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레이시 언니. 언제나 하던 상담이니까 긴장 풀어.


 

너무 오래 생각하지 말고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그대로 말해줘.


 

요즘 기분은 어때?


 

괜찮아요.

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

 

그래? 요즘 잠은 잘 와?


 

가끔 안 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잠들 수는 있어요.

자기 싫어 하지만 자버려 그러면 악몽을 꿔

 

혹시 약 필요해? 수면제까지는 아니더라도 수면유도제는 처방해줄 수 있는데.


 

괜찮아요.

약은 안돼. 싫어. 실험실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싫어.

 

요즘 고통은 어때?


닥터 덕분에 많이 나아졌어요. 고마워요.

아파. 아직도 아파. 머리가 깨질 거 같아.


그래?


 

잠시만 기록 좀 할게.


 

(어디 보자. 바이탈-멘탈 그래프가...)


 

(......불안정해. 언니, 거짓말하고 있네.)


 

(거짓말 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오히려 솔직하게 말해야 언니 고통 치유할 수 있는데.)


 

(......이러긴 싫은데...조금 흔들어봐야 하나.)


 

......


 

요즘도 가족들에 대한 생각을 해?


 

......

가족?

 

저한테 가족은 없어요.

스튜를 맛있게 잘 만들던 상냥한 엄마,

장난기 많지만 나를 잘 따르던 남동생,

무뚝뚝하지만 믿음직했던 아빠,

언제나 병약해서 내가 실험실로 가게 만들었던, 소중한 여동생.

 

어디 까지나 실험을 위해서 주입 된 기억이지.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라. 가족들도 고향도 이웃들도 어린 시절의 기억들도.

그 기억들 덕분에 끔찍했던 실험실에서 버틸 수 있었어.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아요.

그런데 전부 거짓말이었어. 전부. 그러면 난 뭐가 되는 거지?

 

......

죽고 싶어.

 

언니.


 

(어쩌지. 너무 강하게 흔들어서 그래프가 파악이 안 돼.)


 

(이렇게 해놓고 그만두는 것도 문제고. 그냥 두면 또 거짓말 할 텐데.)


 

닥터. 지난 번에 준 이거 뭐하는 데 쓰는거야?


 

아무리 봐도 쓸 데 없는 기계인......


 

아, 레이시.


 

사령관님.


 

(어? 그래프가 순식간에 안정됐네?)


 

......


 

레이시 언니, 잠시만! 오빠 여기로 와봐.


 

응? 어?


 

아, 이 기계 말이구나. 내가 제대로 설명을 안 해줬었나?

-오빠, 레이시 언니랑 이야기 좀 해줄 수 있어?-


 

(필담?)

-어? 못할 건 없지? 그런데 어떤 이야기?-


 

잘 봤어. 세상에서 제일 쓸모 없는 기계야.

-레이시 언니의 고통이 육체적인 것도 있고 심적인 것도 있어서 그걸 줄이려고 하거든. 오늘은 심적인 고통을 줄이기 위한 상담.-


 

이걸 이렇게 누르면, 봐봐.

-레이시 언니 고통의 근원은 블랙 리버 사에서 자행한 실험이야. 그리고 가족.-


 

히히히히. 스위치를 on하면 로봇팔이 나와서 다시 스위치를 off하는 기계지.

-자신을 지탱해준 가족이 가짜라는 사실이 레이시 언니를 언제나 고통스럽게 만들어.-


 

하지만 나는 여기에 골드버그 장치까지 곁들였지. 어때 재밌지?

-레이시 언니랑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해.-


 

-나 상담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데?-


 

후후, 신조차 모독하는 최강의 천재 닥터니까 만들 수 있는 기계지.

-괜찮아. 오빠랑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날 믿고 오빠를 믿어. 그러면 잘 될 거야.-


 

-알겠어.-


 

-부탁해.-


 

......


 

레이시 언니. 잠시만 기다려줄래? 오르카 호 기관부에 문제가 생긴 거 같다고 하네.


 

똑똑하면 이게 문제라니까. 여기저기 불려다니는 거.


 

뭐, 내가 닥터이니까 생기는 일이니 감수해야지.


 

기다리는 동안 오빠랑 대화 좀 하고 있어.


 

다녀올게.


 

                      ......


 

하하, 순식간에 사라지네.


 

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어?


