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어제 인터셉터 때문에 차가 박살나 버려서 뜻밖의 도보여행 하느라 좀 힘들었지만 오늘 아침 드디어 트레저가 말했던 그 블랙리버 연구소에 도착했다. 트레저가 앞장서서 낡아빠진 철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간 뒤 우리도 따라 들어갔다. 그리 큰 건물은 아니었기에 문서 보안고로 보이는 방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블랙리버 연구시설은 다 기본적으로 자체 발전기가 딸려있는 건지 아니면 아직도 도시에 전기가 들어오는 건지 벽의 스위치를 누르자 불이 들어왔다.


트레저가 컴퓨터로 보이는 물건에 다가가 버튼을 이것저것 만지자 모니터가 켜졌다. 삼안의 김지석이 생체재건장치를 만들 동안 블랙리버는 어떤 결과를 냈을까, 그 답을 보기 위해 이곳 연구원의 일지를 찾아 화면에 띄웠다. 


아 시발 영어로 써놨네.

하긴 미국에 위치한 미국 기업인데 당연한 거겠지...


옆을 보니 리디아는 뭔가 바빠 보이길래 트레저한테 대신 읽어서 요약해 달라고 했다. 트레저는 빠르게 화면을 넘기며 속독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휩노스 병의 원인은 해저에서 나오는 FAN파 라는 특이 전파가-"


"인체의 신경계에 접촉해서 발생하는 증후군으로 어쩌구 저쩌구. 원인은 알고 있으니까 해결법으로 넘어가자고."


"없슴다."


"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일시적으로 병을 막는 방법만 나와있슴다. 완전한 치료법은 없고요."


"그럼 그 방법은 뭔데?"


"신경계가 그 전파에 노출되는 상황만 막으면 되는 거니까 인체를 중금속으로 코팅하는 검다. 인체를 텅스텐 납 합금으로 된 인공 골격과 전자 신경계, 오리진 더스트 근육계로 갈아끼우는 수술을 연구했다고 하는데 이건 미완성으로 끝났다고 함다.

대신 차선책으로 전파 차단이 가능한 합금 벙커를 만들어 그 안에서 사는 거랑 합금 헬멧을 만들어 뒤집어써서 뇌를 보호하는 방법을 만들어냈는데..."


"뭔가 문제라도 있나?"


"어느 쪽이든 완벽한 밀폐는 불가능한데다, 벙커는 그 벽이랑 신경계가 바로 맞닿아서 보호하는 게 아니라서 효과가 약하고, 헬멧은 뇌는 커버하지만 척수까지 덮질 못해서 FAN파를 완전히 막을 순 없다고 적혀 있슴다.

결국 임시조치라는 거죠, 방법 자체도 거의 야매고요. 그렇긴 해도 이 일지를 쓴 연구원은 그 합금 헬멧을 쓰고 생활했다고 하는데... 헬멧을 어디다 뒀는지는 안적혀있네요."


"아까 둘러봤을 땐 헬멧으로 보이는 건 없었잖아. 그 연구원이 헬멧 쓰고 어디로 나갔다가 죽었나?"


"글쎄요, 저도 잘..."


"야 고블린! 이리 와서 손 좀 빌려줘."


"고블린이라고 부르지 좀 마, 나한텐 형님이 지어준 트레저라는 이름이 있다고! 그래서 뭔데?"


혼자서 뭔가 찾고 있던 리디아가 큰 소리로 부르자 트레저가 투덜거리면서도 그쪽으로 걸어갔다. 리디아가 뒤의 벽을 손등으로 치자 텅텅 소리가 났다.


"이 뒤에 뭔가 숨겨져 있어, 벽 뜯어내는 것 좀 거들어."


둘이 낑낑대며 쇠로 된 벽 한 켠을 허물자 그 너머에 있는 숨겨진 공간이 드러났다. 연구실의 비밀벙커로 보이는 이 안에는 머리에 이상한 철 투구를 쓴 채 죽어있는 백골이 있었다.


"설마... 이게 그 연구원인가?"


"그렇겠지. 저 해골이 쓰고 있는 투구가 일지에 적힌 합금 헬멧인가 하는 거겠지. 뜬금없이 기사 코스프레 용품이 있을 리는 없잖아?

상의 앞면이랑 늑골이 집중적으로 너덜너덜해진 꼴 보니 대충 총 맞고 죽었나본데?"


"철충이 쳐들어왔었나?"


