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다.


천장을 바라보던 남자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밀폐된 잠수함 속에서 몇 년을 지내다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답답한 이유는 잠수함에서 지낸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마지막 인간으로서 지구를 차지한 적들을 물리쳐야 할 운명인 것이다.


물론 그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인조인간 소녀들과 로봇이 그와 함께하는 중이었다.


그는 그 부하들을 이끌고 싸웠다. 헌신적인 대원들과 그의 지식 덕분에 지금까지는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이 잠수함 안에서 그는 왕이나 마찬가지였으며, 하지 못할 일도 거의 없었다. 모두의 사랑을 받았고, 모두를 사랑해 주었다. 원한다면 온갖 재물을 손에 넣고 주지육림에서 지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유롭지 못했다.


마지막 인간, 생존, 전쟁은 그가 결코 피할 수 없는 굴레였다.


때때로 그는 이 세상이 가짜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모든 인류가 전멸하고, 지구는 금속의 괴물들이 차지했으며, 자신은 아무런 기억도 없이 발견되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사령관이어야 했다. 그만이 할 수 있고, 해야 될 일이었다. 도망칠 수도 없었지만 외면할 생각도 없었다.


그는 마지막 인간이었고, 동료 모두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세상의 왕이라는 신분이 곧 그의 감옥이었다.


그는 하도 답답한 나머지 함장실 안에서만 지내는 일이 잦아졌다. 일 중독이란 소리를 들을 만큼 해치우던 업무도, 손수 작전을 지휘하는 일도 뜸해졌다.


다행히 그에게는 일을 대신 수행할 뛰어난 비서와 지휘관들이 많았다. 적의 공격 같은 다급한 사태가 있지 않는 한 그가 잠시 일을 게을리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전에도 종종 그러한 일이 있었으므로, 대원들도 굳이 남자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단지 그의 마음을 풀어 주고 싶어 할 따름이었다.


그날도 남자는 아침부터 부하들의 보고를 받았다. 아무리 업무를 중단했어도 모든 움직임엔 원칙적으로 그의 허락이 필요했다.


- 식량 생산이 늘었다는 보고입니다. 말씀하신 플랜트 확충이 순조롭게 이뤄져서…….


- 우리 발할라 병사들 중에 간식을 좀 더 배급해도 되겠느냐는 요청이 있어. 딱히 내가 먹고 싶은 건 아니고.


- 각하. 동계 특별 훈련을 승인 받고 싶습니다. 별로 훈련 강도는 세지 않습니다. 자세한 훈련 계획도 전송하겠습니다.


- 오빠. 약속한 자재와 지원은 어디에?


행정부, 참모부, 과학부로부터 요청이 쏟아졌다. 남자는 그가 평소에 하던 업무 속도 그대로 각종 사안을 처리해나갔다. 우울한 와중에도 업무는 빠르게 처리하는 걸 보면 일하는 습관이 몸에 밴 모양이었다.


이어서 그가 점심을 먹고 쉬고 있으려니, 문득 노크가 들렸다.


열어 보자 그의 호위를 총괄하는 메이드인 리리스가 서 있었다.


"주인님. 식사 맛있게 드셨죠?"


"응."


"오늘 점심은 어떠셨을지 모르겠네요. 사실, 이번엔 특별히 리리스가 도왔거든요. 후후."


어쩐지, 일류 셰프가 만든 식사에 짜고 탄 부분이 섞여 있었지 싶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일정이 따로 없으신가요?"


"알잖아. 나 휴가란 거."


"그러네요. 무기한 무단 휴가."


"혹시 일하라고 찾아온 거면 아직은 거절이야."


"전혀요. 애초에 계속 일하고 계시면서…… 그보다, 오늘은 신기한 걸 보여드리려 왔어요."


"신기한 거?"


리리스는 갖고 온 상자에서 우의와 흡사한 옷을 꺼냈다.


"이건?"


"닥터가 만든 걸 빌려 온 거예요. 팬텀 양이 입고 다니는 망토를 비슷하게 구현한 시제품이라나 뭐라나요."


팬텀은 은신과 암습 등에 능통한 스페셜 리스트로, 그녀가 쓰고 다니는 은신 망토는 사용자를 거의 완벽히 숨겨줄 수 있었다.


남자는 은신 망토를 살피며 감탄했다. 비록 다운그레이드 판이라 해도, 이 은신 망토를 보급하면 일반 대원들의 생존 확률을 높여줄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이것을 보급할 계획을 세울 뻔했다.


"대단한데. 양산은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럴 거예요. 닥터한테 빌려온 거니까요. 그리고……."


"?"


리리스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주인님. 모처럼인데 여기저기 구경 다니는 건 어떠세요?"


남자는 머리를 긁었다.


"시찰이라면 나중에 하자."


만사가 귀찮을 땐 일일이 대원들을 살피고 격려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아, 걱정 마세요. 투명 망토를 쓰면 시야 뿐만 아니라 뇌파도 감출 수 있으니까요. 요컨대, 투명 인간이 가능하단 거죠."


