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TR물, 후회물, 피폐물 그런거 아닙니다.)

모음집



나는 두번째 인간이다.

원래는 폰에 라오 깔려있는 평범한 라붕이였는데 어쩌다보니 라오 세계관에 오게 됐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건지는 묻지마라 나도 모르니까.


아무튼 난데없이 멸망 후의 세계에 떨어졌다가 저항군 탐색부대와 마주쳐서 이 오르카호에 들어오게 됐다.

듣자하니 여긴 나보다 먼저 발견된 인간 사령관이 있는 모양이라 내가 승선하자마자 사령관이 되는 전개가 일어나진 않았다.

어찌보면 다행이지. 공략없이 스테이지 못깨는 내가 지휘했어봐, 스토커도 못잡고 오르카호 침몰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기 막 들어온 뒤 신체검사 받으며 겸사겸사 오리진더스트 주사맞았는데 어우 진짜로 호랑이 기운이 넘치더라, 약빨쩌네.

다프네가 말하기를 휩노스 병 막으려고 오리진더스트를 소량 투여한건데 이건 임시조치라 주기적으로 맞던가 아님 제대로 시술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 시술이 뭔지 알려주진 않았지만 게임에서 봐서 뭔지 안다, 생체재건장치 그거. 물론 굳이 아는 척 하진 않고 대충 그렇구나 하고 넘겼다.


신체검사 마치고 나서 사령관과 만나 면담하게 됐는데 여기 사령관은 원작 주인공인 그 빛간 사령관인걸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멸망 전 좆간으로 판명되면 즉결처형 될지도 모르니 얘기하면서 나는 무해한 인물이라고 나름 열심히 어필했다.

하렘물 세계관에 들어왔는데도 내가 그 하렘의 주인공이 아닌건 아쉽지만 이게 현실인 걸 어쩌겠어, 바싹 숙이고 떡고물이나 받아먹어야지.


사령관에게 들은 말을 종합해서 유추해본 결과 여긴 8지역 깨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한창 오메가한테 날이 서있을 때였다.

내가 펙스의 첩자가 아닌가 한순간 의심 받았지만 지들이 생각해도 에바였는지 그 의혹은 금방 풀렸다. 쌩쌩한 인간 남자 만들어낼 기술력이 있으면 진작에 일곱 회장부터 부활시켰겠지.


면담에서 좋은 인상을 보이는 데 성공한 건지 대화가 끝날 즈음엔 사령관의 날 보는 표정이 좀 밝아진 것 같았다. 사령관 옆에 서있던 리리스는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사령관이 대뜸 부사령관직에 앉을 생각 없냐하자 단칼에 거절했다, 부사령관이면 사령관만큼은 아니여도 일거리도 엄청 많을 거 아냐? 무엇보다도 내 입지가 간당간당한 시점에서 그런 높은 자리를 덥석 받았다간 다시 의심받을거다.


결국 내 자리가 결정될 때까지는 손님으로서 머무르게 됐다. 사령관이 호위 겸 안내역으로 내 옆에 페로를 붙여주게 됐다, 물론 실질적으론 감시역이다. 

멸망한 세상에서 의식주와 안전이 보장됐으니 만족했다, 저 양반이 내 생사여탈권을 쥐고있으니 완벽한 안전은 아니지만. 사령관 명령 한마디면 여기있는 페로의 손톱에 내 목이 땅에 떨어질게 뻔하다. 그래서 사령관 눈밖에 나지 않으려고 알아서 몸 사리고 다녔다. 


오르카호의 대원들 대부분, 특히 지휘관 개체들이 나를 경계하는 분위기였지만 경계심이 옅은 몇몇과는 친해질 수 있었다.

좌우좌나 알비스같은 꼬맹이들과 역할극하며 놀기도 하고,

밤에 출출해서 주방에 들어가 스팸 굽다가 야간순찰중인 브라우니랑 마주쳐서 입막음용으로 스팸 한점 건네주기도 하고,

바쁜 사령관 대신 하치코와 켈베로스 산책시키기도 하고, (물론 목줄 채우고 뛰었다거나 한 건 아니고 나란히 서서 조깅했다.) 

AGS 격납고에 구경가서 로봇 개멋지네 했다가 포츈의 열렬한 로봇강의를 듣기도 하고,

내 방 치워주는 바닐라한테 수고한다고 인사했다가 괜히 매도만 들어서 뻘쭘해지기도 했고, 아 이건 친해진 게 아닌가.

한번은 정원 구경 갔다가 리제가 해충구제라며 거대한 가위 들고 위협했던걸 레아랑 다프네가 뜯어말린 적도 있었다. 역시 얀데레 무서워.


