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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목표인 젤리 캔디는 15시 정각부터 15시 13분 사이에 일반 기록물들이랑 섞여서 함장실로 올라갈 거야. 운반원은 방주 기록물 분석반인 오렌지에이드고."


빔 프로젝터로 투영된 사령관실의 도면이 어두컴컴한 브리핑 룸의 벽면에 훤하게 비쳤다. 장화의 손에 들린 레이저 포인터가 X자로 표시된 일곱 군데를 차례 차례로 짚어가며 원을 그렸다. 다리를 꼬고 의자에 느슨하게 몸을 기댄 천아는 버터플라이 나이프를 가볍게 던졌다 받으며 포인터를 따라서 반듯하게 쓰여진 장화의 글씨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공중에서 휘릭휘릭 돌아가는 바이트 핸들의 소리와, 천아의 손에 안착하며 찰칵! 하고 엣지와 세이프 핸들이 맞물리는 소리. 장화는 거슬리는 소음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이내 그런 기색을 지우고 설명을 이어갔다.


"설치된 카메라는 총 일곱 대. 4대는 함내 전산망에 연결된 폐쇄 회로 텔레비전이고, 3대는 앵거 오브 호드 숙소로 연결되는 무선 카메라야. CCTV만 주의해야 한다면 이용할 사각은 꽤 나오겠지만, 무선 카메라의 시야 반경까지 합해지면 사실상 사각이 나오진 않을 거야. 그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겠지?"


찰칵!


급작스럽게 크게 울린 쇳소리. 장화는 참다 못해 한 마디 했다.


"...그것 좀 그만하면 안 돼?"

"아아, 집중할 때 나오는 버릇이라서."

"허어, 집중은 하고 계신 거였어? 그냥 앉아서 화면 보고 멍이나 때리길래, 나는 우리가 왜 이 짓거리 하는 건지 아예 까먹으신 줄 알았지."

"흥."


천아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탐탁찮은 눈으로 쳐다보는 장화에게 시리게 웃어 보이며, 천아는 내용을 되읊어주기 시작했다.


"목표물은 방주에서 발견된 엠프레시스 하운드의 임무 수행 영상 기록 두 편. 각각 너와 내가 찍힌 동영상이고, 출처는... 너는 여제님 휘하의 사람들이 앙헬에게 매수되어서 의도적으로 흘린 정보라는 가설과, 우리에게 붙었던 작전 완수 확인 겸 감시용 드론 영상이 멸망 통에 제대로 회수가 안 돼서 딥 웹 등지로 퍼져나갔을 거라는 가설 두 가지를 제시했지만... 나는 후자가 더 그럴듯하다고 생각해. 일단 내용을 확인하면 어느 쪽인지 확실해지겠지만, 어쨌건 지금 그게 어디서 새어나간 거냐가 중요한 건 아니고..."


천아는 집게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방주 내의 기록실을 파괴하는 건 요란하기도 하고 이력이 남아서 들킬 게 뻔하니까 그대로 두고, 핫팩이 못 보도록만 하면 되니까 보고가 올라가는 도중에 가로채서 우리가 파기하는 게 전술목표. 네가 함장실 외부에서 소란을 일으켜 시선을 끌면, 함장실 안에서 핫팩이랑 노가리 까고 있던 내가 슬쩍해간다. 젤리 캔디는 아직 식별되지 않은 기타 영상물 분류라서 일단 붉은 색 USB로 집어오면 된다고 했고... 끌 수 있는 시간은 대략 30초 정도 예상한다고 했으니, 그 정도면 차고 넘치지. 카메라 일곱 대 쯤은 이 언니가 알아서 피하면 되고."


얄밉게 싱긋 웃는 천아를 장화는 마음에 안 드는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공교롭게도 트집 잡을 구석은 없었다.


"뭐... 온갖 잡동사니랑 정크 데이터가 그득한 저 방주에서 그걸 먼저 찾아서 선수쳐서 알아내고, 언제 보고가 올라가게 될 건지까지 어떻게 파악했는지는 나야 모를 일이지만... 안 봐도 고생 좀 했겠지? 그래도 연산 모듈을 괜히 달고 있는 건 아닌가 봐."


비꼬는 것처럼 들려도 천아는 나름 치하한다고 한 소리였다. 장화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짜증나는 말투를 굳이 잡고 늘어지진 않았다. 이젠 마지막 확인만 남았다. 장화는 으레 받는 쪽이었던 다짐을 자기가 받게 된 상황이 퍽 신기했다. 


