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반가워. 보안관 아이언 애니야."


"보안관이라고?"


히루메가 되묻자 애니는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헤헤, 사실 이제와선 보안관이라기 보단 자경단에 가깝지.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거든."


"그렇다면, 펙스나 오르카의 끄나풀이 아니라는 뜻이냐?"


"물론이지, 그 점은 안심해도 좋아."


애니가 친근하게 다가가려하자 히루메가 지팡이를 겨눠 그녀를 견제했다.


"기다려라! 아직 네놈을 믿을 수 없다. 여긴 어떻게 온 것이냐? 우리가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지?"


"그 질문에 답해주자면, 나는 너희들을 콕 집어서 찾아온 게 아니야. 순찰 돌던 중에 이 근처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난 걸 보고선, 누군가 위험에 처한 줄 알고 냉큼 달려왔을 뿐이지."


"아, 그거..."


히루메가 쏜 불꽃을 본 거로군. 그렇게 멀리서도 보였던 건가.


"그런데, 순찰이라고?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고?"


이번에는 내가 질문을 던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멸망 전에 받은 명령이야. 인간들이 모두 죽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받은 명령이 바로 이 지역을 지키라는 거였으니까."


"그럼... 그때부터 100년간 이 일대를 순찰하며 관리해왔다는 것이느냐?"


"뭐, 그런 셈이지."


"마치 지박령같구나..."


뭔지 알 것 같다, 원작에서 나온 키르케 같은 케이스다. 그녀도 인류멸망 전 명령에 묶여 테마파크에서 벗아나질 못하고 있었었지.


"그리 불쌍하게 보지 마. 비록 활동 반경이 제한돼있긴 했어도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나름대로 가치있는 삶을 살아왔다고."


"그래? 드라이브라도 실컷 즐겼나?"


"펙스의 난민들을 돕는 일을 했지."


그녀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너희도 알고 있겠지만, 이 미국은 대악당 레모네이드 오메가가 점령하고 있어, 그 여자의 폭정 밑에서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이 피와 눈물을 흘리는 건 말할것도 없지.

그녀의 밑에서 도망친 바이오로이드가 미국을 여기저기 떠돌다가 이 지역에 흘러들어오면, 그 때부터 내 일이 시작돼. 그들을 찾아서 안전한 곳으로 데려오고, 펙스의 추적자들로부터 숨겨주는 일이야. 다쳤다면 치료해주고, 굶주렸다면 음식을 나눠줬지.

그리고 때를 봐서 그들에게 미국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줬어. 어떤 때는 캐나다 쪽으로 보냈고, 어떤 때는 맥시코 쪽으로, 또 어떤 때는 바다 쪽으로 보냈지. 

...하지만 난 그들과 끝까지 함께 할 수 없어서 그들이 무사히 도망쳤는지, 도로 붙잡혔는 지는 알 수가 없었어."


"혼자 살아남기도 벅찼을 터인데, 그렇게까지 남들을 도우며 살아온 이유가 무엇이더냐?"


"내겐 보안관으로서의 긍지가 있어. 질서를 수호하고, 법을 집행하는 게 내가 태어난 이유야. 무엇보다도, 이런 불평등한 세상이라도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


"...그대여."


"응, 듣고 있어."


"이 처자는... 믿어도 될 것 같구나."


"그치?"


"헤헷, 믿어줘서 고마워, 여우 아가씨."


히루메가 지팡이를 거두자 애니는 살갑게 다가와 나한테 어깨 동무를 걸었다.


"자, 이번엔 내가 질문할 차례인가? 나도 인간님한테 궁금한 게 있거든."


"그 전에 하나만 더 묻고 싶은데, 아까 말한 소문이란 건 뭐야?"


"그거 말이지, 내가 펙스 난민들과 만나면서 걔들한테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는 하거든? 들리는 바에 의하면 최근 펙스의 바이오로이드 사이에서 저 어딘가에 살아있는 인간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있는 모양이야.

그래서 요즘 뇌파가 감지되면 일일이 눈으로 보면서 확인하고 다녔는데, 오늘 드디어 그 소문의 실체를 확인한 거지!"


"...그 소문의 주인공은 아마 나 말고 다른 인간 일 거 같은데."


"뭐? 살아있는 인간이 또 있어? 너, 뭔가 아는 모양인데? 네가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도 알고 싶고."


"설명하자면 좀 길어."


"그으래? 그럼 밥이나 먹으면서 천천히 들을까? 곧 해도 져물테니 우리 집에서 묵고 가."


"마침 잘 곳이 필요했는데, 우리야 고맙지."


우리들은 애니를 따라서 그녀의 오두막집으로 갔다. 그 집은 멀지않은 곳에 있는... 내가 대량의 식량을 찾은 그 집이었다.


"어? 모아둔 음식이 다 사라졌어! 도둑이 들었었나봐!"


"...미안, 빈 집인줄 알았지."


"...엥?"


*



"휩노스 병이라, 골치 아프게 됐는걸."


애니의 집에서 초졸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낡은 소파에 모여앉아 쉬고 있을 때였다.

