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명해.”

“뭘?”

 

붉은 안광에도 전혀 겁먹지 않고 대꾸했다.

사령관실 안은 서릿발로 얼어붙어 있다.

휘몰아치는 서리 폭풍에 손과 발마저 얼어붙을 듯하다.

자리한 책상으로부터 몇 걸음 떨어져 노려보기만 하던 티타니아는 

시큰둥한 반응이 언짢았는지 도도한 걸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모르는 척 마. 레아 말이야.”

“레아가 왜?”

“...”

 

눈발이 더 거세진다. 이대로 살해당하는 걸까?

체온이 더욱 낮아진다. 죽음의 공포가 등허리를 타고 흐른다.

그러나 물러설 수는 없다.

 

“왜 말 안해줬어?”

“그니까 뭘.”

 

이제는 그녀쪽을 보지도 않은 채로 시선을 책상으로 향한다.

음... 검색하려고 했던 게 뭐였더라?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테블릿을 만지작거리자 창백했던 얼굴이 점차 빨개진다.

피식 웃으며 슬쩍 눈길을 주자 울화통이 터진 모양이다.

 

“옷 말이야!”

 

‘옷’이라는 말을 꺼낸 순간부터 이미 페이스는 내 쪽으로 넘어왔다.

하지만 아직 이르다. 조금 더. 자기 입으로 ‘그 단어’를 꺼낼 때까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으으... 바니걸! 바니걸 옷 말이야, 이 둔탱아!”

 

아아, 승리의 여신이 내게 미소를 지었다.

반면 티타니아는 부들부들 떨며 울상을 짓고 있다.

얼음장 같은 마음을 가진 서리의 화신조차 장난질 

3년 차에 접어든 내게는 귀여운 아가씨에 불과할 뿐.

많은 사람을 얼려 죽인 그녀지만, 정신만 차리면 손바닥 안에서 갖고 놀 수 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시작은 단지 도도한 여왕님의 풀어진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평소와 180도 다른 옷을 입힌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그래서 마침 요즘 유행하는 바니걸 옷이 그 타겟이 되었다.

물론 그걸 쉽사리 입어줄 리는 없겠다만, 몇 가지 꼼수를 쓰면 간단하다.

 

첫 번째, 질투 유도하기.

 

“레아 그 년이 날 우롱했어! 그 음탕한 젖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는 내 앞에서 깡충깡충 뛰어다니지를 않나, 너도 레아의 칭찬만 했잖아! 너, 그런 토끼 옷이 좋아? 왜 말 안 했어? 네가 언질만 해줬다면 여왕이 그런 모욕을 당할 일도 없었을 텐데!”

 

사전작업을 꼼꼼히 해둔 덕분에 순진한 여왕님은 내 계획대로 반응하고 있다.

내가 티타니아를 화나게 만들었다! 내가 여왕의 감정을 조종할 수 있다!

물론 레아의 열연이 없었다면 힘든 일이었겠지만.

 

여기서 두 번째, 콤플렉스 자극하기

 

“그건 레아 잘못이 아니지 않아?”

“또! 자꾸 레아만 싸고 돌잖아! 여왕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면서!”

 

티타니아는 파들파들 떨며 책상을 연신 내려쳤다.

화에 못 이겨 눈가에 눈물까지 맺혔다.

보기 안쓰럽긴 하지만, 목적을 위해서는 감수해야 한다.

그래, 바니걸 코스프레를 시키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예상한 일이었다.

감정이 최고조로 다다른 지금이 마지막 방법을 사용할 최적의 타이밍이다.

 

세 번째, 자존심 건드리기.

 

“뭐, 그래도 결국 네 자업자득이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바니걸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 애초에 네가 그걸 입으리란 기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어.

당장 저번에 드레스만 해도 입기 싫다고 난리를 쳤었잖아.

그리고 요즘 바니걸이 유행하는 건 다른 자매들과 얘기 몇 마디만 알 수 있는 사실이거든?

하다 못해 네 동생들조차 알고 있는데 말이지. 한 마디로, 이건 다 평소의 태도 때문이라는 거야.

네가 조금만 주변에 관심이 있었으면...”

“그만, 그만! 짜증나!”

 

흩날리던 얼음 결정이 한순간에 모이며 폭발했다. 차가운 바람이 완전히 가라앉으며 지독한 고요가 찾아왔다. 고개를 숙인 여왕은 미세하게 떨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천장이 흔들리는 소음에 놀랐는지, 바깥에서는 얼어붙어 열리지 않는 문을 쾅쾅 두드리며 내 안위를 걱정한다.

 

누가 봐도 단단히 잘못된 상황이다. 

하지만, 나는 되려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웃었다.

 

“결국, 바니걸 옷을 입고 싶다는 거지? 레 아 처 럼.”

 

그 말 한 마디에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던 티타니아의 안색에 활기가 돌았다.

아까의 죽일 듯한 눈빛은 어디로 갔는지 홍조까지 띄우고 있다.

무섭지 않았냐면 거짓말이다. 어째 바지가 좀 축축한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다 계획대로 됐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닐까?

 

“으, 응... 입고 싶어, 그거. 내가 레아보다 잘 어울릴 거라고.”

 

그 여왕이 자기 입으로 바니걸 옷을 입고 싶다고 말하다니...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모든 고뇌와 고통을 참아온 것이다.

책상 아래에 달아둔 녹음기로 녹음까지 했다.

이걸로 또 골려먹을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말 안 들을 때마다 써먹어야지.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하지 그랬어.”

“눈치 없는 네 잘못이잖아!”