"...혹시라도 우리 둘 중 하나가 발각되면, 알지?"

"그럼, 알지. 우리 방식. 서로 이 일에 대해 일절 모르는 거고, 단독범이라고 우기면서 혼자 뒤집어 쓴다. 근데, 들키더라도 실행범인 내가 들키겠지. 너는 별로 걱정할 일 없을 거 같은데?"

"...아마추어같이 들키지나 마."

"하, 자기 걱정이나 하셔."


브리핑이 끝나고, 장화는 그렇게나 공들여서 손수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주석을 단 설계도를 미련 없이 잘게 찢고 구겼다. 어차피 내용은 머릿속에 명확하게 남아 있으니, 전달이 끝났으면 안전하게 처리하는 것이 후환이 없었다.


"자, 그럼 견적은 나왔으니까... 일 하자, 일!"

"그래, 각자 위치로."


둘은 서로에게 덕담같지 않은 덕담을 남기고 회의실을 나서서 정반대 방향으로 흩어졌다.



**



"아하하, 그래서 그때 있지~"


사령관실의 널찍한 업무용 책상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대고 걸터앉은 천아는, 두 발을 번갈아 물장구치듯 휘두르며 즐겁게 재잘거리고 있었다. 자리하고 있는 곳은 바로 사령관의 대각선 앞. 아슬아슬한 스커트로 시선을 향하려다가 뜨끔하면서 다잡는 핫팩을 코앞에서 골려줄 수 있으면서도 구석과 모서리에 위치한 카메라 세 대를 등으로 가로막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천아의 개인적 욕구와 작전의 원활한 수행을 동시에 만족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진심으로 그 순간에 이루어지는 대화를 즐기는 와중에도, 천아의 눈은 계속 시계를 향하고 있었다. 대여섯 번쯤 분침을 쳐다보았을 때, 드디어 사령관실의 벨이 울렸다. 예상 시간 안이었다.


"저, 사령관니임~ 방주 기록물 이전 승인 받으러 왔는데요오~"


눈에 띄게 지친 티를 내는 애교스러운 목소리. 사령관은 천아에게 눈짓하며 잠시 양해를 구하곤, 문을 열어 오렌지에이드를 맞아들였다.


"어휴, 무거워... 끙차!"


낑낑대며 들어온 오렌지에이드는, 여러 하드 디스크와 플로피 디스켓, USB 따위가 담긴 상자를 책상 위로 내려놓았다.


"응, 왔어? 오늘도 수고가 많네."

"에효~ 누가 자꾸 외근 시켜서요. 자, 여기 말씀하신 데이터들 왔어요. 이번엔 B-72 구획에서 뽑아온 자료들이에요. 텍스트도 있고, 이미지도 있고, 영상 자료도 있는데... 사령관님이 반입 허가 내주셔야 해석 팀에서 선별해 줄 거예요."

"음... 그래?"


사령관이 미심쩍은 눈으로 상자 안을 살피고 있을 때, 오렌지에이드는 살갑게 손을 흔들며 "천아 씨 안녕~"이라고 인사해주고 있었다. 천아는 앞으로 그녀에게 벌어질 일에 조금은 켕기는 게 있었지만, 그래도 미소로 화답하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상자 안을 뒤적이던 사령관은, 유난히 눈에 띄는 빨간 USB를 집어 들었다. 식겁한 천아는 속으로 헛숨을 삼켰다.


"뭐 이상한 물건 있는 거 아니지? 애들이 보면 안 되는 불순한 매체라든가..."

"에헤이~ 그런 건 이미 함내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는데 굳이..."

"뭐?"

"..."


사령관의 반문에 화들짝 놀라서 말문이 막힌 오렌지에이드는 스스로 방정인 입을 손바닥으로 짝! 소리가 나게 후려쳤다.


"어, 어머! 내 정신 좀 봐! 알파 님이 시키신 일이 있었지... 저 다시 외근하러 나가볼게요~"

"야, 야! 어디 가! 뭘 어디서 충분히 본다고? 야!"

"그럼, 수고하세용~"


명백히 부자연스러운 태도와는 다르게, 빠르게 총총거리는 걸음은 자연스럽게 사령관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젤리 캔디를 내려놓은 사령관은 이마를 짚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에휴... 싫어하는 아이도 있을 테니까 함부로 찍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했을 텐데..."


그래도 아직까지는 낯부끄러운 주제였다. 천아는 괜히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웠다. 나도 언젠간 조심해야겠네.