바이오로이드는 시야 뿐만 아니라 뇌파로도 인간을 느낄 수 있지만, 리리스의 말 대로라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모두를 훔쳐볼 수 있단 것이다.


투명 인간이란 단어에 혹한 남자는 잠시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전환 삼아 대원들을 관음 - 아니, 구경하는 것도 괜찮으리라 싶었다.


이윽고 남자와 리리스는 투명 망토를 입고 방을 나섰다.


그들은 정말로 투명 인간이 된 듯했다. 통로에 오가는 대원들은 모두들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남자는 그 길로 대원들의 생활 구역에 향했다. 특별히 정해 둔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었고, 그저 하릴없이 걸을 뿐이었다. 그래도 리리스는 남자와 같이 걷는다는 게 마냥 좋은 모양이었다. 그는 불현듯 그녀가 데이트하고 싶어서 망토를 가져온 거란 느낌을 받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쳐 지나가는 대원들 사이로 문득 트리아이나와 네레이드가 만나서 인사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 네리잖아? 잘 지냈어?" 단발의 쾌활한 소녀가 손을 들었다.


세일러복을 입은 소녀도 씩 웃었다. "그럼! 오랜만이야."


둘은 간단히 안부를 물었다.


"트리는 어떻게 지내?"


"글쎄. 요즘은 좀 심심해." 트리아이나가 기지개를 폈다.


"왜?"


"그야. 탐사 나갈 일이 줄었거든."


트리아이나는 수중 탐사용 바이오로이드답게 오르카호에서도 정찰을 주로 맡았다. 문제는 현재 남자가 활동을 중단한 바람에 정찰도 당분간 보류되었단 점이었다.


몸 움직이기 좋아하는 트리아이나로선 가만히 잠수함 안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실 만했다.


"네리도 심심하지 않아? 아무 재미난 일도 없고, 정박도 잘 안해서 외출도 힘들잖아."


"음. 글쎄?"


네레이드는 씩 웃었다.


"난 잘 모르겠어. 체력 단련하고, 친구들하고 요리 연습하고 보내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가거든."


"그래?"


갑판 전투 요원인 네리는 잠수함 안에서의 생활을 그리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사실 그것은 그녀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활발하고 긍정적인 성격 덕분인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도록 세뇌된 것일까. 남자는 순간 표정을 굳혔다. 바이오로이드가 세뇌된 존재란 사실이 새삼 떠오른 것이다.


"오히려 싸움이 없으니까 위험하지 않기도 하고. ……참, 트리도 심심하면 같이 운동할래? 마이티가 잘 알려줄 거야."


"음. 그럴까."


둘은 떠들면서 자리를 벗어났다.


남자도 묘한 기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들은 이 부자유 속에서도 진정 아무렇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리리스도 남자의 분위기가 편치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입을 다물고 호위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남자의 발은 이번에는 작업 시설로 향했다. 네레이드를 보면서 든 생각 때문일까, 그는 작업 중인 바이오로이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했다.


시설에 들어서니 더치걸과 브라우니들이 보였다. 전투용 병사인 브라우니는 아마도 파견으로 이곳에 온 모양이었다.


자재와 자원 생산 시설은 거의가 자동화된 상황이었다. 바이오로이드들은 생산품을 옮기거나 자동화 시스템을 체크하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자동화 시설을 감독하고 살펴보기만 하는 일이 재미있을 리 없었다. 브라우니들은 하품을 하거나 잡담을 하며 지루하다는 티를 팍팍 냈다. 만약 남자나 지휘관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면 그녀들은 열심히 일하는 척이라도 했을 것이다.


어느덧 휴식 시간이 되자 브라우니 하나가 최선임 더치걸 옆에 쪼그려 앉았다.


"힘드셨겠습니다."


브라우니가 더치걸에게 위로하듯이 건넨 말이었다.


더치걸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별로 힘든 일은 아니잖아. 훈련보단 편하지 않아?"


"으으. 그게, 정신적으로 힘듭니다. 지루하고…… 그쪽은 매일 이런 걸 보고 지내는 겁니까? 대단합니다."


더치걸은 슬쩍 웃었다.


"별로…… 익숙해지면 아무렇지 않아."


브라우니는 더치걸이 내민 담배를 정중히 사양하며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전 몸 쓰는 게 더 좋아서 말입니다."


"후후. 그래도 직접 싸우는 것보단 낫잖아. 이 배가 침몰하기 전까지는 죽을 일도 없고. 힘들지도 위험하지도 않고."


"그것도 한 두 번이지, 차라리 훈련을 받는 게 낫겠습니다. 오늘 한번 해보고 느꼈습니다."


더치걸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뭐, 동굴 속에 갇혀서 죽도록 일만 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남자는 더치걸을 보았다. 갈색 머리칼의 이 소녀는 과거 인류 멸망 전, 지하 동굴에서 가혹한 채굴 노동을 하며 지내 온 것이었다.


"햇빛 하나 들어오지도 않는 그 땅속 아래가 아니란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어."


