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나와 히루메가 도착한 곳은 한 시골 마을이었다. 땅의 대부분이 한 때 밭이었을 초원이었고 민가는 듬성듬성 위치해있었다.

의외로 깨긋한 집 안을 뒤져보니 보존식을 꽤나 구할 수 있었다. 오르카도 펙스도 여기선 얻을 수 있는 자원이 얼마 없다고 판단한 건지 이 마을은 손 대지 않은 모양이다. 

물론 이곳엔 군대를 먹일 만한 양의 음식은 없지만 두 명이서 먹을 양은 충분하다. 마침 자루도 있길래 안에 음식들을 집어넣은 뒤 어깨에 맸다.


이렇게 음식을 찾고 있으니 옛날 생각나네. 오르카호에서 나온 지 얼마 안됐을 때 트레저, 리디아와 함께 이런 식으로 먹을 걸 찾아 폐허를 뒤졌는데... 갑자기 걔들 보고싶어진다. 무사하긴 한 건지 소식을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다.


집 밖으로 나오자 다른 집을 수색하고 있던 히루메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때, 뭣 좀 찾았어?"


"주...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닌 과정이니라."


"못찾았구나. 내가 들어간 집엔 먹을 게 쌓여있던데."


"우으... 도움이 되질 못해 미안하구나...


"에이 뭘 그런걸로 낙담하고 그래, 운이 안좋았을 뿐이지. 내가 둘이서 먹을 양 찾았으니 같이 먹으면 되겠네."


괜히 축 쳐져있길래 위로해줬지만 좀처럼 기운을 차리질 못했다. 그녀의 여우귀는 본인 기분에 반응하는 건지 힘없이 옆으로 눞혀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귀가 쫑긋거린 걸 본 순간, 갑자기 히루메가 냅다 달려들어 나를 덥쳤다. 내 몸이 히루메한테 밀려 넘어지는 그 찰나에 무언가가 내 헬멧을 스치고 지나갔다. 땅에 등이 닿고나서야 무슨 일인지 물으려던 참에 히루메가 사색이 된 얼굴로 먼저 말을 끊었다.


"그대, 뇌파가...! 뇌파가 느껴지니라!"


"뭐?"


머리에서 시원한 바람이 느껴진다. 헬멧에 손을 대보니 아까 스친 자리가 찢어져 헬멧에 구멍이 나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내 머리는 무사했지만, 뇌파가 감지된다는 건 더이상 이 헬멧이 제 기능을 못한다는 뜻이다.


"어머나, 피하셨군요? 깔끔하게 한 방에 보내드리려 했는데."


목소리가 돌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블랙 리리스가 양손에 블랙 맘바를 든 채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하치코도 있었다.


"리리스...!"


"가만히 계세요, 괜히 엉뚱한 데 총알이 박히면 더 아프기만 할 거랍니다?"


그녀가 다시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사령관이 보낸거냐?"


"주인님은 이 일에 대해 모르고 계세요. 앞으로도 모르실 거고요."


"바이오로이드가 명령없이 인간을 공격할 수 있다고?"


"경호실장으로서 주인님께 해를 끼칠만한 위험분자는 제 선에서 처리하는 게 가능하거든요."


"누가 해를 끼친다는 거냐! 이거 안보여!? 해를 입은 건 바로 나야!"


욱해서 신경질적으로 대답했지만 상황이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내가 주저않은 채 일어서질 못하고 있는 동안, 히루메가 먼저 일어나서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 그이에겐... 손끝 하나 대지 못한다...!"


없는 용기를 쥐어짜 나서긴 했으나, 그녀의 다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으며 꼬리 털도 빳빳이 서있었다. 블랙 리리스라는 최상위 포식자가 눈 앞에 있는 이상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헌데 히루메를 보자 리리스는 총을 내려놓고 아까까지만 해도 맹금류같은 눈으로 노려보던 게 거짓말이었다는 듯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천향의 히루메 씨, 맞으시죠? 오기 전에 당신에 대해 조사해봤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본래 컴패니언으로 기획되었으나 배틀메이드로 소속이 옮겨졌다고 나와있더군요.

