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  우리집 브닐라 모음집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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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슬슬 밝아오려고 한다.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으로 어둑어둑하고, 붉은색의 불길한 폭풍 같은 것은 여전히 하늘 곳곳에 자리 잡고 있긴 했지만, 어쨌든 그 사이사이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희망적인 경치는 못 된다. 아니, 되려 한층 더 괴이한 모양새다. 

 

새벽 빛이 지상을 비추기 시작하면서, 간간히 들려오는 소음으로만 짐작할 수 있었던 참상이 직접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버리고 간 차들로 꽉 막힌 도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 그리고 그 사이를 분주히 쏘다니는 로봇 같은 것들. 멀리서 봐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다들 하나같이 심하게 뒤틀린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아직 재난 상황이라는 게 실감이 안 된다. 이대로 눈을 감았다 뜨면, 우리집 침대에서 이비를 옆에 끼고 부스스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다. 뭐, 지금까지 몇 번이고 했음에도 우리집 침대가 아닌 걸 보면 이게 현실이긴 현실인가 보다. 

 

지금까지 우리는 몇 시간 동안 정신없이 산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이따금씩 멀리서 들려오는 괴성과 포성 따위의 소리가 우리를 긴장시켰지만, 그럴 때마다 이비의 단호한 재촉이 우리의 발을 계속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것도 아까까지의 이야기긴 하지만.

 

 

 

 

 

“J'aime l'oignon frit à l'huile,

J'aime l'oignon car il est bon!

J'aime l'oignon frit à l'huile,

J'aime l'oignon! J'aime l'oignon!“

(나는 기름에 튀긴 양파가 좋다네!

 맛있으니까 좋아한다네!

 나는 기름에 튀긴 양파가 좋다네-

 양파가 좋다네, 양파가!)

 

 

조금 전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하던 이비는, 다시금 평소의 단순하고 해맑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목소리 역시 아까까지의 성숙하고 낮은 목소리가 아닌, 그 앳된 얼굴에 어울리는 밝고 귀여운 목소리다.

 

.....저렇게 세상 발랄한 여자애가 사람 머리를 둘이나 날려버리고, 거기에 두 명을 추가로 날리려 들었다는 게 잘 믿어지지 않는다. 내 눈으로 직접 봤는데도 말이지.

 

평소대로 바보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어떻게 길은 잘 찾아서 가는 이비가 신기하기도 했다. 역시 짬으로 익힌 건 저 지경이 되어서도 어디 안 가는 건가.

 

이렇게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을 안고서 이비를 한참 바라보다가, 시선을 다른 일행들에게로 돌려보았다. 

둘이서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방금 그렇게 피를 뿌려놓고 저리도 즐거워하는 모습이라니....

이비 씨가 정상이 아닌 건 알았지만, 이건 정말 예상을 뛰어넘는군요.“

 

”.....우리끼리 하는 얘기지만, 쟤 솔직히 미친 것 같아.“

 

신나게 노래 부르는 이비의 뒤에서 무어라 속삭이는 바니와 H. 표정이나 손짓으로 보아 그다지 좋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진 않다. 

둘은 조금씩 이비와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이거 이대로 가도 되는 걸까.“

 

”서방님, 인정하기는 싫지만 아까는 제가 오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저 미치광이와 같이 있는 것보단 우리끼리-“ 

 

그 순간, 이비의 눈빛이 변했다.

 

 


 

”어라? 바니 언니 어디 가심까?“

 

그 자리에 얼어붙는 두 사람. 이비의 말투는 평소와 같았지만, 눈빛만큼은 몇 시간 전 보았던 그 눈빛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어...으...“

 

”그-그게-“

 

이비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노려보고 있다. 바니와 H는 불안한 얼굴로 제자리에 얼어붙어 있을 뿐.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어색하디 어색한 대치상태가 이어진다. 

 

나까지도 불안한 마음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할 무렵, 다행히도 이비는 곧 다시 밝게 미소지으며 헤실거렸다.

 

”에헤헤, 전 바니 언니를 믿슴다. 설마 언니가 우리 몰래 딴짓을 하시겠슴까.“

 

”그...그렇죠...“

 

”자, 더 가까이 오시지 말임다! 같이 노래 부르면서 가는 검다!“

 

”네...네! 물론이죠.“

 

”....휴,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결국 둘은 이비의 바로 뒤에 붙어서 걸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졌다간 곧바로 이비의 매서운 눈길이 따라왔으니까. 

