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 https://arca.live/b/supernerimk2?category=%EC%86%8C%EC%84%A4&target=title&keyword=%EC%A1%B0%EA%B8%88+%EC%9D%B4%EC%83%81%ED%95%9C


모음 : https://arca.live/b/lastorigin/207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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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악!!”

 

 

 

커다란 비명이 고막을 뚫고 지나갔다.

알프레드의 가슴에 껴있는 팔을 재빨리 빼내,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달렸다.

 

점점 짙어지는 피 냄새. 비명의 근원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써니!!”

 

 

 

왜 그러냐 묻기도 전에 난 그 광경을 보았다.

리제의 치맛자락에서 튀어나온 가위가 리제의 손에 들려 있는 모습과 써니가 그것을 가까스로 막고 있는 장면을.

뾰족한 가위가 차크람의 날에 끌려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었다. 날에 긁힌 써니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리제도 자신이 왜 그러는지 모르고 있었다는 거. 리제의 얼굴에는 어리둥절해하는 눈빛이 만연해 있었다.

 

 

 

“아... 아아, 몸이 대체 왜...??”

 

“리제 양! 정신 차리고 내 말 좀 들어보세요!”

 

“드... 들려요. 들리는데...!!”

 

 

 

써니의 말에 대꾸하는 와중에도 리제의 오른팔을 거칠게 스스로를 흔들었다.

통제에서 벗어난 움직임은 치명적이었고, 써니의 신들린 솜씨도 한계가 보이는 듯했다.

 

난 리제에게 달려갔고, 나보다 빠르게 알프레드가 리제의 몸을 끌어 안았다.

 

 

 

“숙녀분! 정신 차리세요!”

 

“아아아... 몸이, 몸이 왜...!!”

 

“으윽!”

 

 

 

리제의 가위가 알프레드의 등을 셀 수 없이 찔러댔다.

그 덕에 놀란 써니와 페더는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알프레드가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리제는 점점 자신의 몸의 통제권을 잃어갔고, 그럴 수록 오른팔에 쥐어진 가위는 알프레드의 등을 상처투성이로 만들었다.

알프레드의 소체는 구성 요소 덕분에 금새 아물었지만, 그보다 빠르게 가위날에 베여 갔다.

내가 패닉에 빠진 동안 알프레드의 회복력은 점점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상처가 아무는 속도보다 리제가 가위로 쑤시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으윽...!! 신사분, 어떻게 방법이 없습니까?!”

 

“잠깐만, 잠깐만...”

 

 

 

머리가 쉴 세 없이 돌아갔다.

페더의 날개로 손을 얼릴까? 아니, 지금의 리제는 자기 몸의 통제권을 거의 다 잃어버렸다. 얼리기만 하면 임시방편도 못될 가능성이 크다.

써니의 홀로그램? 물리적인 실체도 없는 것을 가지고 대체 어떻게 하겠냔 말이다.

알프레드는 리제를 막느라 정신이 없고, 남은 건 나 혼자뿐인데.

 

 

 

‘손을 대야 하나? 리제가 저 상태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애초에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왜 저러는 건가, 난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리제가 자기도 가끔 자기 오른팔이 자기를 찌른다고 했다. 자기도 모르게.

그 증상이 지금 재발한 건가? 그럼 지금 위험한 건 알프레드뿐만이 아니다!

알프레드가 막아주지 않으면 결국 자기를 찌르다가 죽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왜 그런 짓을 하는 건진 나도 모른다.

 

옛날 트라우마나 그런 이유가 원인이겠지.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

 

 

 

“신사분! 조금만 더 빨리요!”

 

“잠깐만... 진짜 조금만 더 생각하면...

...

... 에이씨!”

 

 

 

온 신경을 집중해 리제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타이밍에 맞춰, 난 리제가 알프레드를 찌르려는 때에 내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가위가 내 손바닥을 뚫고 피를 흘렸다. 

내 손의 신경이 통제를 잃고 미친 듯이 떨기 시작했다.

 

 

 

“신사분! 무슨 짓을 하신...”

 

“페더! 내 손부터 얼려!!”

 

 

 

다급하게 페더를 호출했고, 페더가 자신의 날개깃을 빌려 내 손에 가져다 대었다. 