"그건 아닐걸. 우리가 벽 뜯어내기 전엔 밀폐돼있었잖아. 누가 저 인간을 죽이고선 이 방에서 나간 뒤 바깥에서 조작해 방을 통째로 숨긴 거겠지. 사람 아니면 바이오로이드... 아마 사람이겠지? 보통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을 공격 못하니까."


리디아는 시신을 훑어보며 사인을 추측하기를 끝내고 머리에 씌워져 있던 합금 헬멧을 빼낸 뒤 먼지를 털어 나에게 건네줬다.

해골이 쓰고 있던 물건이라 찜찜하긴 했지만 가릴 처지가 안됐다. 헬멧을 받고 한번 더 헬멧 안쪽을 손으로 툭툭 턴 뒤 머리에 썼다. 

어색한 느낌은 둘째치고 눈구멍이 좁아서 시야가 제한되는 데다 그것도 선글라스처럼 어두운 유리가 붙어있어서 앞이 잘 안보였다.


그런데 정말로 이상한 건, 리디아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기겁한 표정을 지은 채 날 쳐다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혀, 형님! 괜찮으심까? 괜찮은 거 맞슴까!?"


뒤돌아보니 트레저도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멀쩡해, 멀쩡한데 왜? 연구원의 유령이라도 나타났어?"


"형님 뇌파가 전혀 안느껴짐다!"


"...뭐?"


내가 도로 헬멧을 벗자 트레저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안심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후, 다행이다... 형님 머리에 뭔가 이상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했다고요."


"전파 뿐만 아니라 뇌파까지 차단하는 거였군. 블랙리버 놈들 잘도 이런 걸 만들어냈네."


"이게 뇌파도 차단한다고? 그럼 너희들 눈엔... 내가 어떻게 보인거야?"


바이오로이드는 뇌파로 인간을 구분한다, 그런데 뇌파가 없다면?


"그, 뭐라고 해야 하나... 본능적으로 인간의 형상을 했지만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느껴졌슴다. 마치 형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바뀐 거 같았지 말임다."


"그렇다고 바이오로이드로 보이는 건 아냐, 바이오로이드는 생체신호를 내뿜거든. 근데 형님이 헬멧 쓴 동안은 그런 것도 없었다?"


"철충은 딱 봐도 인간이 아닌 걸 머리가 억지로 인간으로 인식했지만 이건 정반대였슴다."


"거기다 인간의 뇌파가 안느껴지니 명령권도 못쓸테지."


둘이 번갈아서 얘기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내가 이 헬멧을 쓰고 있는 동안은 바이오로이드는 나를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나 또한 명령도 내릴 수 없다는 거다.

그렇다면 혹시...


"저 연구원, 바이오로이드한테 총맞아 죽은 거 아냐?"


그렇게 말하자 둘은 백골이 된 시신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럴지도, 멸망 전 인간이 우릴 어떻게 취급했는지는 안 봐도 뻔하니까. 그럼에도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저항 못하다가 헬멧 쓰고 인간이 아니라고 인식한 순간 원한을 푼 거일지도 몰라."


이것이 이 헬멧의 부작용이다. 휩노스 병을 완전히 막을 수도 없거니와 인간을 바이오로이드와 같은 위치로 끌어내리는 물건, 이걸 쓴 순간 인간은 에머슨 법 뒤에 숨지 못하게 된다.


"걱정할거 없슴다 형님! 뇌파가 안느껴지더라도 전 언제나 형님의 편입니다!"


트레저가 내 불안을 달래주기 위해 큰 목소리로 호언장담했다. 그러자 리디아도 말을 덧붙였다.


"응, 그렇지. 뇌파가 없어도 겉모습이나 목소리로 구분하면 되겠지 뭐. 명령권 좀 못쓰면 어때, 어차피 형님은 평소에도 명령 잘 안내리잖아?"


평소에 좆간처럼 행동했다면 프래깅 각이었겠지만 그러지 않았었기에 둘은 의리를 지킨다는 선택을 했다. 새삼 얘들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도로 머리에 헬멧을 썼다.


"으... 여전히 적응이 안됨다."


"뭐 됐고, 이걸로 한동안 휩노스 병은 걱정 안해도 되겠다. 이게 얼마나 오랫동안 FAN파를 막아줄 지는 모르겠지만 수명 연장은 됐네. 헬멧 외에 또 건질만한 건 없나?"


"대충 보니까 식량이나 무기는 하나도 없던데, 옷가지는 좀 남아있더라."


"그거라도 챙겨가자. 안 그래도 잘 때마다 춥던데 이불로라도 써야지."


