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나는야 두번째 인간.

오르카호에서 환영받지 못해 생체재건장치 구경도 못해본 불쌍한 인간.

오늘도 어김없이 폐허가 된 빌딩 사이를 달리...진 못하고 있다. 폭격이라도 맞은 건지 도로가 군데군데 파여있어 속도를 줄인 채로 나아가는 중이다.


"근데 트레저야, 우리 그 연구소 도착하려면 얼마나 남았냐?"


어젯밤에 잠들었을 때는 악몽을 꾸지 않았다. 아직 휩노스 병으로 죽기엔 여유가 있는 것 같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오르카호에서 막 내렸을 땐 오리진더스트 빨로 FAN파를 막았지만 약빨이 떨어진 뒤로는 조금씩 FAN파가 내 몸에 영향을 끼치고 있을 거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 이게 임계점을 넘고 꿈에서 별의 아이랑 아이컨택하는 순간 내 명줄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는 거다.


"조금 더 빠르게 간다면 오늘 밤 안에는 도착할검다."


"아, 그거 좋은 소식이군. 오늘부터는 휩노스 병 걱정할 일 없이 편안히 잠들 수 있겠어."


"...그거 죽는다는 표현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 재수없게스리.

아무튼 휩노스 병 문제를 처리하고 나면 철충과 펙스만 걱정하면 될 테니 좀 편해질 거야."


그동안 철충한테 쫒기랴 펙스한테 쫒기랴 온갖 고생을 해왔지만 그중 가장 골칫거리였던 휩노스 병 대비책이 코앞이다. 

미국 땅에 들어와야 했을 땐 어찌되나 걱정했는데 국경선 넘을 때만 힘들었지 오메가가 추격을 속행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정말.


"형님한테 대드는 건 뭐든지 제가 박살내버리겠슴다!"


"그 주둥이만큼 잘 싸우는지 실력 좀 구경해봐야겠는걸."


뒤에서 잠자코 있던 리디아가 입을 열자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왜냐면 꼬리를 잡힌 거 같거든."


꼬리? 뒤에 뭔가 따라붙었다고?

백미러를 보았지만 도로 위에는 건물의 잔해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번엔 사이드미러를 보자 차 뒤쪽 하늘까지 볼 수 있었다. 그제서야 우릴 쫒아오고 있는 회색 비행체 한 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건 또 뭐-"


그 비행체가 속도를 높여 차와 가까워지자 다짜고짜 발칸포를 쏘기 시작했다. 사이드미러로 아스팔트 도로에 총탄이 튕기는 게 보이더니 그 다음엔 트렁크와 지붕에 총탄 자국을 길게 남겨놓았다.

이 때 뒤를 맞으면서 타이어가 펑크난 건지 차가 도로 위를 포물선으로 그으며 멈춰버렸다, 비행체는 그대로 우릴 지나쳐 하늘 멀리 날아갔다가 유턴해서 다시 우리 쪽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와쳐? 아니, 색이 이상한데?"


"정찰형 인터셉터야, 펙스에서 보낸 거다!"


"형님, 차 안에 계십쇼! 완전한 방탄차는 아니지만 바깥보단 안전할검다!"


"저거 미사일도 쏘는데, 그건 막을 수 있냐?"


"어, 미사일은 못막는데요. 걍 내리십쇼!"


다시 우릴 향해 날아오는 인터셉터를 견제하기 위해 트레저와 리디아가 대공사격을 시도했으나 역시 효과가 없었다, 인터셉터는 유연한 회피기동으로 전부 피해내며 빠른 속도로 접근해왔다.

현실은 턴제 전투가 아니다, 소총이나 기관총 든 보병 둘이서 전투기를 잡는다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이거라도 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저항도 오래가지 못했다.


인터셉터에서 우릴 향해 미사일이 발사된 걸 육안으로 확인하자마자 둘은 총을 내팽개치고 지프차의 뒷범퍼 밑에 손을 밀어넣은 뒤 힘을 합쳐 차를 비스듬하게 세웠다.



곧이어 요란한 광음과 함께 차 반대쪽이 터지는 게 보였다. 차를 통째로 방패삼아 미사일을 막아낸 덕에 차만 박살나고 우린 무사할 수 있었다. 인터셉터는 다시 우릴 지나쳐 그대로 날아가더니 이번엔 곧장 유턴하지 않고 멀찍이서 우리 주변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오픈카가 되어버린 차를 땅에 내려놓고 다시 총을 겨눴지만 사정거리 밖이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내려오지 않잖아 저거, 뭐하자는 거야?"


"지원군이 올 때까지 우릴 여기 붙잡아두려는 거 아냐? 우리 위치도 알아냈고, 차도 없으니 도망치려 하면 언제든지 날아와서 쏴버릴 수 있을 테니까."


"혼자서 우릴 다 죽일 수 있을텐데 왜 지원군을 부르겠어?"


"저게 오메가가 보낸 거라면 분명 살아있는 인간을 생포하려 들거다. 인터셉터는 사람 잡아다 배달할 손이 없잖아."


