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아의 고원지대에 가득 차 있던 어둠의 장막을 날카로운 빛이 찢어냈다.


날이 밝자 날짐승이 날아다니며 노래를 불렀고, 작은 들짐승 하나가 최근에 새로 생긴 작은 언덕 주위를 둘러보며 먹이를 찾기 위해 코를 킁킁거렸다.


작은 언덕이 들썩였다. 들짐승은 지금까지 살아있게 도와주었던 신중함을 발휘해 잽싸게 도망쳤다.


작은 언덕이 양쪽으로 갈라지더니 긴 머리의 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녀. 신속의 칸은 눈을 찌르는 햇빛을 손으로 가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침인가.’같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적어도 반경 백 여 킬로미터 이내에 들을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까운 곳에 도시가 있기는 했지만, 그곳은 아나톨리아 전쟁과 연합전쟁, 멸망전쟁을 거치면서 폐허가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한 때는 요충지였다. 그곳을 지키기 위해 칸은. 아니 당시에는 케시크였던 그녀는 자매들과 함께 언약의 수호자라는 적과 싸웠다.


당시의 상흔은 아직도 남아있었다. 곳곳에 파인 구덩이는 포탄 구멍이고, 저기 붉게 녹슨 물체는 기갑장비일 게 분명했다.


그곳에 신속의 칸은 증거를 더 남겼다.


칸은 가볍게 몸을 푼 후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이곳에 온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녀는 무덤을 만들었다. 리볼버 캐논을 들었던 손이 삽을 들고 빈 무덤을 만들었다. 무덤을 만들기에 좋지 못한 땅이었지만 칸은 묵묵히 무덤을 만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애쓴 후에 그녀는 무덤 하나를 만들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칸은 무덤 앞에 돌이나 녹슨 철판을 가져와 무덤 주인의 이름을 새겼다.


케시크 38.


도구로 이용되었기에 아무도 추모해주지 않는 바이오로이드의 이름이었다.


칸은 케시크 38에 대한 기억을 곱씹으며 그녀를 추모했다.


추모가 끝났다. 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허리를 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주위에는 이미 수백 개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었다.


칸은 자신의 위업에 뿌듯해하거나, 앞으로 남은 할당량에 대해서 좌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랜 세월을 거쳐 깊어진 눈으로 무덤들을 바라보며 자신도 저들과 다를게 없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칸은 먼지로 칼칼해진 목을 물로 축인 후 다음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나톨리아에 밤이 내렸다. 그러나 어둡지는 않았다. 주위에 빛이 없자 오히려 더욱 밝은 빛을 내는 별과 달이 아나톨리아 고원 평원 지대를 밝혔다.


칸은 평원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옛이야기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별이 떨어진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던 날. 나는 밤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감스럽게 별이 떨어지는 것은 보지 못했다. 나의 자매들이 잔뜩 죽은 날이었는데. 나는 그때 우리 바이오로이드들은 죽어도 별이 떨어지지 않는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머릿속으로 사령관에게 보낼 편지의 초안을 작성하던 칸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인간들이 멸망하던 시기에도 별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인간의 죽음과 자연현상을 결부시키려는 미신적인 거짓말이다.’ 라고 단정하면 너무 멋이 없는 것이겠지. 아마 우주의 별이 너무 많아서 지상의 인류가 전부 사라지더라도 티가 안 나는 것이겠지. 별의 수는 모르겠지만. 아마 오비탈 와쳐에게 물어보면 가르쳐주지 않겠나?‘


칸은 이 편지를 받은 사령관이 너털웃음을 터트릴 것을 상상하고 자신도 웃음을 터트렸다.


칸은 즐거운 마음이 되어 랜턴을 켰다. 그녀는 랜턴의 빛에 의지하며 사령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식량이 다 떨어졌다. 물도 지금 있는 병이 마지막이었다. 삽도 금이 가서 임시방편으로 접착제로 붙여서 쓰고 있는 실정이었다. 더러워졌다고 흉볼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간단하게 샤워도 하고 싶었다.


