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은폐장의 힘을 이용해 오르카호에 조용히 들어온 뒤, 음식이 든 상자를 하나 챙겨서, 조용히 나간다. 완벽한 계획이다.

적어도 몇 분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현재 오르카호 어딘가의 복도에선 도둑 2명과 경찰 2명의 열렬한 추격전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내 뒤에는 미호와 불가사리가 나를 잡으러 달려오고 있었고 내 옆에는 어느새 날 따라잡은 히루메가 나란히 뛰고 있었다.



"근데 넌 왜 나 따라와!? 넌 잡혀봤자 별 일 안당할텐데 그냥 가서 잡히지!? 겸사겸사 내가 도망칠 시간도 벌어주고!"


"말이 되는! 헥! 소리를 하거라! 헤엑!"


"대체 왜 이렇게 된거야! 그냥 먹을 것 좀 구하러 왔을 뿐인데!"


이 똥여우때문에 내 탈출작전이 틀어졌다, 원래는 들어온 곳으로 나가려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다른 출구를 써야 한다.


"그런데 언제까지, 헥! 도망가야 하는 것이더냐!? 숨을 데가 필요하다!"


"숨기는 왜 숨어, 여기서 나가야지!"


상자 챙기는 사이 오르카가 출항한다거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서 생각해 둔 플랜 B가 있다. 그 곳에 도착하기만 하면 여기서 탈출할 수 있다.


"이대로 쫓기만 해선 끝이 없겠어! 불가사리, 뒤로 물러서!"


등 뒤에서 뭐라 외치는 걸 듣자 불길한 마음에 뒤돌아보니 미호가 그 자리에 멈춰서서 저격총을 겨누고 있었다.

하필 뇌파 차단 헬멧때문에 에머슨 법의 제약도 사라져서 미호가 마음만 먹으면 날 공격할 수 있는 상태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진짜로 쏘게? 내가 뭘 잘못했다고! 도둑질하긴 했지만!


몇 초 뒤 총성이 들렸다고 생각한 순간, 더 큰 대포소리 같은 것과 함께 오르카호가 흔들렸다. 뛰던 도중에 난데없이 바닥이 흔들리자 균형을 잃고 그대로 넘어지면서 상자를 또 놓치고 말았다.

주변을 둘러보자 미호도 넘어져 애먼 천장에다 총을 쏜 상태였고 히루메도 옆에 넘어져있었다. 유일하게 넘어지지 않은 불가사리는 미호를 부축해주고 있었다.


[비상! 지금 오르카호가 철충한테 공격받고 있거든! 싸울 수 있는 인원들은 빨리 갑판으로 나와줘야 하거든!?]


함내 방송에서 포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철충? 이 타이밍에? 뭐가 어찌됐는 간에 이건 기회다.


"아야야..."


아무래도 히루메는 굽이 있는 게다를 신은 채로 넘어졌다보니 발목을 삔 모양이다.

마침 미호와 불가사리도 주춤한 상태고, 여기서 히루메를 붙잡히게 내버려두면 원작보단 조금 이르긴 하지만 무사히 사령관이랑 합류시킬 수 있다. 그게 히루메 너한테도 이득일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선 서둘러 상자를 챙겼는데...


...넘어져있는 히루메랑 눈이 마주쳐버렸다. 마치 도와달라는 듯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왜 나한테 그러는 건데? 동업자라고 하기야 했지만 우리 오늘 처음 만났거든? 날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원작처럼 사령관이랑 있는 게 더 행복할거라니까? 저거 봐, 벌써 불가사리가 뛰어오고 있는데, 나도 튀어야 하는데...


"첩을... 혼자 두고 가지 말아다오..."


...남 일 같지가 않네.


"에라이이이!"


이쪽으로 곧장 뛰어오는 불가사리를 향해 들고있는 자원 상자를 냅다 던졌다. 불가사리가 파일벙커로 상자를 부숴버리자 그 안에 꽉 차있던 참치캔들이 크레모아처럼 우수수 터져나와 그녀의 얼굴을 가격했다.

아ㅋㅋ 식량 상자 당첨이었었네 제길. 아무튼 간에, 불가사리가 잠깐 무력화된 사이 넘어져있는 히루메의 손을 잡아 일으켜세워서 그대로 뛰었다.


내 플랜 B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르카호에 문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 비상 탈출용 포드가 여러대 준비되어 있는 탈출구였다, 예전에 오르카호에 있을 때 혹시나 싶어서 이곳의 위치를 기억해 둔 보람이 있다.

계속 쥐고있던 히루메의 손을 놓고 제일 가까이 있는 1인승 탈출 포드에 탑승했다. 다행히 조작법은 간단했다, 그냥 안에 타서 안전벨트 매고 사출 버튼만 누르면 된다. 하긴 긴급시에 쓰는 거니 복잡한 절차같은 게 없는 게 당연하지.

미호랑 불가사리가 오기 전에 냉큼 튀려고 했으나 눈앞에 왠 노란 털뭉치가 들이닥치자 벙쪄서 굳어버렸다. 히루메가 내가 타고있는 포드에 엉덩이와 꼬리부터 밀어넣고 있던 것이었다.


