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가에 자그마한 파도가 밀려오며 특유의 싸악거리는 소리를 만들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한 바이오로이드는 잠시 쌍안경에서 눈을 떼고 건너편의 대륙이 아닌 섬의 해안가를 쳐다봤다.

 

 그것도 아주 거대한 배들이 해안가에 있었다하지만 정확하게 말한다면 배였던 고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폭압으로 우그러지고 찢어진데다 불에 그슬려 새카매진 선체를 잠시 말없이 지켜보던 그녀는 문득 아래를 내려다본 후 붉은 얼룩이 묻은 천과 길쭉한 유백색 무언가를 발견했다그것들은 현재로서는 더 이상 가치 있는 것들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그것들을 무시하고 돌아서 갈 길을 갔다.

 

 해안가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임시로 만든 기색이 역력한 가건물이 하나 있었다쓰고 남은 자재들을 아무렇게나 조립해 만든 것이 분명했지만 그래도 추위나 비바람은 피할 수 있는 정도였다그래서 진눈깨비가 내리는 이런 날에 건물 안이 아닌 밖에서 가만히 서 있는 인간을 본 그녀는 의문이 들었다.

 

 “춥지 않으신가요.”

 “춥지.”

 “안에 들어가시죠.”

 “이러고 있으면 잠이 잘 오지 않아.”

 

 노인이 며칠째 잠을 자지 않고 버티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그녀는 말없이 안으로 들어갔다건물 안은 초라했다간이침대가 두 개접이식 탁자와 의자가 하나씩그리고 다용도로 쓰이는 상자 몇 개와 군용 무전기 하나가 가구의 전부였다자신이 나가기 전과 비교해 식수와 식량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그녀는 노인이 잠을 쫓기 위해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쉬려던 그녀의 눈에 탁자 위에 놓인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종이에는 수많은 군 기지들의 무선 주파수가 적혀 있었다그 목록들의 거의 모두의 옆에 가위표가 그려져 있는 걸 본 그녀는 말없이 종이를 내려놓은 후 침대에 몸을 누이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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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빨간 안광들이 끊어진 다리 위에 바글거렸다굳이 쌍안경을 통해 보지 않아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철충들이 우글거렸다어차피 이쪽으로 건너오지도 못할 것인데 왜 저렇게 몰려들어 있는지 그 이유를 그녀로서는 짐작할 수 없었다문득 옆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는 노인이 퀭한 눈으로 멍하니 철충들을 응시하고 있는 걸 보았다한참을 쳐다본 후에서야 노인은 간신히 다른 곳을 쳐다볼 수 있었다.

 

 말없이 걸어가던 노인은 갑자기 비틀거렸다그녀가 노인의 휘청거리는 몸을 받친 순간노인은 욕설을 내뱉었다순간 놀라서 내밀었던 손을 거둔 그녀는 마구 떨리는 노인의 두 눈동자를 쳐다보고선 상황을 이해했다결국 그녀는 품을 뒤져 마지막으로 남은 주사약과 주사기를 꺼냈다.

 

 약병과 주사기를 건네받고서도 노인은 잠시 머뭇거렸다그로서는 최대한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약 얼겠어요.”

 

 괜히 품에 넣고 있던 게 아니라고요라고 그녀가 덧붙이자 결국 노인은 주사기에 약을 채운 후 소매를 걷어 올렸다바늘이 팔에 불거진 혈관을 찌르고 약을 집어넣자 노인의 표정이 약간이나마 풀어졌다.

 

 “약효가 얼마나 갈까.”

 “몇 시간 정도는 가지 않을까요.”

 “몇 시간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노인은 그녀에게 따라오라고 한 뒤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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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참을 걷던 노인은 이윽고 해안가에 도달해 걸음을 멈추더니 적당한 바위 하나를 골라 그 위에 걸터앉았다

 

 “자네도 앉게.”

 

 그녀도 적당한 바위에 앉자 노인은 대화를 시작했다.

 

 “자네는 바이오로이드였지.”

 “그렇죠.”

 “바이오로이드와 인간의 가장 큰 차이가 뭔가?”

 “바이오로이드는 오리진 더스트를 이용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난 학술적인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네.”

