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설정과 다른 2차 창작입니다.

∗1장부터 순차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

서약 반지.

바이오로이드와의 서약을 위해 필요한 반지인 그것은, 사랑받는 이라는 증표이자, 어쩌면 오르카 호의 모든 소녀가 바라는 ‘그것’ 일 것이다.

그리고 그 반지가 먼지가 잔뜩 낀 채 조그맣고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서 굴려지고 있었다.

 

“으음... 이게 왜 여기 있는 걸까요?”

 

안드바리는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갸우뚱하며 혼잣말했다. 아니, 혼잣말보다는 그녀와 함께 다니는 수송 드론에게 말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물론, 창고를 관리하는 다른 바이오로이드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물자들은 그녀의 최종 검수를 거쳐야 한다. 게다가, 사령관 바보똥개 이 ‘전투원 복원’이라는 명분으로 몰래 자원을 빼 가는 일이 잦아, 그녀는 시간이 빌 때 창고를 홀로 점검하곤 했다.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시설 자원과 알터리움 사이에 조그맣게 끼어 있는 일곱 개의 반지 케이스는 안드바리가 합류한 이후로 창고를 꾸준히 관리했지만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아마 그런 귀중품이 아무렇게나 버려둬 두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반지를 조심스레 전등에 비춰본다. 비록 먼지가 끼어 있지만, 반지는 눈부신 금빛으로 빛났다.

다이아몬드를 통과한 빛이 부서져 안드바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살짝 감긴 눈꺼풀의 아래에서 이미지가 떠오른다.

햇빛은 바다에 부서지고 찬란한 다이아를 수면에 흩뿌렸다. 실크와 알록달록한 꽃들로 장식된 갑판, 하이얀 카펫이 깔린 길, 그 끝에 있는 연단,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사람.


안드바리는 살며시 손을 내려 반지를 케이스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케이스를 다시 소매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소녀의 볼이 새빨갛게 물듦은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그것이었다.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왜 사령관님은 이걸 여기에 둔 걸까?

다른 언니들이 회수한 자원과 물품들은 우선 사령관에게 보고가 올라갔다가, 심사 및 분류를 거쳐서 여기 창고까지 내려온다. 

혹시나 자신이 리스트를 잘못 봤나, 싶어 패드를 확인해봤지만, 서약 반지는 애초에 목록에 없었다. 물음표는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다른 언니들이 한 거라면...”

 

그럴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반지’는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물건이다. 예전에 사령관님이 주신 용돈으로 떡볶이를 사 먹으러 갔을 때, 레오나 언니가 반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었다.

 

“언니들이 반지를 봤다면 아마 오르카 호가 뒤집혔겠지...?”

 

그렇다면 생각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안드바리는 예전 LRL과 아쿠아랑 읽었던 이상한 모자를 쓴 멸망 전 인간님의 소설에서 나온 탐정처럼 조목조목 생각해 나갔다.

반지는 다른 언니들이 잘 오지 않는 창고 중에서도, 산더미같이 쌓인 자원들 사이에 숨겨져 있었다.

다른 언니들이 반지를 봤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남은 결론은 하나.

 

“사령관님이 반지를 일부로 여기에 보관하셨다...?”

 

왜? 왤까? 이유가 뭐였을까?

괜스레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생각할수록 안드바리의 머릿속도 배배 꼬였다.

 

“으으... 모르겠어...”

 

나중에 사령관님한테 물어봐야지. 라고 생각한 그녀는 앉아 있던 컨테이너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 사령관님하곤 같이 떡볶이 먹기로 했으니까. 그걸 생각하면 절로 배시시 미소가 떠오르는 안드바리였다.

 

2장

드르륵, 문이 열렸다. 사령관은 마침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사령관님!”

 

“그래, 바리 왔니?”

 

최근에 업무 패드를 빼앗긴 사령관은 요즘 아이들과 가지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가끔 혼자 있을 때는 다른 대원들로부터 추천받은 것들을 해 보곤 했다. 매지컬 모모 극장판이라던가, 엘라와 듀얼을 위한 덱 짜기 라던가.

안드바리는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사령관 옆의 의자에 앉았다. 힐끗 본 책표지에서는 연인 사이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무슨 책인가요?”

 

“아아, 레오나가 추천해 준 책인데,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고 있었지.”

 

사령관은 책갈피를 끼우고 조심스레 책을 덮었다. 그리고 안드바리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바리는 오늘도 열심히 하는구나. 잘했어.”

 

“아뇨, 제가 할 일인걸요.”

 

사령관의 기분 좋은 손길에 지그시 눈을 감던 안드바리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그러셔도 제 일감은 안 드릴 거에요. 얼마 전에 레오나 대장님이 화내신 거 기억하시죠?”

