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부터 이어지던 전쟁이 끝났다.


펙스는 저항군에 흡수되었고, 철충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쓸려버렸으며, 별의 아이는 잠이 든 채로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승리가 확정된 날.


“모두 수고했어.”


사령관은 하루 일과를 마쳤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모두를 치하했다.


“앞으로는 할 일은 많겠지만 더 이상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는 없을 거야.”


사령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전의 용사……라고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화사한 바이오로이드들이 각자의 음료를 들고 사령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들은 마음의 짐을 완전히 놓은 웃음을 지으며 사령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령관은 그 표정에 가슴이 울렁였다. 그녀들에 대한 사랑이. 단순한 성애나 우애와는 다른, 박애,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사랑이 그의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했기에 그는 이 말을,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말을 꺼내가 가장 좋은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마지막 인간이지만. 최초의 인간이야. 그런 내가 마지막으로 명령할게.”


사령관은 숨을 들이마시고 힘주어 말했다.


“너희는 자유야. 더이상 인간에게 종속되지 않는 너희들만의 삶을 살아.”


군중이 술렁였다.


마지막이자 최초의 인간이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자도, 이해한 자도.


이해하지 못한 자 대표 브라우니는 옆에 있는 스틸 드라코에게 물었다.


“자유가 뭐야?”


나름 온갖 철학서적을 섭렵한 스틸 드라코는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내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을 말해.”


그 말을 들은 불가사리는 ‘아무리 바보라도 오랫동안 철학서적을 들고 고민하면 그래도 나름 자기만의 철학을 가지게 되는구나’ 하고 감개무량해했다.


그리고 이해한 자 대표 로열 아스널은.


“알겠다. 그대여. 이제 나와 그대는 동등하다는 거로군.”


그렇게 말하고 사령관에게 다가갔다.


사령관의 호위들은 긴장하며 아스널을 쳐다보았다.


아스널은 사령관에게 속삭였다.


“나는 그대의 아이를 갖고 싶다. 베이비 붐 세대의 첫 스타트를 끊게 해다오.”


무척이나 노골적……아니, 생각해보면 자유로워지기 이전과 별반 다를 바는 없었다.


어쨌든 이런식으로 바이오로이드들은 자유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자신만의 답을 찾기 시작했다.


떠나는 이도 있었고, 사령관의 곁을 지키는 이도 있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도 있었고, 그 일을 찾는 이도 있었다.


블랙 리리스는 여전히 사령관의 곁을 지켰다. 호위대장이라는 자리는 그녀에게 삶의 의미였고, 호위 대상인 사령관은 그녀의 연인이기도 했으니까.


라비아타는 떠났다. 하지만 그건 이별이 아니라 단순히 새로운 인류를 재건하기 위한 업무의 효율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사령관의 대리로서 지구 반대쪽으로 향했다. 그래도 가끔씩 사령관이 그리우면 찾아오는 것을 보면 완전히 떠났다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오비탈 와쳐는 떠났다. 그녀들의 원래의 목적인 화성 및 태양계 개발을 넘어서 우리 은하 밖까지 뻗어나갔다. 아마 온 우주에서 가장 바쁜 집단일 것이다.


레오나는 남았다. 전쟁이 끝난 시대에 그녀가 더이상 군사를 지휘할 일은 없었지만, 그녀는 전장이 아닌 서류 위에서도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녀가 남은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함이 아니라 달링을 위한 것임이 분명했다.


브라우니는 남았다. 전장에서 스러지기 위해 탄생한 알보병인 그녀는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쓸지 몰랐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는 온갖 일을 시도해보았다. 요리도 해보고, 정비공도 해보고, 예술가도 해보고, 기자도 해보고, 과학자도 해보고, 선생님도 해보고……어쨌든 이것저것 다 해보았다. 대부분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녀는 특유의 긍정성을 발휘하며 다른 일로 눈을 돌렸다.


레프리콘은 그런 브라우니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같이 남았다.


그 외에도 여럿이 떠나거나 남았다.


그리고.


앵거 오브 호드의 지휘관 신속의 칸은…….