 

 노인은 잠시 북쪽 저 멀리를 쳐다봤다파도 소리와 물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그리고 맞은편 해안의 수많은 철충들에게서 들려오는 기계음만 제외하면 고요했다.

 

 “바이오로이드는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되지반면에 인간은...몇 세기 전부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가 자유롭다고 주장해 왔고최소한 그 사상을 대놓고 부정하려고 드는 간 큰 미친놈들은 거의 없었어오리진 더스트강화된 인간의 몸에는 없나금속 골격인공 골격은 20세기에도 있었어바이오로이드는 여자만 있다나 같은 늙은이들은 옛날에 있었던 사고도 알고 있지인간과 바이오로이드를 구분하는 가장 큰 것은 바로 자유야자유달리 말하면 인간이라도 자유가 없으면 바이오로이드나 다름없지.”

 

 노인은 다시 북쪽을 쳐다봤다그녀는 노인의 태도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가만히 있었다.

 

 “내가 자네를 알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지?”

 “함에 제가 배치된 것이 2년 전이었습니다. 전쟁이 막 시작될 때였지요.”

 “그랬군. 빌어먹을 기업 놈들. 이러니 19세기에 그렇게 공산주의가 성행했지. 어쨌든, 그럼 자네는 내 개인사는 잘 모르겠군,”

 “그렇습니다. 그동안 계속 각종 임무로 인해 바빴으니까요. 게다가 저는 일개 위생병이니까요.”

 “그럼 이 기회에 알아 두게나내 조부님은 20세기를 살아가셨던 분이셨네.”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노인의 얼굴에 희미하지만 미소가 떠올랐다

 

 “그분은 나에게 종종 그분의 조부님그러니까 내 고조부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네대부분은 그분이 젊을 적 전쟁에서 세운 무용담에 대한 내용들이었지.”

 “함장님의 고조부님이라면...설마 2차 세계대전인가요?”

 

 노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나는 적에게 맞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내 조상의 이야기에 매혹되었지그것 때문에 내가 군대에 들어오게 되었고비록 현실은 잔혹하다는 걸 더 크고 나서 깨닫긴 했지만어쨌든 그래서 나는 내가 내 조상님보다 그 정도는 못 하더라도 똑같이 자유를 위해 싸우는 줄 알았어하지만 아니더군나는 자유를 위해 싸우기는커녕주어진 자유를 빼앗기고도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던 머저리였던 걸세.”

 

 노인은 서글픈 눈초리로 해안가에 죄초된 선박의 잔해를 쳐다봤다가만히 자신의 배를 쳐다보던 살아남은 함장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전쟁에서 지고...우리가 기업들의 꼭두각시가 된 후 기업들의 세력 다툼에 이용되기 시작되었을 때의 그 기분은 정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어그래서...나는 철충이라는 인류의 적이 나타났을 때 오히려 기뻤다네.”

 

 노인의 마지막 말에 그녀는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이어지는 말에 그 말을 다시 삼켰다.

 

 “녀석들과의 전쟁은...인류의 자유를 위한 사투였으니까.... 결코 기업들의 이권을 위한 다툼 같은 게 아닌....”

 

 노인은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내가...그런 생각을 해서였을까전 세계가...이렇게 되어 버린 것도...함대의 그 많은 젊은이들이...모두....”

 

 그녀는 말없이 노인이 우는 것을 들어 주었다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였다.

 

 잠시 뒤 노인은 진정하고 울음을 멈췄다그러자마자 노인이 꺼낸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미안하다.”

 “뭐가...말인가요?”

 “이곳에 갇힌 지난 몇 주간 닥치는 대로 통신을 시도해 봤지만 전부 연결되지 않았어그러다 오늘 아침에 간신히 한 곳과 연락이 통했고운 좋게 상대도 아는 사람이었지.”

 “아직 생존자가 남아 있나요?”

 

 노인은 허탈하게 웃었다.

 

 “대화의 마무리는 총성이었어.”

 “....”

 

 둘은 잠시 말없이 하늘을 쳐다봤다하늘은 아직 푸르고 아름다웠다.

 

 “자유가 있으려면...억압이 없어야지억압이 있으려면...사람이 필요하고.”

 “그런 것 같네요.”

