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득하는 닥터와 말 안 듣는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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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설득하는 닥터와 말을 듣는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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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설득했던 닥터와 잠들어 있는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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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설득했던 닥터와 말 안 들었던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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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우우..."


'끝났다.. 이제 다 끝났어... 탈론페더와 스프리건이 적극적으로 퍼뜨린다고 가정하면, 아마 반나절.. 아니 몇 시간 정도. 닥터까지 회선으로 알린다고 하면 두 시간도 안 돼서 오르카호 내에 퍼지겠지. 일단 바로 유미한테 가서 방화벽 점검이랑 보안 강화 부탁하고, 점령지까지는 알리지 않는 걸로 해서...'



처음부터 모두에게 사실을 밝힐 생각은 아니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닥터와 입씨름을 하고 지팡이만 받아서 빠져나오던, 하다못해 말을 할거라면 사전에 시설 내에 있는 탈론페더의 소형 카메라를 전부 빼내어 닥터에게만 진실을 알려줄 수도 있었다. 그저 한순간 생겨난 변덕이었다. 닥터의 감정젖은 호소때문이었을까, 아니면 10년간 비밀을 지키면서 쌓인 피로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모두에게 자신이라는 헛된 희망을 안겨준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와서 저지른 일의 원인을 찾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그렇게 생각하며 사령관은 스캔실 문에 기대어 한숨을 크게 쉬고는, 유미가 있는 서버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


"유미, 나야. 안에 있어?"


"아, 사령관님. 잠시만요 문 열게요."


"오랜만이야. 자주 못 와서 미안해."


"아, 아니에요. 사령관님이 가장 바쁘신데요. 그나저나 직접 오실 정도면 꽤 중요한 일인가요? 혹시..."


"..!"


'벌써 소식이 퍼졌나, 상황이 안 좋아. 아무리 탈론페더라도 이렇게 중요한 사안을 마구잡이로 퍼뜨리지는 않을거라 생각해서 시간을 길게 잡은건데. 이렇게 되면..'


"근무 째고 낮술...이라던가? 헤헷."


"...?"


"..잘못했으니까 그렇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보지 말아주세요... 사령관님이 지금 시간에 온다는 건 일밖에 없을 것 같아서 농담한 거니까요.."


"아, 흠흠.. 기대를 배신해서 미안하지만, 안타깝게도 일거리야. 외부 방화벽의 점검과 보안 강화를 부탁하려고 왔어."


"방화벽 강화요? 그거라면 일주일 전에 정기점검할 때 보고서 써서 올렸는데요?"


"아.. 미안. 급하게 오느라 말이 좀 거칠었네. 정확히는 추가적인 외부 해킹시도나 침입흔적을 파악해줬으면 좋겠어. 혹시 얼마나 걸리는지 알 수 있을까?"


"음.. 해킹시도가 없다고 쳤을 때, 단순 점검은 그렇게 오래 안 걸려서 지금부터 해도 몇 분 안 걸릴거에요. 보고 가실래요?"


"미안해. 서류 처리하다가 온 거라 금방 가봐야 하거든."


"에에? 아쉽다. 어쩔 수 없죠. 안녕히 가세요, 사령관님."


"일거리 줘서 미안해, 유미. 아, 모레 비번이었지? 그때 예정 없으면 낮술이라도 한 잔 할래?"


"네?! 완전 좋죠! 저 그때 한가해요! 아.. 근데 낮부터 술 마시면 저번처럼 콘스탄챠님한테 혼나는 게..."


"걱정하지 마. 내가 커버쳐줄게. 그래도 혼나면 같이 무릎꿇지 뭐, 설마 맞기야 하겠어. 하하"


"그, 그럼 그때 뵐게요, 사령관님! 약속 잊으시면 안돼요!"


"그래그래. 책상에 몬스터 안 흘리게 조심하고. 모레 만나자."



위이잉..


"그때 꼭 만나자..."


'반응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아직 정보가 퍼지지는 않은 모양이네. 다행이야. 


...뒷일도 생각하지 않고 질러버리다니, 나답지 않았어. 최소한 급한 업무는 끝내놓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아직 펙스와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으니 전투 지휘를 생각해서 당장 쫓겨날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만약...'