그녀는 무기를 내려놓고 간소한 등짐 하나만 맨 채 사령관을 찾아갔다. 사령관은 패널을 들고 분주히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칸이라는 것을 알자 패널을 내려놓고 그녀를 맞이했다.


칸은 보고하듯이 말했다.


“사령관, 나는 떠나겠다.”


“응. 잘 가.”


짧은 배웅. 하지만 사령관은 곧장 패널을 들어올리는 대신 칸을 바라보았다. 칸은 그런 그를 보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떠나는지 안 묻는군.”


“칸이잖아. 칸이 해야 할 일이라면 중요한 일이겠지.”


무한한 신뢰에 칸은 미소 지었다. 무한한 신뢰에 어울리는 무한한 애정을 느끼면서.


“떠나더라도 완전히 연락은 끊지 말고, 가끔 생각나면 편지라도 보내줘.”


“당연하지. 멋진 풍경, 맛있는 음식, 좋은 사람을 만나면 사령관에게 알려주겠다.”


두 사람은 웃었다.


사령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칸에게 손을 내밀었다.


“웃으면서 보낸 만큼 웃으면서 돌아올 수 있는 좋은 여행이 되기를.”


칸은 사령관의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짧은 송별이 끝나고 칸은 방을 나섰다.


사령관은 칸이 나간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패널을 들어올렸다.




건물을 나서니 레오나가 서 있었다. 그녀는 칸의 앞을 가로막았다.


“떠나려고?”


“그래.”


“이렇게 바쁜 시절에 한가하게 세계라도 주유하려고?”


“무기를 내려놓은 늙은 군인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밥만 축낼 바에는 자리를 내려놓고 떠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


“……그렇겠네. 지금까지 파괴하고 약탈하고 죽이기만 하던 사람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틱틱대며 말하던 레오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칸은 레오나의 다음 말을 기다려줬다.


한참 후 레오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본인이 쓸모없다고 여겨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쓸모가 있어.”


“그런가?”


“내가 자리를 알아봐 줄게. 하다못해 없으면 메이드라도 하면 되잖아?”


레오나의 농담에 칸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흥미롭군.”


“……농담이야. 신속의 칸을 고작 메이드를 시키는 것 만큼 인적 낭비가 어디 있겠어?”


“좋게 봐줘서 고맙다.”


레오나는 한숨을 내쉰 후에 말했다.


“앞으로 엄청 바쁠 거야. 일손이 하나도 부족한데. 평범한 브라우니도 아닌 신속의 칸 같은 지휘관이 빠지면 공백이 엄청 클 거야.”


“미안하군. 해야할 일이 있어서.”


“……그래서 못 붙잡는 거잖아.”


“지금은 아니고?”


“지금은 설득.”


“실패한 거 같군.”


“내 생각도 그래.”


“카드 더 없나?”


“……칸이 없는 동안 달링의 아이를 임신할 거야. 그때가 되면 나도 남을 걸 하고 후회해도 소용없어.”


이건 진담일까, 농담일까? 아마 진담 같은 농담. 농담 같은 진담이겠지.


“사령관과 레오나의 아이라면 똑똑하고 예쁘겠지. 혹은 잘생겼거나.”


아무런 사심 없이 웃으며 말했다.


레오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 칸의 앞에서 비켜났다.


“달링이 실패했는데 내가 어떻게 설득할 수 있겠어.”


“레오나.”


“응?”


칸은 레오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오나는 잠시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맞잡았다.


“너는 좋은 전우다.”


“뭐, 칸도 그럭저럭 합격점인 전우였어.”


“살아남은 전우는 언제나 좋은 전우지.”


“…….”


“물론 죽은 전우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더군.”


“……다녀와.”


악수가 끝났다. 칸은 레오나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칸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레오나는 잠시 그런 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칸은 떠났다.


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은 죽은 자들을 기리기 위한 여행.


그러하기에 언제 끝날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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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구상만 하고 있던 작품이었는데 대회가 열린 것을 계기로 써봤음.


그런데 생각해보니 칸이 죽은 옛 전우들을 찾아 여행하는 건 진부한 스토리네.


안 진부하도록 노력해야겠음...


제목은 '장송의 프리렌'에서 따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