그 속도마저 답답했던 나머지, 난 남은 손으로 깃털을 뺏어 내 손에 가져다 대었다. 관통된 부위에 벌써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었으니까.


페더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날개는 순백의 하얀색으로 변했고, 그것에 닿자마자 내 손은 가위와 함께 얼어 붙었다.

 

 

 

“괜찮으세요? 혹시 제가 무슨...”

 

“리제 반대쪽 손도 같이 얼려!

안 그러면 바닥에 떨어진 가위로 다시 똑같은 짓을 할 거야!”

 

 

 

리제의 치마에서 떨어진 가위만 하더라도 지금 바닥에 열댓 개가 널려 있다. 치맛자락 안에 숨겨져 있는 것들을 생각하면 수십 개가 될 지도 모를 일.

그나마 반대쪽 손은 아직 통제권을 잃지 않은 듯 했지만 그것도 시간 문제다. 

통제 불능이 될 때까지 몇 십 초가 걸릴 지, 몇 초가 걸릴 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최선의 방법은 리제의 양 손을 얼려버리는 것이라 생각했고, 거기까진 좋았다.

리제의 몸은 알프레드가 움직이지 못하게 막고 있었고, 오른손은 내 손이, 왼손은 페더의 얼음이 움직임을 봉쇄했다.

그제야 나는 겨우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하아... 하아...

뭔... 뭔 일이야...

... 아니지, 괜찮니? 리제야...?”

 

“죄, 죄송해요...! 그...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왜 자꾸만 이러는 거지...? 원래 안 이랬는데...!!”

 

 

 

리제의 빨간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걸 닦아주고 싶었지만 내 손이 거기에 닿으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서둘러 리제의 옷을 탐색했다. 살갗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치맛자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 안에는 적지 않은 양의 가위가 있었다. 이미 대부분이 바닥에 흩뿌려져 풀잎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말이다.

 

써니는 서둘러 가위들을 수거해 멀리 있는 수풀 속에 던져 버렸고,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다시 한 번 리제의 주변을 살펴보았다.

가위뿐만 아니라 혹시 모를 철조각,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까지 살펴보며 만에 하나라도 리제의 손에 들리면 위험할 것들을 주변에서 멀리 치워버렸다.

 

 

 

“흐윽... 흐흐흑... ...”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어린 리제에겐 너무나 두렵게 느껴졌을 것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함께 웃고 떠들던 이들이 자신 때문에 한 순간에 표정을 바꿨고, 자신의 머리가 따라오지 못할 속도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 이질적인 풍경이 두렵지 않은 아이는 없을 테다.


나도 한 때 아이였었고, 어른들의 이야기가 급박해져 갈 때면 무서워 엄마를 찾곤 했다.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리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리제는 무서워 울기 시작했다. 커다란 눈물이 눈썹에 대롱대롱 매달렸고, 이윽고 툭 툭 떨어져 알프레드의 어깨 위를 적셨다.

그 때문에 되려 당황한 알프레드가 자칫 팔에 힘을 빼버릴 뻔했지만, 내가 남은 손으로 녀석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진정해라, 알프레드.”

 

“아... 네, 그래야죠. 신사분...”

 

“그래, 그럼 됐다.

리제야?”

 

“흑... 흐윽...

...

... ... 네에...?”

 

“많이 놀랐구나.”

 

“... 흐흐흑.”

 

“그래, 그래. 자기도 모르게 자기 몸이 막 움직이니 무섭지 않을 수가 없지.

그래도 이제 조금 괜찮아진 것 같지?”

 

“손이... 손이... ...”

 

“맞네. 리제 손이 조금 차갑지?

그래도 조금만 같이 버티자. 내가 금방 풀어줄 테니까.”

 

 

 

그 말은 대책 없는 위선에 불과했다. 레아도 해결하지 못한 이 상태를 어떻게 내가 해결하겠나.

심지어 내 한 손에서는 피가 주륵주륵 나오고 있는 상태.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이려고 해도 뼈가 가위날에 걸려 으득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음 방법을 간구하는 것과, 그 외의 남은 여력으로 리제 앞에서 최대한 웃는 것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페더의 얼음이 나와 리제의 손을 떨어뜨리고 있었다는 것.