아무리 강인한 육체를 가진 바이오로이드라고 하더라도 거친 환경에 너무 오랫동안 지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했다.


칸이 진지하게 문명이 있는 곳에서 보급을 하고 다시 올까 고민하고 있던 때. 칸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공기 가르는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엄폐물을 찾았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전쟁이 끝났음을 떠올리고 자신도 모르게 쓰게 웃었다. 너무 오랫동안 전쟁에 물들어 있다 보니 조건 반사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칸은 느긋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에 잘 보이는 노란색의 비행체가 칸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조금 더 기다리니 그것이 드론 08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것은 드론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는지 드론의 아래에는 미사일 대신 커다란 상자가 매달려 있었다.


드론은 칸 앞에 까지 날아온 후 물었다.


“수취자 신속의 칸. 본인 맞으십니까?”


“그래.”


“수취자 확인.”


드론은 짐을 내려놓았다.


“발신자는 누구지?”


“발신자의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서 함부로 밝힐 수는 없습니다.”


“그런가? 뭐. 수고했다.”


“언제나 Azaz&Gremlin 사의 서비스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고의 로봇 서비스를 원하시면 A&G를 찾아주십시오.”


드론은 그 말을 남기고 떠났다.


칸은 드론이 남긴 말을 듣고 웃고 말았다.


이렇게 옛 전우의 근황을 알게 되다니. 더군다나 기계성애자라고 칭해도 될 둘이다. 자유로워진 둘이 만났으니 얼마나 폭주할지도 예상이 갔기에 웃음은 더욱 커졌다.


칸은 한참 웃은 후에 상자를 열었다.


상자에는 칸이 바라마지 않았던 보급품이 들어있었다.


식량, 삽날, 물 정화기와 필터, 기호품 그리고 이동식 비닐 욕조와 물을 데울 수 있는 휴대용 보일러도 있었다.


마치 보고 있었다는 듯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있었다.


발신자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서 함부로 밝힐 수는 없다고 했지만 이렇게 철저한 일처리를 하는 사람은 칸이 알기론 거의 없었다.


그리고 칸이 무엇을 하는지 아는 사람이라는 조건을 붙이면 한 명으로 좁혀진다.


“고맙다.”


들리지 않을 감사 인사를 하고 칸은 짐을 자신의 텐트로 옮겼다.




“올인!”


“자신 있나? 샐러맨더 737.”


“하하! 천하의 대장이 쫀거야? 쫄리면 폴드해.”


“좋다. 받아주지. 콜.”


“좋았어. 그러면 오픈이다. 나는 7 포카드!”


“미안하군. 로열스트레이트 플러시다.”


“…….”


“이걸로 오늘은 끝인가?”


“아니, 평생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게 왜 이게 지금 나오냐고! 나도 지금까지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건데!”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나.”


“……대장.”


“왜 그러나?”


“저기……미안한데. 헤헤. 조금 돈이 부족해서 말이야.”


“돈도 없으면서 도박을 하자고 했나?”


“아, 나는 이길 줄 알았지.”


“……달아두도록 하지. 나중에 돈이 생기면 갚아라. 그때까지는 도박 금지다.”


“나으리, 제발 그것만은!”


“나리든 마님이든 돈 없이 도박했다가 나중에 무슨 경을 치려고. 안 돼.”


칸은 눈을 떴다.


최근에는 옛 전우에 대한 꿈을 많이 꿨다. 종일 옛 전우에 대해 생각을 하고 옛 전우들의 장례를 치르다 보면 당연히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오늘 꿈에 나온 샐러맨더 737은 칸의 명령을 충실하게 지켰다. 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로열스트레이트 플러시를 뽑은 다음 날 전투에서 전사했기 때문이다.


오늘 장례를 치러줄 사람은 정해졌다.


간단한 운동과 식사를 마친 후 칸은 삽을 들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제는 제법 요령과 노동에 적합한 근육이 붙었는지 땅이 시원시원하게 파였다. 다른 때보다 절반의 시간이면 충분히 무덤을 만들 수 있겠다고 판단하던 칸은.


캉!


