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TR물, 후회물, 피폐물 그런거 아닙니다.)

전편 모음집



"-생각해보면 좀비 아포칼립스도 이거보단 낫지 않을까 싶어. 좀비는 적어도 저 금속 외계 버러지랑은 달리 총들고 달려들진 않잖아."


"우물우물..."


"아니지,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100년 지났으면 좀비들이 싹 다 백골이 돼서 더이상 위협이 되지도 않을테니 훨씬 더 편하겠네."


"우물우물... 꿀걱."


"또 한편으로는 뉴클리어 아포칼립스가 아닌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방사능 걱정하느라 숨도 마음껏 못쉬는 건 정말 고역일테지, 안그래?"


"우물우물... 에? 모으어으아."


"아무것도 아냐, 그냥 혼잣말."


괜히 배고픔을 잊으려고 아무 말이나 지껄여봤지만 오히려 말할수록 더 배고파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랑 고블린은 지금 낡은 지프차를 타고 도시를 벗어나 텅 빈 도로 위를 달리는 중이다. 내가 운전하는 동안 고블린은 옆자리에 앉아서 하치코의 수제 민트미트파이를 맛깔나게 시식하고 있었다. 어제 제조된 뒤로 아무것도 못먹은지라 주린 배를 붙잡고 있는 게 안쓰러워 반만 남은 민트미트파이를 건네줬다. 내 음식을 자기가 먹을 순 없다며 손사래 쳤지만 난 이미 반 먹었으니 나머지 반 먹으라 하자 그제서야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꿀걱. 휴, 이상한 맛인데 그렇다고 못먹을 건 아니네요. 의외로 나쁘지 않았슴다."


"암, 배고플 땐 뭐든 맛있는 법이지."


"그나저나 참 살풍경하네요. 어떻게 메마른 땅이랑 도로 빼곤 코빼기도 안비춘답니까? 풀 한 포기 안보이네."


"전쟁통에 폭격 맞고 도로에 구멍 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자고.

참, 그러고보니 고블린의 호전성은 오리진더스트와 남성 호르몬의 상성이 안좋아서 생기는 부작용이라고 들었는데, 그럼 거세시키면 얌전해지는건가?"


"아무렇지도 않게 무서운 소리를 하시네요."


"어... 미안."


"제가 알기로는 블랙리버도 그 생각을 안해본 건 아닌데 이미 대중에는 남성 바이오로이드가 언제 사고칠지 모른다는 인식이 박힌 상태라서 어중간하게 고자 바이오로이드 운용할 바에야 싹 처분하고 여성 바이오로이드로 대체하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었다고 함다.

그리고 그... 굳이 바이오로이드가 아니라도 거세당하면 누구든 낙담해서 조용해질걸요."


"음, 하긴 나라도 하루아침에 심영 되면 그럴 거 같네."


남정네 둘이서 실없는 잡담을 나누며 드라이브하길 몇시간 째, 얘깃거리가 다 떨어져서 앞만 보며 운전하다가 고블린이 말을 걸어왔다.


"...형님, 저기 뭐가 있슴다."


"뭐?"


앞을 봐도 땅 위의 도로밖에 안보이는 데 얘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옆을 보니 고블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앞을 쳐다보다가 이내 까만 고글 형태의 스마트글래스를 꺼내 썼다. 맨얼굴일 때는 어리버리하지만 말 잘 듣는 꼬붕같은 인상인데 선글라스 끼니까 터미네이터로 인상이 확 바뀌네.


"저 앞에 누가 서있슴다. 여자...로 보입니다."


"여자라면... 바이오로이드인가?"


"그렇겠죠? 설마 인간일 리는 없을테고."


고블린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래, 원래세계에서 라오 할때도 탐사 한번 나가면 야생 바이오로이드 몇명씩 데려왔는데 나도 마주칠 수 있지.

차가 앞으로 갈수록 조금씩 내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길가에 서있는 장발의 여성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팔을 옆으로 쭉 뻗은 모습이.


"...히치하이킹...?"