 “아마도 나는 역사상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 된 것 같네.”

 “희망을 잃지 마세요.”

 “아니그 친구가 자살하기 전에 철충들에게 마지막 선물을 하나 남기고 갔거든슬슬 올 때가 된 것 같아.”

 “그게 무슨....”

 

 그 순간 저 멀리에서 갑자기 눈부신 섬광이 번쩍이더니 어마어마한 폭발음이 들려왔다순간적으로 감각을 상실한 둘이 다시 앞을 봤을 땐 멀리서도 뚜렷하게 보이는 버섯구름이 몇 개씩이나 보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평소에 가던 그 가건물 말고 좌초된 선박 내부가 대피에는 더 나을 거다이곳으로 직격은 안 하겠지만 낙진이 날아올 수도 있으니녀석어릴 적부터 비밀요원이 꿈이라더니.”

 “함장님피하셔야...지금 뭘.”

 

 노인은 가지고 다니던 권총의 총구를 관자놀이에 들이대고 있었다.

 

 “이제...너도 자유를 얻어라나는 이미 얻었으니미안하다.”

 

 발사된 총탄은 노인의 두개골을 관통했다해변에 몸뚱이 하나가 힘없이 쓰러졌다자유를 얻었지만더 이상 자유란 개념이 가치를 가지지 못하게 된 세상을 노인은 견디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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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한동안 배 안에서 생활했다기울어진 방과 복도곳곳에 새어든 해수와 어디선가 풍기는 악취가 불편하긴 했지만 몇 주 정도는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이 안전했다비록 신선식품들은 이미 전부 상해 있었지만 그녀는 어렵잖게 대량의 전투식량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식수도 선내를 조금 돌아다니자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대충 한 달 정도가 지났다언제나 코에 달라붙어 있던 악취도 이제는 덜해진 것을 그녀가 느꼈을 때그녀는 삽을 찾기 시작했다식량과 식수가 슬슬 떨어져 가고 있었기에그녀는 그녀 나름의 끝맺음을 하고 싶었다

 

 야전삽 하나를 찾아낸 후 그녀는 먼저 해안가를 돌아다니며 발밑을 유심히 쳐다봤다희멀건 것이 보이면 일단 멈춰서 집어 올렸다상당수는 떠내려 온 유목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제법 많았고그럴 때마다 그녀는 삽을 들고 구덩이를 팠다.

 

 해안가에서 더 이상의 수확이 없자 그녀는 선박들의 잔해를 뒤졌다애석하게도 침수된 구획에 있을 것들은 그녀가 어떻게 할 수 없었기에 포기했다하지만 상당히 많은 수가 선박의 위쪽 통로에 몰려 있었다비록 손에서 냄새가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옷도 몇 벌이나 버리고 새로 구해 입어야 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잔해들을 짊어지고 땅으로 옮겼다.

 

 처음만 해도 튼튼했던 삽이 지금은 너덜거렸다. 구덩이들은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마지막 구덩이에 흙을 뿌린 그녀는 허리를 펴고 자신이 한 것을 바라봤다. 덕분에 그녀는 몇 주 분량의 식수와 식량을 소모했다. 삽도 하나 소모했고.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자유를 찾는 것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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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걷고 있었다등에는 커다란 가방이 메어져 있었지만 그 안은 거의 비어 있었다계속해서 몰아치는 눈보라가 얼굴을 때릴 때마다 그녀는 날카로운 날붙이가 얼굴을 파고드는 상상을 했다밤낮으로 몰아치는 눈보라에 그녀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길을 안내해 줄 수 있는 건 간략한 여행용 지도책과 낡은 나침반이 전부였다나침반 바늘을 보면서 간신히 걸음을 옮겨 놓던 그녀의 귀에 희미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봤지만 주위는 온통 눈과 덤불이었다그녀는 곧 다시 걷기 시작했다다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이번에도 그녀는 이상한 것을 보지 못했다.

 

 묵묵히 걸어가던 그녀는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에게 밀려 넘어졌다무언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풀거리는 흰 깃털들이 뒤에서 날렸다무언가 무거운 것이 자신을 누르고 있었고 거친 숨소리와 악취가 느껴졌다

 

 인간의 뇌파가 느껴지지 않았기에 그녀는 허리춤을 더듬어 단검을 빼든 후 그대로 팔을 돌려 등 뒤를 찔렀다무언가가 칼날에 들러붙는 감각이 느껴지자 그녀는 곧장 날을 비틀며 잡아 뺀 후 다시 찔렀다.