 

사령관은 머쓱해하며 볼을 긁었다. 일전에 알프레드랑 전산망을 해킹하려고 했던 게 이렇게 소문이 빨리 퍼질 줄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 그날 사령관은 레오나한테 엄청 깨졌다.

 

“아하하... 이젠 그런 짓 안 해. 레오나가 무서워서라도.”

 

“그러시면 됐어요. 사령관님은 저랑 떡볶이 먹으러 가면 되는 거에요.”

 

“아하, 바리는 계속 그 생각 하고 있었구나?”

 

“에?”

 

마치 정지 버튼을 누른 듯 안드바리가 잠깐 멈추더니 이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아뇨, 으, 아... 그게 아니구요, 으...”

 

갑작스러운 사령관의 공격에 안드바리가 안절부절못했다. 사령관은 그런 안드바리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별안간 툭, 소리와 함께 작은 상자 하나가 안드바리의 주머니에서 떨어졌다. 두 쌍의 눈동자가 상자로 옮겨졌다.

 

“맞다, 사령관님. 이게 창고에 있었어요. 분명 제 관리 품목은 아닌 것 같은데...”

 

“...사령관님?”

 

“아, 응. 그래. 고맙구나. 그럼 바리야, 미안하지만 먼저 식당에 가 있겠니? 사령관은 이 상자를 적당한 곳에 다시 가져다 둬야겠구나.”

 

“아... 네. 그럼 늦지 말고 오세요!”

 

안드바리가 문을 열고, 문이 다시 닫힐 때 힐끗 본 어깨너머에는 사령관의 등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언제나 넓고 푸근해 보이던 등이 유달리 무거워 보였다.

3장

“으음... 그건 뭐였을까...”

 

오후 일과를 하러 창고로 돌아온 안드바리는 볼펜을 휘휘 돌리고 있었다.

아까 보았던 반지가 마음에 걸려서였다. 안드바리가 식당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사령관이 뒤따라왔고, 그때 보았던 사령관은 예전과 똑같은 사령관이었다.

 

“잘못 본 건가...”

 

발할라 대원의 직감인가, 여자의 직감인가. 무언가가 안드바리의 마음속에서 걸린 느낌이었다.

그녀는 아까 반지를 발견했던 장소로 다시 가 보았다. 

 

“...어라? 하나, 둘, 셋, 넷... 일곱?”

 

반지는 알터리움과 자원 사이에 그대로 있었다. 좀 전에 사령관에게 건네준 것까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맨 앞의 상자에는 작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상자를 집어 들었다.

 

‘미안, 바리야. 이것들은 잠시 여기에 보관할게. 재고에는 올리지 말고, 알겠지?’

 

사령관님의 필체였다. 사령관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안드바리의 머릿속엔 여전히 안개가 낀 듯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으... 괜찮을까...”

 

“어머, 안드바리 양 아닌가요?”

 

안드바리가 뒤돌아보자 키르케와 더치 걸이 있었다.

 

“두 분, 여기는 무슨 일이세요?”

 

“드론이 전지가 이상해서 정비실에 갔더니, 전지를 교체해야 한다더라구.”

 

“우후후, 저는~ 혹시 맛~있는 술 한 병만~”

 

“주류는 마음대로 불출 못 드리는 거 아시잖아요... 그런데 그건 어디서 난 술이에요?”

 

플라스크에 든 황금빛 액체가 찰랑거리며 거품이 올라왔다. 안드바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자원 빼돌리셔서 밀주를...”

 

더치 걸이 키르케를 올려본다. 키르케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아니아니아니, 꼬마 아가씨, 이건 저번 탐색 때 찾은 마지막 술이라고요. 밀주라니, 무서운 말씀을~”

 

“저거 다 마시면 나랑 같이 끊기로 했어. 나는 담배, 키르케는 술.”

 

키르케가 촉촉한 눈망울로 플라스크를 빛에 비춰보았다. 안드바리는 멸망 전 영화에서 타락한 괴물이 자신의 보물을 비춰보는 장면이 떠올랐다.

 

“아아... 남은 마법의 포션이... 얼마 없네요...”

 

“...이번에는 사흘이라도 넘겼으면 좋겠어. 닥터가 그러는데, 키르케 몸 안의 알콜이 전부 분해되는데 10시간 정도 걸린대.”

 

“호드의 샐러맨더 언니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저 병이 떨어지는 대로 11시간.”

 

“그...힘내요.”

 

“그런데, 바리는 뭐 하고 있었어?”

 

“아, 저는...”

 

“어라? 이건...”

 

“후후, 어여쁜 반지네요, 이런 귀한 물건이 왜 여기 방치돼 있을까?”

 

안드바리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안드바리도 아는 게 없어서 크게 말해 줄 수 있는 건 없었지만, 설명이 끝나자 키르케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그렇군요, 꼬마 아가씨에겐 아무래도 호기심을 해결해 줄 마녀가 필요해 보이네요.”