저는 이래뵈도 제 자매들한텐 친절하답니다? 그러니 히루메 씨, 배틀메이드가 아니라 한 때 컴패니언이었던 당신에게 제안하겠습니다. 저희 주인님 밑으로 오세요, 분명 귀한 대접을 받으실 겁니다."


리리스가 블랙 맘바를 홀스터 안에 집어넣고 손을 내밀었다. 저 손을 잡으면 히루메는 살 수 있다.


"컴패니언... 으로서..."


히루메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계속 후들거리던 히루메의 다리의 떨림이 멎었다.


"자, 어서 이쪽으로..."


"첩은..."


그녀는 숨을 한번 삼키고 말을 계속했다.


"첩은 약속했느니라... 그이를 구원해주기로...! 그이에게 광명의 미래를 가져다주겠다고!"


계속 움츠러든 자세로 서있던 히루메가 허리를 펴 똑바로 섰다.



"신을 모시는 무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노니, 내 결코 니놈들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네 조언을 받아들여, 배틀 메이드가 아닌 컴패니언으로서! 나의 은인을 지키겠노라!!"


그녀의 당당한 선언을 마침과 동시에 왼손에 쥔 지팡이의 끝으로 힘차게 땅을 쿵 치자 그 위에 달린 여러개의 방울에서 짤랑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방울소리와 함께 그녀의 앞에 거대한 삼족오의 형상이 나타나더니 이내 거대한 불꽃으로 돌변해 리리스가 서있는 장소를 통째로 붙태워버렸다.


"헉... 허억... 첩의... 한 번 밖에 못쓰는... 필살기이니라..."


히루메가 뒤돌아서서 나를 잡아 일으켜세워줬다.


"일어나거라, 빨리 자리를 떠야..."


"유감이군요."


더이상 들리지 않을거라 믿었던 목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란 히루메가 다시 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기가 걷히자 로자 아줄의 방어막에 감싸져 있는 리리스와 하치코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럴수가... 최대화력 이었거늘..."


"당신에겐 사적인 감정은 없지만, 제 앞에 서겠다면 당신도 베제하겠습니다."


리리스가 무표정을 유지한 채 한걸음 내딛자, 히루메가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녀는 맨몸으로 리리스와 싸울 생각이었다. 지팡이를 양 손으로 잡고 크게 휘둘렀으나 리리스는 여유롭게 피했다, 그러나 히루메는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지팡이의 방울이 달린 끝부분을 땅에 박은 뒤 장대처럼 써서 뛰어올라 발차기를 날렸다. 연계기는 예상하지 못한건지 아까와는 달리 아슬아슬하게 피한 탓에 그녀의 머리에 쓴 카츄샤가 히루메의 발에 스쳤다.

히루메는 지면에 박힌 지팡이를 회전축삼아 허공에서 한 바퀴 돌고 땅에 착지해 자세를 고쳐잡자 리리스도 무기를 꺼내는 대신 맨손으로 싸울 자세를 취했다. 그녀의 뒤에선 하치코가 누구 편을 들어야 할 지 모른 채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둘이 다시 격돌하는 것을 보며 느낀 건데 히루메는 의외로 봉술과 체술을 사용한 근접 전투에도 능통했다, 전에 속으로 똥여우라고 불렀던 게 무색해질 정도였다. 인게임에선 불 뿜는 지팡이나 방어용 부적을 날리는 모습만 봐서 틀림없이 법사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원래 컴패니언으로 기획됐었던 만큼 제한된 공간에서의 경호를 상정해서 넣은 능력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리스의 상대가 되진 못했다, 얼핏 보면 둘이 대등히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히루메가 맹공격을 펼치는 반면 리리스는 봐주는 건지 반격도 안하며 여유롭게 공격을 흘려내고만 있었으니까. 설령 히루메가 만전의 상태였다 할지라도 상대가 그 블랙 리리스인 이상 결과는 같았을 거다.