"그럼 이제 어떡함까? 저게 내려오지 않으면 우린 공격할 수단이 없슴다."


"도망쳐야지, 차는 쓸 수 있냐?"


"제가 정비공은 아니지만 대충 봐도 굴러갈 것 같진 않슴다 형님."


"안에 든 식량도 날아가 버렸지. 형님 소방도끼는 무사하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아끼지 말고 하루 3끼 먹을걸."


"어이 형님, 농담할 기운 있으면 뭔가 이 상황을 타계할 방법 좀 생각해봐."


"건물 사이로 숨는 건?"


"와쳐, 그러니까 인터셉터는 지상 관측에 특화된 AGS임다. 어디로 숨든 하늘 위에서 금새 찾아낼걸요. 실내로 숨는다면 보이지야 않겠지만 들어간 건물의 출입구만 감시하면 금방 들킬검다."


이러는 와중에도 인터셉터는 실시간으로 우리 좌표랑 영상을 오메가한테 전송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오메가가 다음 수를 쓰기 전에 움직여야만 한다. 

숨으면서 동시에 도망쳐야 한다, 쓸만한 주변 건물이 뭐 있나 두리번거리다 건너편 인도에 있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바로 지하철 입구다.


"저기다! 지하철 쪽으로 뛰어, 당장!"


우리 셋이 뛰기 시작하자 인터셉터가 다시 우릴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인터셉터는 우리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려 워낙 높이 떨어져있었기에 바로 우리에게 닿진 못했다.

다급해진건지 우리 등을 향해 발칸포를 쏘기 시작했지만 근처 도로에만 눈 먼 총탄이 튕길 뿐이었다.

우리가 계단을 내려가 어두컴컴한 지하로 들어가자 인터셉터는 추격을 중지했다.


*


"지하철이라, 머리 좀 썼군."


인터셉터의 카메라를 통해 상황을 지켜보던 오메가가 중얼거렸다. 지하철로 들어갔다면 사실상 추적이 불가능해진다. 미로처럼 얽혀있는 지하의 수많은 선로를 따라 이동한다고 치면 어떤 도시의 어떤 출입구로 튀어나올 지 예측할 수가 없다.

크기가 작은 드론이라면 모를까 인터셉터를 지하의 폐쇄된 공간으로 들여보내면 그 하찮은 보병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다 맞게 된다. 이제와서 드론을 증원으로 보낸다 해도 그놈들은 멀리 도망친 뒤일 것이다.

거기다 멸망 후의 지하철은 그야말로 심연이다, 한 치 빛도 들어오지 않는 데다 군데군데 수몰되기까지 한 어둠의 미로는 야생에서 떠돌아다니는 노숙자 바이오로이드도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하철로 도망친다는 선택을 강행한 놈들을 보며 독한 놈들이라 생각했다.


"추격은 중지다, 귀환하도록."


명령을 수신한 인터셉터는 지하철 입구를 빤히 쳐다보던 것을 관두고 본진으로 돌아갔다. 오메가는 실시간 영상을 끄고 녹화된 영상을 다시 보며 정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차에서 나온 건 여자 하나에 남자 둘. 여자는 모습이 좀 바뀌긴 했지만 보병 바이오로이드 브라우니임이 틀림없다.

남자 중 근육과 덩치가 있는 쪽은 아마도 그 또한 보병 바이오로이드인 고블린일 것이다. 반면에 다른 한명의 남자는 힘도 약해보이고 인터셉터의 공습에 직접 싸우기는커녕 다른 둘로부터 지켜지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고블린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 남자는 분명 인간일 것이다. 오르카호의 사령관과는 다른 두번째 인간. 그리고 그 인간도 사령관이란 남자와 마찬가지로 휩노스 병에 면역일지도 모른다.

이 순간 레모네이드 오메가의 목표 중 우선순위가 사령관에서 두번째 인간으로 변경됐다, 회장님의 부활을 위해 무슨 수를 써서든 그를 납치해와야 한다.


*


"어두워."


"당연히 어둡지, 전기도 안들어오는데."


"아니 그래도 이건... 무섭다고 진짜..."


셋이서 각각 손전등 하나씩 들고 앞을 비춰봤지만 이 칠흑같은 어둠을 완전히 걷어낼 수는 없었다. 인터셉터고 나발이고 눈앞의 어둠이 제일 무섭다 시발.


"형님, 손잡아줄까?"


"됐어, 나갈래 그냥..."


"그 AGS는 어떻게 처리하려고?"


"아 몰라 안해 못가 태양빛 보러 나갈래."


"그럽시다 그럼, 저도 그 비행기자식 손봐주지 않으면 속이 안풀립니다!"


"알았어, 형님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그렇게 해서 우리 셋은 들어왔던 출입구로 도로 나왔다. 어째 나왔을 땐 인터셉터가 포기하도 돌아간 건지 어디에도 없었다.

아 개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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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씨 존버할걸...)


라붕이 일행, 차와 식량을 전부 잃어버리다! 그래도 휩노스 병 대비책에 거의 다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