그리고...


턱! 쿠당탕!


"꺄악! 아이코..."

"칫, 뭐야..."

"아, 장화 씨? 미, 미안해요..."

"앞 똑바로 안 보고 다닐래?"

"아, 아 죄송합니다..."


약속처럼 문 밖에서 들리는 소음. 천아는 신경을 곤두세우며 슬슬 몸의 긴장을 풀었다. 작은 소란은 슬슬 위험한 기운을 풍기며 사령관실 안으로도 번져나갔다.


"...잠깐."

"에?"

"너... 지금 어디서 나오는 길이야?"

"네, 네? 저..."

"...또, 또...! 너... 너! 내 남자랑... 무슨 얘기 했어?"

"아, 아니, 저는..."

"날 두고... 한눈을 팔았어...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그랬지..."


명백하게 끼쳐오는 불온한 기색. 사령관은 팔걸이를 붙잡고 다급하게 일어났다. 나이스. 천아는 장화의 시선 끌기에 속으로 감탄했다. 어째 갈수록 연기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자, 잠깐 천아야. 나 나갔다 좀..."


사령관의 눈이 천아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행동 개시였다. 장화와 천아가 하려는 일은 근본적으로는 마술 쇼와 다를 것이 없었다. 마술사가 관객의 주의를 화려하게 움직이는 왼손으로 교란하는 순간, 미처 신경쓰지 못하는 오른손에서 속임수가 일어나는 방식. 천아는 등 뒤로 멀어지는 발소리를 느끼며 책상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젤리 캔디를 시야에 고정시켰다.


등 뒤에 있는 카메라 세 대는 천아가 책상 위에서 무슨 짓을 벌이건, 등으로 가로막은 사각지대를 벗어나지만 않으면 아무 것도 잡지 못할 것이다. 입구 쪽 구석에 설치된 카메라 두 대는 낮은 시야각으로 책상 위를 포착하지 못하고, 천아와 마주보는 카메라만이 천아와 책상에 놓인 젤리 캔디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기이익-


천아는 발끝으로 슬며시 의자를 돌려서 젤리 캔디와 마지막 카메라 사이를 가렸다. 모든 카메라에 자신의 손동작이 찍히지 않을 가동 범위를 계산하고, 팔을 재빨리 내뻗어 회수하면 끝. 수십 군데의 급소를 초 단위로 훑어낼 수 있는 천아에겐 손쉬운 일이었다. 그 어떤 카메라에서도 천아는 책상 위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언제나 변수는 있는 법이었다.


책상 모서리를 반쯤 넘어간 채로 걸쳐져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고 있던 젤리 캔디는, 쾅! 하고 문이 닫히자마자 붕 떠오르며 책상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안 돼. 동작이 너무 커지겠어. 천아는 책상 밑으로 떨어지려는 캔디를 따라 몸을 기울였다. 그런 천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책상 아래를 비추는 새까만 렌즈.


"..."


책상 밑에 설치된, 여덟 번째 무선 카메라였다. 천아는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을 받았다. 모르고 있던 변수가 새로이 발견된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게다가 책상 밑은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바이오로이드를 두셋 정도 수용하고도 남을 정도로 널찍했다. 이렇게 장애물도 없이 탁 트인 곳에서 눈속임을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치를 부릴 성격은 아닐 텐데 왜? 


하지만, 천아 역시 스페셜리스트였다. 변수 하나, 둘 쯤은 문제 없이 이겨내고 목표를 달성했던 건 셀 수도 없었다. 이미 젤리가 허공으로 뛰어오른 순간부터 천아의 팔은 내뻗어지고 있었다. 짤그랑. 쇠가 부딪히는 맑은 소리와 함께 소매 속에서 천아의 버터플라이 나이프가 튀어나왔다.


공교롭게도 발리송의 좁은 손잡이는, 빨간 젤리 캔디의 너비와 꼭 맞춘 것처럼 똑같았다.


깔끔하게 정돈되어서 접힌 묵직한 발리송이 천천히 돌아가며 떨어졌다. 그대로 책상 밑으로 추락하며 카메라와 젤리 캔디의 사이에 끼어든다. 이미 손끝의 감각만으로 조정은 맞춰 두었다. 허공에서 곤두박질하는 길쭉한 쇳덩이와 빨간 플라스틱 조각은, 공교롭게도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처럼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한 회전수로 바닥을 향해 회전했다.


책상 밑의 카메라에는, 홀로 부드럽게 돌며 떨어지는 철제 버터플라이 나이프 밖에 보이지 않는다.