자칫 잘못했으면 내 손에 리제의 팔목이 닿을 뻔했었다. 그리 되지 않았으니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있다.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을 것이다.

 

 

 

‘생각하자. 적어도 아직 정신은 멀쩡해. 그럼 몸을 묶어놓을 수만 있다면 괜찮을 거야.

하지만 실이... 없지. 주변에서 풀잎을 엮어 만들기엔 시간도 부족하고.

그럼 얼음으로 얼려? 아냐, 그랬다간 애 몸 전체를 다 얼려야 할 거야. 페더가 그럴 힘이 남아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알프레드가 막게 해볼까? 하지만 애 하나에 다 맡기기엔 너무 불안하다. 잘못 했다가 팔 하나라도 놓치게 되면 일이 전부 그르칠 수 있어. 게다가 지금 몸 안고 있는 것만 해도 힘겨워보이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내 손에서 뜨거운 핏물이 흐르면서 손을 얼린 얼음을 녹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 당황하면 정말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지금이 엄청나게 위태로운 순간이란 걸 인지해야 한다.

 

묶는다. 묶는다.

실도, 얼음도 없고 시간도 없는 상황에서 아이 하나를 온전히 묶어놓을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살이 닿으면 안 되고, 염동력이라도 쓸 수 있어야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건데...

...

... 아니지. 잠깐만.

 

 

 

삐릭.

 

“... 하아, 왜 연락 안 오나 했네.

당신, 일 터졌구나.”

 

 

 

아직 자유로운 내 반대편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어 수신기를 켰다.

열려 있는 통신 채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닥터였다. 이왕이면 부를 일 없길 바랬지만 지금만큼 부르기에 적합한 때는 없을 테다.

 

 

 

“닥터, 짧게 말할게.

손 안 대고 애 붙잡아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나?”

 

“손 안 대고... 붙잡아 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

...

... 잘 됐네. 마침 그쪽으로 가고 있을 거야.”

 

“뭐?”

 

“설마 당신이 그런 일을 하는데 언니들이 진짜 노느라 정신 팔려 있을 거라 생각한 거야? 아니겠지?

딱 적당한 사람 하나가 방금 출발했으니까 기다리고 있어.”

 

“누군ㄷ...”

 

“그건 이따가 확인하고 지금은 다른 것부터.

다쳤지? 어디가 어떻게 다쳤는지나 말해.

나한텐 그게 더 중요해.”

 

 

 

여전히 시니컬한 대답을 하는 닥터에게 나는 잠시 멍해질 수 밖에 없었다.

 

 

 

“뭐해? 대답 안 하고.”

 

“아... 아냐. 손바닥이 조금...”

 

“당신 입에서 조금이라고 했으면 뭔 최소 뚫렸다고 봐야지.

일단 그거 빼지 말고 그대로 지혈만 하고 있어. 최대한 심장 보다 높게 손을 들고 있는 건 기본이니까 확실하게 하고.

나도 준비되는 대로 출발할게. 더 다칠 생각하지 말고 기다려.”

 

뚝.

 

“... ...”

 

 

 

그 말을 끝으로 닥터는 연락을 끊어버렸다.

조금 퉁명스럽게까지 보이는 대답. 하지만 그 말에 나는 크게 한숨 돌렸다.

닥터가 출발했다는 건 적어도 내가 계속 이러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내가 숨을 돌리자 리제의 눈에도 생기가 돌아왔다.

간헐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몸은 변함이 없었지만, 적어도 나를 보는 표정은 이전과 같이 평온해진 것 같다.

 

적어도? 아니, 많이 좋다.

나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지나칠 정도로 좋다. 이 정도 출혈은 레아에게 부탁을 받았을 때부터 예상한 바였다.

내 손에서 피가 좀 나긴 하지만 그게 뭐 어떻겠나, 괜찮아졌다면 이 정도는 버틸 수 있다.

 

 

 

‘... 아야야...’

 

 

 

물론, 아직 좀 아프긴 하지만. 통각에 익숙해지는 것도 훈련을 해야겠어.

 

 

 

 

 

 

 

 

 

 

 

 

 

 

 

 

 

 

“큰일 날 뻔 했네요. 사령관님.