그렇게 내가 오르카호에 승선하고 아다 유지하며 조용히 지낸 지 일주일 째


내 퇴출이 결정됐다 이런 씨벌


지휘관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이라는데 대체 무슨 뒷담화가 오간거야, 누가 스정게에 후회물 소설이라도 올려서 다들 예민해졌나? 

내가 뭐 금태양처럼 행동한 것도 아닌데 뭐가 불만인건데, 나도 NTR 싫어한다고오오


심지어 생체재건장치로 나한테 새 몸 만들어주지도 않아서 오리진더스트 약빨 다 떨어지면 휩노스 병으로 뒤지는 거다, 아님 그전에 철충한테 발견돼서 총알세례 맞고 뒤지겠지. 

말이 퇴출이지 그냥 사형이잖아 이거.

그렇다고 불만을 토로할 수도 없다, 여기까지 온 시점에서 입 잘못 뻥긋했다간 즉결처형으로 바뀔테지.


그나마 배웅하러 온 사령관은 미안하다고 사과하더라. 야임마 미안하면 변호해줬어야지, 하다못해 요안나 아일랜드같은 후방 기지로 보냈어도 되잖아.

호위라도 한명 붙여주겠다고 한 거 그냥 거절했다. 호위가 있으나 없으나 어차피 죽을텐데 쒸이뻘.

여기와서 조금 친해진 바이오로이드들이 있긴해도 사령관을 버리고 날 따라오겠다고 하는 애는 없었다.

8지역까지 왔으면 다들 사령관한테 호감도 만땅일텐데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겠지.


그러나 딱 한명.

좌우좌가 작별선물이랍시고 격려와 함께 자기 소방도끼를 선물해줬다.

등대에서 100년을 혼자 살아온 그녀의 곁을 지켜줬던 보검을, 나에게 하사하였다.

투박한 글씨로 DRAGON SLAYER라고 적힌 소방도끼를 손에 꼭 쥐고 맹세했다. 반드시 살아남으리라.


그렇게 해서 나는 생존키트랑 비상식량 바리바리 싼 가방을 매고 한손에는 낡은 소방도끼를 든 채 오르카호가 정박해있는 해안가에서 내렸다. 


인생 씨벌...


*


사령관은 외로웠다.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수백여명의 미녀들에게 둘러쌓여 있음에도 외로움을 느꼈다.

이유인 즉슨 자신 한명만이 유일한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자매기나 부대원끼리 사이좋게 담화를 나누는 바이오로이드들을 보며 자신에게도 솔직한 얘기를 나눌 동성 친구가 있었으면 했다.

만약 또 다른 인간을 찾는다면, 그리고 그 인간이 멸망 전의 인류같은 악인이 아니라면,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허황된 꿈을 얼마나 꾸었을까,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었던 일이 눈앞에 벌어졌다.


두번째 인간이 발견된 것이었다.


사령관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계했다, 테마파크의 참혹한 흔적을 직접 본 적이 있는 만큼 그 두번째 인간이 악인이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다.

그러나 사령관이 직접 두번째 인간과 대면한 결과 그가 걱정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바이오로이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불쌍한 애들이죠.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아 물론, 제가 남들더러 불쌍하다고 할 처지는 못되지만요."


두번째 인간의 입에서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나온 대답이었다.

그는 바이오로이드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해주면서도 멸망전 그녀들이 받았던 처우를 안타까워했다.

듣자하니 그가 살았던 곳은 바이오로이드가 없었기에 그는 과거 바이오로이드를 화면 너머로만 봤을 뿐 직접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했다, 그렇기에 제 3자 시점으로 인간의 악의를 관찰할 수 있었던 거일지도.


"오르카호에 온 것을 정식으로 환영합니다. 당신에게 부사령관직을 맡기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 거절하겠습니다."


"...?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높은 자리에 앉으려면 그만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데, 저는 그럴 능력이 못됩니다."


그는 겸손한 태도로 막대한 권력을 쥐는 것을 거절했다. 한번 떠보기 위해 던져본 질문이었는데도 사령관은 벌써 이 사람이라면 정말로 부사령관을 맡아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일단은 그 두번째 인간을 손님 신분으로 승선시키고 탈론 페더와 페로의 감시망을 통해 지켜봤다. 

그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바이오로이드들에겐 굳이 먼저 다가가지 않고 언행을 조심하면서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바이오로이드들에겐 친절하게 대했다. 


일주일 동안 지켜본 결과 사령관은 그가 충분히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휘관들에겐 아니었다. 두번째 인간이 저자세로 나오는 것은 분명히 숨죽이고 쿠데타의 기회를 노리는 구밀복검의 자세일거라 의심했다.

