다. 상어의 지느러미와 같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곤 교차하듯 달려나가는 두 개의 칼날.


무섭게 쇄도하는 블레이드가 방향을 바꿔 벽면에 달린 조명의 빛을 차례차례 좀먹어간다. 콘크리트 벽을 긁는 소음과 찾아온 일순간의 암전에도 요동조차 없는 라인리터.


『전술적이군요. 하지만!』


발을 구른 것과는 반대로 궤도를 회전시켜 후방으로 물러나려는 라인리터. 동시에 네 개의 발이 굽혀지며 다시 한번 묵빛의 란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보이지 않는다면 모두 날려버릴 뿐!』


시야를 방해받는 건 칸 역시 마찬가지. 남은 귀와 어둠에 적응한 눈을 부릅뜬 그녀는 멀찍이서 이쪽을 겨누는 포신에 오롯이 신경을 집중한다.


-퍼엉!!


가려진 시야 사이로 확연히 존재감을 드러낸 섬광과 그 뒤를 잇따르는 소리의 칼날. 칸의 다리에 부착된 바퀴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굉음이 그녀의 동체를 옆으로 밀어낸다.


‘아슬아슬했어….’


머리 위를 가로지르는 새하얀 섬광에 눈을 한번 깜빡인 칸은 어깨너비로 벌린 다릴 굽히며 더욱 가속해간다.


-끼리리리릭.


다음 포탄이 장전되는 소리. 앞서 달려나간 포탄이 그제야 뒤쪽에서 폭발음을 토해냄에도 칸의 귀는 라인리터의 자그마한 소리조차 놓치지 않는다.


‘분명 어두워서 앞은 보이지 않을 텐데. 소리로 이쪽의 움직임을 짐작하는 건가?’


조금은 꺼림칙하나 생각은 짧게.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포신에 로켓의 출력을 최대한으로 전개해 폭발의 범위에서 벗어난 칸이 무장을 치켜든다.


***


-쾅!


앞서 두 번의 포격으로 딜레이가 생긴 라인리터가 벌떡 일어나 섬광을 뿜어댄다. 일순 환해진 시야 사이로 들려오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격발 음. 분명 칸이 소지한 무장임에 틀림없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야를 옮겨 공격 궤도를 수정해보지만 어째선지 칸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데.


『사라졌…?!』


당황한 나머지 판단이 늦다. 어째선지 코앞으로 다가온 칸의 총구가 라인리터의 시야를 가득 채운다.


-펑!


또 한 번의 굉음이 지하 수로를 가득 채운다.


***


자세를 낮춘 뒤 로켓의 불꽃에 몸을 싣는 칸. 때마침 뒤편에서 피어나는 포탄의 충격파가 물보라와 함께 그녀의 몸을 힘껏 날려 보낸다.


단숨에 좁혀지는 거리. 쓰라린 상처 부위로 미간을 찡그리지만 손에 쥔 무장만큼은 라인리터의 안면을 향해 정확히 쑤셔 넣는다.


“…공평하게 가자고!”


『무슨?!』


∴WARNING∴ -CRITICAL DAMAGE-


흔들리는 시야 위로 들이닥치는 무수한 경고음. 접근전이나 원거리 공격을 가능케 한 전면부 양측의 송곳이 칸의 공격으로 우그러진다.


『이따위 가당치도 않은…!!』


왜인지 잔뜩 화가 난 라인리터가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뒤편으로 접힌 포신의 위치가 낮다. 절호의 기회. 아마 다음은 없으리.


‘충격으로 바퀴 축이 어긋났어. 시간을 끄는 건 위험하니 부족한 속도는 엔진 부스트로 메꾸는 수밖에…!’


혀를 차는 칸의 시선이 뒤꿈치의 틀어진 바퀴로 향함과 동시에, 하체를 진동시키는 엔진에서 새빨간 불꽃이 치솟기 시작한다.


‘AGS의 구성원리는 잘 모르지만… 일반적인 전투용 바이오로이드로 생각한다면 얼추 비슷할 터.’


칸의 머릿속엔 자신들의 무장을 거의 온몸으로 입다시피 두른 아머드 메이든의 대원들이 떠오른다.


‘단단한 장갑 속에 숨겨진 막강한 포신. 훗, 카멜에게 또 한소리 듣겠군. 아니, 카멜뿐만이 아닌가…’


-촤아아악!


쉬지 않고 지하도를 질주하는 두 개의 블레이드와 템포를 맞추되 신속히 놈의 뒤로 돌아간다. 반으로 접힌 라인리터의 거포가 시야로 잡히자 눈에 불을 켜며 무장을 치켜세우는 칸.


‘…어?’


