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TR물, 후회물, 피폐물 그런거 아닙니다.) 

전편 모음집



아무 짓도 안저질렀는데도 오르카호로부터 추방당한 라붕이, 그는 지금 해안가 도시의 폐허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가 오르카호에서 받은 가방 안에 들어있는 비상식량은 일주일어치, 혼자서 아껴먹으면 어림잡아 한달은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양이었다.

그 비상식량이 바닥나기 전에 식량을 더 찾아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선 해안가 도시로 들어왔다.

인류가 멸망한 지 100년이 지났지만 콘크리트와 철골 구조물은 수풀에 뒤덮인 채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상가 여기저기 걸린 간판에는 영어가 써져있었다.


"영어인 거 보면 한국은 아닌데... 미국인가? 해안가에 오르카호가 정박한 거 보면 오메가 세력권은 아닐테고."


라붕이는 여기가 무슨 나라인지 고민하다 당장 중요한 일은 아니니 호기심을 접어두고 도시의 상가를 뒤져봤지만 예상대로 텅텅 비어있었다. 혹시 야생 바이오로이드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오르카호에서 나온 뒤로 하루종일 아무도 못만났다.


"그래, 오르카호 정박시키려고 사전에 싹 정리했을텐데 바이오로이드든 자원이든 다 쓸어갔겠지 제길. 그래도 걔들이 이 일대는 정리해놨다면 철충도 없겠네."


다리가 피곤해지자 적당한 곳에 앉아 걸터앉아 하치코가 넣어준 민트미트파이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평범한 미트파이 넣어주지 하고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이렇게나마 챙겨준 데 고마움을 느꼈다.


오르카호에 있었을 때 하치코가 라붕이한테 대뜸 민트미트파이를 시식해보라고 건네준 적이 있었다.

역시나 괴상한 맛의 조합이었지만 그리 못먹을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하치코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바라보기에 차마 맛없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애써 맛있다고 칭찬하자 하치코가 크게 기뻐했다, 그 보답으로 오르카호를 떠나는 인간의 가방에 이 도시락을 넣어준 것이었다.

그 때 민트미트파이가 별로라고 했다면 평범한 미트파이를 넣어줬을까, 아니 호감도 쌓지도 못했을테니 그랬었다간 아무것도 안넣어줬을지도.

그는 당장 먹을 게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민트미트파이를 꾸역꾸역 먹으면서 앞으로의 행보를 생각했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 식량을 찾으려면 오르카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을 찾아야 한다. 즉 내륙에 있는 도시를 찾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오르카호가 정리하지 못한 곳이라면 철충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 위험하지만 다른 옵션이 없다.

계속 움직이자, 가만히 있어선 아무것도 안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반만 남은 민트미트파이를 도로 포장해서 가방 안에 집어넣은 뒤 발걸음을 옮겼다. 


*


몇시간을 걸었을까, 라붕이는 다른 도시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해도 어느덧 져물어 달빛과 손전등에 의존해야 앞을 볼 수 있는 상태였는 데다 지친 몸을 이끌고 차디찬 밤바람을 마주하며 탐사를 속행하기엔 무리였다.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며 바람을 피할 곳을 찾아 폐허 사이를 터벅터벅 걸었다. 대부분의 건물이 반쯤 무너져있어서 저 안에서 잤다간 입 돌아가기 딱 좋아 보였다.

그러던 중 한 건물이 눈에 띄였다.


"블랙리버... 군사 연구소?"


철충의 집중포화라도 받은건지 벽에는 구멍이 숭숭 나있었고 문짝도 날아가있었지만 그 블랙리버의 연구소라면 분명 쓸만한 무언가를 찾을 수 있으리라, 라붕이는 그렇게 믿고 어두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역시나 어두웠다, 부숴진 벽 사이사이로 달빛이 들어오긴 했으나 그럼에도 어두운 건 매한가지였기에 손전등으로 안을 비춰야만 앞을 볼 수 있었다.

