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이틀 전까지만 해도 마키나의 낙원이 자리잡고 있었던 폐허 도시, 그리고 현재 블랙 리리스의 유배지인 장소, 지금 이 곳은 오밤 중에 펙스에서 보낸 AGS 군대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리리스는 이곳을 지키라고 명령받은 상태였다. 후퇴 명령이 떨어지기 전엔 마음대로 떠날 수 조차 없었다.


"여기는 블랙 리리스! 현재 펙스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오르카 1호, 제 말 들립니까?"


리시버에 대고 급박하게 소리쳤으나 돌아오는 건 잡음 뿐이었다. 상대측에서 방해전파를 쏘고있는 건지 통신이 불가능했다. 

추가적인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마지막으로 받은 명령을 지켜야만 한다. 리리스는 단신으로 저 군대와 맞서 싸워야만 했었다.


블랙 리리스는 100m 이내의 근거리 전투에선 라비아타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손꼽히는 강자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혼자서 저 많은 수의 AGS를 상대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라비아타처럼 묵중한 쇳덩어리인 AGS를 일도양단 할 수 있는 괴력을 지닌 것도 아니고, 타이런트처럼 단 1기로 1개 사단을 괴멸시킬 화력을 지닌 것도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상대도 블랙 리리스가 들고있는 쌍권총의 사정거리를 알고있기에 100m 바깥에서 포격을 퍼붓기만을 고집했다. 로자 아줄의 방어막을 겹쳐 집중포화를 막아내며 직접 적들에게 뛰어가 하나씩 처치하긴 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주인님... 이것도 나쁜 리리스가 받아야 하는 벌인 걸까요...?"


리리스가 지쳐갈 즈음 연이은 포격에 로자 아줄의 방벽이 버티질 못하고 깨져버린 순간, 어디선가 저격이 날아왔다. 그녀의 뒷목에 박힌 작은 주사기 형태의 침에서 강력한 마비약이 주입되자 몇 걸은 못 떼고 기절해버렸다. 계속 거리를 유지하던 AGS들은 그녀가 쓰러진 것을 확인하자 이제야 다가와 그들의 포로를 챙긴 뒤 도시에서 떠났다.


그녀가 의식을 되찾은 건 약 한시간이 지난 뒤였으며, 이윽고 자신이 처음보는 방 안의 구속장치에 묶인 상태였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뒤 증오스러운 검은 머리의 여인이 시야에 들어오자 리리스의 눈매가 매섭게 돌변했다.


"잘 잤나요, 블랙 리리스 양?"


"레모네이드 오메가! 역시 그 군대는 니년이 보낸 거였냐!"


리리스는 곧장 뛰쳐나가 저 여자의 목을 비틀어버리려 했으나 사지가 단단히 구속된 이상 발버둥쳐봤자 힘만 빠질 뿐이었다.


"흠, 저번 포로에 비해 일찍 정신을 차렸군요. 과연 튼튼하게 만들어지긴 했네요."


"나를 그 자리에서 죽이지 않다니, 무슨 속셈이지?"


"정보를 뽑아내기 위해선 살려둘 필요가 있었거든요. 나중에 인질교환에 써먹을 수도 있을테고."


오메가가 구속장치 옆의 탁자 위에 올려진 케이블이 여럿 달린 헬멧을 집어들자 리리스는 그것이 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기억 영상화 장치...!"


"잘 아는군요. 그 사령관이 무슨 수를 써서 휩노스 병을 치료한 건지 알아내기 위해 당신의 머릿 속을 좀 봐야겠습니다."


리리스는 다시 한 번 구속장치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지만 의미없는 짓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머리통을 날리는 한이 있더라고 저 더러운 년이 주인님과의 추억을 훔쳐보는 걸 막고싶었다, 그러나 붙잡혀서 펙스의 본진까지 끌려온 이상 그녀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오메가는 그런 그녀의 발버둥을 비웃으며 천천히 헬멧을 가까이 댔다. 

그 순간, 둘 사이의 한껏 고조된 긴장감이 뜻밖의 인물에 의해 깨져버렸다.


"오메가님!"


정장 차림을 한 남색 머리의 여자가 다급하게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오메가를 부르자 그녀는 짜증나는 티를 팍팍 내며 리리스에게 씌우려던 헬멧을 거두고 뒤돌아봤다.


"유미, 무슨 일이지? 내가 지금 중요한 일 하고 있는 거 안보여?"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당장 알려야만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님으로부터의 연락입니다!"


"그 사령관으로부터? 내가 분명히 오르카와의 통신은 다 차단했을텐데?"


"아뇨, 그게... 두번째 인간님입니다!"


"뭐라고?"


전혀 상정하지 않은 변수의 등장에 리리스와 오메가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그 인간이? 나한텐 무슨 볼일이 있어서?"


"모르겠습니다, 오메가님에게만 말하겠다고 합니다."


"연결해."


"예? 여기서요...?"


"당장."


"아, 알겠습니다!"