하는 금속성 소리에 삽질을 멈췄다.


그녀는 먼저 삽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비껴쳤는지 삽날은 상한 부분이 없었다.


다음으로 그녀는 삽으로 친 것을 확인했다.


네모난 금속 상자였다. 탄통이었다.


칸은 그것을 꺼냈다. 탄이 가득 들어있을 때만큼 묵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빈통도 아니었다. 통을 드니 안에 있던 것이 흔들려서 소리를 냈다.


부비트랩인가 하는 생각이 안 든 것은 아니지만 부비트랩을 이렇게 깊은 땅속에 묻어둘리 없다고 판단하고 그녀는 과감하게 탄통을 열었다.


“…….”


탄통에는.


멸망 전 인류가 쓰던 지폐와 트럼프 몇 벌 그리고 종이가 한 장 있었다.


종이에는.


’샐러맨더 737의 개인물품! 횡령시 추적해서 불태워버린다!‘


라고 쓰여있었다.


“하하하하하핫.”


칸은 웃었다.


그 웃음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즐거움과 어이없음 그리고 그리움.


“아아. 돈 없다고 했으면서 있었잖나.”


칸은 한숨과 함께 웃음을 그쳤다.


“못 받았던 돈 이걸로 확실하게 받았다.”


이제는 가치가 없어진 화폐에서 딱 자신이 받아야 할 것만 빼고 나머지는 다시 탄통에 넣었다.


많지 않은 돈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칸은 탄통을 옆에 두고 무덤을 마저 완성시켰다.


완성된 무덤을 앞에 두고 칸은 탄통을 묘비로 대신했다.


샐러맨더 737의 이름을 새기고 그녀에 대한 추모를 하던 칸은 문득 그녀라면 다른 방식으로 추모해주길 원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칸은 탄통에서 트럼프 한 벌을 꺼냈다.


“돈은 갚았으니 도박 해금이다. 마지막으로 어울려주지.”


상대가 제대로 플레이를 못 하니 기계적으로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캐리비안 스터드 포커를 하기로 했다.


서로 다섯 장을 받고 딜러는 한 장만 깐 채로 플레이어만 자신의 패와 딜러가 공개한 한 장만 보고 게임을 진행할지 결정하는 단순한 게임.


플레이어는 칸. 딜러는 샐러맨더 737이었다.


이기고 지고 돈을 따고 돈을 잃고 엎치락뒤치락 게임의 승부는 쉽게 나지 않았다.


망자의 한이 아직 맺혀있는지, 아니면 오랜 전우와 더 게임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게임은 황혼이 내릴 때까지 계속 되었다. 칸은 주위가 붉게 물드는 것을 보고 말했다.


“이걸로 마지막이겠군. 찝찝하게 끝내지 말고 서로의 판돈 전부를 걸도록 하지.”


칸은 그렇게 말하고 패를 나눴다.


딜러의 공개된 카드는 스페이드 10.


칸은 자신의 패를 확인했다.


“하하. 마지막이라고 패가 좋게 나온 거 같군.”


그렇게 말한 칸은 자신의 판돈 전부를 걸었다.


“올인이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칸은 대답이 있다는 것처럼 기다린 후에 말했다.


“어차피 마지막이다. 군말 없이 확인하도록 하지.”


칸은 자신의 패를 보였다.


“4 포카드다.”


그리고 칸은 샐러맨더 737의 패를 뒤집었다.


“……훗.”


그 패를 본 칸은 웃었다.


스페이드 로열스트레이트 플러시.


“축하한다. 샐러맨더 737.”


바람이 불었다. 카드와 지폐가 바람에 휩쓸려 날아갔다.


칸은 그것을 바라보았으나 붙잡지는 않았다.


쓰임이 다한 물건들이다.


그러나 그 어떤 때보다 가치 있게 쓰인 물건들이었다.


망자를 환송하는 데 쓰였으니.


칸은 지폐와 카드가 바람에 휩쓸릴 때, "마지막에 이긴 사람이 진짜 승자지, 대장? 최고의 승부였어."라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