 

“키르케 언니가?”

 

“흐흥, 제가 술만 마시는 마녀는 아니라고요. 꼬마 아가씨에게 씐 호기심을 걷어내는 것도 마녀의 역할이죠.”

 

안드바리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사령관님과 얘기하면서... 한 잔 얻어먹을 수 있겠고요~”

 

“금주 결심한 지 세 시간도 안 돼서...”

더치 걸이 이마를 짚었다.


4장

 

“똑똑~! 사령관님 계신가요?”

 

키르케가 살며시 함장실 문을 열고 손에 든 위스키병을 찰랑거리며 말했다.

 

“있는 거 뻔히 보이면서 뭘,”

 

사령관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침대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뻗은 채 책을 읽고 있는 그의 모습을 하르페이아가 봤다면 앞뒤 안 가리고 바로 달려들었으리라.

키르케는 나풀나풀 다가와 침대에 털썩 걸터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딱 달라붙는 치마와 옆트임으로 보이는 살결이 그녀를 충분히 고혹적으로 만들었고, 천천히 포개지는 다리의 각선미는 평소 그녀가 술에 찌들어 산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군살 없이 완벽했다.

그러나 사령관은 책을 읽고 있었다. 키르케는 살짝 볼을 부풀렸다.

 

“사령관님도 참, 마녀를 옆에 두고 무슨 책이길래 그렇게 열심히 보고 계시는가요?”

 

“아아, 미안미안. 너무 몰입했었나 보네. 그냥 멸망 전 유행하던 만화야. 프린세스의 일도 그렇고, 멸망 전 문화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볼까 해서.”

 

“어머, 역시 사령관님은 마음이 깊으시네요~”

 

사령관이 책을 덮곤 키르케에게 잔을 하나 건네받았다.

 

“별말씀을, 앞으로 함께 할 가족이니 그만큼 알아야지. 그나저나 키르케, 네 잔은 없어?”

 

“아, 제 잔이요?”

 

키르케는 병목을 잡고 그대로 고개를 젖혔다. 꼴깍, 꼴깍. 

희미하게 보이는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크아~! 이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되었을까요?”

 

“충분히. 그나저나 그러다간 내가 마실 것까지 다 마시는 거 아냐?”

 

“우후후, 그렇게 된다면 제 특제 고량주는 어떠세요?”

 

키르케가 고간을 살짝 눌렀다. 누른 부위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젖어 들었다.

사령관은 놀라 쿡쿡 헛기침했다.

 

“그... 안 입었어?”

 

“수많은 여성들의 모습을 본 사령관께서도 이건 좀 자극적이신가 보네요. 후후~ 보람이 있는데요?”

 

“음... 그건 네가 다리 꼴 때부터 자극적이었는데...”

 

“어머머.”

 

키르케의 얼굴에 술기운이 아닌 홍조가 깃든다. 그녀가 씩 웃으며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책에 집중하신다고 생각했는데, 다 보고 계셨네요~ 엉큼하셔라~”

 

“그렇게 예쁜 다리에 시선이 쏠리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순간, 키르케는 몸을 낮추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고, 독한 술을 마셨음에도 놀랄 만큼 달짝지근한 타액이 사령관의 혀를 휘감았다.

 

“푸아... 자꾸 그렇게 부끄러운 말만 하시면 참을 수 없다구요.”

 

사령관의 위로 키르케가 천천히 자세를 고쳐 올라탔다. 폭력적이라고 말할 만큼 달콤한 그녀의 과실이 그의 몸 바로 위, 몇 센티 위에서 당장 커다란 손으로 거두어지기를 바라듯 부드럽고 말랑하게 흔들렸다.

 

꼴깍. 남자는 침을 삼켰다.

 

“이대로 예전처럼... 손님의 품에 안기는 것도 좋겠지만...”

 

키르케가 사령관의 옆에 풀썩 돌아누웠다. 그가 들고 있던 잔이 찰랑거리며 손가락을 살짝 적셨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집어넣더니, 작은 상자를 끄집어냈다.

 

“우선... 꼬마 아가씨의 소원을 들어주는 게 먼저라서요.”

 

“안드바리인가. 메모장에 비밀로 하라고 써 둘 걸 그랬나.”

 

“아뇨, 후후. 그러셨대도 제가 알아내려 했겠죠. 이건 제 개인적인 호기심이기도 하거든요.”

 

“오르카 호의 모든 바이오로이드에게 사랑받는 유일한 인류, 구원자, 각하, 주인인 사령관님이 왜 이렇게 중요한 물건을, 그런 인적 없는 장소에 두신 걸까요?”

 

“심지어 다른 선물들, 의상들, 편지들은 따로 보관하시는 철저한 분께서. 왜...”

