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https://arca.live/b/lastorigin/43170160


새벽 3시. 밤늦게까지 술판을 벌이는 일부 별종을 제외하면 모두가 잠에 들었을 시간이지만 어둠 속에도 빛은 있는 법. 다만 이번의 빛은 하얗게 빛나지도, 푸르게 비추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다소 외설적인 붉은색이다.

 

"아아악!" 붉은 빛의 근원지를 반쯤 집어던지듯 바닥에 내려놓은 푸른 눈의 AGS, 글라시아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잠을 자고 싶었다. 최소한 절전 상태로 들어가 메모리를 비운다면 이 끔찍한 기억을 조금이라도 없앨 수 있지 않을까?  

"아니지 아니야 그보다는 그냥 기억을 지우는 건..." 자가복구 기능까지 있는 초고강도합금으로 만들어진 로봇이 두통을 느낄 리 없건만, 지금 침대 위에서 몸을 말고 머리를 감싸 쥔 채 신음하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편두통 환자다. 

  

사건의 시작은 5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검색창에 글라시아스라는 이름을 입력할 때만 하더라도 그녀는 무엇이 나오더라도 감수하리라 다짐했다. 성인 콘텐츠 경고가 떴을 때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동료들은 젊고 아름다우며 강했고, 그런 여자를 상대로 인간들이 어떤 시선을 보냈을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충격적이었다. -비록 눈앞의 광경에 정신이 팔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검색엔진이 추천한 34번 규칙이라는 커뮤니티는 확실히 그녀가 생각했던 종류의 사진과 영상으로 넘쳐났다. 문제는 또 다른 사진과 영상이었다. 

 

"이, 이건 도대체..." 


인간들의 성욕은 오직 바이오로이드만을 향하지 않았다. 


 (https://arca.live/b/lastorigin/26877049)


(글라시아스가 실제로 본 그림은 훨씬 하드합니다.) 

 

그녀도 있었다. 

 

 

그림? 그림인가? 날 그렸네? 그런데 왜 내가 성관계를... 아니야 저건 유사 성관계야. 아무튼 성관계의 일종이야. 그런데 왜 나를? 내가 잘못 봤나? 아니야 분명 나 맞아. 난 저런... '부위'가 없는데? 일종의 개조? 가능이야 하겠지. 그런데 왜 내가? 번식본능? 나를 상대로? 인간도 아닌데? 인간보다 적어도 250배는 더 큰데? 

질문과 답변의 끝없는 꼬리물기를 이어가며 자신의 생각에 오류가 없는지 검토하던 지혜로운 드래곤은 마침내 두려운 결론에 다다랐다. "설마 이런 게 더 있을 리가..." 충분한 결괏값을 얻으려면 표본의 수를 늘러야 한다.

 
 "설마 이런 게 더 있을 리가..." "어차피 오늘이 아니어도 언젠가는 봤을 거야." "내 동료들은 더 심한 꼴도 당했을걸?" "내용이 충격적이라 그렇지 사실 그렇게 심하지도 않으니까..." 저주받은 검색어라는 말이 있다. 결과를 알면서도 굳이 검색했다가 온몸을 쥐어뜯으며 고통받게 되는 그런 단어. 

온갖 변명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검색 결과 더보기'를 향해 조금씩 손가락을 뻗는 그녀는 이미 본능에 사로잡힌 상태였다. 저주받은 검색어의 손아귀는 지혜로운 드래곤조차 피할 수 없었다. 페레그리누스가 봤다면 틀림없이 몇날 며칠을 놀리리라. 아니면 함께 비명을 지르거나.

 

"꺅!" 

 

 

다시 5시간 후로 돌아와 현재. 조금이나마 마음을 가라앉힌 그녀는 아까의 광경을 떠올려보았다. 


"꺅!" 사람의 몸에 용의 머리를 한 자신이 반투명한 메이드복 밑으로 비대한 유방을 드러내고 남자를 유혹하는 그림. -작품명 드래고니안 메이드.- "세상에..." 음부가 달린 자신이 거대한 얼음기둥으로... '그것'을 하는 영상. -작품명 자위하는 미친 백룡.- 

"맙소사..." 구름 사이를 날며 입을 벌리고 혀를 내민 채 -그녀는 몰랐지만 '아헤가오'라 불리우는 표정으로.- 음부에서 눈가루를 뿌리는 자신. -작품명 여신의 성수.- "잘... 그렸구나..." 거대한 화염룡에게 짓눌려 강간 당하는 자신 정도면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고. -작품명 불꽃은 얼음을 이겨.-

"이건... 끄응..." 제일 압권은 눈에 하트 무늬를 띄운 자신이 니드호그와 페레그리누스 사이에 끼어 헐떡이는 영상이었다. -작품명 야한 몸을 한 누님 잘못이야!- 


"아아악!" 도대체 왜 존재하는지 감도 안 잡히는 '글라시아스 암컷 빙룡 치욕일지 시리즈'의 마지막 장면. 온몸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배에는 하트 무늬를 레이저로 새긴 자신이 리본이 달린 레이스로 결박 당한 온몸을 20여 명의 인간들에게... 마침내 견디다 못한 그녀가 태블릿을 집어던지는 순간이다. 



"인간들은...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건가..." 힘없이 침대에 널브러진 글라시아스는 문득 두려워졌다. "과연 나는..." 인간을 이해하고 있는 걸까? 끓어 넘치던 분노가 가라앉고 차가운 이성이 돌아오자 남는 건 자신에 대한 실망 뿐이었다.