 

 뜨뜻한 무언가가 단검을 쥔 손에 느껴지며 고통스러운 울음소리가 들렸다누르는 힘이 약해지자 그녀는 억지로 일어섰고뒤로 돌아서 옆구리를 난자당한 채 쓰러진 늑대를 발견했다늑대는 치명상을 입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그녀는 그 늑대의 목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움직임이 멈추자 그녀는 늑대의 배를 갈랐다김이 나며 피와 내장이 흘러나왔다

 

 적당히 내장을 들어낸 후 그녀는 고깃점을 적당히 베어내어 입 안에 넣고 씹었다물컹한 느낌과 함께 비릿한 혈향이 풍기며 역한 맛이 입 안을 채웠다그것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그녀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고기를 삼킨 후 그녀는 다시 고기를 베어냈다어느새 고기는 딱딱해지고 있었다이번에는 씹기 전에 입 안에 오랫동안 머금고 있어야 했다그러자 역한 맛이 더욱 심해진 기분이 들었다

 

 날고기를 씹어 삼킨 후 그녀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그녀는 자신이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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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해서 걷던 그녀는 어느 날 다른 바이오로이드를 만났다그 바이오로이드는 오래된 도서관에서 지내며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 그녀는 그 바이오로이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바이오로이드는 오랫동안 도서관에서 지낸 탓에 아는 것이 매우 많았다여러 도움되는 지식을 얻게 된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물어 보았다하지만 그 바이오로이드는 그것은 명확하게 답변할 수 없는 내용이라고 대답하기를 꺼려했다대신 그 바이오로이드는 그녀가 지금껏 해온 것들에 대해 물으며 그 행동에 대해 찬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 바이오로이드는 그녀에게 자신들을 동물과 구분 짓는 것은 감정이라고 말해 주었다. 당신이 그렇게 자신만의 자유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도 단순히 바이오로이드와 주인간의 주종 관계가 아닌, 감정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그러한 감정들로 엮이고 엮인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가 우리를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든다고 그 바이오로이드는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며 그녀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그곳을 떠나기 전 그 바이오로이드는 그녀를 배웅하며 이렇게 말했다당신이 찾는 자유는 그 무엇보다 값진 것이며그것을 찾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그 말에 그녀는 최소한 자신이 걷는 것 자체는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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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리가 끊어져 있었다한참 동안 완벽하게 파괴된 다리를 쳐다보던 그녀는 이제 손때가 묻고 해진 지도책을 펼쳤다이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면 몇 킬로미터를 돌아서 우회해야 강을 건널 수 있었다힘없이 돌아서던 그녀의 눈에 갑자기 하늘을 날아가는 새 무리가 보였다그 새들은 강 저편에서 날아오더니 순식간에 이쪽으로 날아와 저 멀리로 날아가 사라졌다새들이 날아간 쪽의 하늘을 잠시 멍하게 쳐다보던 그녀는 말없이 강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 무렵 그녀는 간신히 강을 건널 수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두 다리가 떨리는 가운데 그녀는 먹을 걸 찾아봤다가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들려던 찰나웬 야생 거위 무리가 저쪽에서 유유히 걸어 다니고 있는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아직 자신이 거위들에게 발견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그녀는 조심스럽게 거위들에게 다가갔고성공적인 기습을 가해 거위 한 마리를 붙잡아 목을 비틀 수 있었다혼비백산한 채 사방팔방으로 날아가던 거위들 중한 마리가 강 건너편까지 날아가는 걸 보고 그녀는 쓰게 웃으며 거위의 가슴팍을 물어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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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이 아팠다신발은 거의 다 해졌고 발바닥의 물집은 이미 터지고 덧난 지 오래였다하지만 계속 걸어갔다.

 

 추웠다옷은 해졌고 피부엔 생채기가 가득했다목은 따가웠고 계속 기침이 나왔다하지만 계속 걸어갔다.