착!


천아는 '실수'로 소매에서 흘렸던 나이프를 바닥에 닿기 전에 주웠다. 기울인 머리가 책상 밑의 카메라와 딱 마주치자, 혀를 내밀며 멋적게 웃어주었다. 바닥에는 아무 것도 닿은 게 없었다.


문 밖의 소란이 잦아들고, 사령관은 이마를 훔치며 도로 들어왔다.


"에휴, 참... 진땀 뺐네. 업무 때문이었다고 말을 해도 계속 추궁을 하니 원..."


사령관은 어느새 몸을 바로 세운 천아가 들고 있는 버터플라이 나이프를 보았다.


"...그건 뭐야? 함내에서 무기 반입 못 하지 않던가?"

"아~ 이거? 그냥 손 심심할 때 갖고 노는 장난감이야, 장난감. 봐봐. 날도 다 빼 놓은 스틸 블런트라고?"


천아는 능숙하게 손 안의 버터플라이 나이프를 휘릭휘릭 돌렸다. 철컥거리며 돌아가는 두 자루의 손잡이와 하나의 칼날. 묘기를 부리는 손바닥 안쪽에 뭐가 숨겨져 있는 지는, 지금은 천아만이 알 것이다.


철컥!


화려하게 돌아가던 발리송이 깔끔하게 접히며 천아의 손 안에 들어왔다. 사령관은 마뜩찮게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신고는 해 둬. 나 때문이 아니라, 아르망이나 알파가 알면 난리 친단 말이야."

"후후, 과보호네~ 알았다구, 핫팩!"


어쨌건, 임무는 깔끔하게 완료였다.



**



어둑어둑한 회의실. 장화는 홀로 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저 담담하게 눈을 감고 여유있게 기다리는 것처럼 보여도, 산만하게 책상을 두드리는 초조한 손가락은 숨길 수가 없었다.


덜컹!


회의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장화의 눈이 번쩍 뜨이며 천아를 향해 돌아섰다. 문이 닫히고, 장화가 가장 먼저 물어본 것은 뻔했다.


"...성공?"


천아는 말없이 손바닥 위의 붉은 USB를 보여주었다. 안도의 한숨을 쉰 장화가 천아에게로 다가가려는 그때, 장화의 발치에 발리송이 날아와 꽂혔다.


푹!


"...무슨 짓?"

"일 똑바로 안 해? 너 일부러 누구 엿 먹이려고 몰카 하나 더 있는 거 말 안했냐?"

"...카메라가 하나 더 있었다고?"

"그래, 이 등신아! 7개가 아니라 8개라고! 사령관실 책상 밑에 있는 거 몰라서 나 좆될 뻔 했잖아!"

"설마 들켰..."

"이 년이 끝까지 사람 열받게 하네... 들켰으면 내가 왔겠냐? 그리고, 지금 그 얘기보다 먼저 할 말이 있지 않아?"


착 가라앉은 어조와 싸늘한 눈빛. 장화는 빼도박도 못하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하, 참... 뭐야, 대체? 진짜로 눈까리가 삐어서 못 봤다고 할 셈?"

"하, 하지만..."

"하지만, 뭐?"

"다, 답사 갔을 때... 걔가 업무 보고 있어서 차마 비켜달라고 말 못했단 말이야..."

"...하아."


결국, 이런 이슈였군. 천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이젠 더 혼낼 생각도 들지 않았다.


"...됐고, 빨리 파기하기나 하자."


천아는 USB를 손가락 끝으로 집어들었다. 가볍게 힘을 주려는 그때, 장화가 급하게 제지했다.


"잠깐."

"왜?"

"내용물까지 확인해야지."

"...그렇긴, 하네."


장화는 가져온 개인 단말에 USB를 연결했다. 천아는 머뭇거리며 장화의 등 뒤에서 화면을 지켜보았다.


둘 앞에 나타난 검은 화면은 이내 흐트러지고, 영상이 재생되었다.


『좋아, 견적은 완벽하고... 자, 이제 춤 한번 춰볼까?』


"..."

"..."


『흐흐, 한 놈 더! 이 손맛이 진짜 오진단 말이야~』


"...너 원래 작전할 때 혼잣말 저렇게 했어?"

"씨이입... 닥쳐어..."


천아는 스스로의 멋짐에 도취되어 있는 과거의 자신을 적나라하게 지켜보며 치솟아오르는 오글거림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잔뜩 후까시가 들어가서는 과장된 동작에, 과도하게 여유를 부리는 행동... 그 때야 저게 멋있다고 생각했겠지. 천아의 어금니가 꽉 앙다물렸다. 