가까이 가서 차를 세우자 그 여성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바디슈트와 그 위에 걸친 헤진 자켓. 여기까지 본다면 스틸라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보병 바이오로이드였을 터였으나 그녀는 뭔가 달랐다. 아니, 조금 많이 달랐다.


머리의 길이는 허리까지 닿는 장발이었고 얼굴에는 1자 흉터가 백안이 된 왼눈을 가로지르고 있었으며 어깨엔 총을 두 정 매고 있었다. 그녀 앞에서 차가 완전히 멈추자 내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다짜고짜 뒷문을 열고 뒷좌석에 탔다.


"이야, 진짜로 세워줄 줄은 몰랐네. 그 쪽은 인간 맞지? 반가워."


"...저기, 타도 된다고 한 적은 없는데."


"차 세운 거 보면 어차피 태워주겠단 뜻 아냐?"


어깨에 매고있던 총들을 옆에 쏟아내듯 내려놓으면서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의외로 상당히 마이페이스인 이 여자에게 고블린도 뭐라 말을 꺼내야 할 지 감이 안잡혀 뒷좌석을 쳐다보기만 했다. 내가 생각하는 그 바이오로이드가 맞는 것 같지만 확인차 한번 물어봤다.


"브라우니, 맞지?"


"뭘 의문문으로 묻고 있어, 척 보면... 아, 내가 그리 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졌나? 하긴 머리 정리 안한 지 꽤 됐지."


세상에 내가 살면서 장발브를 다보네, 오르카호에서도 본 적 없는데.


"그래 뭐, 넌 어디 가는 길이길래 히치하이킹 한 거야?"


"댁은 어디 가는 길인데?"


"미국 간다. 미국에 있는 블랙리버 연구소."


"그럼 나도 거기가 목적지야. 심심한데 마침 잘됐네, 같이 가줄게. 감사인사는 안해도 돼."


"이런 싸가지를 봤나, 죽일까요 형님?"


보다못한 고블린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근데 왜 하필 나온 말이 그딴거야.


"안돼."


"뭐야, 인간만 보느라 못봤었는데 너 설마 고블린이야? 와, 나 고블린은 처음봐!"


"형님, 이런 소속도 불명확한 년을 어떻게 데리고 간단 말입니까!"


고블린이 뒷좌석의 브라우니를 향해 삿대질하며 꽥꽥 소리를 지르자 브라우니는 싸울 마음 없다는 듯 양손을 슬쩍 위로 올렸다.


"소속이 궁금해? 예전에는 라비아타 휘하 스틸라인 소속 브라우니 007이었지만 지금은 낙오병이올시다. 아무데도 소속되어있지 않았지, 근데 오늘부터 댁 소속으로 바꿨어."


"뭘 멋대로... 잠깐, 그보다 007이면 엄청 옛날 개체잖아? 멸망 전부터 살아왔던 거야?"


"아니, 난 인간 다 죽은 뒤에 라비아타가 복원한 개체야. 007이란 번호는 그냥 내가 마음에 들어서 붙인 거고."


"그게 뭔..."


"이년이 개념을 제조실에 놔두고 왔나, 누구 맘대로 등록번호를 바꿔?"


"왜, 어차피 진짜 브라우니 007은 관짝에 들어가 있을텐데 내가 대신 그 번호 이어받아서 안될 거 뭐 있어?

아무튼 이렇게 만난 것도 끝내주는 인연인데 같이 가자고, 응? 제조된 뒤로 수십년동안 명령권자 없이 살아왔는데 이제야 명령권자 등록을 했네."


"처음보는 인간을 대뜸 명령권자로 설정했다고?"


"뭘 어쩌겠어, 바이오로이드란게 결국 인간한테 봉사해야만 한다고 각인된 종속인데. 굳이 그게 아니더라고 살기 지루하던 참에 새로운 자극이 눈앞에 떡하니 있는데 이걸 어떻게 참아?"


그 순둥순둥하던 브라우니 입에서 이런 거친 말투가 나오니 정신이 혼미해지는 느낌이다. 역시 오르카호에서 본 평범한 브라우니랑은 완전 딴판이야.


"형님, 전 이 여자 싫슴다."