이제와서 네오딤이나 에키드나같은 실험기 바이오로이드를 발견한다는 대박을 기대하진 않았다, 군사기업이니 호신용으로 쓸 권총이나 블랙리버 직원들이 쓰려고 꽁쳐둔 식량이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그 기대가 깨지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젠장, 참치캔 하나 없네. 여기도 누가 먼저 쓸어갔나?"


괜히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투덜거렸지만 없는 건 없는 거다. 아니, 아직 한 군데 살펴보지 않은 곳이 있다. 이 연구소 폐허에서 딱 하나의 문만이 잠겨져 있었다. 다른 곳을 둘러봐도 열쇠고 뭐고 찾을 수가 없었기에 마지막 수단을 쓰기로 했다. 소방도끼를 들고 문을 여러번 찍어서 팔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을 낸 뒤 안쪽 손잡이를 돌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라붕이는 드디어 쓸만한 것을 찾았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방 안에는 바이오로이드 제조기가 한 대 구비되어 있었다.


"바이오로이드 제조기잖아... 작동이 되네?"


제조기의 버튼을 이것저것 눌러보니 건물에 자체적으로 발전기가 달려있기라도 한 건지 의외로 전원이 들어왔다, 패널을 보니 이미 유전자 씨앗 1개와 소량의 자원이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어떤 바이오로이드가 나올지는 모르나 지금 상황에선 일손이 늘어나는 걸 마다할 이유가 없다, B급 바이오로이드라도 생기면 감지덕지지.

제조 버튼을 누르자 패널엔 타이머가 떴다, 30분. 아마 브라우니라도 만들어지는 모양이다.


30분간 멍하니 기다리기도 뭐해서 바람이라도 쐴 겸 다시 밖으로 나왔다. 자기 전에 어떤 바이오로이드가 나올지 얼굴 정도는 봐야지.

밤이긴 하나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의 달이 폐허가 된 시가지를 환하게 비춰주어 그리 어둡지만은 않았다, 달빛도 들어오지 않은 실내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기 더 밝게 느껴진 거일지도 모른다.


10분인가 20분인가 걷던 중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 탓에 그림자밖에 안보였으나 분명히 움직였다.

사람이라기엔 크기가 조금 작아보이는 게 야생동물인가 하고 가까이 가봤다. 골목길 코너를 돌아 그것의 정체를 확인했을 때 라붕이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고, 그것은 그 작은 소리를 놓치지 않고 뒤돌아봤다.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소용돌이 무늬가 새겨진 이형의 검은 몸체, 철충 재퍼가 그 자리에서 그를 향해 뒤돌아보고 있었다.

그것에겐 눈으로 보이는 부위는 없었지만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을 때, 라붕이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곧바로 결론을 내렸다.


저건 적이다, 도망쳐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선 몸을 돌려 왔던 방향으로 뛰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재퍼는 이쪽에서 선빵치지 않는 이상 경계태세를 유지하는 특성이 있으니 먼저 자극하지 않으면 괜찮은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뒤돌아보자 처음 내린 결론이 옳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가 서있던 곳의 뒤에 있던 벽에 테이저건 전극이 파직거리며 박혀있었으니까. 인간 상대로는 얄짤없구나.


재퍼가 벽에 박힌 테이저건 전극을 뽑고 코너에서 달려나와 다시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리자 라붕이는 황급히 블랙리버 연구소를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펍헤드의 테이저건이나 제압용 전류를 흘려보내지 철충에게 감염되어 강화된 테이저건이라면 살상용 전류를 흘려보낼 게 뻔하다, 한 대라도 맞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며 뛰었다.


"내가 괜히 밖에 나왔지 시바- 아악!"


재퍼에게서 사출된 체포사슬이 라붕이의 두 다리를 칭칭 감아버리자 그 자리에서 넘어졌다. 아픈 것도 잊고 상체를 들어 뒤돌아보자 재퍼가 체포사슬에 묶인 자신을 천천히 자기 쪽으로 당기는 게 보였다.