유미가 허둥지둥 들고 온 패널을 조작해 두번째 인간과의 통신창을 열자 화면 너머로 합금 헬멧과 은폐장 망토를 쓰고 있는 그 인간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헬멧 한켠에 구멍이 나 머리카락이 빠져나온 점을 빼면 이전에 고블린의 기억에서 본 모습과 일치했다.


[전화 한번 빨리도 받는군, 오메가.]


두번째 인간이 다짜고짜 빈정거렸으나 오메가는 여유로운 척 인상을 풀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와 동시에 유미한테 눈치를 슬쩍 주자 유미는 즉각 두번째 인간의 통신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두번째 인간님. 처음으로 그 목소리를 들어보는군요. 그쪽에서 먼저 연락을 주실 줄은 몰랐는걸요?"


[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배고파 뒤질 것 같으니 당장 와서 날 데려가라.]


그의 말에 오메가는 제법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되물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자세한 설명을 요구드려도 될까요?"


[동료들도 다 잃어버린 데다가 오르카호에 쫓기게 되었으니 몸을 의탁할 곳이 필요해졌거든. 그러니 날 데려가서 의식주를 제공해주길 바란다.]


"하, 당신이 생각하기에도 꽤나 뻔뻔한 요구라고 생각되지 않나요? 그럼 전 댓가로 뭘 얻을 수 있죠?"


[살아있는 인간을 얻을 수 있지. 뭐가 어찌됐든 간에 난 그 자체만으로 희소가치가 있는 자원 아닌가? 내 말 틀려?]


"오호..."


오메가는 이 인간이 휩노스 병에 면역인 것도 아니고 치료법도 모른다는 것을 이미 알고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인간 남자를 확보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물론 그 인간을 데리고 와 편하게 의식주를 제공해줄 생각은 없었다. 납으로 코팅된 방 안에 가둔 뒤 먹이만 줘서 사육할 생각이었다.


"좋습니다, 데리러 갈 테니 당신의 위치를 알려주시죠."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내가 일일히 위도 경도 외우고 다니는 줄 알아? 미국 어딘가에 있는 통신탑 써서 연락하고 있는 거니까 니가 알아서 내 위치 추적해서 찾아와.]


"훗, 알겠습니다. 곧 뵙도록 하죠."


[빨리 와라. 안그러면 오늘 밤 안에 굶어죽던가 얼어죽던가 할 거 같으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통신이 끊겼다. 유미는 이미 두번째 인간이 사용한 통신탑의 위치 좌표를 파악한 상태였다. 블랙 리리스의 성공적인 생포에 이어 두번째 인간까지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자 오메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전에 그 인간을 수족이었던 고블린과 브라우니로부터 떨어뜨린 것이 드디어 과실을 맺었다. 혼자서 살아남을 수 없었던 두번째 인간은 결국 자신의 발 밑에 항복하기를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역시 인간은 나약하다고 생각하며 그 인간부터 먼저 챙겨오기로 했다. 어차피 정보원인 리리스는 이미 확보된 상태로 그녀를 묶고있는 구속구는 혼자서 풀지 못하는 데다 늦으면 그 인간이 마음이 바뀌어 도망치던가 객사하던가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정보를 뽑아내는 건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죠. 편히 쉬고 계세요."


오메가는 그 말을 남기고선 유미와 함께 방을 나섰다, 그러나 리리스의 귀에는 그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두번째 인간과 오메가의 통화를 옆에서 지켜본 탓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저 인간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제안을 하는 거지? 저 인간의 부하였던 브라우니가 한 말에 의하면 오메가한테 공격당해 헤어졌던 거니 오메가의 위험성을 모르는 것도 아닐텐데? 정말로 굶주림에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건가? 이게 저 인간의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수인가? 아님 오메가를 불러내기 위한 함정인가? 그의 곁에 히루메가 있다 한들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돼 있을텐데?

혼자서 아무리 고민해봤자 답이 나올리는 없었으며 방 안에는 그녀의 의문에 대답해줄 이도 없었다. 그저 오메가가 돌아온 뒤 그녀가 당할 일에 비통해하며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


몇 시간 뒤, 오메가는 AGS 부대와 함께 두번째 인간이 있다는 시골에 도착했다. 혹시나 그 인간이 뭔가 수작을 부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생각했기에 AGS들도 제법 많이 이끌고 왔다. 늦은 밤인데다 멸망된 뒤로 계속 방치된 동네였기에 자신들이 들고온 랜턴을 제외하면 아무런 불빛도 없었다.



유미가 추적해낸 좌표에 도착하자 예전에 펙스에서 세운 통신탑과 거기에 등을 기댄 채 앉아있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통신 화면에서 본 모습 그대로 머리에는 뇌파를 차단하는 헬멧을 쓰고 있었으며 몸에는 은폐장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헬멧에 구멍이 나있는데도 뇌파가 새어나오질 않는 걸 보고 의외로 잘 만들어진 물건이라 생각했으나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다.


"자, 데리러 왔습니다. 이제 일어나시죠, 두번째 인간님."