"너무 그러지 마, 일손 늘어나면 좋지 뭐... 너도 같이 가자 그럼."


"좋지. 잘 부탁해 인간님. 나도 형님이라고 부를까?"


"마음대로 불러."


"그럼 형님, 나 담배 좀 필게."


"아니 그건 좀... 차 안에서 피는 건 자제해줬으면 하는데."


"쫌생이."


"죽일까요 형님."


"왜 자꾸 죽이려들어 이 미친놈아."

 

팀원이 늘어나서 기쁜 것도 잠시, 둘이 신경전 벌이는 것 때문에 벌써부터 골치 아파지기 시작했다. 그냥 가던 길이나 빨리 가자는 셈으로 다시 악셀을 밟았다.


"근데 왜 따까리 냅두고 형님이 직접 운전하냐?"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더라. 넌 운전할 줄 알아?"


"핸들 잡아본 적이 있어야지, 누가 브라우니한테 운전을 시켜?"


"흠. 그런가. 그러고보니 저항군 소속이었다고 했지, 어쩌다가 떨어지게 된거야?"


조용해서 심심했던 차였기에 이번엔 브라우니를 상대로 잡담을 시작해봤다.


"흔한 얘기지 뭐, 내가 있던 저항군은 철충과 싸워야 한다는 사명이 있는데도 인간의 명령이 없으니 총도 마음대로 못쏘고 소극적으로 저항만 하고 그랬었는데... 우리가 점거했던 군수공장에 철충이 작정하고 쳐들어온 적이 있었어. 꼴랑 열명 남짓하는 우리 상대한다고 아주 잔뜩 싸들고 왔더라."


브라우니는 크게 숨을 한번 내쉰 뒤 말을 이었다.


"그 때 다 죽었어, 나만 빼고. 난 어찌저찌 도망치긴 했는데 본대는 이미 떠났고 난 뒤따라가기도 귀찮아서 그냥 낙오된 셈 치고 야생에서 혼자 살기 시작했지. 그러다가 수십년만에 바퀴 소리를 들었고, 저 멀리 왠 차가 오는 게 보이더라고. 나 말고 다른 누군가를 보는 건 오랜만이라 횟김에 히치하이킹 좀 해봤지.

그런데 차가 가까워질수록 뇌파도 느껴지더라? 철충은 AI회로가 탑재되지 않은 기계는 감염시키지 않는데 이게 어떻게 된건가 했어, 설마 철충이 차를 운전할 리는 없을 거 아냐? 설마설마 하면서 가까이 가보니 진짜 살아있는 인간과 만나게 된거지! 이게 내 이야기야."


"그러면 그... 본대에 합류할 방법이 있긴 해?"


"낙오됐을 경우의 행동지침도 당연히 있지. 적당한 통신탑 찾아다가 구조신호 보내면 누가 데리러 와준다고 하더라. 물론 저쪽도 여유롭진 않을테니 브라우니 한명 데리러 오진 않을 테지만 말이야."


"아니, 브라우니 한명이라도 분명 데리러 올걸, 그 사령관이라면 분명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야."


"라비아타가?"


"말고, 인간 사령관."


"뭐? 인간이 또 있다고?"


"모르고 있었구나."


저항군에서 나온 지 수십년이나 됐으니 저 쪽 내부소식을 모를 법도 하다. 브라우니에게 저항군이 나 이외의 인간을 먼저 발견해 사령관 자리에 앉힌 얘기, 구인류와는 달리 바이오로이드를 인격체로 봐주는 사령관의 성품 얘기 (고블린은 그가 착하다는 부분에서 태클을 걸었지만), 그리고 재수없게도 쫒겨난 두번째 인간 얘기 등을 들려줬다.

복잡미묘한 얼굴로 내 얘기를 듣던 브라우니는 얘기가 끝나자 납득이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 그래서 형님은 혼자 허허벌판에 떨어져 있던 거구나."


"이젠 혼자가 아니지. 그런데 넌 여기 있어도 괜찮겠어?"


"뭐가?"