 

녀석, 다시 바보가 되었어도 의심병은 그대론가보다.

 

나는 슬쩍 H와 바니 쪽으로 다가가 귓속말을 건넸다.

 

”미안해, 고생 많다. 나도 쟤가 저 정도로 나올 줄은....“

 

”어떻게 좀 해주면 안 돼? 자꾸 이러다가 숨 막혀서 못 살겠다.“

 

난처한 표정으로 간절히 부탁해오는 H. 난 그저 ‘조금만 참아’라고 밖에 해 줄 수가 없었다. 

나도 이 상황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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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만에 가지는 첫 휴식시간.

 

극도의 긴장 속에 한참 동안 산행을 했더니 꽤나 배가 고파진 관계로, 우리는 준비해온 비상식량을 조금씩 꺼내먹기 시작했다. 이비는 즐거운 얼굴로 익히지도 않은 생 스팸캔을 숟갈로 퍼먹고 있다. 나 같으면 질척하고 차가워서 도저히 못 먹을 것 같은데. 

 

그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니 이비가 나에게 차가운 스팸 한 스푼을 내민다.

 

”아, 주인님도 좀 드림까?“

 

”그...아냐, 나는 괜찮아. 이비 많이 먹어.“

 

가뜩이나 입맛도 없는데 저런 걸 입에 넣었다간 구역질이 나올 것 같다.

 

나는 바니가 나눠준 칼로리 바란스를 우물거렸다. 텁텁한 데다 별맛도 없는 물건이지만, 가뜩이나 기분까지 꿀꿀한 상황에서 꾸역꾸역 먹으려니 평소보다도 더 넘기기가 힘들다. 그 점은 H와 바니도 마찬가지인지, 둘의 표정도 영 좋지가 못하다. 

 

아무래도 여기서 싱글벙글한 건 이비 뿐인 것 같다. 저 낙천성이 부럽다. 진심으로. 

 

맛대가리 없는 밀가루 쪼가리를 해치우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신호가 안 잡히더니, 그래도 사람 사는 동네 근처로 왔다고 이제야 잡히는 모양이다. 

 

인터넷으로 정보라도 좀 수집해볼까 생각하던 참에, 수북히 쌓인 부재중 전화와 문자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발신자는 모두.....나랑 같이 근무하던 커넥터 유미다.

 

 

[관리자님, 갑자기 인터넷이랑 전화가 맛이 가서 다시 출근했어요 힝힝ㅠ 

관리자님도 문자 보시는 대로 나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ㅠㅠㅠㅠㅠ]

 

[관리자님? 혹시 지금 주무세요?]

 

[저 지금 중계시설 건물 안에 있는데... 라인 점검하던 로봇들이 이상해졌어요 ㅠㅠㅠ]

 

[어ㄸ떡핻요 지금ㅁᅟᅮᆫ막 두드리고있어요 저지금너무무서워요]

 

[도와주ㅈ세요]

 

[관리자님.....무사하시죠? 혹시라도 문자 읽으신다면....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건강하세요.]

 

 

...저 불길한 마지막 문자가 온 건 지금으로부터 약 두 시간 전. 분위기를 보아 지금쯤 유미가 살아있을지도 불분명하다. 근데, 그렇다고 그녀가 확실히 죽었으리라 단정지을 근거도 없고.... 

 

만약 유미가 아직 살아있다면, 어떻게든 내가 도와줘야 할 것이다. 설령 그녀가 이미 명을 달리했더라도 최소한 시신 정도는 수습해줘야 할 거고. 그 정도가 최소한의 도리 아니겠나.

 

나는 그곳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볼 생각으로 홀로그램 지도를 켜보았다. 유미가 있을 중계시설은 우리가 가야 할 경로에서 조금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멀지는 않아 보였다. 이 정도라면 시간을 조금 투자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저기, 잠깐 다른 곳을 먼저 들러야 할 것 같아.“

 

용기를 내어 입을 연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H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어주던 바니, 그런 바니의 머리를 쓰다듬던 H, 그리고 차가운 스팸을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던 이비까지. 이거 원 부담스럽네.