슬슬 질린건지 리리스가 드디어 공세로 전환했다. 가벼운 발차기로 히루메의 손을 쳐 지팡이를 떨구게 한 뒤 그녀의 명치에 장타를 내질렀다. 히루메가 그 방향 그대로 허공에 붕 뜨더니 내 앞에 떨어지려 하기에 급하게 온 몸으로 받아냈다.

그녀는 숨도 제대로 못쉬고 꺽꺽대며 자신의 명치를 제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앞에선 리리스가 한 손에 히루메의 지팡이를 잡고 빙글빙글 돌리며 천천히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본 히루메가 아직 통증이 남아있을텐데도 내 어깨를 잡고 일어서서 또다시 내 앞에 섰다.


"못 지나간다... 첩의 명이 다하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못 지나간다...!"


리리스가 히루메에게 닿기까지 앞으로 10보,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


리리스는 오기 전에 히루메에 관해서 조사해봤다. 

천향의 히루메, 그녀가 컴패니언에서 배틀 메이드로 이적한 이유는 그녀를 설계할 때 들어간 여우 유전자의 영향으로 경계심이 너무 강해져서 제 주인까지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두번째 인간이 히루메를 데리고 나갔다 한들 그녀는 그 인간을 경계할테니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 어째서, 저 인간을 지키는 것이지? 어째서 저 인간에게 경계를 푼 것이지? 리리스는 혼란스러웠다. 저 인간이 구인류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제 주인을 지키려드는 컴패니언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


"언니..."


옆을 보니 하치코가 울먹거리며 자신의 소매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히루메와 하치코, 두 컴패니언이 저 인간을 죽이지 말라고 하고 있다.

본래 주인에게 해가 될 자는 무자비하게 처리하는 것이 블랙 리리스의 천성이지만, 선한 사령관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그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그녀는 더이상 마음을 독하게 먹을 수 없었다.


"...하치코, 돌아갑니다."


"...!! 네, 언니!"


리리스는 전의를 상실했다.

그녀는 손에 든 지팡이를 히루메에게 휙 던져줬다. 히루메는 미처 받지 못하고 그녀의 이마에 부딪혀 땅에 떨어진 걸 허둥지둥 잡아 들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히루메를 뒤로 한 채 리리스는 자신이 온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치코가 바로 따라오질 않고 두번째 인간에게 가서 뭔가를 건네주고 있었다.


"하치코!"


"네, 지금 가요!"


그렇게 리리스와 하치코는 오르카호로 돌아갔다, 두번째 인간과 히루메를 살려둔 채.


*


"이거, 두고 가신 물건이에요."


리리스가 돌아가나 싶더니 하치코가 달려와서 그렇게 말하며 뭔가를 건네줬다. 검은 보자기로 싸맨... 아니, 보자기가 아니라 내 은폐장 망토였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건 DRAGON SLAYER라고 새겨진 소방도끼였다.

얼마 후 둘이 한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을 만큼 작게 보일정도로 멀리 떨어지자 히루메가 입을 열었다.


"...간 것이냐?"


"그런가 본데?"


"흐아아아..."


긴장이 풀린 히루메는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풀썩 주저앉았다.


"무서웠니라... 저 여자, 정말로 저승사자 같더구먼..."


"히루메, 저기 그... 내 편을 들어줘서 고마워."


"은혜를 져버리고 혼자서만 살아남은 건 인의에 어긋나는 일이니라. 무엇보다도, 이번엔 첩이 그대를 구원해줄 차례이라고 말했잖느냐?"


히루메가 식은땀을 닦아내며 싱긋 웃자 나는 멋쩍은 웃음으로 답해줬다. 그 다음 나는 손에 들고있는 찢어진 헬멧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 투구가 없으면 지병을 막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렇지... 당장 목숨은 건졌지만 앞으로가 문제군."