"야, 잠깐...! 뭐하는 거야? 내가 여기 타고있는 거 안보여!?"


"여기까지 왔는데 같이 도망쳐야 할 것 아니냐!"


"옆에 거 타! 이건 1인승이야!"


"첩은 이런 요상한 기계 쓰는 법은 잘 모른단 말이다!"


"그냥 앉아서 버튼만 누르면 되잖아!?"


"자꾸 궁시렁대지... 히이익! 왔다!"


"저기 있다! 1번 포드에 타고있어!"


히루메의 풍성한 꼬리가 내 시야를 다 가린 상태였지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는 건 여럽지 않았다. 미호가 여기까지 들이닥치자 다급해진 나는 히루메를 향해 소리쳤다.


"빨간 버튼 눌러, 당장!"


"어어? 이, 이건가?"


잠시 후 비프음과 함께 탈출 포드가 닫히더니 순식간에 오르카호에서 사출되었다. 오르카호는 핵잠수함인 만큼 동력원인 원자로에 이상이 생길 경우 큰 방사능 피해가 터질 수 있기에 이러한 탈출 포드는 최대한 빨리 오르카호에서 멀리 떨어지도록 설계되어있다.

추격을 성공적으로 따돌려 오르카호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하자 한 숨 돌릴 수 있었지만...



"에취! 네 꼬리 좀 어떻게 치울 수 없는 거냐? 자꾸 헬멧 안으로 털이 들어온단 말이야!"


"그만 좀 징징거리거라! 비좁은 건 첩도 마찬가지이거늘!"


탈출 포드의 문이 닫히면서 히루메까지 억지로 이 안에 구겨넣은 덕에 덥고 숨막혀서 죽을 것 같았다...


*


미호와 불가사리는 텅 빈 1번 도크를 멍하니 바라봤다. 난데없이 퇴출되었던 두번째 인간이 돌아오고, 어떤 바이오로이드를 데리고 나가버렸다. 그 와중에 철충이 오르카호를 공격하고 있다고 한다.

안그래도 사령관을 포함한 오르카호 대부분의 인원들이 밖으로 나갔다가 연락이 끊겨서 걱정인데 왜 자꾸 이런 일이 연속해서 터지는 건가 머리가 아팠다.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한다. 두번째 인간은 이미 놓쳐버렸으니 저 철충부터 처리해야 한다.


"포츈 언니, 미호에요. 지금 불가사리랑 같이 있어요. 아직 철충과의 교전 안끝났죠? 저희도 곧 나갈게요."


[어머, 미호니? 참, 말해둘 게 있는데 이 녀석들 알고보니 철충이 아니라 AGS가 철충으로 위장한 거였거든!"


AGS였다고? 설마 저 AGS 공습도 두번째 인간의 계략이었던 건가?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지만 상황이 여유롭지 않았기에 가만히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둘은 비스마르크 도시에 간 사령관과 모두가 무사히 돌아오길 빌면서 갑판으로 뛰쳐나갔다.


*


한편, 워싱턴에 위치한 오메가 산업 빌딩의 최상층에선, 고블린에게서 알아낸 정보의 정리를 마친 오메가가 회장의자에 앉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기억 영상화 장치로 고블린의 기억을 들여다본 것 까진 좋았으나 거기서 본 것은 그녀가 원하던 정보가 아니었다.


[휩노스 병? 그거 아직도 치료법이 나오지 않았슴까?]


[아니 그게, 치료법이 나오긴 했어. 나 말고 다른 인간은 벌써 휩노스 병에 면역인 몸을 갖고 있는 상태야.]


[그 방법이 뭐랍니까?]


[듣기도 전에 쫒겨났지. 하지만... 얼핏 들어본 바로는 삼안에서 만든 어떤 기계가 휩노스 병을 치료할 열쇠라더군.]


그녀의 관심사는 휩노스 병의 치료법 뿐이었는데 두번째 인간은 휩노스 병에 면역인 것도 아니고 해결책이 뭔지조차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령관을 생포한다면 고문하든 해부하든 해서 휩노스 병의 해결법을 뽑아냈겠지만 저 두번째 인간은 잡아와봤자 그러지도 못한다. 삼안이 만든 어떤 기계, 이런 두리뭉실한 정보 만으로는 쓸모가 없다.


현재 두번째 인간이 쓰고있는 금속을 덕지덕지 붙여 만든 조약한 헬멧을 확보한다 해도 소용이 없다.

회장을 부활시킨 뒤 평생 헬멧 쓰고 살라고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뇌파와 명령권을 쓰지 못하면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을 복종시키는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럼 저 두번째 인간에겐 어떤 가치가 있는가, 휩노스 병의 치료법을 알아내기 위한 생체실험의 모르모트?

무리다. 멸망 전의 과학자와 의사들이 닥터까지 동원해가며 달려들었는데도 치료법을 알아내지 못한 불치병이다. 

중추신경계와 관련된 증후군이라면 저 헬멧을 벗기고 실험대 위에 올려놔야 할텐데, 유의미한 결과를 내기 전에 두번째 인간이 절명할 것이 뻔하다.


