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주인님. 리리스는 그 브라우니가 어딘가 수상하다고 생각해요."


사령관과 리리스, 마리가 나란히 서서 함장실로 돌아가는 길에 리리스가 꺼낸 말이었다.


"뭐? 갑자기 왜?"


"그 브라우니, 주인님의 존안을 확인한 순간 잠깐동안 주인님을 째려봤어요."


"...겨우 그런 이유로? 지금 농담하는 거지?


"농담하는 게 아니에요. 바이오로이드는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호감을 갖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 인간이 명령권자로 등록된 인간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데 그 브라우니의 표정에선 주인님을 향한 적개심이 비춰졌습니다."


"에이,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어. 멸망 전 개체라서 인간을 경계하는 거겠지."


"각하, 브라우니 482는 인류가 멸망한 후에 제조된 개체입니다."


"어? 그랬어?"


"하지만 리리스 경호실장의 말엔 이의를 제기하고 싶군요. 브라우니 482는 저희 저항군이 사령관 각하를 발견하기 전부터 같이 싸워왔던 전우입니다.

비록 그녀가 한번 합류를 포기하고 오랫동안 낙오병으로 살아왔긴 했지만 그렇다고 인의와 충성을 져버릴 인물은 아닙니다,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그 충성심이 누구를 향하느냐가 관건이죠."


"...그게 무슨 말입니까, 경호실장."


"오르카호가 미국에 정박해 있을 때 두번째 인간이 나타났고, 그 다음엔 미국에서 수상한 브라우니가 나타났습니다. 

그 브라우니는 주인님을 보자마자 적개심을 드러냈죠, 제조된 후 처음으로 본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죠, 그 브라우니는 이미 '다른 인간'을 만났고 그 인간을 명령권자로 설정했다는 겁니다."


블랙 리리스는 그 브라우니가 두번째 인간을 먼저 만났다는 걸 눈치챘었다. 그걸 알아챌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원래 촉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명령권자 이외의 인간을 적이라 여기는 자신의 본성을 무의식중에 그 브라우니에게 투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브라우니가... 두번째 인간의 부하라고?"


"하지만 경호실장, 그렇다면 왜 둘이 따로 있었겠습니까? 세상에 어떤 바이오로이드가 자신의 명령권자인 인간이 위험하게 혼자서 적진에 가는 걸 냅두겠습니까?"


"사정이 생겨서 헤어진 거겠죠. 그 브라우니는 다친 상태였었잖아요?"


"그렇다면... 브라우니 482가 두번째 인간이 아닌 각하를 섬기기 위해 돌아온 것일 수도..."


"마리 소장, 방금 당신 입으로 말했죠? 그 브라우니는 충성을 져버릴 인물이 아니라고요. 그녀는 아직도 두번째 인간을 자신의 명령권자로 여기고 있을테고, 따라서 저희 주인님을 적대하고 있을겁니다.

거기다 그 브라우니, 스틸라인인데도 주인님을 보고 '각하'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리리스는 단지 그 브라우니가 사령관을 한순간 째려본 걸 놓치지 않고 캐치한 순간부터 의심하기 시작했고, 기어코 여기까지 추측해냈다. 어찌보면 억측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녀의 말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니 주인님. 그 브라우니를 처리하거나, 아니면 기억소거 시술을..."


"절대로 안돼."


"..."


사령관은 오히려 이걸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브라우니가 두번째 인간을 가까이서 지켜본 게 맞다면, 그녀의 말은 두번째 인간이 어떤 인물인지 판가름하기 위한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될 것이다.


"그 브라우니랑 다시 만나서 얘기해봐야 겠어."


"주인님, 너무 위험합니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야."


사령관은 면담 일정을 잡기 위해 패널을 들어 다프네에게 연락을 취했다.


