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TR물, 후회물, 피폐물 그런거 아닙니다.)  

전편 모음집


배에 멍들긴 했지만 다행히 어디 뼈에 금 가지는 않은 것 같군. 철충 머리에 박힌 소방도끼를 뽑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인게임에선 옥수수 수확하듯 털어버릴 수 있던 잡몹이었는데 현실에선 겨우 이 재퍼 한마리 때문에 그 생고생을 했다.

그나마 테이저건 달린 재퍼여서 다행이지, 나 혼자서 나이트칙이랑 마주쳤었으면 도망도 못가고 벌집이 됐을 게 눈에 훤하다.


보아하니 저 고블린은 이 시설 내부를 잘 알고있는 모양이다. 어둠 속에서도 능숙히 전등 스위치를 찾아 불을 킨 뒤 옷가지가 들어있는 선반을 찾아 자신에게 맞는 옷을 꺼내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다만 고블린이 찾아봐도 무기는 하나도 없었다. 브라우니도 기본적으로 전용 돌격소총을 장비하고 있는데 얜 그것마저 없다.

아무튼 옷 입는 고블린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라오에 나온 고블린 설정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고블린, 바이오로이드 사업이 막 시작됐을 시기에 블랙리버에서 선보인 남성형 군인 바이오로이드.

그러나 오리진더스트와 남성호르몬의 상성이 안좋아 극단적인 폭력성을 만들어냈고, 결국 고블린이 폭주해서 인간을 학살한 사건 때문에 전량폐기되었다는 설정이었지.

그렇다면 의문인 건, 어째서 진작에 폐기되었을 고블린의 유전자 씨앗이 남아있어서 저 제조기 안에 있었던 거지?


"고블린, 궁금한 게 있는데."


"그게 무엇임까?"


"내가 알기론 고블린은 분명... 생산이 전면중지 됐을텐데."


"맞슴다, 제 형제들은 과한 공격성 때문에 전부 회수되어 살처분됐슴다."


"그럼 어떻게 저 제조기 안에 고블린 유전자 씨앗이 들어있던 거지?"


"사실 전부 다 폐기한 건 아님다. 블랙리버는 회수한 고블린 형제들 중 대부분을 냉동창고에 보관해 놨고 만들어둔 유전자씨앗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숨겨둔 고블린을 몰래 다른 기업에다 팔기도 했다는데, 그쪽은 잘 모름다."


그러고보니 게임 속 김지석의 묘에서 실험체 고블린이 나오기도 했었다. 남성 신체 대상의 생체실험용으로 쓰려고 샀던 거겠지, 하여간 멸망 전 새끼들이란...


"아시다시피 저희가 맡던 알보병 자리는 T-2 브라우니가 대체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철충 침공으로 일어난 전쟁이 지속되면서 쓸 수 있는 병력은 전부 긁어모으기 시작했고, 이 때 꽁쳐둔 고블린 부대도 꺼내 운용하기 시작했슴다. 

폭력성이 높은 건 눈앞의 적을 사살해야할 군인으로선 결점이 아니었으니까 말임다. 아, 그래도 물론 비공식적으로 운용됐슴다. 여기까지가 제가 제조될 때 입력된 정보임다."


"그렇게 된 거였군... 대충 알 것 같네."


"그래서 그 전쟁은 어떻게 됐습니까?"


"인류의 패배로 끝난 지 100년이 지났다. 현재 지구상에 남은 인간은 단 두 명 뿐이야."


"예?"


셔츠에 팔을 집어넣던 고블린이 어벙한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갑작스런 폭탄뉴스에 옷 입는 것도 멈추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머릿속을 정리하는 게 훤히 보였다. 잠시 후 셔츠 옷깃을 내리면서 다음 질문을 던졌다.


"...두 명이요? 그 중 한명이 당신이고요? 그럼 다른 한명은요?"


놀라서 다나까체 쓰는 것도 잊어버린 모양이다.


"다른 한명은 라비아타의 저항군에 들어가 그곳의 사령관 자리에 앉아있지, 나보다 먼저 발견된 인간 남자였거든."


"라비아타? 제가 알기로는 거의 최초의 바이오로이드인걸로 알고있는데 아직도 살아있었슴까. 근데 그럼 인간님은 왜 혼자 여기 와있는 겁니까."