혹시 아직도 아프거나 하신 건 아니죠?”

 

“아냐, 괜찮아. 세레스티아.”

 

 

 

닥터의 전화가 끊기고 1분이나 있었을까, 긴 금발이 내가 떨어진 절벽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월계수 잎처럼 생긴 금 장식과 반투명한 하얀색 옷을 걸치고 있던 세레스티아였다.

 

눈이 커서 그런 건지 절벽 위에 서서 곧바로 내가 있는 곳을 알아차렸고 그대로 몸을 던졌다.

무슨 미친 짓인가 싶었지만 절벽 틈에서 커다란 덩굴들이 솟아나며 그녀가 디딜 발판이 되어 주었다.

으득거리는 절벽을 뒤로 한 채, 세레스티아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고 그럴 수록 초록색 덩굴이 그녀를 빠르게 내게로 데려다 놓았다.

 

 

 

그 이후 그녀가 한 일은 아주 일목요연했다.

내 상태를 눈으로 한 번 슬쩍 흘겨 보고, 땅에서 자라는 작은 풀잎들을 쓰다듬어 기다란 덩굴로 만들었다.

그 덩굴들이 리제의 팔과 몸을 감쌌고 생전 느껴본 적 없던 생소한 감각에 리제는 눈을 꼭 감았다.


덕분에 페더는 얼음을 녹여 내 손을 빼낼 수 있었고, 나는 가위에서 내 손을 쑥 뽑아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 부위는 알프레드의 등에서 흘러 나오는 치료액으로 대충 감쌀 수 있었다.

 

 

 

“... ...”

 

“혹시 아직도 힘드신 건가요?

제가 도와드릴 것이라도...”

 

“... 아냐, 일단 리제부터 계속 보고 있어야지.”

 

 

 

대충 지혈만 해놓고 난 리제 앞에 풀썩 주저 앉았다.

간헐적으로 발작하는 리제의 몸이 혹시 덩굴을 끊고 다시 자기 몸을 해할까 하는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대 방심하지 않을 거다. 리제 몸에 흉터 하나라도 생기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미련해서 지금까지 다친 아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니 적어도 내 눈 앞에 있는 아이 한 명은 지켜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난 리제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온 힘을 다해서.

 

 

 

“괜찮아. 괜찮아. 나 어디 안 갈 거니까 놀라지 말고 그냥 이렇게 조금만 버티자.

곧 닥터도 온다고 했으니까 금방 치료해줄 수 있을 거야.

치료하고 나면 예쁜 꽃 장식들 다시 만들러 가자. 알았지?”

 

“죄... 죄송해요. 또 저 때문에...”

 

“에이, 이제 와서 사과할 필요가 뭐가 있어.

너 지키겠다고 절벽에서 뛰어내린 사람들한테 이런 거 하나가 별 거겠어?”

 

“신사분, 저는 조금 별 건데요?

제 등에 난 상처만 해도... 으엑!”

 

“닥쳐.”

 

 

 

옆에서 눈치 없이 구는 알프레드를 보니 답답하긴 해도 마음이 놓인다.

이 놈... 아니, 년이 아무리 장난끼 넘치는 깡통이라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진심으로 저런 말을 할 애는 아니니까.

... 그래도 혹시 모르는 마음에 확인을 해봤다. 설마 그 정도로 깡통일 리는 없겠지.

 

 

 

“... 그거 진담 아니지?”

 

“당연히 농담입니다! 농담! 분위기가 조금 그래서 한 번 풀어보려고 했던 건데."


"그것도 때를 봐 가면서 해야지."


"압니다, 알아요!

제가 아무리 긍정적이고 에너지 넘치고, 사랑스러운 AGS라지만 멍청한 건 아니란 말입니다!

가위로 몇 개 찔린 것 가지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 숙녀분이 조금 웃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했을 뿐이지...”

 

“... 에휴, 그래. 그럼 됐다.”

 

 

 

... 그래, 그 정도로 꼴통은 아니겠지.

근데도 왜 이렇게 안심이 되는 걸까, 모르겠다.

 

그 때 내 옆자리에 세레스티아가 속상하다는 듯이 풀썩 앉았다.