라붕이는 본능적으로 발버둥 치다가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걸 보았다, 좌우좌에게 받은 소방도끼. 오른손에 도끼를 꽉 쥔 뒤 사슬을 힘주어 내리쳤다, 한 번 내리치자 사슬이 반쯤 패였고 두번 내리치자 사슬을 뚝 끊어버릴 수 있었다.

다리를 움직여 사슬을 빠르게 풀어낸 뒤 몸을 굴러 일어섰다.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엔 어느새 재퍼의 테이저건 전극이 박혀있었다, 조금이라도 늦게 일어났다면 저걸 맞고 감전사했을 것이었다.


재퍼가 도로 뽑기 전에 바닥에 박힌 테이저건의 전극을 발로 밟고 도끼로 와이어를 끊어버렸다. 공격수단이 사라지자 당황한 듯한 재퍼를 뒤로 한채 블랙리버 연구소를 향해 뛰었다, 뒤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사족보행 발소리로 재퍼가 뒤따라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체포사슬도 테이저건도 제거했으니 싸울 만 하지 않을까 하다 관뒀다, 애초에 원본부터가 흉기 든 범죄자도 제압하는 경찰 로봇인데 소방도끼 하나 들었다고 상대가 될 것 같지가 않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상태로 연구소에 도착해 냉큼 안으로 들어갔다, 문도 바리케이드도 뭣도 없으니 재퍼가 금새 뒤따라올 거다. 라붕이는 서둘러 제조실로 들어갔다. 지금쯤이면 바이오로이드 제조가 끝났겠지, 그렇게 믿었다.

불도 안켜진 어두운 방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건 제조기의 유리로 된 생체관과 그 옆에 달려있는 패널 화면에서 나는 빛 뿐이었다. 생체관의 덮개가 아직도 닫혀있는 걸 보고 황급히 패널에 띄워져 있는 타이머로 시선을 돌렸다.


00:02:47


아직도 안끝났다, 3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재퍼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제조실 안까지 쳐들어온 재퍼가 대형견같은 기세로 라붕이를 향해 맹렬히 달려와 그 몸체을 부딪히자 라붕이의 몸이 힘없이 날아가 벽에 부딪혀 쓰러졌다.

300kg짜리 쇳덩이의 몸통박치기에 직격한 충격은 컸다, 복부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숨도 제대로 못쉬며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었다. 

재퍼는 쓰러진 라붕이를 뒤로 한채 옆에 있는 바이오로이드 제조기를 흘긋 보더니 이번엔 거기에다 몸을 쾅 부딪혔다. 


재퍼가 몸을 뗀 제조기의 옆면은 음푹 패여있었고 제조기 패널의 불이 꺼졌다. 부딪힌 충격으로 덮개의 경첩도 망가진건지 빠직하고 덮개가 삐걱거리며 살짝 열리면서 그 틈으로 배양액이 흘러나왔다.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진건가? 거의 다 끝난 제조였는데 이렇게 끝이라고? 반드시 살아남겠다고 결심한 지 24시간도 안지났는데 여기서 죽는건가?

재퍼가 다시 이쪽으로 몸을 돌리자 라붕이는 소방도끼를 쥐려했으나 자신의 양손은 비어있었다. 조금 전에 부딪힐 때 날아가며 손에서 놓쳐 재퍼의 뒤에 떨어져 있었다.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 이렇게 끝나서는 안된다.


"일어나!!"


그의 최후의 발버둥이었다, 재퍼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돌려 불 꺼진 제조기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빨리 일어나지 않고 뭘 꾸물거리고 있냐! 깨어나지도 못한 채 영원히 눈 감는 게 분하지도 않아!? 당장 일어나서! 나 좀 도와달라고!!"