*


브라우니 482, 아니, 리디아가 오르카호에 구조되고 나서 몇시간이 지난 뒤, 그녀는 현재 다프네가 끄는 휠체어에 실려 면담실 문 앞에 도착했다. 다프네가 말하기로는 사령관이 그녀와 만나 얘기하고 싶다며 저녁식사 후 면담실로 데리고 와달라고 했다고 한다. 덕분에 리디아는 환자복이 아닌 자신의 해진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사령관과 만나기 위한 '준비'를 할 시간이 충분했다.


"주인님, 말씀하신 브라우니 양을 데리고 왔습니다."


'헤, 이렇게 기회가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리디아는 안그래도 사령관과 다시 대면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마침 저쪽에서 제안해준 것이었다. 

그러나 저쪽에서 먼저 불렀다는 건, 저쪽이 이미 어느정도 눈치를 챘다는 뜻이기도 했다.


별 볼 일 없는 용건이라면 사령관이 병문안삼아 수복실로 와서 얘기를 나눴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환자를 듣는 귀가 제한된 면담실로 소환한다는 것은 중요한 용건이란 뜻일 거다.


면담실의 자동문이 열리자 다프네는 리디아를 실은 휠체어를 안까지 밀어넣은 뒤 밖으로 나갔다.

리디아의 앞에는 사령관이 소파에 앉아있었고 그의 양옆에는 마리와 페로가 서있었다.


'블랙 리리스는 없는 모양이군, 잘됐어.'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확인하는 게 끝나자 리디아는 사령관을 향해 초점을 맞췄다.


"와줘서 고마워, 아직 더 쉬어야 할텐데 이렇게 불러내서 미안."


"아닙니다, 사령관 나으리께서 부르시는데 일개 졸병인 제가 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령관이 실없는 안부인사로 시작을 끊자 리디아는 태연하게 비꼬아 응수했다.


"아하하... 밥은 잘 먹었어? 여기 음식이 입에 맞았으면 좋겠는데."


"그럼요, 두말할 것도 없죠. 이렇게 맛있는 식사는 제조된 후 처음입니다."


리디아가 활짝 웃자 사령관은 긴장이 약간 풀린 것 같았다. 그녀는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긴 정말 좋은 곳이네요. 음식도 자원도 풍족하고 의료 시설도 삐까번쩍한 최신 기술로 떡칠돼있잖습니까?"


"마음에 들었다면 다행이-"


"그런데 왜 나눠먹을 생각을 안했습니까?"


그 순간 그녀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어...?"


"난 말이에요, 바깥에 나가서 형님을 만났습니다, 댁들이 두번째 인간이라 부르는 그 사람이요. 비록 여기 식당만큼 맛좋은 요리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바깥 생활이 불행하다고 여긴 적은 없어요. 당신이 하렘 끼고 호의호식할 동안 저흰 참치캔 하나도 나누어 먹을 정도로 절박했지만 그래도 즐거웠습니다, 형님이랑 같이 있었거든요."


"..."


사령관 측에서 리디아를 떠보거나 심리전을 시도하기도 전에 상대쪽에서 먼저 폭탄발언을 술술 내뱉자 놀란 사령관은 입을 다물고 경청했다.


"마리 대장, 하나 물어봅시다. 왜 그 '두번째 인간'을 쫒아낸 거죠?"


"...그 자는 위험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요? 무슨 대단한 짓을 저질렀길래?"


"그건..."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심증만으로 추방했었다고.


"인류재건 노래를 부르던 우리 대장님은 어디 가셨을까?"


"브라우니 482. 이제 그만하게."


"압니다, 이젠 인류를 위한 집단이 아닌 한명의 인간을 위한 사랑의 보금자리죠. 거기 외간남자 끼는 게 아니꼬왔을 테고요."


"지금이라도 명령권자를 사령관 각하로 바꿀 생각은 없나?"


"제가 낙오병이라도 스틸라인인건 변치 않습니다. 저 사령관 앞에 무릎 꿇고 살아남을 바에야 형님 옆에 서서 죽겠습니다."


"브라우니, 그게 네 진심이야?"


사령관이 다시 입을 열자 리디아가 시선을 돌렸다.


"왜요, 이렇게 대사 읊으라고 명령 받았을까봐?"