 

잘 지내고 있어요.

보고 싶었어요.

 

요즘도 많이 아파?


 

옛날보다는 덜해요.

사령관님이랑 같이 있으면 덜 아파요.

 

다행이네.


 

......


 

(어떻게 가족을 화제로 돌리지.)


 

......



네오딤이랑도 잘 지내지?


 

네.


 

하하, 네오딤도 레이시를 언니처럼 잘 따르지?


 

......네.

여동생...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계속 해야하나?)


 

(닥터! 나 상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니까!)


 

(날 믿고 오빠를 믿어.)


 

......


 

레이시 가족은 어떤 사람들이었어?


 

저에게 가족은 없어요. 전부 심어진 가짜 기억이니까요.

떠올리기 싫어요.

 

그래도...알고 싶어. 그 기억 위에 레이시가 서 있는 거니까. 가짜라도.


 

......


 

엄마는 스튜를 잘 끓였어요.

스튜의 내용물은 언제나 달랐고 맛도 언제나 달랐지만 언제나 맛있었어요.

제가 어떻게 끓이는지 여쭤보면 애정이 담겨 있으면 된다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요.

 

남동생도 있었어요. 저랑 같은 방을 썼는데.

언제나 방을 어질러서 제가 방을 정리해야했죠.

하지만 저를 잘 따랐고, 무언가 좋은 게 있으면 가장 먼저 저에게 보여줬죠.

하지만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요.

 

아빠는 무뚝뚝한 사람이었어요.

아침 일찍 직장에 나가서 밤에 저녁을 먹을 때가 되어서야 돌아오셨죠.

하지만 쑥스러움이 많아서 무뚝뚝해보였던 것 같아요.

저와 동생들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 애정이 느껴졌어요.

하지만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요.

 

여동생도 한 명 있었어요. 많이 병약해서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던 아이였죠.

하지만 그 아이가 외롭지 않도록 가족들은 그 아이 앞에 모여서 시간을 보냈죠.

그 아이 덕분에 가족 사이가 더 돈독해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요.

 

하지만...

아파아파아파

 

그런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아요.

아파아파아파

 

저에게 그렇게 소중한 사람들인데.

아파아파아파

 

제가 가장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게 해준 사람들인데.

아파아파아파

 

전부 가짜였어요.

아파아파아파

 

레이시.


 

엄마의 따뜻한 스튜 맛이 기억나요.

남동생이 저에게 가져다준 새끼 새의 감촉도 기억나요.

술에 취한 아빠가 저희 남매를 끌어 안았을 때의 술냄새도,

여동생이랑 같이 만들었던 십자수도 전부 기억나요.

아파아파아파

 

그런데 전부 가짜였어요.

아파아파아파

 

저에게 가족은 없어요.

아파아파아파

 

그런데 그 기억 때문에 고통스러워요.

아파아파아파

 

환상통처럼...잃어버린 사지에서 느껴지는 고통처럼, 가짜 기억이 저를 고통스럽게 해요.

아파아파아파

 

죽은 거라면 추모라도 할 수 있는데.

찾아가서 무덤이라도 만들 수 있는데.

저는 잘 지낸다고 닿을 리 없는 편지라도 보낼 수 있는데.

아파아파아파

 

가짜예요.

아파아파아파

 

전부.

아파아파아파

 

이 가짜 기억 위에 존재하는 저는 뭐죠?

아파아파아파

 

허무해요.

아파아파아파

 

그런데도 가족을 떠올릴 때마다 고통스러워요.

아파아파아파

 

단순히 마음이 아픈 게 아니라...

아파아파아파

 

머리가...온 몸이...

아파아파아파

 

레이시...


 

어떻게 해야...이 고통을 끝낼 수 있죠?

아파아파아파

 

기억이 고통스럽게 하는데. 그 고통이 기억을 상기시키는데. 

아파아파아파

 

기억과 고통이 표리일체해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아파아파아파

 

저는 어떻게 해야하죠?

아파아파아파

 

......


 

그래서...네오딤이 레이시를 잘 따르는구나.


 

네?

아파아파아파

 

동생들이 있었으니까 레이시가 네오딤을 잘 보살펴준 거지?


 

하지만......그건 가짜 기억이었어요.

아파아파아파

 

가짜지만 레이시는 기억하고 있잖아.