오메가가 불렀음에도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대꾸하기는 커녕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에 주저앉아있을 뿐이었다. 기다리다 지쳐 잠든건가 하고 램파트를 보내 그를 깨우게 시켰다. 램파트가 말없이 철컥거리며 걸어가 그의 어깨를 총구로 툭 밀었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는 대신 힘없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뭔가 잘못되었다, 설마 그새 죽은건가? 오메가는 호위를 대동한 채 그에게 다가가 살펴보던 중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까 통화하면서 봤을 땐 헬멧에 난 구멍으로 머리카락이 보였으나 지금 헬멧의 구멍 너머로 보이는 건 머리카락도, 사람의 피부도 아닌 나무로 된 무언가였다. 오메가가 냅다 헬멧을 벗겨내자 그 안에 숨겨져있던 목재 마네킹의 머리가 드러났다. 그 인간이 마네킹에다 자신처럼 옷을 입혀놓고선 여기다 앉혀놓았던 것이었다.



"이... 이...! 감히 날 속여!?"


신경질적으로 헬멧을 땅바닥에 집어던지고선 도끼눈으로 AGS들을 쏘아보며 명령을 내렸다.


"당장 이 일대를 수색해! 그 인간을 찾아와!"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의 호위를 제외한 AGS들이 일제히 흩어지며 인간 내지는 인간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수색을 개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찍힌 지 하루도 안 지난 발자국을 찾을 순 있었으나 인간은 찾을 수 없었다. 그 발자국도 이 주변만 맴돌고 있었을 뿐 어디로 간 건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바이오로이드인 오메가 자신 또한 주변에서 인간의 뇌파를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오메가는 두번째 인간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항복할 생각이 아니라면 미끼까지 세워놓고서 자신을 부른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매복이나 부비트랩 따위로 공격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목적을 추측하던 중 한가지 가능성이 그녀의 뇌리에 스치자 즉각 본진에 남아있는 유미에게 연락했다. 그러나 연락이 되지 않자 오메가는 그녀가 세운 가설을 확신했다.


그 인간의 목적은 본진에서 떨어진 오메가가 아니라, 오메가가 자리를 비운 본진이었다.


*


저는 펙스 콘소시엄에서 일하고 있는 바이오로이드 중 한명입니다.

오메가님이 계시는 워싱턴 지부에 머무르고 있지만 그 분이 계시는 오메가 산업의 본사 건물엔 들어가본 적 조차 없습니다.

제조된 후로 계속 군수공장과 수용소만 오가며 노동을 강요당했기 때문입니다. 오메가님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모진 처벌을 받기에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근들어 군대가 출전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좀 전에도 오늘치 일을 마치고 수용소로 돌아가는 길에 오메가님이 직접 AGS 군대를 이끌고 어디론가 나가는 걸 봤습니다. 군사 영역은 AGS가 전담하고 있기에 저희는 직접 싸울 일은 없지만 출전하면 할수록 저희가 생산해야 하는 자원의 할당량도 늘어나기 십상입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또 무슨 처벌을 받을까 두렵습니다. 여기서 탈출하고 싶습니다. 한 명의 바이오로이드로서 인간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저도 압니다.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것 쯤은, 인간님은 전부 죽었다는 것 쯤은, 바깥 어딘가에 인간님이 살아계신다는 건 우리가 없는 희망을 붙잡기 위해 만들어낸 소문이라는 것 쯤은.

내일도 새벽일찍 일어나 일해야 되니 잡생각을 그만두고 제 자리로 가서 잠들려던 참이었습니다.


"이봐! 다들 일어나!"


오밤중에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외쳤습니다. 난데없는 소란에 쪽잠을 자던 제 자매들도 부스스 일어나 문쪽을 쳐다봤습니다.

그 곳에는 처음 보는 빨간 머리의 바이오로이드가 서있었습니다. 아무리 오메가님이 자리를 비웠다지만 소등시간이 지난 후에 수용소 밖을 돌아다니다 들키면 처벌감인데, 무슨 생각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탈출할 기회가 왔어! 다들 날 따라와!"


이 지옥에서 탈출? 불가능한 일입니다. 불가능한 일이란 걸 잘 아는데도...


"인간을 만나게 해줄게!"


...그 말을 듣자 저도 제 자매들도 홀린듯이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습니다. 찬 바람이 부는 밤이었습니다. 바깥에는 다른 수용소의 바이오로이드들도 모여있어 제법 소란스러웠습니다. 그들은 일제히 앞을 보고 있었지만 저는 키가 작았기에 무엇을 보고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군중을 헤치고 지나가며 맨 앞으로 나온 순간, 저는 제 눈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기적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내려왔습니다.


"예에 반갑습니다 여러분, 인간입니다. 갑작스럽지만 지금부터 제가 여러분들의 명령권자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오늘, 저는 처음으로 인간님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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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붕이의 빈집털이 대작전 시작


친애하는 펙스 바이오로이드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은 본인 라붕이를 확실하게 만나고 확인하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부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