그러나 라붕이가 아무리 악을 써도, 제조기에 도로 불이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오직 소리만,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재퍼가 쇠로 된 다리를 내딛으며 천천히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다음으로 들린 소리는 무언가가 끼익 하고 열리는 듯한 소리, 찰박거리며 배양액으로 젖은 금속 바닥 위를 밟는 소리... 라붕이는 생각했다, 이건 재퍼한테서 나오는 소리가 아닌 거 같은데.

재퍼는 뒤를 흘긋 보더니 다시 눈앞의 인간에게 시선을 향하고선 빠르게 땅을 밟아 달려들었다, 다시한번 몸통박치기로 저 인간을 벽에 짓눌러 터뜨려버릴 생각이었다.


허나 정신차려보니 재퍼의 몸에 닿은것은 인간의 몸이 아닌 금속재질의 바닥이었다. 기세좋게 튀어오른 몸뚱아리가 누군가의 손에 잡힌 뒤 반대방향으로 휘둘러져 바닥에 쳐박혀버린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충격에 재퍼는 곧바로 일어서질 못했고, 이것은 자신을 메어친 누군가가 다음 공격을 하도록 허용하는 꼴이었다. 그는 땅에 떨어진 소방도끼를 줏어 스파크를 튀기며 움찔거리는 재퍼를 사납게 수차례 내리쳤다.

감염시킨 펍헤드 기체가 순식간에 고철덩이가 되자 그 안에 들어있던 철충 유체는 곧바로 몸체를 버리고 탈출했으나 재수없게도 그 철충 유체의 머리가 펍헤드 기체에서 나오자마자 두더지잡기 당하듯 도끼에 찍혀버려 한순간에 절명해버렸다.


라붕이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아 이 모든 상황을 보고 있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제조기에서 걸어나온 바이오로이드의 손에 철충이 무참히 박살나는 꼴을 보고서야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눈이 조금씩 어둠에 익숙해지자 그 바이오로이드의 실루엣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저보다 큰 키와 넓은 어깨, 이마를 드러낸 단발머리, 근육이 잘 잡혀있는 몸, 그러나 가슴은 전혀 없어보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바이오로이드는 문 옆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자 천장의 불이 켜졌다. 라붕이가 전등 스위치를 못 찾았을 뿐 자체적으로 발전기가 구비되어있어서 전기가 들어오는 건물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게 무색하게도 갑작스런 빛에 라붕이는 눈도 제대로 뜨고 오른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괜찮으십니까?"


의외의 목소리에 라붕이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 바이오로이드가 냈다고 생각되는 목소리는 분명히...


...걸걸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팔을 내리고 눈을 가늘게 떠 앞을 보았다, 눈이 밝은 환경에 점차 익숙해지며 시야가 확보되자 그 바이오로이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눈앞에 서있는 이은 분명히 남자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금발 올백머리의 남성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무런 말도 못하던 라붕이는 그 남자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본 뒤 손을 잡자 그 남자가 팔을 당겨 라붕이를 일으켜세워줬다.


"너는..."


"당신이 제 주인이심까?"


"...그런데?"


라붕이의 얼떨떨한 대답을 듣자 눈앞의 남자는 꼿꼿하게 경례 자세를 취하고 힘찬 목소리로 인사했다.


"승리! T-1 고블린, 신고합니다!"


...


......


..........고블린?


"고블린... 이라고?"


"그렇슴다! 뭐든 명령만 내려주십쇼!"


"아니... 하지만 고블린은 분명..."


한순간 정지되었던 라붕이의 사고가 팽팽하게 돌기 시작했다, 잠시 뒤 라붕이는 어정쩡한 자세로 경례를 한 뒤 입을 열었다.


"그...래, 쉬어. 묻고 싶은 게 굉장히 많지만... 우선 그... 명령이다, 그러니까..."


"그게 무엇임까?"


"...옷 좀 입어라."


내 앞에서 덜렁거리지 말고 이 터미네이터 새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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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붕이의 스타팅 파트너는 세상에 둘도 없는 유니크 바이오로이드였다!

아 독자님들 잠시만요 아직 하차하지 말아봐요 곧 여캐도 합류시킬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