그리곤 내 손을 휙 낚아채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 당겼다.

 

 

 

“사령관님, 손을 좀 줘보시겠나요?

상처에 자주 쓰이는 약초에요. 이게 조금은 도움이 되겠죠.”

 

“아, 아냐. 알프레드가 도와줘서 피도 다 멈췄고, 이제 닥터도 올 거라 해서...”

 

“그냥 받아주세요.”

 

 

 

전에 들은 적 없는 단호한 목소리에 난 찍소리도 못하고 얌전히 세레스티아의 치료를 받았다.

따스한 손의 온기가 자꾸만 날 간지럼 폈다.

 

 

 

“... 다행이네요. 아직 상처가 크게 번진 것은 아니라.

뼈 부분에 긁힌 것도 있는 것 같지만 그건 닥터 양이 고쳐줄 수 있겠죠.

...

...”

 

“... 왜, 할 말 있어?”

 

“아... 아뇨. 그냥 아직 죄송스러운 마음이 남아 있어서.”

 

“죄송? 아직도?

우리가 그 정도 사이 밖에 안 되는 거야?”

 

“...”

 

 

 

어디선가 달콤한 향기가 풍겼다.

세레스티아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껏 양 손에 쥔 채 자기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었다.

 

 

 

“그... ... 그래도 마지막 남은 인간 분께 그렇게 응석 부리는 건 실례니까요.”

 

“난 좋았는데, 왜? 누가 뭐라 그랬어?”

 

“아뇨, 그건 아니지만...

... 사령관님과의 첫 경험을 그런 상태에서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으니까요.”

 

 

 

... 세레스티아의 뺨이 잘 익은 사과 마냥 붉게 물들었다. 나도 이제 이런 걸로 부끄러워할 시기는 지났지만, 유독 이런 거에 면역이 없는 세레스티아 덕에 나도 덩달아 얼굴이 붉어졌다.

이왕이면 리제 앞에선 그런 얘기 안 하려고 했던 내 노력이 허투로 돌아가버릴 것만 같다. 리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거든.

 

 

 

“무슨 일을 하셨는데요?”

 

“아... 아, 아냐. 그건 내가 나중에 이야기해줄게.

그냥 지금은 닥터가 오는 걸 기다리자. 알았지?”

 

“.. 네에.”

 

“그래, 시간 보니까 금방 오겠네. 조금만 버티자?

그리고, 세레스티아?”

 

“네?”

 

 

 

행여나 이 애가 또 무슨 이야기를 할까 두려워서 내 입을 세레스티아의 기다란 귀에 가까이 가져다 대어 말했다.

 

 

 

“(리제 앞에선 그거 얘기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지금 그런 거 말할 분위기 아닌 거 알잖아, 왜 그래?)”

 

“(아... ...

...

... 네, 그렇죠.)”

 

 

 

잔뜩 어지러운 머리 탓에 조금 혼나는 투로 이야기했더니 세레스티아의 어깨가 금방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을 보니 또 마음이 아프다.

 

 

 

“(... 왜 그래? 혼 내는 게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그래.

설마 내가 아직까지도 그걸 신경 쓰고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을 거 아냐.)”

 

“(... 제가 사령관님께 힘이 되지 못할 것 같아서... 조금 어리숙했네요.

죄송해요.)”

 

“(힘이 안 되긴 무슨? 지금 이렇게나 도와주고 있는 세레스티아를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겠어?)”

 

“(... ... 제가 사령관님께 폐라는 폐는 다 끼쳤지만 정작 사령관님은 저희를 구해주셨잖아요.

그런 분과 함께 할 수 있으려면 저도 저의 쓸모를 증명해야 하지 않겠나요?)”

 

“(우리가 그런 사이 밖에 안 돼?)”

 

“(사령관님껜 아닐 지 몰라도, 전 아니에요.

사령관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이니까 사령관님께서 거두실 수도 있는 거죠.

... 그리고 전 그 사랑이 거둬지는 걸 견딜 수 없을 것 같거든요.)”

 

 

 

세레스티아의 파란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야릇한 옷차림도, 커다란 가슴도 그 순간만큼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움츠러든 어깨와 내 시선을 피해 살짝 떨구는 고개만 보일 뿐이었다.