"쫒겨났어. 아무래도 나는 불청객인 모양이..."


첫 문단을 듣자마자 고블린 표정이 점점 험악해지는 게 보이자 나도 모르게 말끝을 흐려버렸다.


"야야 표정풀어."


"아, 죄송함다. 그치만 정말 너무하지 말임다! 그 말대로면 저쪽은 저항군을 통째로 손에 넣어 풍족하게 살고 있을텐데 인간님은 이게 뭡니까 이게!"


자기 일처럼 화내며 씩씩대던 고블린은 바지 안에 셔츠를 다 밀어넣자 다시 말을 이었다.


"제 형제들이 전부 살처분되었던 건 그 폭주 사건 때문이라지만, 전 솔직히 제 형제들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라고?"


"주인이 모욕받았는데 참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님까?"


그 말을 듣자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명령체계 무시하고 제멋대로 학살 저지른 사건에 대해 느낀 점이 그거야? 고블린은 내 어이없어하는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가슴을 주먹으로 팡 치며 목청껏 소리쳤다.


"저 고블린! 인간님의 충성스런 부하가 되고 총이 되겠습니다! 누구도 주인님을 깔보지 않게 주인님의 적은 제가 박살내버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스타팅 파트너로 위험한 놈이 걸린 것 같다. 그렇다 한들 나한텐 다른 옵션이 없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려면 이 녀석이라도 데리고 다니는 수밖에.


"...음, 잘 알았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내가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하자 고블린이 순식간에 인상을 풀고 어벙하게 웃는 얼굴로 돌아와 두손으로 내 손을 쥐고 흔들었다. 저 다혈질인 점만 빼면 브라우니랑 비슷한 성격인 거 같은데 말이야.


"근데 그... 인간님은 뭐라고 부르면 됨까? 대장이라고 부를까요?"


"나야 뭐 아무런 직위도 없는 민간인이니 아무렇게나..."


"형님으로 모시겠슴다!"


"...뭐 그러던가."


모처럼 젖겜 세계관에 들어왔는데 꼬추새끼 둘이서 서바이벌 찍게 되다니, ㅈ같은 내 인생...

아니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고블린이 폭주한 원인은 제 주인이 욕먹자 분노했기 때문이다, 최소한 주인으로 등록된 인간에게 총구를 겨눌 일은 없다는 뜻이다.

아놀드 슈워제네거급의 근육질 떡대가 보디가드 되어준다면 든든하지. 응, 그렇고말고.

그래봤자 브라우니보다 근력이 조금 강할 뿐 실질적인 전투력은 엇비슷할 거 같지만...


"자, 앞으로의 일정을 정리해보자.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이만 자고, 내일부턴 식량을 찾기 위해 도시를 샅샅히 탐색해야 돼. 철충에게서 몸을 피할 거점도 확보해야 하고. 

휩노스 병으로 죽는 건 못막아도 철충한테 총맞아 죽거나 굶어 죽는 엔딩은 피해보자고."


"휩노스 병? 그거 아직도 치료법이 나오지 않았슴까?"


"아니 그게, 치료법이 나오긴 했어. 나 말고 다른 인간은 벌써 휩노스 병에 면역인 몸을 갖고 있는 상태야."


"그 방법이 뭐랍니까?"


"듣기도 전에 쫒겨났지. 하지만... 얼핏 들어본 바로는 삼안에서 만든 어떤 기계가 휩노스 병을 치료할 열쇠라더군."


김지석의 묘에 생체재건장치가 있다고 해봤자 어차피 거기까지 갈 수단도 없으니 굳이 말하진 않았다. 아니 지금은 김지석의 묘가 아니라 오르카호에 있나?


"삼안에서요? 별일이네요. 블랙리버에서도 휩노스 병을 연구했지만 병을 막는 방법밖에 못만들었는데."


잠깐, 방금 뭐라고?


"휩노스 병을 막을 방법이 있다고!? 그게 뭔데?"


"저야 모르죠, 전 그냥 일개 군인인걸요. 그치만 여기 말고 다른 블랙리버 연구소에서 했다는 건 압니다."


"위치가 어딘지 아나?"