"그야... 난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데다 언제 비명횡사할지 모르는 몸이잖아. 굳이 나 따라다닐 바에야 너도 오르카호로 들어가는 게 더 행복하지 않겠어?"


"오, 지금 나 걱정해주는 거야? 인간님이? 바이오로이드를?"


"아니 진짜로, 가겠다면 붙잡지 않을게."


"싫어. 들으면서 생각해봤는데 저쪽 인간 밑으로 들어가서 흔해빠진 브라우니 중 한명으로 취급될 바에야 형님 옆에 서서 특별한 한명의 브라우니가 되는 게 훨씬 더 나아."


뜻밖의 대답에 놀라 뒤를 쳐다보자 브라우니가 씩 웃었다. 양산형 고기방패로 태어난 브라우니이기에 고를 수 있다면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쪽을 선호하는 건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뭘 이 정도로."


"저도 평생 따르겠슴다 형님!"


옆에서 가만히 듣던 고블린이 자기도 질세라 힘껏 소리쳤다.


"그래 너도 고맙다 고블린. 역시 니들밖에 없다."


만난지 하루이틀 된 녀석들인데도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당장 어젯밤 철충한테 죽을 뻔 한게 거짓말같게도 어떻게든 이 멸망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기분이 든다. 휩노스 병만 어떻게 한다면 말이지 제길.

그나저나...


"...고블린... 으음, 고블린이라..."


"왜그러심까?"


"이름 촌스러워."


"ㅇ, 예?"


당황한 고블린이 말을 더듬자 뒷좌석에서 풉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브라우니란 이름은 귀엽기라도 하지 고블린은... 흔히 판타지에서 나오는 잡몹 이름이잖아, 원전의 고블린은 요정 이름이었긴 해도 그 이름 들으면 녹색 좆만이 이미지가 더 강하게 떠오르는 걸."


"어... 그, 그럼... 어떡하죠?"


"흠, 어떻게 하다기 보단... 아니지, 새 이름 지어줄까?"


"!! 정말이심까!?"


그냥 해 본 말인게 몹시 기뻐하는 눈치다. 고블린이라고 부르기도 뭣하니 이 참에 이름 바꿔야지.

고블린이라, 어떤 이름이 좋을까. 고블린하면 떠오르는 건... 보물 고블린?


"트레저. 니 이름은 트레저야."


"영광임다 형님! 야 어떠냐! 난 형님한테 이름 받았다!"


고블린, 아니, 트레저가 신나서 뒤쪽에 대고 떠들자 이번엔 브라우니가 뾰루퉁한 표정을 짓는 게 백미러로 보였다.


"어이 형님, 그럼 나는?"


"? 너도 굳이? 브라우니란 이름은 괜찮은데."


"나만 쏙 빼놓고 쟤만 편애하기야? 나도 이름 지어줘, 브라우니 말고 형님이 지어준 이름 받을래."


만난 지 한시간도 안됐는데 살갑게 구는 거 보소. 오르카호에 있을 때 워울프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 그러면..."


브라우니면 뭐가 좋을까. 브라우니 하면 생각나는 건... 초코 케이크, 이건 관두고.

원전의 브라우니는 집요정이라고 들었다. 집요정 하면 뭐가 있을까, 항상 집에 머무르면서도 잘 따라주는...


아 그러보니 옛날에 스카이림 할 때가 생각난다, 1회차 바닐라 플레이할 때 처음 얻은 동료였던 리디아.

1회차 땐 다른 동료가 없으니 엔딩 볼 때까지 걔만 데리고 다녀서 정들었는데 2회차부턴 다른 동료 쓰느라 걘 항상 집에 놔두고 다녔지, 마치 집요정처럼.


"리디아. 브라우니 니 이름은 오늘부터 리디아야."


"헤에, 괜찮네. 무슨 의미라도 있어?"


"...스카이림이라는 게임 알아?"


정말 갓겜입니다. 바닐라 기준으로도. (아니 그 바닐라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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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차저차해서 라붕이 파티 결성!

그림에서 두번째 인간 묘사를 대충 해놓긴 했는데 실제론 브라우니보다 키가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