지휘관들은 두번째 인간을 위험분자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멸망 전부터 인간의 악의를 봐왔던 불굴의 마리가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에 사령관은 흔들렸다, 역시 자신이 너무 섣불리 믿은걸까, 다른 인간을 처음으로 본 자신보다 그들이 더 잘 알지 않을까.

결국 두번째 인간을 오르카에서 추방하기로 결정됐다. 이 사실을 그에게 전달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걱정했다.

회의 결과를 들은 두번째 인간은 당연히 놀랐다, 여기까진 예상했다. 그러나 그 다음 그는 사령관을 욕하거나 화를 내지도 않았고 비참하게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았으며 체념한 듯 빠르게 받아들였다.

보다못해 호위라도 붙여서 보내겠다고 했지만...


"아뇨, 괜찮습니다. 여기 있는 애들은 다 당신 가족인데 누구한테 당신 곁을 떠나라고 시키겠다는 겁니까."


그것마저 거절했다. 사령관은 다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정말로 이 자가 악한 본성을 숨기고 있는건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옳은건가? 

그가 복잡한 생각을 하며 가방을 매고 하선 준비를 하는 두번째 인간의 모습을 보던 중 뒤에서 익숙한 소녀의 목소리가 뛰는 듯한 발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권속 2호여!"


"아... 좌우좌구나."


"우씨, 좌우좌가 아니다! 짐은 진조의 사이클롭스 프린세스이니라!"


좌우좌, 두번째 인간이 LRL에게 붙인 별명이다. 사령관 외에 두번째 인간과도 친해진 LRL은 새 별명에 대해 툴툴대면서도 그리 싫어하지는 않았다.

LRL이 양손에 자신의 소방도끼를 꼭 쥔채 도도도 달려와 두번째 인간의 뒤에 서자 그가 뒤돌아봤다.


그런데 소방도끼? 고딕 드레스로 갈아입은 뒤로는 그 소방도끼 대신 늘 검을 들고다녔는데 오늘은 왠일로 소방도끼를 들고 온 거지?


"권속 2호여, 정말로 떠나는 것이느냐?"


"...아쉽지만 그렇게 됐어."


"혼자서?"


"응. 혼자..."


그 말을 듣자 LRL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사령관을 향해 뒤돌아봤으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결정된 사안이다.

LRL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도끼머리를 땅에 닿게 내린 뒤 양손을 도끼자루 끝에 얹고 엄숙하게 말했다.


"꿇어라!"


"...?"


"진조의 공주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하거라!"


뭐지? 떠나지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역할극 하자는 건가? 사령관과 두번째 인간이 황당해하면서도 두번째 인간은 LRL의 말에 맞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LRL은 도끼자루를 쥐고 반바퀴 돌려 이번엔 도끼머리가 하늘을 향하게 했다. 그리고선-


"그대의 용맹함과 명예로운 섬김에 대하여, 나 진조의 공주가 그대에게 명하노라. 일어나라, 진조의 기사여."


도끼날이 옆을 향하게 한 채 천천히 내려 도끼머리의 넓적한 부분으로 두번째 인간의 어깨를 툭 쳤다. 왼쪽 어깨를 한번, 오른쪽 어깨를 한번.

LRL은 느닷없는 기사임명식에 당황한 두번째 인간의 앞에 양 손 위에 수평으로 올린 도끼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눈에 도끼자루에 새겨진 DRAGON SLAYER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비춰졌다. 두번째 인간이 도끼를 받아들고 나서야 LRL은 손을 내렸다.


"짐은... 혼자서 살아간다는 게 어떤 심정인지 잘 알고 있느니라. 그치만... 영겹의 세월을 기다린 끝에... 친구들도... 권속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 

힘내, 절대 희망을 잃지 마. 살아남으면 두번째 인간도 분명 새 친구를 잔뜩 만날 수 있을 거야. 내가 장담할게."


작지만 강한 소녀의 격려에 두번째 인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잠깐동안의 침묵이 지나고 나서야 LRL은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고마워."


사령관은 그의 눈빛에 생기가 돌아온 걸 볼 수 있었다. 

짧막한 감사를 마친 두번째 인간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르카호의 바깥을 향해 걸어나갔다.

사령관도 LRL도, 그 자리를 지켜보던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도 차마 그를 막지 못했다, 그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말없이 배웅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

후회물 원천차단하는 법을 아는 똑똑한 지휘관들 덕에 죄없는 라붕이만 고생


두번째 인간(라붕이)가 오르카호에 있질 못하고 바깥에서 고생해가며 살아남는 그런 얘기 써보고 싶었음

피폐물 급으로 고생하는 그런건 절대 아님, 다음화에서 라붕이편 바이오로이드 합류할 예정

삽화는 내키면 가끔 넣을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