"미국에 있는 연구소임다."


"...가만, 지금 우리가 서있는 곳은 어디 땅이지?"


"캐나다 땅임다."


"잠깐 나 생각 좀..."


여기가 캐나다라는 건, 오르카호가 알레스카에 정착해 오메가+철의 왕자랑 한 판 붙고 그 다음 근처 바다에서 서성거리다 캐나다 해안가에 날 내려준 거로군.

그리고 미국이면... 바로 그 오메가가 있는 펙스의 세력권이다. 아무런 빽도 없이 그 마굴에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오메가 그년이 살아있는 인간인 나를 발견하면 신나게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게 뻔한데.

하지만 휩노스 병을 막을 수단이 있다는 건 분명히 큰 수확이다, 살기 위해선 결국 미국 영토 내로 들어가야만 한다. 휩노스 병 걸리면 100% 사망 확정이지만 오메가는 그 년 한테 들키거나 붙잡히지만 않으면 살 수 있다.


"고블린."


"예 형님."


"예정 변경이다, 내일 우린 미국의 그 연구소로 향해 출발한다."


*


"어으으..."


시계는 없지만 지금이 대충 오전 7시일 거라고 느꼈다. 오르카호에 있을 때 매일 이 시간에 깨어났으니 자동으로 눈이 떠진 모양이지.

금속 바닥에 옷가지를 있는대로 깔고 그 위에 깐 침낭은 썩 좋은 잠자리는 아니었지만 어젯밤 피곤해서 그런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잠들 수 있었다.

침낭에서 꼼지락거리며 기어나와 기지개와 함께 몸을 일으킨 뒤 세수를 하러- 아니 여기 화장실은 물 안나오지 참.

세수는 관두고 수통을 꺼내 물 한모금 마신 뒤 침낭을 접어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고블린이 누워있던 자리엔 그 녀석이 침낭 대신으로 쓴 흐트러진 옷가지만 있었다. 


"고블린?"


"저 여기있슴다 형님!"


건물 바깥에서 들린 목소리를 따라 밖으로 나오자 건물 뒤편 주차장에서 손에 기름통을 들고 지프차에 기름을 넣는 남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잘 주무셨슴까 형님."


"응, 넌 일찍 일어났네."


"저는 6시 반 칼기상임다!"


기운차게 대답하는 모습에 새삼 얘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어젠 확인할 겨를이 없었는데 연구소 뒤에 주차장이 있었구나. 이거 굴러가긴 하냐?"


"아마도요? 안에 차키가 꽃혀있으니 시도해봐야죠. 미국까지 걸어갈 수는 없잖슴까."


고블린은 기름 넣는 걸 멈추고 운전석의 문을 열었다. 운전선 쪽 유리창이 깨져있는 건 굳이 캐묻지 않기로 했다. 안에서 차키를 돌리자 별 탈 없이 차에 시동이 걸렸고, 고블린이 환희에 찬 표정으로 운전석에서 내려와 소리쳤다.



"형님, 당장 출발합시다! 짐은 다 싸셨슴까?"


"나야 챙길 짐이라곤 이 가방 하나뿐이지, 넌?"


"전 이 옷 빼면 아무것도 없는데요 뭐. 여기 뒷좌석에 타십쇼 형님!"


고블린이 차 뒷문을 열고 손짓하자 나는 자연스레 뒷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내가 손 쓰기도 전에 고블린이 뒷좌석 문을 닫아주고 운전석에 가서 앉는 게 보였다.


"자, 출발합니다 부릉부릉!"


"하하, 멸망한 세상에서 자동차 여행이라니 두근거리는데?"


"저도 운전대 잡아보는 건 처음이라 두근거림다!"


"...?"


잠깐 너 무슨... 아니지, 어제 막 제조되었으니 당연한 거잖아?


"그... 차 운전하는 법은 알고있는 거지?"


"그거야 직접 해보면서 배워나가는 법 아니겠슴까!"


"야 너 옆에 타."


한순간에 차 꼬라박고 도보여행하는 전개를 보고 싶진 않았기에 그냥 내가 운전하기로 했다.

하여간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니까... 아 거긴 내 집 아니었지 참.



---------

본격 생체재건장치 안쓰고 휩노스 병 대비책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