 

게임 속에선 주인공을 도와줄 수 있었던 세레스티아였지만 여기선 그러지 못했다.

혹시 그래서 나를 만나러 오지 못했던 걸까? 내가 이 애를 짐이라 생각하고 있었을 까봐?


밀린 서류를 정리하고, 다친 몸을 치료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나는 이 아이들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첫 작전을 성공했다는 이유로 온갖 축하 파티에 이리 저리 끌려 다녔고, 술과 음식을 먹느라 바빴다. 그러는 동안 이 애가 자기만의 걱정에 빠져있는 지도 모르고.




"(사랑을 거두다니? 내가 너희들을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데 그런 말을 해?)"

 

"(...)"


"(설령 너희가 진짜 도움이 안 되는 애들이라고 해도 난 너희를 데리고 갈 거야.

이런 세상에 내 편 한 명이 얼마나 절실한 지 너희도 잘 알잖아!

내가 너희를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그런 의심 때문에 그러는 거였으면...)"


"(하지만.)"


"(...?)"


"(... 하지만 말씀 해주시지 않으셨잖아요.

저희를 버리지 않으실 거라고...)"




세레스티아의 응석이 마음 한 켠을 찔렀다.

하지만 그건 그저 불쌍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말 하지 않으면 모른다... 라...’

 

 

 

지금까지 내가 이 애들에게 셀 수도 없이 했던 이야기.

하지만 정작 그러는 나는 그 말을 지키고 있었던 걸까? 내 사랑을 모든 애들에게 다 말해주고 다녔던 걸까?

...

아니, 이 많은 애들에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난 한 명이고 아이들은 수천 명이었으니까.

그럼 이렇게 불안해 하고 있는 아이들이 지금도 내 함선에 있다는 뜻일까? 세레스티아의 말은 나를 자꾸만 상념에 빠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 눈 앞의 광경은 내가 그러한 사색에 빠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으읍...?!?!”

 

“리제!”

 

 

 

순간, 리제의 눈동자가 뒤집히며 입에는 거품이 물렸다.

입 밖으로 흐를 정도로 쏟아지기 시작한 거품을 보며 난 멍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세, 세레스티아, 당장 입에도 덩굴을 둘려!”

 

“네... 네!! 사령관님!”

 

 

 

뭐지? 왜 이러는 거지? 트라우마가 이제 목 위쪽까지 통제권을 침범하기 시작한 건가? 만약 그렇다면 리제의 이도 안심할 수 없다!

저러다가 혀라도 씹어버리면 죽을 수도 있다!

이가 갈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저러다 생니가 빠지면 쇼크사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만의 하나의 경우도 놓치지 않을 거다.

난 그리 생각하며 세레스티아의 덩굴이 리제의 입을 감싸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리제의 이빨이 덩굴이 콰득콰득 씹는 소리가 났다.

 

 

 

“으읍...!! 으...!”

 

“리제야... 리제야... ...”

 

 

 

얼굴 근육까지 경련하기 시작했다. 리제 스스로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란 거다.

이런 경우는 레아에게서도 들어본 적 없다. 이 상태가 되기 전에 죽일 수 밖에 없었다는 뜻이었겠지.

아니면 동생을 아끼는 레아가 리제를 여기까지 몰아붙이지 못했던 걸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난 반쯤 정신을 놓을 것 같았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애가 모든 걸 다 놓아버리고 눈동자 하나만 간신히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그 눈동자를 나한테 고정시키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으니까.

 

 

 

“사령관님...”

 

“...”

 

 

 

리제의 입이 덩굴을 씹어대는 소리가 점점 더 커져갔다. 세레스티아가 씹힌 부위에 덧댈 덩굴을 계속 입 안으로 집어 넣었지만 도움이 될 수는 없었다.

날 부르는 세레스티아의 말엔 그 뜻이 담겨 있었다.

 

‘이대로 두면 죽는다.’

 

얼굴 근육이 보기 힘들 만큼 뒤틀리기 시작했다. 덩굴에 붙잡힌 팔과 다리에서도 으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직 눈 하나만, 빨간 눈동자 하나만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사지가 스스로 몸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듯했다.