그래서 동생을 보살피는 것처럼 네오딤을 잘 보살피는 거잖아.


 

......

아파아파아파

 

가짜 기억이라고 무조건 잊으려고 할 필요 없어.


 

그냥 끌어 안고 가면 안 될까?


 

그 기억이 고통스럽게 한다면...


 

새로운 기억을, 쌓아가면 조금은 희석되지 않을까?


 

아니면...가족이라는 키워드에 새로운 경험을 덧씌우면 어떨까?


 

......어떻게요?

아파아파아파

 

새로운 가족을...만들자.


 

......

아파아파아파

 

이미 여동생 같은 네오딤이 있잖아.


 

음...에키드나는...조금 철부지 이모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풋.

아파아파

 

하하. 레이시가 웃으니까 기뻐.


 

마리는 어떨까? 듬직하니 고모?


 

아빠나...남동생은요?

아파아파

 

음...내가 1인 2역을 할...아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구나.


 

꼭...기억 속의 가족을 답습할 필요는 없잖아.


 

......

아파아파

 

가족에 대한 기억이 마치 환상통처럼 고통스럽다고 했지?


 

환상통의 옛치료법 중에는 거울치료라고 있었대.


 

환상통이 느껴지는 부위의 반대쪽 부위에 거울을 두고

남아 있는 부위를 움직여서 없어진 부위가 움직이는 것처럼 착각하게 해서 고통을 완화시켰다고 해.


 

이처럼...새로운, 진짜 가족을 만들자.


 

옛 가족에 대한 기억에 고통스럽다면...새로운 가족에 대한 기억은 행복한 걸로 가득 채우자.


 

......

아파아파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거 같은데?


 

......

아파

 

엄마가 끓였던...스튜를...똑같이 끓여보고 싶어요.

아파

 

......


 

그걸 가족들이 먹고 맛있어하는 것을 보고 싶어요.

아파

 

아이들이...뛰어노는 것을 보고 싶고.

아이들이 잘못을 하면 혼내키고 싶어요.

그리고 자기 전에는 동화책을 읽어주고 싶어요.

아파

 

......


 

사랑하는 남편에게는...사랑한다고 말하고 싶고...사랑을 나누고 싶어요.

아파

 

응.


 

제가...새 가족을 만들 수 있을까요?

아파

 

만들 수 있어.


 

......

아파

 

내가...레이시의 가족이 되어줄게.


 

사령관님.

아파

 

당장 아이들은 힘들지만...


 

내가 레이시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줄게.


 

......


 

......


 

......저를...사랑해...주실 수 있나요?


 

말했잖아.


 

레이시의 가족이 되어주겠다고. 레이시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주겠다고.



 

......


 

당분간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해야겠네.



(후일담)


 

안녕, 레이시 언니. 언제나 하던 상담이니까 긴장 풀어.


 

너무 오래 생각하지 말고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그대로 말해줘.


 

요즘 기분은 어때?


 

좋아요.


 

응. 그래 보여.


 

그래? 요즘 잠은 잘 와?


 

가끔...잠들기 힘들 때는 있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네오딤이랑 같이 잠들거나...하면 괜찮아요.


 

요즘 고통은 어때?


 

많이 나아졌어요.



그래?


 

잠시만 기록 좀 할게.


 

(어디 보자. 바이탈-멘탈 그래프가...)


 

(히히. 오빠랑 같이 있을 때처럼 안정됐네.)


 

......


 

요즘도 가족에 대해 생각해?


 

......


 

네.


 

주로 어떤 생각을 해?


 

......


 

죄송해요. 말 못해요.


 

괜찮아. 표정을 보니까 고통스러운 생각은 아니구나?


 

그러면 오늘 상담은 끝! 이제 물리치료!


 

이 옷 입고, 이 방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그러면 전부 잘 될 거야.


 

저기...이 옷...


 

싫어?


 

......


 

아뇨.


 

...닥터.


 

응?


 

고마워요.


 

과학자로서 당연히 해야하는 일인 걸 뭐.


 

결자해지. 과학이 만들어낸 문제는 과학이 해결해야지.


 

언니가 좀 더 우리를 믿어주면 그걸로 충분해.


 

자! 빨리 치료실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치료사 보낼 테니까.



 

아. 오빠? 지금 문제가 생긴 방이 있는데. 거기 가서 문제 해결 해줄래?


 

급하니까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