 

”구해줘야 할 사람이 있어.“

 

나는 부담감을 애써 억누르며 최대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나랑 같이 일하던 유미가 지금 중계시설에 갇혀서 못 나오고 있대. 

 로봇 하나가 이상해져서 길을 막고 있나 봐. 

 여기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우리 가는 길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아.

 그러니까 조금만 돌아서-“

 

땡그랑 때그르.

 

갑작스레 울린 소리가 내 말을 잘랐다.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니 이비가 떨어뜨린 스팸캔이 보였다. 그리고 이비는....또다시 어딘가 눈빛이 사나워져 있었다.

 

”That’s not advisable, sir.“

(현명한 판단이 아닙니다, 주인님.)

 

차갑고 또박또박한 목소리. 그 말인즉, 지금부터 내가 설득해야 하는 것은 닳고 닳은 전직 장교라는 뜻이다. 내 말이라면 껌뻑 죽는 순딩이 여자애가 아니라.

 

솔직히 저 친구를 말로 이길 자신은 없지만, 이제 와서 물러설 생각은 더더욱 없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이제 어떻게든 이비를 구슬려 봐야겠지.

 

”현시점에서 우리의 최우선 목표는 주인님의 생존입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대피 시설에 최대한 빨리 도달하는 것이고요. 

저는 이 일에 불필요한 변수를 늘리고 싶지 않습니다. 

사서 일을 더 어렵게 만들지 않더라도, 위험요소는 이미 필요 이상으로 넘칠 테니까요.“

 

이비가 내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나를 몰아붙였다.

 

”주인님, 외람되오나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그분과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은 게 언제입니까?“

 

”...대충 두 시간 전.“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히 많은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주인님도 아시겠지요?“

 

”...그건 그렇지만-“

 

”설령 주인님께서 위험을 감수하시더라도, 주인님이 바라시는 결과를 맞게 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것도 알아, 하지만-“

 

”이미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단호히 내 말을 자른 이비. 그녀는 성큼성큼 내게 걸어오더니, 무릎을 꿇고서는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오해하지는 말아주세요. 주인님께선 좋은 분이십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요.

 제가 감히 주인님을 사랑하게 된 것도 그런 면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친다. 

 

”하지만 지금은 좋은 사람이 될 때가 아니라, 현명한 판단이 필요한 때입니다.

 저는 주인님의 따뜻한 마음씨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만....

 이런 때에는 잠시.....양심을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부디 그 점을 명심해 주세요.“ 

 

이비의 말이 옳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살기 위해서는 조용히 내 갈 길이나 가는 편이 훨씬 낫겠지.

 

하지만 그녀의 눈에 비친 내 얼굴을 보자, 나는 도저히 그런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놈이란 걸 자각해버리고 말았다.

 

사사로운 정에 흔들려서 손해를 보는 놈. 난 언제나 그런 놈이었으니까.

 

”...이비.“

 

나도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운을 떼었다.

 

”나는 네 경험을 존중해. 지금처럼 가끔씩 드러나는 너의 판단력도 높이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내 귀에는 말이야.....

 네가 말하는 ‘현명함’이란 게 ‘몰인정함’으로 밖에 들리질 않아.“ 

 

”...주인님.“

 

”말 자르지 말고 들어줘. 아까 나보고 좋은 사람이랬지? 

 그럼 나한테서 그걸 빼면 뭐가 남는데?

 

 애초에 나는 전혀 현명한 사람이 아니야. 

 내가 네가 말하는 대로 현명했다면 애초에 너를 계속 데리고 있었을까?

 내가 그렇게 현명했다면 너와 사랑에 빠질 수 있었을까?

 한낱 도구, 그것도 원래 기능은 지지리도 못하면서 손해만 주던 도구와?

 정말로 사랑을 느끼는 건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유사 인간과?

 

 ...난 현명한 놈이 아니라고. 현명해질 수도 없고.

 

 내가 가진 건 알량한 양심 하나뿐이야.

 너랑 나를 이어준 것도 꿋꿋이 간직해온 그 양심 하나고.“

 

”...지금은 감상에 젖으실 때가 아닙니다.“

 

”나도 알아, 아는데...“

 

잠시 뜸을 들이던 나는, 내 속에 있던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네 말대로 했다간 내가 살아도 산 게 아닐거야.