200번의 죽음에서 저것들이 몸에 제대로 붙어 있었던 적이 몇 번이나 될까, 그리 생각하니 이 아이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이 환상통임을 깨달았다.

있던 것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없던 것이 있어서 느끼는 환상통 말이다.

 

 

 

‘... ... 씨발.’

 

 

 

난 하늘을 향해 욕을 내뱉었다. 두 번, 세 번, 그 다음으로 또 셀 수 없이 많은 욕을 지껄였다.

 

내가 아픈 것도 감당하겠다. 내가 바칠 수 있는 모든 걸 바쳐서 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

그리 말 했음에도 하늘은 이 애를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다가 던져 놓았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곳으로.

 

 

 

“... 세레스티아.”

 

“네...?”

 

 

 

애초에 내가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 아니었다.

 

이건 상처가 아니다. 이건 흉터다. 칼로 찔리고 뽑힌 자리에 남아 있는 아주 깊은 흉터 말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 약을 발라도 지워지지 않는 흉터 말이야.

 

페더의 날개로 몸을 얼릴까? 알프레드에게 더 강하게 움켜 쥐라고 할까? 써니에게 더 화려한 홀로그램을 뽑아 내라고 해야 할까?

아니, 그건 그저 시간 끌기에 불과하다. 진통제도 없는 시간 벌이.

 

고통일 뿐이다.

그래서 말했다.

 

 

 

“덩굴 풀어.”

 

“네?!”

 

 

 

페더가 얼리면 이 애의 근육은 억지로 그걸 뜯어버릴 것이고,

알프레드가 잡아 당기면 트라우마가 그보다 강한 힘을 이 여린 몸에서 강제로 뽑아낼 것이며,

써니의 화려한 춤이 현혹시키면 그걸 가리기 위해 스스로 눈을 뽑아낼 것이다.

지금도 그러고 있으니까.

 

머리카락이 하얗게 질리고 있고, 눈썹이 미친 듯이 떨려 온다.

눈의 흰자마저 실핏줄이 터져 빨갛게 변하고, 입에선 덩굴을 씹어대느라 피가 주륵주륵 쏟아진다.

온 관절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덩굴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저건 관성이다. 

사랑을 의심하는 자는 의심을 유지하고,

고통에 익숙해진 자는 고통을 유지한다.

 

 

 

의심의 관성과 고통의 관성.

두 관성이 지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난 둘 모두의 브레이크를 걸어줄 생각이다.

그러기 전에 바퀴가 터져버릴 지도 모르지만.

 

 

 

덩굴이 풀린 리제의 손을 잡았다. 

나의 손으로.

 

 

 

“리제야.”

 

“으으...!”

 

“내가 못 지켜줘서 미안해.”

 

“으으으...!!!”

 

“... 미안해. 미안해.”

 

 

 

내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분노, 슬픔, 무력함, 한 없이 가벼운 것들의 집합.

그것은 내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레아의 말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주인님은 저희에게 기적 같은 분이시니까요.’

 

 

 

그래. 기적.

제발 부탁이니 그 빌어먹을 기적이여, 부디 이번 한 번만 일어나거라.

나를 기적이라 생각하는 이 미련한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부디 내가 이번 한 번만, 단 한 번만 기적이 되는 것을 허락하여라.

 

그럼 나는 내 모든 것을 내어줄 테니.


 

 

“으으!!!”

 

“...”

 

 

 

내가 이 미련한 아이를 끌어 안았다. 

리제의 손톱이 내 등을 마구 할퀴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고통이 기적이 되기 위한 값이라면, 내 기꺼이 지불하리라.


내 심장을 멈추었다. 미친 듯이 뛰는 아이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내 숨을 포기했다.

말조차 할 수 없는 아이를 위해 내 입술을 씹었다. 반대로 꺾이는 팔들은 붙잡고 내 품 안에 품었다.



으득. 으득. 으득.


"으아아!!!!"


"... 미안하다. 리제야."




내 친구들은 리제를 위해,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였다.

그러니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리라.

이것이 나의 말이 되리라.

 

 


눈물이,

아이에게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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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간 사령관은 건전한 작품이며 비극은 일절 없다.




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