누가 운전석 창문 깨부숴서 말이지. 트레저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창고에 가보니 옷이 담겨져 있는 상자가 쌓여있었다. 몇몇개 열어보니 바이오로이드용 옷으로 보였다. 대부분이 이불로도 못써먹을 쫄쫄이 슈트 그런 거 뿐이었다.

그래도 스틸라인이 쓰는 것 같은 군복 자켓이 있길래 사이즈 큰 거 찾아서 트레저한테 건네줬다. 맨날 티셔츠 한장만 입고 다니는 게 추워보이더라, 본인은 추위를 잘 안탄다고 했지만.


그 외엔 쓸만한 게 없어 보였으나 대박이 들어있는 상자를 하나 발견했다. 원래 세계에 있을 때 라오에서 이것을 본 적이 있다. 몸을 전부 덮을 정도로 기다랗고 후드가 달린 반투명한 까만 망토, 바로 팬텀의 은폐 망토다. 

크, 이 맛에 가챠를 못끊는다니깐.


망토를 만지작거리자 광학 미채가 작동됐다. 원래는 팬텀의 생체 에너지로 작동된다는 물건이지만 지금은 내가 쓰고 있는데도 작동되고 있다, 따로 배터리가 붙어있거나 한 거겠지.

완전히 망토를 뒤짚어쓰고 둘에게 어떻게 보이냐고 물어봤다.


"모습도 안보이고 뇌파도 감지할 수 없지만... 그 망토가 펄럭거리면서 형님이 서있는 장소가 막 일렁이고 그런 게 보임다."


"팬텀이 망토 썼을 땐 그런 일그러짐이 전혀 없던데, 아마추어가 망토 쓰면 완벽히 투명해지진 못하는 모양이네."


"그래? 뭐 이 정도면 됐지. 가까이 와서 관찰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알아볼겨."


"그건 그렇지. 망토는 형님이 가져, 철 투구랑 망토를 같이 쓰니 무슨 덴세츠 연극에 나올 기사 같아 보이네.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이제 볼 일 다 봤으니 미국에서 떠야지. 여기 계속 있다간 언젠가 또 오메가한테 들킬걸."


"차는 둘째치고 식량부터 구합시다. 여기 있는 동안은 그 오메가란 년의 정찰망 피해서 돌아다녀야 하니 전처럼 식량 찾으러 도시 마음대로 쏘다닐 수도 없을검다. 캐나다로 돌아갈 때까지 먹을 식량 만이라도 미리 확보해둬야죠."


"그래그래, 지금쯤 국경선 경계도 강화됐을 것 같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이 도시에서 먹을 거 없나 찾아보자."


"도시 수색은 둘이서 해. 난 도시 외곽 나가서 사슴이라도 잡아올게."


"사슴 고기 맛있냐?"


"소나 돼지랑 비교하면 별로야, 그냥 양이 많아서 먹는 거지."


그렇게 해서 우린 두 팀으로 나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늘에 드론이나 와쳐같은 정찰기가 보이면 숨으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


제대로 된 호위도 없는 인간이 자신의 영역 안에 들어와 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오메가는 그렇게 되새기며 여전히 두번째 인간을 찾고 있었다. 미대륙 곳곳에 정찰기를 보낼 뿐만 아니라 다방면으로 추적을 시도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화면에는 미국 내 각 도시에서 어느 정도의 전기가 사용됐는지가 표시된 지도가 띄워져 있었다. 그 중에서 자신이 아직 개척하지 않은 폐허 도시에서 전기가 흐른 것을 발견했다, 누군가 그 도시의 어떤 건물에 들어가서 전기를 사용했다.


수상한 흔적을 찾은 오메가는 곧장 전기가 사용된 해당 건물의 위치를 추적한 뒤 AGS 부대를 이끌고 직접 나섰다. 숨은 인간을 효율적으로 잡아내기 위해선 뇌파를 감지할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가 필요했고, 자기 휘하의 바이오로이드 중 이런 중요한 일을 맡길만한 자가 아무도 없으니 자신이 나서서 처리하겠다는 이유였다.


라붕이 일행이 자신들이 이미 발각되었다는 것도 모른 채 한가롭게 식량이나 찾고 있는 사이 펙스의 군대가 진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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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붕이 현재 장비: 

-중금속 합금 헬멧 (패시브 스킬, 전파 및 뇌파 차단)

-팬텀의 은폐장 (액티브 스킬, 투명화 가능)

-좌우좌의 소방도끼 (새 친구 사귈 수 있을 거 같음)


이걸로 휩노스 병 대비책 찾기 성공, 하지만 좋은 일이 일어난 다음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