 걔가 살아있었다면? 우리가 구해줄 수 있었다면? 

 그게 아니라면 시체라도 양지바른 곳에 묻어줬을 수도 있었잖아?

 ...이런 식으로 죽을 때까지 후회하겠지. 

 

 .....그러니까 부탁이야, 이비. 

 

 평생 그런 괴로움을 겪게 하지 말아줘.

 날 몰인정한 놈으로 만들지 말아 달라고.“ 

 

내가 말을 마치자, 이비는 잠시 나를 노려보았다. 화가 난 건지, 실망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가 없는 표정이었다. 

 

눈을 돌려보니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내 눈치만 보고 있는 바니와 H가 보였다. 그렇게 볼 필요 없어, 친구들. 나도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갈지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이내 이비는 내 손에서 단말기를 낚아채어 지도를 열었다. 잠시 홀로그램을 손끝으로 훑으며 곰곰이 고민하던 그녀는, 단말기를 내게 돌려주더니 가방을 들쳐멨다.

 

”현 시간부로 우선 목표를 지인분의 구출로 변경하겠습니다.“ 

 

”이비?“

 

”이동하시죠.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어딘가 차가운 눈빛이었지만, 그 속 깊은 곳에선 내가 알던 그 메이드가 보이는 것만 같다. 나는 힘겹게 입을 열어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제게 감사하지 마세요. 이 결정을 벌써 후회하고 있으니까요.“

 

이비는 그대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멍하니 얼어있던 바니와 H는 그녀의 서슬퍼런 호령에 부랴부랴 짐을 싸들고 뒤를 따른다. 

 

...이제 남은 건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유미가 무사하길 바라는 것 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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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없음. 움직이셔도 좋습니다.“

 

이비가 내게 앞으로 오라는 듯 손짓하고 있다. 수풀 뒤에 엉거주춤 숨어있던 H와 나는 허겁지겁 일어나 이비에게로 다가갔다.

 

우리는 어느덧 중계시설 근처까지 도달했다. 

 

두 메이드는 각자 무기를 꺼내 들고 우리의 앞에서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다. 인근에 어떤 위협이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우리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신중하게 이동하는 중이다.

 

[유미, 아직 거기 있어? 지금 가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폰을 확인해보니 아까 보낸 메시지에 아직 답장이 없었다. 제발 무사해라...

 

다시 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이비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붕붕대는 진동이 느껴졌다. 다급히 폰을 다시 꺼내 확인해보니, 유미에게서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관리자님? ㅇ여기 오시ㅁㅕ면 안돼요! 위ㅣㅎ험해요!]

 

다행이다. 아직 살아는 있었구나. 

 

”이비! 유미 아직 무사한가봐!“

 

이 소식을 이비에게 전했더니, 이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대었다. 조용히 하란 뜻인갑다. 

아무래도 내 목소리가 너무 컸던건가.

 

 ”....미안.“

 

그녀가 내게 가까이 오라며 손짓한다. 이비와 바니의 위치까지 가 보니, 그저께까지만 해도 내 일터였던 중계시설이 보인다. 

 

”저 쪽을 보세요, 주인님.“

 

시설 근처에선 동체 곳곳에서 붉은빛을 내는 회색 로봇 두 기가 서성이고 있었다. 아니, 로봇이라기엔 어딘가 짐승처럼 뒤틀린 모습이라, 원래 로봇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등 쪽에 나와 있는 케이블 설치 장비가 아니었으면 아마 그냥 외계 괴물이라 해도 믿었을 거다.

 

그리고 시설의 옥상에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두 로봇(이었던 것)을 쳐다보는 유미가 있었고. 고개를 내민 유미를 발견한 로봇 하나가 괴성을 울리며 벽을 두드려대자, 유미는 소스라치게 놀라 안테나 위로 기어 올라갔다. 거의 청설모 수준으로 빠르구만.

 

”저와 바니 언니가 진입하겠습니다. 

 주인님과 친구분께선 이곳에서 계속 숨어 계세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오시면 안 됩니다.