리디아는 휠체어의 팔걸이를 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재킷의 주머니에 양 손을 넣은 뒤 사령관 쪽으로 절뚝거리며 천천히 걸어갔다. 페로가 움직이려 했으나 사령관이 제지했다.


"난 복잡한 심리전이나 그런 건 할 줄 몰라요, 뭐 숨기는 것도 잘 못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고 그냥 저돌적으로 앞만 보고 돌진하는 게 제일 잘하는 거지, 으레 브라우니가 다 그렇듯이 말이죠."


리디아가 사령관 코앞에 섰다.

그녀는 여전히 재킷의 주머니 안에 양 손을 넣은 상태였으며,

그 중 오른쪽 주머니에 들어있는 나이프를 꽉 쥐었다.


"이게 제 진심입니다."


이 인간을 죽인다.

그리고 형님이 최후의 인간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이 저항군은 좋든 싫든 형님을 데리러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그녀가 형님을 구하기 위해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그렇구나. 알았어."


그리고 리디아가 죽음을 각오하고 전달한 진심에, 사령관은 마음을 다잡았다.


"약속할게. 반드시 두번째 인간, 네 형님을 구해내서 이곳에 무사히 데려올게."


예상치 못한 말이 귀에 들어오자 리디아는 눈을 크게 뜨고 멈칫했다.


"내 섣부른 판단으로 그를 퇴출시킨 건 후회하고 있어. 내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책임지고 그를 데리고 올게."


"...그게 당신의 진심입니까?"


"물론, 진심이야."


리디아는 상대방의 눈을 보고 거짓말인지 아닌지 분간해내는 그런 기술은 없다. 다만 사령관이 당당하게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는 건 확실했다.


"...흠. 거기 경호원? 이것 좀 받아줄래?"


리디아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그녀가 나이프의 날 부분을 잡고 페로에게 손잡이를 향한 상태였다. 페로가 잠시 당황하다가 나이프를 받아들자 리디아는 자신의 휠체어로 돌아가 앉았다.


이제 그녀는 완전한 비무장 상태다. 그녀 나름대로의 신뢰의 표시였다.


"그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사령관 나리."


리디아가 씩 웃었다.


"...실망시키지 않을게."


면담을 마치고 사령관이 패널을 두드리자 밖에서 대기하던 다프네가 들어와 리디아의 휠체어를 끌고 문 밖으로 나섰다.


"브라우니 482..."


"마리 대장,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몇번이나 얘기했잖아요."


"...실례했다, 브라우니 007."


"그거 말고, 리디아라고 불러요. 형님한테 받은 소중한 이름입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면담실의 문이 닫혔다. 이제 방 안에 남은 건 세명 뿐이었다.


"페로, 그 인간이 브... 리디아한테 암살을 명령했던 걸까?"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명령을 받고 움직였던 거였으면 멈추질 않았겠죠. 자의로 계획한 일이기에 자의로 그만둘 수 있던 겁니다."


"그리고 자의로 그런 행동을 결심한 이유는 두번째 인간을 향한 충성심 일테지요."


"마리, 두번째 인간이 악인이었다면 리디아가 이렇게까지 충성심을 내비치진 않았겠지?"


"그거야 두말할 것도 없죠."


"그래, 모든 단서가 그를 선인이라고 가리키고 있으니 더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지.

지휘관들을 소집해, 두번째 인간 구출을 위한 긴급 회의를 열어야겠어."


"알겠습니다, 각하!"


"저, 저기 잠시만요... 주인님? 정말로 두번째 인간을 구하고 싶으세요?"


"당연하지, 이제와서 그건 왜?"


"...그럼 꼭 말씀드려야 할 게 있어요."


페로가 마치 뭔가 잘못한 게 있다는 듯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사실, 리리스 언니가..."


"설마... 아니라고 해줘, 제발..."


"...죄송해요."


*


(사령관과 리디아의 면담으로부터 한시간 전)


"흐음... 아무래도 그 인간은 히루메란 바이오로이드와 함께 내륙으로 향한 것 같네요."