사령관의 머릿속은 전투 지휘를 하듯 복잡하게 돌아갔지만, 지휘 때와는 다르게 그 생각의 거칠기가 강변의 자갈바닥과도 같았다. 알고 있는 철충의 약점과 강점을 토대로, 전장에 따라 전투에 적합한 부대원을 선택해 스쿼드를 조직하고 이기는 싸움만을 한다. 설령 기습을 당한다고 해도 그때그때 대적한 부대원들의 강점들로 약점을 보완하는 사령관의 지휘 능력은 그 옛날 촉의 책사와 비견될 만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젊은 날의 치기보다도 생각없이 질러버린 변덕과 스스로의 가치가 사라졌을 때 생길 일들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냉철한 판단력을 앗아갔다. 유미 앞에서는 짐짓 괜찮은 척을 하며 태평하게 낮술약속이나 잡았지만, 아르망이나 콘스탄챠를 만났더라면 대화도 하기 전에 불안감을 들켜버렸을 것이 분명했을 정도로 사령관은 동요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에 목줄을 매듯 사령관은 넥타이를 강하게 잡아당겨 목을 매고는 사령관실로 돌아갔다.


.

.


"...업무는 이걸로 끝인가. 요즘들어 꽤 적은걸. 나때문에 알파랑 아르망이 고생하네. 고마워, 알파"


"감사해요, 주인님. 하지만 지금껏 해오신 일들에 비하면 저희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답니다. 믿고 맡겨주신 임무인데 아직도 업무 처리를 따라가지 못해 죄송할 뿐이에요."


"그런 말 하지 말아줘, 알파. 너희들은 이미 내 기대에 따라주고 있어. 전투 지휘까지 전부 위임하는 건 좀 불안하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오르카호 내 업무 처리는 문제없겠어. 나 하나 정도는 없어도 당분간 괜찮겠지."


"후훗. 주인님,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씀 말아주세요. 제 주인님은 주인님뿐인걸요."


"...알파. 나도, 너희들도 살아있는 이상 언젠가는 사라지게 될 거야. 하지만 적어도 후대의 애들이 우리처럼 문제 해결에 필요 이상의 시행착오를 겪지는 않았으면 해. 단지 그것뿐이었어."


"주인님.."


"..무거운 얘긴 여기까지 하자. 알파, 업무도 일찍 끝났는데,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저야 좋죠, 소완 양에게는 얘기해둘게요. 그럼 가실까요?"


.

.


사령관은 레모네이드 알파와의 저녁 식사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가 가벼운 샤워로 피로를 씻어냈다. 그리고 오랜만에 도수가 낮은 캔맥주를 한 캔 꺼내 데워진 이마에 대고는 침대에 걸터누워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생각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오늘은 하루종일 조용했네. 마리의 전투 지휘를 보고 점검하면서도 별다른 얘긴 없었고, 서류업무 처리하면서 알파와 얘기했을 때도 뭔가를 아는 눈치는 아니었어. 탈론페더가 자체 엠바고를 해준건가? 아니면 다들 알면서도 나를 배려해준다고 가만히 있는걸지도..


...처음부터 알리겠다고 스캔을 허락한 건 아니니까, 굳이 대놓고 말할 필요는 없겠지. 어디 오늘 동침은... 웬일로 동침도 비어있네. 마침 잘 됐어. 앞으로 내 처우에 대해 생각이나 해볼까...'


"하아... 피곤하다."


.

.

.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탈론페더 언니.."


"..."


"..그리고 아르망 언니?"


"..."


"..지금까지 제가 사령관님과 관련된 모든 정보는 받는 족족 퍼뜨리기는 했어요. 하지만 이건..."


"내일 내보내야겠군요."


"?!!! 그게 무슨!"


"역시 그렇지? 그렇게 대답할 거라 생각했어."


"닥터 님?!!"


"그럼 닥터 양은 스프리건 양에게 엠바고를 부탁해 내일 점심식사가 끝날 때쯤 정보를 풀도록 해주세요. 그 정도라면 스프리건 양도 흔쾌히 수락하실겁니다."


"오케이~"


"잠시만요! 지금 저 혼자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최고 권위자의 건강정보는 기밀중에서도 기밀. 그것은 폐하도 다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건 인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가능성도 존재하는 정보입니다."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그냥 못 들은 척 하는 게 나은 거 아닌가요?!"