 구출에 성공하면 우리가 이쪽으로 돌아올 테니까, 절대로 나오지 마세요.“ 

 

이비가 몇 번이고 나에게 당부했다. 그러자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항의하는 바니.

 

”...이비씨, 저는 서방님을 지켜야-“

 

”저 혼자 갔다가 일이 잘못되면, 언니 혼자서 저 둘을 동시에 상대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언니 주인님을 살리고 싶으시면 제 지시에 따르세요. 반론은 듣지 않겠습니다.“

 

바니의 어깨를 탁탁 두드린 이비는 그녀를 데리고 내려가 시설 쪽을 향해 전진했다.

 

”...별일 없겠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어오는 H.

 

”잘 될 거야. 쟤들을 믿어보자고.“

 

나도 확신은 없었지만, 희망에 가까운 마음을 말로 옮겨보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이비와 바니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것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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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둘 모두 옥상에 정신이 팔려있군요. 

 제가 발포하는 것을 신호로 교전을 개시합니다.“

 

제게 고개를 끄덕여 준 바니 언니는 긴장된 얼굴을 하고 계셨습니다. 처음부터 민간사회에서만 지내셨던 분이니, 아마 실제 교전은 이번이 처음이겠지요.

 

”긴장 푸세요. 어려울 것 없습니다. 등 뒤에 붙은 배터리 팩을 노리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찰카닥, 하고 안전장치를 푸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서 해치우고 서방님께 돌아가죠.“

 

우리는 그 로봇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정말이지 이상하게 뒤틀려있던 그것들에게선 인공물의 느낌보다는 기괴한 유기물의 느낌이 더 진하게 풍겨왔습니다. 그동안 나름 오래 살면서 볼 건 다 봐 왔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건 정말 처음 보는군요.

 

목표로부터 대략 30m. 정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입니다. 저것들은 아직도 건물 벽을 쾅쾅 두들기며 포효하느라 바빠 우리가 접근하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등 뒤에 커다랗게 붙은 배터리팩도 보입니다. 뭐가 됐든 일단은 로봇인 이상, 동력이 차단되면 그대로 멈출 수 밖에 없겠죠.

 

마침 두 목표는 편리하게도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이건 놓칠래야 놓칠 수가 없을 겁니다.

 

”전진하면서 사격 개시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만 하세요.“

 

바니 언니를 돌아보았더니, 어딘가 안색이 좋지 않았습니다. 

 

”...괜찮으십니까?“

 

”ㄴ-네, 괜찮습니다. 조금 긴장했을 뿐이예요. 준비됐어요.“

 

우리는 조용히 일어서서 그 로봇들에게 무기를 조준했습니다. 바니 언니에게 끄덕여 준 뒤, 저는 조정간을 단발로 내리고 배터리팩에 7.62mm 탄 세 발을 꽂아 넣었습니다.

 

그대로 힘 없이 무너져내린 로봇. 하지만, 그 옆의 다른 녀석은 아직까지 멀쩡합니다.

 

....놈이 우리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저는 제 옆의 바니 언니를 소리쳐 불렀습니다. 

 

”바니!“

 


 

  

 

”이....인간님이잖아요...“

 

바니 언니는 소총까지 놓아버린 채로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저걸 보고 인간이라뇨?

 

아니,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어느새 그 로봇은 땅을 박차고 우리에게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놈이 우리에게 달려들려던 순간, 저는 바니 언니를 멀리 밀쳐 냈습니다. 놈은 지나간 자리의 흙을 모조리 파헤치며 바니 언니의 뒤에 있던 굵은 나무에 충돌해버렸습니다.

 

놈이 다시 몸을 일으키기 위해 들썩거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때를 틈타 바니 언니에게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올렸습니다.

 

”뭐하시는 겁니까? 얼타지 말고 정신 차리세요!“

 

”하지만....저 분은....인간...“

 

”정신 나갔습니까? 저게 어딜 봐서 사람이예요!“

 

”뇌-뇌파가...“

 

그 순간, 놈이 몸을 일으켜 우리에게 고개를 돌렸습니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카메라가 붉은 빛을 뿜어내며 저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일단 뛰어요!“

 

놈은 황소마냥 우리에게 달려들었고, 놈의 삐죽삐죽한 동체가 콘크리트 벽에 부딪히자 크고작은 파편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습니다. 