하지만 이상하다. 아니, 무언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방금 전만 해도 귀청을 울리던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좁은 하수도의 천장만이 시야를 가득 채우는 모순된 상황.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수많은 전장을 헤쳐오며 유사한 경험은 수도 없었기에 이 뒤로 어떤 결과가 펼쳐질지조차도 예상이 가는 칸이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내 위치를 정확히 인지한 거지? 단순히 급소를 지키려는 행위에 얻어걸린 결과물에 불과한 건가?’


폭연으로 가려진 시야와 사용하지 못하는 GPS. 일부러 질주하는 블레이드와 속도까지 정확히 맞춰 접근했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소… 리… …라고?”


매 순간 회전하던 광경이 마침내 눈앞으로 다가오자 이변은 갑작스레 찾아오고 만다.


“허으으읍…!!”


목구멍으로 내뱉으려는 비명이 길을 잃곤 다시 몸속으로 되돌아간다. 내장을 타고 내려간 그것은 이윽고 칸의 복부에 다다르자 뜨겁게 끓어오르며 오감을 폭발시킨다.


***


“커흡…! 허윽…?!”


둥글게 몸을 만 칸의 복부에선 흘러내린 피가 이젠 제법 잔잔해진 물결 주위로 퍼져나가고 있다. 고통에 겨워하는 것과는 반대로 흔들리는 동공은 빠르게 주변을 훑어가는데.


『정정당당히 맞서는 것도 아니며! 창의적 전술로 계략을 세우는 것도 아니군! 감히 눈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비겁하게 뒤에서 다가오다니…!!』


역정을 내는 라인리터가 지축을 뒤흔들 기세로 달려오지만, 그 역시 앞이 보이지 않아 감각에만 의존한 상태. 정신을 차린 칸이 주먹을 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힘껏 내리치자 뭉친 핏덩이가 그녀의 입 밖으로 쏟아진다.


“우윽…! 큭!!”


하지만 좀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 라인리터의 뒷발에 직격당한 데미지가 상상 이상으로 막강해 체내의 바이오더스트까지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모양이지만.


-카각!


하수도 전체를 돌고 돌아 다시 칸의 곁으로 돌아온 한 쌍의 블레이드가 라인리터의 뒷발을 타격해 중심을 무너뜨린다.


-쿵!


『또 얕은수를…!』


몸부림치는 칸의 바로 옆으로 떨어지는 거구의 다리. 하수도의 바닥을 기다시피 한 칸은 간신히 라인리터의 사선에서 벗어난다.


‘움직일 때마다 고역이군. 피가 안 멈춰…’


우그러진 살점과 뼈가 속에서 진창을 만든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운이 없다고 해야 할지…’


직격당하려는 찰나의 순간에 들어 올린 무장이, 조금이지만 라인리터의 타격점을 엇나가게 한 모양. 하지만 그 대가만큼은 오롯이 전달돼 깨지고 부서진 리볼버 캐논의 파편들이 수면 위를 떠다니고 있다.


“AGS도… 소리를… 듣… 나?”


『믿기지 않는단 표정이군요. 무수한 전투 끝에 성장하는 건 당신들만이 유일하다 생각하셨습니까? 오만하군요, 호드의 칸.』


-쿵! 쿵!


찰랑이는 수면을 발길질하는 라인리터의 주위로 둥그런 물결이 퍼져간다.


『이 정도면 궁금증이 조금은 해결되셨겠죠?』


“말도 안… 되는….”


『틀에 박혔군요. 낡아빠졌어. 남들보다 오래 살아왔단 자부심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앞만 보고 달려드는 그 성격이 조그마한 가능성마저 부정하는 겁니까?』


혀를 차는 라인리터에게 더는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오래 살아온 자부심에 젖어 있냐고? 그럴지도 모르지. 오직 달리기만을 고집해 지나치는 환경엔 시선조차 두지 않았냐고?


“…그럴지도. 아니, 그런 것… 같군…”


사정없이 떨려오는 두 다리로 필사적으로 일어선 칸.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지만 기어코 뒤꿈치의 바퀴가 회전하며 신음성을 토한다.


“음파를 이용해서… 그것도 사령관의?”


『이 역시 제가 건의한 겁니다. 점점 수를 더해 가는 적들과 발전하는 놈들의 성능에 대응하기 위해선-!』


꼿꼿이 선 라인리터의 주위로 검은색 연기가 피어오르지만 어째선지 흑마에 몸을 기댄 전사의 망토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림.


『1%의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순 없었기에.』


“하, 하하…”


완벽한 패배다. 설마하니 자신의 주변인들도 아닌 처음 말을 나눠 본 AGS에게 그런 소릴 듣다니.


“후… 그렇군. 그랬어.”


어느새 잊고 있었던 걸까. 사령관과 만나고 평화에 익숙해져서? 아니면 기억 속에만 존재하던 동료들과 재회해 기쁨에 취해있었던 걸까. 어느 쪽이든 간에.