만약 회장이 무사히 부활해서 다시 지배층에 군림하게 된다면 그 분의 발밑에 둘 피지배층 인간들을 늘리기 위한 종마로나 쓸 수 있을 것이다. 저 명령권을 제한하는 헬멧을 계속 씌워둔다면 영원한 피지배층으로서 반기를 들지도 못할 테지.


문제는 회장이 부활한다는 것 자체가 언제 올 지 모르는 미래인데 그 때까지 저 인간을 보관하기도 애매하다는 점이다.


"완전히 계륵이었군..."


계산 결과, 두번째 인간을 생포해도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적다. 오메가는 두번째 인간의 추적을 관두고 예전처럼 오르카호의 사령관을 잡을 궁리나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우선 이용가치가 없어진 포로를 처형하기로 했다.


*


"대체 날 어디로 끌고가는 거야?"


트레저는 정신을 차린 뒤 펍헤드에 의해 양 손목을 포승줄에 묶이고 그것한테 끌려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보다 앞장서서 걷고 있던 펍헤드는 그의 물음에 답해주지 않았다.


불쾌한 침묵을 유지하며 복도를 걷던 중 펍헤드가 멈춰섰다. 그것의 앞에 있는 문이 자동으로 열리자 펍헤드가 안으로 들어갔고, 트레저도 줄에 끌려 반강제로 따라들어갔다.

어두운 방이었다. 안에는 램파트가 총을 든 채 묵묵히 대기하고 있었다. 트레저는 램파트의 앞에 있는 벽이 검은색에 가까운 빨간색의 피가 칠해져 말라붙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은 바로 사형실이었다. 사형법은 램파트를 이용한 총살형임이 분명했다.


"그 자리에서 벽을 등지고 서라."


자신을 이곳까지 끌고 온 펍헤드가 드디어 뭔가 말을 했다, 무미건조한 기계음으로 사형수가 어디 서야 될 지를 알려줬다.

트레저가 자리에 서자 램파트가 철컥 소리를 내며 총을 장전했다.


"유언이 있으면 지금 말하도록."


펍헤드가 가까이 와서 말했다.

트레저는 원래 오메가가 군대를 끌고 쳐들어온 그 날 형님을 피신시킨 뒤 그 곳에서 전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메가는 자신을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고 정보를 뽑아갔으니 그의 독단에 의한 실책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실책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도 죽는 것이 마땅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디아가 말했다, 형님이 자신을 동생이라 불러줬다고. 형님은 자신이 떠나기를 원치 않는다고.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유언이 없다면..."


"야, 이 줄 튼튼하지?"


뜬금없는 질문에 펍헤드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트레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냅다 펍헤드의 머리를 걷어찼다. 펍헤드 전면부의 바이저가 깨지자 당황한 틈에 트레저가 손을 확 당기자 펍헤드가 역으로 줄에 끌려 올려가 그의 손에 붙잡혀버렸다. 

돌발상황에 램파트가 사형수를 향해 발포했으나 트레저가 아슬아슬하게 빨랐다, 그는 손에 든 펍헤드를 방패삼아 자신의 상체를 가려 램파트의 총탄을 막아냈다.


애꿎은 펍헤드만 너덜너덜해지자 당황한 램파트가 사격을 멈췄고, 트레저는 총소리가 멎자 펍헤드를 내려 손목에 묶인 줄을 붙잡은 뒤 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펍헤드였던 300kg짜리 쇳덩이가 철퇴마냥 날아가서 램파트를 가격했다.



우직하는 소리와 함께 램파트가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 하자 트레저는 한번 더 줄 끝의 펍헤드였던 것을 휘둘러 램파트마저 고철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손을 이리저리 비틀어 손목을 묶고있던 줄을 풀어낸 뒤 램파트의 총을 챙겨 문을 박차고 나갔다. 소란을 감지한 드론이 날아왔으나 트레저가 양손으로 들고있는 램파트의 유품에 맞고 박살나 나가떨어졌다.

여기가 건물의 몇층인지도 모르지만 일단 뛰었다, 자신을 잡으러 달려드는 경비 AGS를 향해 총을 난사하면서 복도를 뛰던 중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고 생각한 순간-


"당신, 이쪽으로!"


"응? 어어?"


누군가 문을 열고 손짓하자 트레저는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그 안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경비 AGS의 본대가 도착했을 땐 도망친 사형수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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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붕이! 탈!  

트레저! 출!


라붕이가 들어왔을 때 마침 오르카호 안이 한적했던 이유는 사령관 포함 대부분의 오르카 대원들이 마키나의 낙원에 있었기 때문

그 비스마르크 도시가 원작에서도 미국에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비스마르크는 펙스 산하고 그 펙스가 북미 기업이니 비스마르크도 미국땅에 본사 세웠다고 정했음


이번편은 주말의 힘으로 삽화 이빠이 넣어봤습니다

사실 내가 소설에 삽화 넣는게 글만으로 장면 묘사할 자신이 없어서임, 내 글실력으론 글만 쓰면 관심 덜 받을거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림을 잘그리는 것도 아니지만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