"어디서 또 구할 수는 없는 거냐?"


"힘들걸. 이거 하나도 겨우 구한 거니까."


"허어."


히루메가 조용히 탄식을 내뱉었다.


"이거 고칠 수는 없을까? 융접한다던가... 히루메, 그 불 또 쓸 수 있어?"


"기력을 회복하면 다시 사용할 수 있다만... 유감스럽게도 첩의 불꽃은 화력 조절이 안되서 융접은 커녕 투구를 녹여버릴 것이니라."


"그런가..."


그래도 언젠가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르니 일단 버리지 말고 들고다녀보자. 적어도 팬텀의 투명 망토와 도끼는 되찾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도로 망토를 어깨에 걸쳤다. 은폐장이 아직 잘 작동되나 시험해 보기 위해 작동시켜 봤는데...


"...안켜지네."


고장났거나 아님 배터리가 다 된 모양이다. 이건 이제 바람막이로 밖에 못쓰겠군. 실질적으로 쓸 수 있는 물건은 이 소방도끼 뿐인가.

사실 이것도 실제로 쓰기 위해서라기보단 일종의 행운의 부적 삼아 들고다니는 거지, 좌우좌가 이걸 건네주면서 새 친구 잔뜩 사귈 수 있을거라고 한 걸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어느덧 하늘에선 석양이 지고 있었다. 당장 먹을 식량도 확보했으니 밤이 되기 전에 잘 곳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 주변엔 적도 없는 것 같으니 적당히 아무 민가 들어가서 자면 되겠지 싶었다.

히루메의 귀가 또 쫑긋거리는 걸 보기 전까진 말이다.


"그, 그대여! 또 무언가가 이쪽으로 향하고 있니라!"


"리리스가 돌아오는 건가?"


"아니다, 내륙 방향에서다! 사람의 발소리가 아닌, 무슨 시끄러운 기계 소리가..."


"펙스다...! 하여간 이 거지같은 동네는 하루도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네."


겨우 리리스가 돌아가 숨 좀 돌리나 했더니 연속해서 적이 나타나 미칠 지경이었다. 우리 둘 다 지친 상태라 싸우거나 도망치기도 힘들었거니와 숨는 것도 사정이 마땅치 않았다. 여긴 초원이 대부분인 시골이라 숨을 곳이 한정돼있다. 이 근처에서 엄폐물이라 부를 만한 게 민가밖에 없어서 작정하고 찾으면 집부터 뒤져볼 게 불 보듯 뻔하다.


어떻게 해야할 지 갈팡질팡 하는 사이 히루메가 들었다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구식 바이크 엔진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빠르게 접근하고 있다.


바이크 엔진소리... 바이크? 그럼 AGS나 철충은 아닌데? 바이오로이드인가? 누구지?


"그대여, 물러서 있거라."


히루메가 지팡이를 쥐고 내 앞에 섰다. 반면 나는 뭔가 생각하느라 대꾸할 겨를이 없었다.

시골... 바이크... 바이오로이드... 바이크 엔진 소리... 아, 생각났다.


"히루메, 아무래도 경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뭣이?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답하기도 전에 저쪽이 먼저 도착했다. 호버 바이크가 우리 앞에 서고 나서 빨간 머리에 노란 브릿지를 한 여자가 그 위에서 내렸다.


"와, 정말로 인간이잖아? 소문이 사실이었어!"


"너는..."


"네놈, 정체를 밝히거라!"


히루메가 소리치자 그 여자는 양 허리에 주먹을 얹고 은근슬쩍 왼쪽 어깨에 붙은 보안관 마크를 보여주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반가워. 보안관 아이언 애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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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동료 영입각이다!

헬멧을 못쓰게 됐으므로 다음화부턴 삽화에서 헬멧 없는 라붕이를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