그리고 문득, 영상 속의 천아가 카메라를 인식했다. 그리곤...


『뭐야, 훔쳐 보는 쥐새끼가 있었네?』


"하, 하지 마..."


『메에에롱~』


"그만 해, 이 미친 년아..."


혀를 내밀며 눈 밑을 주우욱 내려 대놓고 카메라를 향해 조롱하는 천아. 그리고 뒤이어서 무언가가 날아오고, 렌즈에 금이 가며 동영상이 끝났다.


"씨발... 씨바알...!"


몸을 타고 흐르는 수치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천아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마구 헝클어뜨렸다.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저런 건 절대로 핫팩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


과거에 저지른 과오에 사로잡혀 있는 천아를 두고, 장화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 그래... 뭐, 물건은 확실한 것 같네. 이젠 파기하..."


텁!


어느새 천아가 일어서서 장화의 태블릿을 붙잡았다. 핏발 선 눈은 장화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네 것도 확인 해야지?"

"아, 아니... 굳이..."

"아니~ 이런 건 '확실하게' 해야 하지 않아?"

"자, 잠깐만! 내놔!"


머리 위로 멀어지는 단말을 향해 장화는 깡총깡총 뛰며 팔을 내뻗었다. 하지만, 신장 차이도 그렇고 기민하면서도 민첩한 손놀림도 그렇고, 천아는 그렇게 쉽게 뺏길 위인이 아니었다.


"야, 야! 하지 마!"

"꺼져 봐! 너도 보자, 네 것도...!"


이젠 절박한 투로 쫓아다니고 있는 장화의 호소에도 아랑곳않고, 천아는 이리저리 피해다니면서도 용케 장화의 파일을 찾아 재생했다. 그리고...


『아하하하하하하! 그래, 다 불타버려! 내 고통도... 징그러운 과거도!』


"푸합!"

"야아아!!!"


갑자기 뻗어나온 힘찬 발성에 천아가 격하게 뿜었다. 분노와 항의를 담아 외친 장화는 그대로 천아에게 달려들었다.


덜컹!


둘이 격돌하려는 찰나,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둘의 눈이 경악으로 동시에 휘둥그레지며 침입자를 쳐다보았다.


"...아, 미안. 여기 원래 안 쓰는 곳이라 빈 줄 알고."


뜻밖의 불청객은, 사령관이었다. 장화는 화들짝 놀라며 천아가 치켜든 태블릿을 쳐다보았다. 천아는 어느새 태블릿을 등 뒤로 숨기며 땀이 어린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 짧은 새에 언제 정지했는지, 소리도 더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야, 핫팩! 들어올 땐 노크해야 할 거 아니야!"

"아니, 불도 다 꺼놔서 사람 있는 지 몰랐지... 둘이 뭐 보고 있었어?"


등 뒤로 숨긴 태블릿 끄트머리가 여전히 눈에 띄었다. 천아는 눈에 띄게 당황해하며 장화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짓을 했다. 하지만, 사령관 앞에만 서면 고장나는 연산 모듈이 여기서 뾰족한 수나 변명을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동안 눈알을 굴리던 천아는, 분위기가 더 부자연스러워지기 전에 말했다.


"야, 야, 동... 보고 있었어..."

"...!"


부릅뜬 장화의 눈이 천아에게로 향했고, 천아는 등 뒤로 돌린 손으로 장화의 팔뚝을 꼬집으며 장화를 닥치게 했다.


"...어, 어... 그, 그래... 미안..."


시원스러울 정도로 빠른 고백에, 사령관은 어물거리며 물러났다. 그야, 발각된 걸 당혹스러워 하며 숨기려는 둘의 태도와, 지나치게 어두운 조명까지 합하면... 꽤나 납득이 되는 변명이었다. 남자로서는 더 파고들기 뭐한 주제이기도 했고.


"어... 잘 봐..."


달칵.


그 능숙한 사령관도 할 말이 없었는지, 저렇게 지리멸렬한 말을 남기며 문까지 소리 없이 닫고 물러나지 않았는가? 천아의 대처는 그래도 나름 최선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


방 안에 남은 두 소녀는, 상처 뿐인 승리를 손에 쥐고 망연해하고 있었다. 이게 승리라면,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흑역사를 없애려던 둘은, 오늘 새로운 흑역사를 만들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