"..폐하는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네?"


"제가 복원된 직후에 폐하의 지휘와 업무 처리 기록을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을 바꾼 적이 없었습니다. 사망자 하나 없는 전투 지휘, 정확하면서도 엄청난 속도의 서류업무 처리, 오르카호 대원들의 사기 진작, 점령지의 민심 수습. 폐하께서는 최소한의 도움으로 2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그 모든 업무에 숙달하셨고, 제가 습득한 인류의 데이터에서 역사상 이 정도로 뛰어난 책임자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


"완전한 몸을 가진 인간님이 평생에 걸려도 이룩해내지 못할 일들을 폐하께서는 시각의 부재라는 매우 큰 패널티를 안으신 채로 단기간에 해내셨습니다. 또한, 하잘 것 없는 바이오로이드에 불과한 저희들의 같잖은 희망을 위해 외로이 비밀을 지키며 저희들을 인도해주셨습니다. 굳센 철갑같은 등에 저희들을 업어 이끄실 때, 그 가슴속에는 얼마나 많은 상처가 있었을지. 탈론페더 양은 상상이 가시나요?


"...전혀요."


"부끄럽지만... 저도 그렇습니다. 마음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잔혹한 상처를 입으신 채로 얼마나 많은 책임을 등에 업으셨을지, 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진작에 폐하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되어 폐하께 사죄드리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런 불초한 저희들에게, 폐하께서는 거둬주시고 돌봐주신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지금껏 미뤄오셨던 스캔도, 자신의 비밀을 얘기해주신 것도, 서로의 치부를 드러냄으로써 폐하와 저희가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위대한 목표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친히 내주신 용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분에 넘치는 배려를 어떻게 모른 척 넘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아르망님, 이걸 도박수로 던지기엔 불확실해요. 아직 전쟁이 시작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그렇기 때문입니다. 아직 펙스와의 전쟁이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오르카호 내에 퍼뜨려야 합니다."


"이유를..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첫째, 펙스측의 정보전 실력이 어느정도인지는 아직 가늠하기 어려워 오르카호의 정보가 얼마나 노출되어 있는지는 모릅니다. 만약 폐하에 대한 정보를 펙스측에서 먼저 입수해 입맛대로 변형하고 퍼뜨린다면 대원들의 사기와 점령지의 민심 하락을 막기는 매우 힘들어질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수를 쳐야 합니다. 물론 오르카호 밖으로는 새어나가지 않는 선에서요.


둘째, 전쟁 중에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기가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행여나 정보의 유출을 통해 떨어질 수 있는 사기를 생각해 전쟁 전에 퍼뜨려야 합니다. 굳이 사기가 떨어진 상태로 싸워줄 필요는 없습니다. 충분히 수습하고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


"그럼 탈론페더 양도, 스프리건 양과 함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아르망 님. 그런데.."


"왜 하필 내일 오후에 정보를 풀 예정인지 궁금하신가요?"


"..네"


"..지금쯤 폐하께서는 오르카호 내에 소문이 퍼지는 걸 경계하시되, 내부에서 충분히 정보가 도는 걸 기다리고 계실겁니다. 하지만 소문은 퍼질수록 그 몸집을 불려 폐하께서 의도치 않은 헛소문들도 돌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폐하께서 오늘 하루의 피로를 푸시고 생각을 정리해 저희들을 부르실 내일 오후가 되기 직전, 정보가 충분히 빠르게 퍼진 동시에 효율적인 제어가 가능한 점심식사 직후에 정보를 푸는 것이 적당할 거라 판단했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한 답변이 되었을까요?"


"..과연 엄청나시군요.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위이잉...


"폐하..."


.

.

.


유일하게 진실을 아는 세 명의 아이들은 각자 맡은 바의 준비를, 마음의 짐을 내려놓아 후련해 함과 동시에 내일에 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몸부림치는 사령관이 자신의 불명예스러운 은퇴 준비를 마치고 있을 무렵, 어느덧 초승달이 그 모습을 내보였다. 그렇게 야속한 시간은 흐르고 흘러,


아침이 밝았다.







빠르면 새벽, 늦으면 점심이빈다. 두 개 같이 풀까 싶었는데, 사령관 연설 짜임새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일단 잘랐스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