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오르카호에서 떠난 지 닷새째 밤, 평소라면 이 시간엔 차 안에서 수면을 취했겠지만 오늘은 그 대신 으슥한 곳에 차를 세워놓고 내린 상태다. 손에 들고있는 쌍안경을 눈에 씌우자 지면을 반으로 가르고 있는 철망과 여러대의 경비 AGS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드디어 캐나다-미국 국경선에 도착했다. 보이는 AGS는 램파트, 펍헤드, 그리고 드론. 분명 레모네이드 오메가 휘하의 AGS겠지. 멕시코-미국 국경처럼 작정하고 세워진 장벽이 있는 건 아니지만 철망 뿐이더라도 넘어가기 힘든 건 마찬가지다.

들고있던 쌍안경을 트레저에게 넘겨주자 이번엔 트레저가 쌍안경을 쓰고 국경선 쪽을 보면서 말했다.


"들키지 않고 넘어가는 건 힘들 것 같슴다."


"원래 캐나다 미국 국경에 저런 벽이 있었던가?"


"멸망 전에는 없었던 걸로 알고있슴다."


"오메가 작품이겠군 그럼. 하도 난민들이 빠져나가서 저런걸 세웠나본데."


"난민이라..."


차 반대편에 기대서서 담배를 꼬나물고 있던 리디아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담배꽁초를 땅에 버려 군홧발로 비벼끈 뒤 우리쪽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보니 말이야, 내가 캐나다에 있을 때 미국에서 도망쳐온 난민 바이오로이드를 몇 명 만나본 적이 있거든. 걔들 얘기하는 거 들어보니 개구멍이 있는 모양이야."


"개구멍?"


"돌아치 밑에 있다더라, 잘 찾아봐."


그 말을 듣고 트레저가 쌍안경을 쓴 채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더니 찾았슴다 하고 짧막하게 외쳤다. 도로 쌍안경을 건네받고 트레저의 검지가 가리킨 방향을 보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돌아치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둘에게 차에 타라고 손짓한 뒤 나도 운전석으로 돌아가 앉았다.


*


"개구멍이라길래 차 버리고 가야 할 줄 알았는데..."


돌아치 밑에 있는 작은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그 너비가 차가 통째로 들어가도 될 정도였다.


"그러게, 이건 나도 몰랐네."


"잘 된거 아니겠슴까 형님! 어서 갑시다!"


그래, 의외긴 하다만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동굴 안 내리막길로 차를 몰았다. 다행히 두갈래길 따위는 없이 일직선상으로 길이 나있는 게 동굴이라기보단 터널이나 지하도에 가까웠다.

동굴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차의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비포장 도로를 1분 정도 달리자 건너편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국경선에 이런 비밀통로가 있을 줄은 몰랐네. 그 철두철미한 오메가가 어떻게 이런 걸 놓치고..."


[삐빅-]


"...!?"


작은 소리였으나 분명 비프음이 들렸다, 차 안도 아닌 차 밖에서. 뜻밖의 소리에 놀라 차를 멈춰 세우자 차 뒤쪽의 통로에서 격벽이 빠른 속도로 내려와 땅을 쿵 쳤다.


"하여간 이놈의 주둥이가 방정이지!"


또 뭐가 튀어나오기 전에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선 액셀을 밟아 차를 급발진시켰다.

오메가는 이 동굴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런 올가미를 만들어 놓은 거겠지. 누군가 이곳을 통해 몰래 미국에서 캐나다로 가려고 하면 센서가 작동해 캐나다로 가는 통로를 막는 격벽을 내리는 구조로 보인다.

우리의 경우는 반대로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들어가는 거였기에 퇴로가 막힌 셈이 된 거다. 굳이 동굴을 틀어막지 않고 격벽을 숨겨놓은 이유는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희망고문 시키기 위함인가?


"정지, 순순히 투항하-"


동굴 출구에서 왠 드론이 튀어나왔으나 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박살나 떨어져나갔다. 빵소니에 신경쓸 겨를도 없이 동굴을 빠져나오자 출구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램파트들이 총을 쐈으나 불행 중 다행으로 차 뒷면만 맞춰서 타이어는 무사했다.


"이새끼들이!!"


"지금은 안돼 트레저!"