내 사정을 들은 애니는 곤란하다는 듯 천장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치료법이나 병을 막을 방법 같은 거 아는 거 있어? 아님 그런 걸 연구한 블랙리버나, 삼안의 연구시설 위치 같은 건?"


"도움이 못돼서 미안하지만, 난 평생을 시골에서만 살아와서 그런 건 전혀..."


"씁, 모른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삼안에서 치료법을 만들어 냈고 그걸 저쪽의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했지?"


"응."


"그럼 저쪽 인간한테 가서 치료해달라고 부탁하는 게 제일 가능성 있지 않을까?"


"그 시정잡배 얘기는 꺼내지도 말거라! 그이를 죽이려든 인간인데 도와줄 리가 없잔느냐!"


애니가 사령관을 언급하자 히루메가 불같이 화를 냈다. 아니 너 사령관과 직접 만나본 적도 없잖아... 혹시 얘 머릿속에선 막 사령관이 몇배나 나쁜 놈이 됐다거나 한 건 아니겠지?


"그치만 얘가 하는 얘기를 종합해보면 오해가 생겨서 쫒겨났을 뿐인 거잖아? 그럼 오해를 풀면 되지."


"어떻게? 내가 오르카호에 있을때 몸 사리고 다녔더니 오히려 그걸로 트집잡고 쫒아냈는데."


"그 오르카의 애들은 네가 바이오로이드를 괴롭히는 인간일까봐 의심했다는 거잖아?"


"그렇지."


"그러면 그들의 예상과는 반대로 움직이는 거야. 그냥 바이오로이드를 건드리지 않는 것만으론 부족하니 더 과감하게 행동하는 거지! 위험에 처한 바이오로이드를 도와줌으로서 네가 정의의 편이란 걸 증명하는 거야!"


"그럼 그 위험에 처한 바이오로이드는 어디서 찾는데?"


"이 미국땅엔 그런 애들이 널려있는걸?"


"...펙스 난민 말이야?"


"말도 안되는 소리! 가뜩이나 넓은 땅에서 펙스의 눈을 피해 숨어다니는 자들을 어떻게 찾는단 말이느냐! 너도 저들이 우연히 이 지역에 들어오길 기다렸을 뿐 바깥에 나가서 찾은 적이 없지 않느냐!"


"물론 그렇지. 하지만 도움을 필요로 하는 펙스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잔뜩 모여있는 장소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잖아?"


"...너 설마..."


"펙스의 본거지에 가서 악당들을 쳐부수고 그곳의 바이오로이드들을 몽땅 데리고 탈출하는 거야!"


"갈(喝)! 겨우 우리 둘이서 펙스의 대군을 상대하라는 뜻이냐? 제발로 호랑이 입속에 들어가는 거랑 뭐가 다르느냐!"


"셋이지, 여기있는 인간님이 명령만 해주면 나도 같이 싸울 수 있어, 나만 믿으라구? ...총알은 몇 년 전에 바닥나서 격투기로밖에 못싸우지만."


"애니... 셋이여도 결과는 마찬가지야."


"그러지 말고! 난 계속 이 날만을 기다려왔어, 이 촌동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말이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시민들이 오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그들을 찾아가 손을 내밀어주고 싶었다고!"


"안된다! 절대! 무조건! 안되느니라! 그대여, 저 바보천치의 말은 듣지도 말거라!"


"그래, 내가 생각해도 그건 무리야. 둘이든 셋이든 펙스의 군대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으음... 알았어. 그럼 다른 방법을 생각해봐야 겠네."


애니가 한 발 물러서자 히루메는 그제야 안심하는 기색을 보였다.


"휴우,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이만 눈을 붙이는 게 어떻겠느냐? 피곤한 상태로는 좋은 생각이 떠오를 것 같지가 않으니 명일 이어서 얘기하자꾸나."


"그래, 그래야겠다. 애니야, 우린 어디서 자면 되냐?"


"손님을 허름한 데서 재울 수는 없지. 내 방에 있는 침대를 써, 난 소파에서 자면 되니까."


"그래도 돼? 주객전도하는 것 같아서 미안해지네."


"아핫, 뭘 그런 것 갖고 그래! 마음같아선 셋이서 같이 자자고 제안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침대가 좁아서 말이야."


"호의에 감사하마. 인류멸망 후로 침대에서 자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기대가 되니라."


"...거듭 느끼는 거지만 힘들었겠네."


"후훗, 무얼 새삼스래. 그대도 같이 자자꾸나."


그 날은 침대 위에서 잤을뿐만 아니라 히루메와 한 침대를 써서인지 편하게 잠들 수 있었는데다 악몽도 꾸지 않았다.

...참고로 말하자면 진짜로 잠만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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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붕이는 모처럼 라오 세계관에 들어왔음에도 살아남느라 바빠서 현재 아다 유지중입니다

설정상 아이언 애니는 멸망전쟁때 전멸해서 지금은 복원 개체 밖에 안남았다고 하던데 스토리 진행상 얘가 필요해서 멸망 전 개체가 남아있다고 내맘대로 정했음


다음화는 적당히 쉬어가는 화로 할까 생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