 

그는 잔을 입에 가져갔다. 쌉싸름하고 타들어가는 맛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키르케는 그런 사령관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깨달은듯한 멍한 표정으로.

 

“아...”

 

“중요하지... 않은 물건이라서?”

 

잔을 옆에 내려놓은 사령관이 박수쳤다. 바닥에 남은 황금빛 액체가 흔들리며 그의 얼굴을 사선에서 비추었다.

 

“훌륭해. 키르케. 거의 정답이야.”

 

“예전엔 점술사도 겸했었다니까요." 

"다만 이번에는 결과는 알겠지만... 이유를 전혀 모르겠네요.”

 

“알고 싶어?”

 

“...네. 이건 꼬마 아가씨의 호기심도 있지만... 한 명의 여자로서도 궁금하네요.”

 

“뭐, 정말 별 거 없는 이유이기는 한데.”

 

사령관은 잠깐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담배를 태우지 않지만, 키르케의 눈에는 더치 걸이 담배를 피우며 한숨 쉬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인공의 연기가 흩어진다.

 

“AGS를 제외하고도 벌써 백 오십 명이 넘는 가족들이 생겼지. 내가 이 반지를 누군가에게 준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반지를 누군가에게 끼워 줄 때 기쁨과 행복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두려워.”

 

“그래. 두려워. 나는 키르케 네가 말한 것처럼 유일한 인간 남성이고, 나를 믿고 따르는 대원들을 평등하게 대해야 하는 위치에 있어. 소완의 일도 있었고, 리리스와 리제의 일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고.”

 

“‘모든 이를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는 위치에서, 내가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 선택받지 못한 이들은 속으로 슬픔을 삼키겠지. 나는 그런 고통을 주고 싶진 않아.”

 

“저항군의 사령관으로서, 사랑받는 남성으로서, 내가 누군가를 대할 때 차별해서 대하진 않았을까? 누군가는 내 행동으로 마음 아프지 않았을까? 홀로 그 슬픔을 달래진 않았을까?”

 

“그런 게 두렵다는 거야.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내게 반지는 단순한 사랑의 증표보다는, 어딘가 생길지 모르는 불화의 싹이 될 수도 있는, 내가 불평등하게 나눠 줘버린 사랑의 증표로써 더 크게 다가와.”

 

키르케는 조용히 사령관의 말을 경청했다.

그가 짊어지고 있는 고뇌와 책임을, 그녀가 모두 덜어줄 순 없겠지만,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써 한때 사령관이 키르케에게 보였던 깊은 사랑을, 그녀 또한 갚아주고자 했으리라.

 

“손님...”

 

“그래서. 그래서.”

 

어느새 잔에 담긴 얼음은 모두 녹아 있었고 사령관은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래서 이 전쟁이 끝나면, 철충 그리고 별의 아이까지. 모든 게 끝나는 그날까지...”

 

“...그날까지 숨겨두시려고...”

 

“아니, 그날까지 모아두려고. 그때쯤이면 인원수만큼 모았겠지.”

 

“...네?”

 

키르케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음, 지금 당장만 생각해도 백 팔십 개 정도 더 모아야 하고, 앞으로도 더 많이 모아야 할 것 같지만.”

 

“그날이 오면 선물하려고, 그때까지 숨겨두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장소를 바꿔야겠네. 페더가 함장실 온 사방에 카메라를 설치하는 바람에 함장실엔 못 숨기겠거든, 적당한 장소를 찾은 것 같았는데. 키르케가 찾았다니 다른 장소를...”

 

“에? 에에?”

 

“응? 키르케, 왜 그래?”

 

“아니, 그렇게 진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결론이 이렇게 난다고요?”

 

“어, 음. 별로인가? 나름 진지하게 생각해서 낸 결론인데...”

 

당황해하는 사령관을 보며 키르케가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어쩌면 제가 괜한 걱정을 했는지도 모르겠네요.”

 

“우리 손님께선 그릇이 큰 분이시니까요. 모두를 기쁘게 만드시려는 분이니까요.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자리에 계신 유일무이한 분이시니까, 불가능을 가능케 만드시는 분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니까 좀 부끄럽네, 그나저나. 그 술은 어디서 난 거야?”

 

“이거요? 안드바리 양께 부탁했죠. 마법에는 촉매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리니 하나 빼 주시더라구요. 우후후, 지금 생각해보면 필요 없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요.”

 

키르케는 남은 술을 전부 들이켰다. 그리곤 평소보다 풀린 눈으로, 평소보다 붉어진 표정으로, 천천히 단추를 풀어헤쳤다.

 

“그러면... 아까 하던 걸 마저 할까요? 사실 아까 손님께서 반응하셨을 때부터... 저도 참기 어려웠거든요...”

 

“우선... 고량주가 충분히 데워졌는데... 그것부터 한잔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