어째서 그들은 이런 것을 만들었을까? 악의?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서? 자신의 추하고 망가진 모습을 이런 식으로라도 보고 싶어서? "아냐. 고작 그런 이유가 아냐." 어떻게 최소 36,000개의 음란물을 단순히 뒤틀린 성욕의 결과물로 치부하겠는가.


그들은 자신을 원했다. 그들이 원하는 형태의 글라시아스를.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하는 글라시아스를. 그들과 사랑을 나누는 글라시아스를. 마침내 그들의 소유물이 된 글라시아스를. 덕지덕지 붙은 온갖 감정과 욕망을 떼어놓고 보면 결국 본질은 하나였다. "이 또한 인간적이라는 건가?"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원했다.


눈앞에 새로운 문제가 나타난 이상 풀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글라시아스는 다른 방법을 시도하기로 했다. 마침내 찾아낸 단서를 땔감 삼아 불붙은 지식욕이 그녀를 다음 과정으로 이끌었으니 이제 관점을 바꿀 차례였다. 


"나는 그의 마음을 원하고, 그는 내 마음을 원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답은 간단했다. 사랑. 그러나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서로의 마음을 원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자신은 인간을 사랑하는 게 아니었던 걸까? "그럴 리가. 보편적 사랑과 개인적 사랑은 다른 거야." 

그렇다면 다음 질문. "개인적 사랑이라면 어째서 이런 형태로 나타났는가." 고민은 짧았다. "애정은 일방적이고 감정과 욕구는 지나친 불완전한 사랑이었기에." 마지막 질문. "이러한 사랑 또한 받아들이겠는가?" 이번에는 침묵이 이어졌다.



그녀가 본 모든 것은 가능성의 흔적이었다. 어쩌면 사랑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는 욕구가 현실에 억눌려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에 성욕의 형태로 분출된 결과물. 꽃피지 못한 사랑이 남긴 자국. 인간들은 사랑하는 동시에 사랑 받고 싶어했다. 필요하다면 대체제를 만들어서라도.

그렇기에 '받아들인다.' 이 한 마디가 가진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사랑을 받아들인다. 개인적 사랑을 한다. 애정과 헌신 뿐만 아니라 욕구를 가진 사랑을 하겠다. 애정과 헌신은 이미 충분했다, 그것이 보편적 사랑이니까. 그렇다면 남은 것은 욕구 뿐. "애정에 대한 욕구라..."


"페레그리누스." 물론 글라시아스는 페레그리누스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것은 애정과 존중이지 욕구와는 다르다. "사이클롭스 프린세스." 아직은 완전치 못한 사랑이다. 피 흘리며 죽어가면서도 마지막까지 애써 웃던 그녀를 향한 사랑은 결코 대체될 수 없으니까. 제 아무리 지혜로운 드래곤이라도 완전무결한 존재일 수는 없는 법이니까.


하나하나 후보에서 지워나가던 그녀는 마침내 애써 미루고 미루던 마지막 두 얼굴과 마주했다. "맹우. 그리고 맹우로구나." 성별도 성격도 다르지만 공통점은 있었다. 그들은 아름답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모두를 이끌어나갔다. 그 어떤 가시밭길이 닥치더라도 운명을 향해 걸어나가는 그들은 사랑 받아 마땅했다. 

그러니 너 또한 그들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일체의 고민도 없이 대답하리라. 사랑한다고. 하지만 모두를 사랑하듯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사랑한다. 남은 일생 모두를 바쳐서. 그리고... 그리고..." 그들의 미소가 보고 싶고, 그들에게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싶고, 그들과 일생을 함께 하고 싶다. "그대들에게 사랑 받고 싶구나..."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사랑이 언젠가 끝날 것이, 그리고 사랑이 스스로를 불완전하게 만들까 두려워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 그녀는 언제나 사랑 받고 싶어했다. 비록 첫 번째 기회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이제 두 번째 기회가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실패를 반복할 생각이 없다. "격어보지 못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 뿐이지." 


겪어보는 것.



새벽 5시. 오르카 호의 아침이 밝아올 무렵 정비실로 향하는 한 여자의 발자취를 따라 푸른 빛이 이어졌다.






"언니! 성공이에요. 글라시아스 언니가 마침내 본인 마음을 깨달았어요!"


"하으음... 그런가요? 뭐... 준비는 끝내 놨으니까요. 으흐음..."


"어휴! 검색 결과 조작질이 이렇게까지 힘들 줄이야!"


"수고했어요. 우리도 이제 한 숨 자죠."


"오늘은 포츈 언니하고 그램린 언니가 맡아 준다고 했으니까... 으으으... 졸려!"


"그런데 그 그림은 굳이 필사적으로 숨길 필요가 있었나요?"


"아 그건... 음... 이걸 들켰다간 그 후폭풍은 감당 못 할 것 같아서요."


"아하. 이해했어요."


https://mobile.twitter.com/thirty8ght/status/1477260977637060609 (봇박이 야짤 주의) 문제의 그 그림. 태초에 야짤이 먼저 있고 이를 이어 폴리모프 스킨이 태어났다고 한다.










지인이 말하기를 이런 흉악한 물건 만들 거면 차라리 웹소설을 쓰라더라



하지만 난 이게 재밌는걸




자 모두 크아악을 외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