오르카호로부터 멀리 떨어진 해변가. 리리스는 모래사장에 반쯤 파묻힌 채 버려져있는 탈출 포드에서 희미하게 이어진 발자국을 보며 중얼거렸다. 몇시간 전에 자신의 주인님이 저녁에 그 브라우니와 면담을 갖겠다고 하자 리리스는 즉각 페로와 당일 경호를 교대한 뒤, 탈출 포드에 탑재된 GPS의 위치 신호를 따라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시간이 많이 경과했으니 발자국이 얼마 안남았을 겁니다. 하치코, 언니는 당신의 수색 능력에 기대하고 있답니다?"


"네, 언니..."


리리스는 두번째 인간을 효율적으로 추적하기 위해 하치코도 데려왔지만 그녀는 이 일이 내키지 않는건지 누가 보기에도 풀이 죽어있었다.


"언니... 우리 그냥 돌아가면 안돼요? 하치코는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럴 순 없어요. 그 사람이 악인이든 아니든, 오르카호의 안전과 주인님의 평안을 위해서 제가 처리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첫번째 이유는 그 인간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밖에 내던지면 얼마 안 가 객사할 거라고 여겼는데 휩노스 병을 막고 아직까지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그 브라우니나 히루메처럼 조금씩 자기 휘하의 바이오로이드를 늘리고 있었다. 더 지체했다간 오르카 저항군이나 펙스 이외의 제 3세력으로 클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찌될지 모르는 변수인 만큼 미리 싹을 뽑아놔야 한다.


두번째 이유는 사적인 이유였다. 그 인간이 감히 주인님께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감히 주인님의 마음에 짐을 얹혔다. 그 인간만 없었다면 주인님의 미간에 주름이 질 일도, 주인님이 한숨을 내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리리스는 그런 두번째 인간을 용서할 수 없었다. 


"주인님, 딱 한번만 더 나쁜 리리스가 될게요...!"


*


"아아, 이 어찌나 슬픈 이야기인고! 첩의 눈물이 도저히 마르질 않는구나!"


"...생각보다 감수성 풍부하구나, 너."


"억울하게 누명을 써 모든 걸 잃고 추방됐을 뿐만 아니라 형제와도 같은 동지들은 생사조차 알 수 없다니 안타까운 일이로다! 하물며 지병까지 앓고 있었다니, 정말 비극이 따로 없구나..."


"자자 뚝 그쳐 뚝, 이러다 예쁜 얼굴 퉁퉁 붓겠네."


도시를 향해 걷다가 다리가 피곤해져 숲 속 적당한 곳에 앉아 쉬던 중 내 이야기가 끝나자 히루메가 울음을 터뜨렸다. 손수건이라도 건네주고 싶었지만 가진 게 없어서 내 셔츠로 히루메의 얼굴을 닦아줬다. 

그동안 이런저런 고난을 많이 겪긴 했다만 다 무사히 건너와 살아남아서 그런가, 그렇게까지 울음 터뜨릴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혹시 또 망상 회로 돌려서 몇 배나 비극적인 스토리로 뇌내각색 한 거 아녀?


"첩도 한 때 알래스카라는 눈 덮인 땅에서 풀뿌리를 캐먹어가며 연명한 적이 있다. 그렇기에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삶도, 주변에 누구도 없는 삶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알고 있느니라."


"그래그래, 너도 고생 많았겠네."


"그대여."


"응?"


히루메가 울음을 그치나 싶더니 내 양손을 잡고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그대가 첩을 구원해줬으니, 이번엔 첩이 그대를 구원해줄 차례이니라. 

약속하마, 이 천향의 히루메가 그대에게 광명의 미래를 가져다주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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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루메는 과연 리리스를 막을 수 있을까요?


이번편은 대화가 대부분이라 삽화 넣을 건덕지가 없었음. 이런 날도 있는거지 뭐

그건 그렇고 이 소설 후회물 아니라고 했었는데 어째 이상한 방향으로 후회물 요소가 들어간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