 

 배고팠다먹을 수 있는 풀과 먹을 수 없는 풀을 전부 알아냈다썩은 사체의 뼈를 깨부숴 골수를 빨아먹었다손톱을 뽑아서 삼켰다하지만 계속 걸어갔다.

 

 계속 걷고또 걸었다아무리 발을 옮겨도 목적지에 다가갈 수 없었다그녀는 이제 목적지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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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그녀는 한 호숫가를 지나가고 있었다마침 목이 말랐기에 그녀는 물을 마시려고 호수로 다가갔다호숫가에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려던 순간수면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억압이 없어야 자유가 있다.

 

 사람이 없어야 억압이 없다.

 

 그래서 그녀는 자유를 얻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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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십니까사령관님이 개체는 사령관님을 주인으로 섬길 수 없습니다

 

 이 개체는 사령관님을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이 개체는 자유로우니까요

 

 어째서 이 개체라고 부르는지 물으셨습니까이 개체가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무언가의 무엇이 아니기에그러한 모두가 없기에 이 개체는 자유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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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자는 인지 및 사고능력, 기억력 자체는 큰 이상이 없으나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해 부르는 행위를 거부하며 현 상황에 심하게 저항함. 또한 자신이 자유롭다며 이쪽에서의 도움을 대부분 사양하고 있음. 망상장애와 적응장애가 심하게 보이며 그에 따라 장기간의 입원 및 치료가 필요할 것으로 보임.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명령을 받았을 경우, 전의 사례와 같이 뇌전증으로 인한 발작이 나타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예상되므로 그 방법은 정 차도가 없을 경우에만 재시도하는 식으로 하겠음.

 

 살다 살다 이런 상태의 바이오로이드는 처음 보네

 -닥터의 소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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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기분은 어떤가요?”

 “....”

 “오늘 날씨가 어떻죠?”

 “오늘은 하늘이 맑고 구름이 적네요.”

 “어디 몸에 통증이 느껴지는 곳은요?”

 “머리 옆과 뒤그리고 목에 통증이 조금 있네요.”

 “혹시 몸에 불편한 곳은요?”

 “....”

 

 환자가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는 걸 확인한 다프네는 말없이 방을 나갔다그녀는 다프네가 방을 나가자 멍하니 천장 구석을 쳐다봤다그곳에는 감시 카메라가 한 대 있었다

 

 며칠 전그녀는 식사 도중 포크로 목을 찔렀다선홍색 피가 천장까지 튀었지만 재빨리 달려온 다프네들은 그녀의 상처를 치료해 놓았다지금도 그녀의 목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녀는 수십 년 전에 자신의 머리에 총을 쐈던 노인을 기억하고 있었다자유가 의미가 없어지자 그 사실을 견디지 못했던그녀 또한 얻은 자유의 종류는 다를지언정 얻은 자유가 의미가 없어지자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식사를 거부하면 어떻게든 영양을 주입당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창문은 바이오로이드의 완력으로도 부수기 힘든 강도였다혀를 씹어도 죽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다른 방법을 떠올렸고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봤다손가락 끝에는 손톱이 다소 길게 자라 있었다

 

 잠시 손가락을 머리에 가져다 댄 그녀는 길이가 충분한 것을 확인했고잠시 후 손가락을 눈과 눈꺼풀 사이로 밀어 넣으며 위쪽으로 힘차게 찔러 넣었다.

 

 다프네들이 달려왔을 때 거기엔 이미 전두엽이 망가진 바이오로이드만이 남아 있었다최대한 신속히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다프네들은 그녀가 비록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으나 이제 더 이상 정상적인 사고나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고 판단했다그녀는 완전히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그렇게 되자 그녀에게 더 이상의 정신과 치료는 의미가 없어졌다그 사실에 대해 모두는 수십 년 동안 너무 심한 고생을 해서 결국 정신이 이상해져 버린 어느 불쌍한 바이오로이드의 비극의 끝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다프네들은 이후 말없이 앉아만 있는 그녀를 볼 때마다 의문을 가졌다어째서 항상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을까.

 

 자유를 얻은 그녀는 오늘도 미소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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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은 딱히 누군가를 의도하고 그리진 않았습니다. 그냥 바이오로이드 A라고 생각해 주십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