“호드의 명예를… 더럽혀버렸군. 미안하다, 모두들.”


작게 중얼거린 칸의 로켓에서 최대치의 불꽃이 피어난다.


“우욱… 프하! 후… 좀 낫군.”


고인 피를 뱉어낸 칸이 전방으로 시선을 던진다. 그에 응수하듯 접은 다리의 궤도를 회전시키며 포신을 드러내는 라인리터.


『결심이 선 모양이군요. 좋습니다. 이제야 케시크(친위대)에 어울리는 모양새군요.』


“그래, 덕분에.”


더 이상의 말은 무의미. 분명 다음의 공격으로 승패가 결정되리라. 만신창이가 된 칸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내 앞으로 나아간다.


***


똑바로 달려나가는 칸. 라인리터 역시 뒤편으로 이동하며 움직임이 감지되는 방향을 향해 포를 발사한다.


-쾅!!


귀청을 자극하는 폭음에도 더욱 가속하는 칸. 상체는 앞으로, 두 손은 뒤로 향한 채 오로지 앞을 향해 나아갈 뿐인 모습.


『무장도 없이 접근하다니 무슨 속셈입니까?!』


-끼리리리릭


다음 포탄이 장전되는 소리. 미약하지만 그 조그마한 소리에 칸의 동공이 이채를 띈다.


‘몸체와 포신의 기능이 구분돼있지만, 분리는 될 수 없는 구조… 노리는 건-!’


콘크리트로 된 벽을 미끄러지며 타원형의 지하수도를 나선형으로 회전하는 칸. 그런 그녀의 뒤를 바짝 추격하는 두 개의 블레이드가 금빛의 섬광을 일구어내며 라인리터의 판단력을 흩뜨려놓는다.


-쾅!!


쏜살같이 지나간 자리로 날아오는 거대한 탄환. 칸의 바퀴가 내지르는 비명이 지하 수로 전체에 울려 퍼져 굉음을 토한다.


『소용없습니다! 제 몸엔 작은 상처조차 줄 수 없는…』


“알고 있다. 그러니-”


라인리터의 곁을 번개같이 스쳐 지나간다. 호되게 당한 상황에서도 아까와 똑같은 위치를 사수하는 칸.


『어디까지 절 실망시킬 작정입니까-!』


다가오는 강철의 톱날에도 물러서지 않은 칸은 기어코-


-카가가각!!


노도와도 같이 몰아치는 폭력에 똑같이 두 발을 차올린다.


***


바닥을 긁어대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칸의 다릴 두른 각반이 사방으로 터져나간다. 덕분에 공중으로 붕 떠오른 그녀는 무방비하기 그지없는데.


『끝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포신을 위치시킨다. 비행장치도 없이 떠오른 칸의 모습은 저격당하기 너무나도 용이한 상황.


허나 당사자인 칸의 얼굴은 호수와도 같이 가라앉아있다.


-끼리리리릭


승리를 확신한 라인리터지만 일순 언짢은 감에 휩싸여 의문을 표한다. 자신의 발을 맞받아친 건 공격을 상쇄하기 위함이 아니었던 걸까? 이런 상황에서도 승기를 따낼 자신이 있다는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이미 행동에 들어간 무장으로 탄환은 장전되고. 발사만 끝마친다면 자신의 승리. 그것이 당연한데도-


-탓!


떠오른 칸이 동체를 회전시켜 지하수도의 천장에 발을 디딘다. 이전부터 쌓여온 데미지와 라인리터의 뒷발을 받아친 충격으로 정신이 아찔해지는 경험에 이를 악물어 버텨내는 그녀.


“체크메이트.”


순간 반전된 칸의 양옆으로 다가오는 한 쌍의 블레이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달려온 블레이드를 양손으로 잡아챈 그녀는, 이내 허벅지의 힘을 폭발시켜 아래를 향해 빠르게 낙하한다.


-카가가가각!!


수직으로 세워진 포신을 긁어가며 라인리터의 동체와 이어진 돌출부위에 찔러넣는 칸.


『이노오오옴--!!!』


“내가 공격하는 게 아니야. 네가 하는 거지.”


바닥으로 떨어진 칸은 더는 움직이지 않는 다리에 신음하며 신속히 바닥을 긴다. 그리곤-


-콰아아앙!!!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폭음이 지하수도를 가득 채워간다.


***


연기가 걷히고 드러난 건 천장을 바라보며 얕은 물 위를 떠다니는 칸의 모습. 그리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죽었네, 이건.’


낙담하는 칸의 시야 끝. 저 멀리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지고 터져 나간 라인리터였던 것의 파편이 주변으로 흩어져 있다.