또 빡돌아서 대응사격하려는 트레저의 어깨를 붙잡고 전속력으로 빠져나갔다. 경비 AGS들은 전력질주하는 차를 쫒아갈 능력이 안되어 추격을 따돌리고 미국 안쪽으로 깊숙이 도망칠 수 있었다.


*


미대륙 서부 최상단에 위치한 워싱턴 주 위에 세워진 어느 한 고층 빌딩. 인류가 멸망한 와중에도 새로 지어진 것처럼 빛나는 이 빌딩은 멸망 전에는 오메가 산업의 본사 건물이었으며 멸망 후에는 레모네이드 오메가의 본거지로 쓰이고 있었다.

건물 꼭대기층에 위치한 회장실에는 검은 머릿결의 여인이 요염하게 다리를 꼬며 한 손으로는 턱을 괸 채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한 대의 지프차가 찍힌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캐나다 쪽에서 미국으로 들어온 신원 불명의 차량, 신원 뿐만 아니라 그 목적조차 알 수가 없다. 그 오르카호가 뭔가 수작을 부리는 것이라기엔 너무나도 막무가내였다.

철충의 공격도 아니다. 철충이었다면 AGS를 놔두고 미국 안으로 도망치기만 했을 리가 없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야생 바이오로이드가 차에 타고 있다는 것이지만 여전히 앞뒤가 안맞다, 펙스의 존재를 알고있다면 일곱 회장에 대한 충성심이라도 있는 게 아닌 이상 미국으로 들어올 리가 없다.

설령 이 오메가가 미국에 있는 걸 모른다 할지라도 일반적으론 경비 AGS가 지키고 있는 국경선을 억지로 뚫고 들어오려 하진 않을 것이다, 미국 내에서 뭔가 얻을 것이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바로 이 차의 운전자다. 운전석의 유리창이 깨져 있었기에 운전자의 모습을 찍을 수 있었다. 비록 사진이 흔들렸고 드론을 통해 위에서 찍은 거라 운전자의 얼굴은 안나와 있지만 몸통은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그 운전자는 놀라울 정도로...


가슴이 없다. 상의에 그림자가 지지 않을 정도로 평평하다.


바이오로이드는 기본적으로 다 미녀로 만들어진다, 어린이 체형이 아니고서야 전부 가슴이 큰 편이다. 블랙리버에서 만든 바이오로이드 중 나이트앤젤이라는 단 한가지 예외가 있긴 하나 그것도 가슴만 작을 뿐 어깨가 좁고 허리가 들어간 여자의 몸매다. 그런데 이 운전자는 그렇지도 않다, 마치 남자의 몸처럼 보인다. 


오르카호의 사령관일 리는 없다, 그가 이런 적진에 혼자 던져졌다는 건 말이 안되니까. 그렇다면, 설마 또다른 인간 남자가 있는 것인가? 그냥 바이오로이드만 탄 차라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겠지만 인간 남자의 가능성이 있는 이상 저 차를 추적하는 게 최우선사항이다.


여인은 패널을 조작해 자신의 비서에게 통신을 걸었다. 전화를 건 지 5초도 안되어 화면에는 수신자의 얼굴이 띄워졌다. 안경 밑으로 다크서클이 슬쩍 보이는 연보라색 머리의 여자가 애써 피곤한 티를 숨기며 대답했다.


"예 오메가님, 무슨 일이신..."



"인터셉터를 출격시켜, 사진을 보내줄 테니 사진 속의 차량을 찾아내."


"알겠습니다."


짧게 명령만 내리고 통신을 끊은 뒤 오메가는 미소를 지었다. 그 사령관이란 남자는 저항군 전원이 감싸서 보호하고 있었기에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 사진에 찍힌 게 또다른 인간 남자가 맞다면, 저항군의 비호 밖에 있는 인간이라면 얼마든지 납치해오는 것이 가능하다. 회장님의 부활을 위해서 저 차의 운전자가 인간인지 아닌지 확인해야만 한다.



------

라붕이, 미국에 발 딛자마자 오메가한테 들키다!

전편이랑은 반대로 이번편은 분량이 짧습니다 스미마셍


그나저나 올리기 전에 여러번 읽으면서 셀프검수 했는데도 꼭 올리고 나서야 오타가 보이더라 제길

그런 의미로 오타지적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