그녀는 연기를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일이 지루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사령관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괜찮아. 옛날의 인간들을 도울 바에야……."


브라우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사령관님을 돕는 일이니 얼마나 보람 있는 일입니까. 저도 훈련이 힘들 때는 그렇게 버티곤 합니다. 기왕에 힘든 거, 제가 선택한 거라고 믿는 겁니다. 하하."


남자는 그녀들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긴 듯이 묵묵히 서 있었다.


리리스가 걱정하듯이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뒤에야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후로도 여러 군데를 돌아다닌 그는, 오르카호가 수면 위로 부상하자 갑판 위로 향했다.


바람을 쐬면 답답한 가슴이 조금이라도 트일지도 모른다.


갑판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언제나 끝없이 시원했다.


일과가 끝날 무렵이라서 그런지 갑판 위로 대원들이 나와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남자가 대원들의 수다를 한 귀로 흘려 들으며 걷고 있는데, 저편에 문득 눈에 띄는 이들을 발견했다. 바로 네오딤과 우르였다.


공연한 호기심이 생긴 남자는 그녀들에게 들키지 않을 만한 거리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지켜보았다. 감이 좋은 그녀들인지라 투명 망토를 쓴 게 걸릴 수도 있었다.


백발의 우르가 네오딤에게 음료 캔을 건넸다.


"데려와 줘서 고마워. 길을 잃을 뻔했어."


"괜찮아. 나도 바람 쐬고 싶었거든."


살펴 보니 우르는 안경을 쓰지 않은 채였다. 초 장거리 저격을 위해 심각한 원시가 된 그녀였기에, 안경이 없으면 장님처럼 바로 앞도 잘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만들어진 실험용 바이오로이드였다.


네오딤은 우르를 바라보다 말했다.


"먼 데는 잘 보이면서, 근처가 보이지 않으면 무척 힘들 것 같아."


"뭐, 그렇지. 오늘도 안경 없이 얼마나 돌아다닐 수 있나 훈련하던 중이었거든. 안경을 못 쓸 때를 대비해서."


우르는 저격수인 만큼 전장에서 언제나 안경과 동료한테 의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불편하지 않아?"


"불편하지. 맹인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말한 우르가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난 이 눈을 최대한 활용해야 돼. 불편하긴 해도, 사령관을 위한 거니까."


"사령관?"


우르는 미소 지으며 시선을 내렸다.


"응. 그 사람은, 언젠가 내가 눈을 고쳐도 쓸모 없어지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거든. 난…… 그 사람을 돕고 싶어. 좋은 세상이 오도록…… 그러니까, 이런 훈련 정도는 해야지."


그녀는 말하면서 쑥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네오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나도, 능력을 연습하는 중이야."


실험체 네오딤은 전자기장을 조종하는 초능력을 갖고 있었다. 원래 싸움을 싫어하는 데다, 아직은 전투 경험과 실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주로 전자기장 능력을 연마하는 데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르가 네오딤을 돌아보았다.


"참. 너도 연구소에서 오랫동안 갇혀 지냈다고 했지?"


"응. 힘든 시절이었어. 억지로 초능력을 연습했고, 나중엔 아무도 날 찾으러 오지 않았거든. 아주 오랫동안……."


남자는 네오딤이 어느 연구소에서 갇혀 있다가 구출됐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연구소에서 네오딤은 태어난 직후 줄곧 생체 실험을 당했고, 인류 멸망 뒤에는 거의 홀로 지내야만 했다.


"그렇구나. 그거 큰일이었네."


"그래서 예전엔 내 초능력이 싫은 적도 있었어. 쓸 때마다 슬픈 기억이 떠올랐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


이번엔 네오딤이 바다 저 멀리 수평선을 내다보았다.


"예전엔 강제로 쓰게 된 거지만, 지금은 내 의지로 능력을 써. 사령관과 모두를 위해 싸우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전혀 힘들지 않아."


"……."


남자는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생각했다.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이 설계한 정신적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남자가 아무리 바이오로이드를 아낀들, 쉽게 바꿀 수 없는 낙인과도 같았다. 멸망 전에는 인간의 노예였다가 이제는 전쟁에서 싸우는 것이 그녀들의 운명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남자를 위해 일하고 싸워서 자신들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또한 전부터 그녀들을 돕는 것이 꿈이었다. 한 남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단지 그녀들이 좋아서, 그녀들을 위해서 이제껏 스스로 열심히 일한 것이 아니었는가.


그런 의지가 있는 한, 자신은 갇힌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그제서야 가슴 한편이 트이고 눈이 밝아오는 것 같았다.


한결 개운해진 그는 침실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여태껏 조용히 따라오던 리리스도 멈추었다.


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고마워."


"예?"


진작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그녀가 나가자고 권하지 않았다면 잊고 지나갈 뻔했으니까.


잠시 어리둥절하던 그녀는 곧 웃었다. 잘은 몰라도 그가 좋으면 다행이었다. 그 뿐이었다.


남자도 다음날부터는 다시 평소대로 돌아와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모두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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