 

간신히 몸을 피한 저는 놈에게 계속해서 사격을 퍼부었지만, 녀석은 자신의 약점이 어디인지를 알고 있는 것처럼 재빨리 몸을 돌려 배터리팩을 가려버렸습니다.

 

”바니 언니!“

 

바니 언니를 불러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넋이 나간 듯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거기 인간 분, 진정하세요!“ 하며 이 고장난 기계와 대화를 시도하고 있을 뿐이었지요. 

 

”바니-“

 

결국 놈의 뒷발에 채여 한 방 먹었습니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입에서 절로 납니다. 너무 아프네요. 저를 밀쳐낸 로봇이 쿵쿵거리며 제게 다가옵니다. 

 

그 순간, 바니 언니가 달려와 놈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미치셨습니까, 인간분? 이러시면 안됩니다!“

 

그녀가 마치 평범한 인간을 제압하기라도 하는 듯, 놈의 팔에 해당하는 부위를 잡아끌었습니다. 놈은 카메라를 돌려 바니 언니를 쳐다보고는, 그대로 팔을 휘둘러 그녀를 쓰러뜨렸고요. 

 

격분한 고릴라처럼 두 팔을 휘두르던 로봇은, 아직 고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언니에게 달려들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저도 몸을 일으키긴 힘들지만, 이대로 뒀다간 제 눈 앞에서....

 

또다시....

 

좆까.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것 같냐.

 

 

 

 

 

저는 순식간에 몸을 날려 놈과 바니 언니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조정간을 자동으로 올려놓고 쉴 새 없이 로봇의 전면 코어에 철갑탄을 박아넣었습니다.

 

놈의 유기물같은 모양을 한 장갑이 뜯겨져 나가더니, 이내 코어가 손상되며 놈은 작동을 정지했습니다. 로봇이 기름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닐 텐데, 탄흔이 가득한 녀석의 동체에서 흡사 혈액과도 같은 액체가 흘러내립니다. 

 

”...이-이비 씨...“

 

바니 언니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 로봇에게 소총을 겨눈채로 언니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무사하십니까?“

 

”...아뇨. 아파 죽겠습니다.“

 

”그럼 무사하신 겁니다.“

 

사실은 저도 아파 죽겠지만요. 아까 놈에게 걷어차였던 명치 부근에서 다시 고통이 올라옵니다. 잠시 그곳을 부여잡고 인상을 찡그리고 있으려니, 언니께서 제게 말을 붙여오셨습니다.

 

”저기...아까 일은...“

 

”...뇌파, 라고 하셨습니까? 중요한 이야기 같으니 잠시 뒤에 자세히 말씀하시죠.

 우선은 당장 해야할 일이 먼저니까요.“

 

저는 우리 위쪽, 시설 지붕을 가리켰습니다. 그곳에 매달려 있던 작은 바이오로이드가 우리에게 외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으아아아앙! 저 좀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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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이제 안전합니다. 당장은요. 그러니 얼른 내려오세요.

 총성을 들었으니 놈들이 더 몰려올지도 모릅니다.“

 

저는 안테나 위에 찰싹 달라붙은 ‘커넥터 유미’에게 재촉했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울먹이며 대꾸하길,

 

”그...저도 그러고 싶은데요...흑흑...못 내려가겠어요....“

 

.....저와 바니 언니는 잠시 서로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럼 아까는 어떻게 올라가셨는데요?“

 

”그게, 너무 무서워서...흑... 저도 모르게.....눈 떠보니....히끅, 여기였어요...

 저... 내려가는 법을 모르겠어서...사다리라도 좀 찾아주시면....“

 

”Oh for fuck’s sake.“

(씨바 지금 장난하나.)

 

 

....앞으로 주인님 부탁 들어드리는 건 신중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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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도 못그리는 그림인데, 유독  슬럼프인지 이번엔 잘 뽑히질 않은 느낌이네요.


매번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피드백과 감상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즐거운 일요일 되세용


+덧.

모음집 링크에 각 회차별 한줄 요약을 추가해 두었습니다. 

있는 쪽이 나을지, 그냥 그림과 링크만 있는게 나을지, 여러분의 의견이 궁금합니다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