『살아… 있습니까… 호드의, 칸…』


‘미친…’


저 지경이 됐는데도 말을 걸어오다니. 이제는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한 칸이지만 자신은 이미 게임오버 상태. 손가락을 움직이긴커녕 말을 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


『훌륭한… 움직임… 하지만, 네… 솔직히 전… 실망이군요.』


‘…’


할 수 있는 건 없었기에 묵묵히 소리에 집중한다.


『이제껏 당신이… 어떤 싸움을 해왔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젠 어두워진 시야 사이로 라인리터의 말만이 지하수도를 흘러 내려온다.


『당신의 전투 방식은… 죽기만을 바라는… 죽음을 찾아가는… 패잔병의 아우성에 불과, 합니다…』


처음 만난 녀석이 꽤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언제까지… 언제까지 홀로 달려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마시길… 언젠가는.』


녀석의 수명이 끝을 고해간다.


『넘어설 수 없는 언덕이… 당신을, 맞이할…』


-삐이이


소리가 끊기자 높낮이 없는 음이 반복된다.


‘마지막까지 수를 남겨뒀나… 무서운 놈이군. 무력으로나, 상대를 분석하는 눈으로나…’


라인리터의 마지막 수법인 자폭을 끝으로 지하수도엔 어둠이 깔려온다.


***


그 후로 눈을 뜬 내게 대원들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어깨를 두드려줬다. 당연히 전투 결과에 웃고 떠드는 것을 기대한 나에겐 쓴웃음이 나오는 상황.


“불렀나, 사령관.”


“응, 어서 와.”


대화를 요청한 사령관의 얼굴 역시도 미묘하기 짝이 없다. 저렇게나 표정을 숨기지 못할 정도면 그냥 대놓고 말을 하면 될 텐데.


그 후로도 지나치는 녀석들의 표정은 모두 가지각색. 술을 권하는 마리, 제발 생각이란 걸 하라고 타박하는 레오나, 이번에야말로 나와 함께 사령관을 급습하자 권하는 아스널, 웬일인지 머릴 식힐 조용할 곳을 추천해주는 메이까지.


괜스레 걱정을 끼친 것만 같아 마음이 무겁지만 이를 해소해 줄 만한 이를 최근에 만났기에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이 빨라지고 만다.


『그때 이후로 오랜만이군요, 호드의 칸. 무슨 용무라도?』


여전히 내려다보길 좋아하는 녀석의 앞에 선 나는 조금 심술이 나는 기분을 억누르고 녀석에게 손을 내민다.


“정찰 임무다. 단독 임무지만… 어떤가? 못다 한 승패를 내보는 게?”


『아쉽지만 사령관님의 명으로 아군에게 피해를 가할 순 없습니다.』


“싸우자는 게 아니다.”


라인리터에게 정찰 중 발견한 철충들의 군집을 보여준다.


“놈들의 방해에 맞서 먼저 정해진 위치까지 도달하는 승부다. 물론-”


고개를 까딱여 복도의 뒤편을 가리킨다. 숨을 생각이지만 여실히 드러난 대원들의 정수리.


“난 녀석들과 템포를 맞출 생각이지만.”


『당신에겐 오히려 짐만 될 텐데요?』


“무슨 소릴. 그때 네놈이 말한 것에 반박도 할 겸-”


뒤편을 응시하자 재빨리 사라지는 인영들. 요 며칠간 날 따라다니는 모양새가 어지간히 걱정을 끼친 모양이다.


“쓸데없는 오해를 풀어야 해서 말이지.”


『조금은 성장하신 겁니까.』


“유일한 건 우리만이 아니라며? 네놈도 보여야 할 거야. 그때 이후로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하, 가당치도 않습니다. 좋습니다, 도발에 어울려 드리죠.』


익숙한 전장에 뛰어들며 뒤편의 동료들을 바라본다. 이토록 오래 살아온 몸이지만 아직은 한창이나 덜 자란 나와는 어디가 어떻게 다른 걸까. 어찌 됐건-


“질 순 없지.”


로켓이 불을 뿜으며 가속하자 대원들이 차례차례 뒤따른다.


“아, 대장 또 혼자 가네~”


“담배 그만 피우고 빨리 따라와! 으앗?! 벌써 저기까지 갔잖아!”


“흠- 하이에나야. 아무래도 내가 이긴 것 같지?”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저래 보여도 대장은 다시 돌아와서 우릴 도와줄 거라고!”


“대장님의 각성한 모습…! 멋져!!”


뭐, 내가 하기 나름이겠지.




분열_6화에서 썼던 전투씬을 리메이크 해봤습니다.


예전엔 글 쓰는 게 참 재밌었는데 취업한 뒤론 퇴근하면 아무것도 하기 싫네요...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