“네네~ 제가 죄인입니다.”

“하... 너 진짜...”

“그래서 옷 안 입을 거야?”

“내가 언제 안 입는댔어!”

 

완전히 기분이 풀렸는지, 여기저기를 꽁꽁 얼렸던 눈덩이들이 녹아내렸다.

내 머리 위에 잔뜩 쌓였던 눈도 녹은 바람에 물벼락을 맞게 됐지만.

 

“그건 여왕을 놀린 벌이야. 반성하도록 해.”

“너무하네...”

“그대로 얼려줄까?”

“죄송합니다.”

“뭐... 됐어. 옷은 어떻게 받아야 하는 건데?”

“어? 당연히 이미 만들... 아.”

“...”

 

아무래도 좆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좆됐다.

 

“이미 이렇게 나올 걸 알고 다 작업해두셨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여왕은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중얼거리더니 이쪽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너, 처음부터 여왕이 그 천박한 복장을 입게 하려고 했던 거지?

레아한테 지기 싫어한다는 것까지 이용해서...!”

 

물바다가 됐던 바닥이 얼어붙어 간다.

이대로라면 어떤 미친 여자의 박제처럼 얼음 동상이 되고 말 것이다.

어찌 됐든 일단 살아야 한다. 머리를 굴리는 거다!

몸이 식어가는 와중에도 머리만큼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래, 일단 말을 돌려보자.

 

“중대한 오해가 생긴 것 같습니다...”

“맨날 그렇게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려고만 하고!

애초에 여왕을 놀려먹을 생각뿐이었잖아!”

“아냐~ 이, 이건 서프라이즈라는 거야! 서프라이즈~ 응? 몰라?”

“서, 서프라이즈?”

“그래! 서프라이즈!”

 

겨우 한숨 돌렸다.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다가오던 빙판이 전진을 멈췄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는 없다.

한 마디라도 잘못 말하면 저 냉기에 꽁꽁 얼어버리겠지...

 

“서프라이즈가... 뭔데?”

“음, 다시 말해 선물 같은 거지. 깜짝 선물!”

“네가? 여왕에게 선물을? 웬일로?”

 

티타니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대체 네 머릿속의 나는 얼마나 폐급인 거니.

 

“이제 사이클롭스 프린세스가 와서 임무에 나갈 일이 줄었잖아.

어... 이를 테면 은퇴식 겸 퇴직금 같은 느낌...?”

“그, 그런 거였어...?”

“아이고~ 놀란 표정이 보고 싶었는데 너무 아쉽다!”

“딱히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기, 기쁘네.”

 

순수하게 감격하는 그 표정에 드물게 양심이 아려왔다.

그렇다고 관둘 것은 아니다만...

 

“같이 가자.”

“네, 네?”

“풉, 왜 그렇게 놀라? 옷 가지러 같이 가자.”

“아, 아하하! 그래! 같이 가자!”

 

끌려가듯 방에서 나왔다.

물바다가 된 방을 치울 메이드들에게 미안한 걸...

석연치는 않지만 결국 팔다리 멀쩡하게 목적을 달성했으니 대만족이다.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티타니아의 발걸음은 전에 없이 가벼웠다.

이내 그토록 바라던 바니걸 옷을 손에 들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소 지었다.

자매인 레아를 닮아 시원하고 기분 좋아지는, 그런 웃음이었다.

 

“나가있을게. 다 갈아입으면 불러?”

“잠깐.”

“응?”

“... 뒤, 돌아있어.”

“오...”

“오는 무슨 오야, 멍청아! 보면 죽여버릴 거야...”

“네네~”

 

막상 뒤를 돌아보고 있으니 다른 감각이 잔뜩 곤두섰다.

옷의 단추가 풀리는 소리, 옷이 말단을 타고 흐르는 소리, 툭- 떨어지는 소리...

이거 묘하게 꼴... 아니, 흥분되네...

지금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가 궁금해서, 

그날 보았던 그녀의 나체가 떠올라서 견디기 힘들었다.

참아야 하느니라... 

딱 몇 초만 더...

 

는 개뿔.

 

못 참겠다...!

 

“다... 입었어.”

“어어어 그, 그래?”

 

여자애 같은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마지막 몇 초가 목숨을 구한 셈이었다.

오늘 하루에만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기는지...

 

잠깐 이성을 되찾으려는 찰나, 그제야 시야에 티타니아가 들어왔다.

마주치지 못하고 떠도는 시선과 창백한 피부 위로 도드라진 홍조가 눈길을 끌었다.

단아한 단발 위로 꽃 핀 두 쌍의 귀가 농염함과 상큼함 사이에서 흔들린다.

레아와 비슷한 크기지만, 조금 더 옹골진 가슴, 그것을 지탱하는 컵.

그야말로 완벽한 토끼다.

 

“어, 어때. 내가 레아보다 어울리지?”

“아니?”

“뭣...”

“레아는 레아고, 너는 너야.”

“...”

“예뻐.”

“하여튼...”

 

티타니아는 그대로 다가와 날 밀어 바닥으로 넘어뜨렸다.

 

“그거 알아?”

“응?”

“토끼는... 365일 발정기래.”

“... 그럼 티타니아, 그거 알아?”

“읏... 왜 그래?”

 

부드럽게 뜨거운 숨을 흘리는 그녀를 슬쩍 밀어내며 일어섰다.

그리고...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나 사실 바니걸 안 좋아해.”

 

체크메이트.

 

“야!!!!!!!!!!!!!!!!!!”

 

 

오늘도 오르카호는 평화롭다.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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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 축 3주년 하


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