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 https://arca.live/b/supernerimk2?category=%EC%86%8C%EC%84%A4&target=title&keyword=%EC%A1%B0%EA%B8%88+%EC%9D%B4%EC%83%81%ED%95%9C


모음 : https://arca.live/b/lastorigin/207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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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게, 연구 시설에서 나온 자료란 말이지?”

 

“네. 아무래도 내용이 내용인지라 자매들에게 공개할 수는 없었어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 생각하긴 하지만...”

 

 

 

철충이 구원이다.

다른 누군가 했다면 개소리라 치부했겠지만, 지금 여기 나온 자료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앵커리지 연구 시설의 자료. 정확히는 철충 잔해를 획득한 다음의 이야기가 담긴 자료.

연구원들은 NW101이라 불리는 철충 잔해를 삼안 기업으로부터 뺏어냈고, 그걸 이용해 뭔가를 연구했다.


그 자료들의 존재만으로도 이 개소리에 신빙성이 부여된다. 개소리를 지꺼리는 게 맞다고 해도 뭔가를 알고 지꺼렸단 뜻이니까.

 

 

 

“라비아타, 혹시 NW101이라는 이름을 알아?”

 

“기억이 나긴 하네요. 삼안 기업이 고비 사막에서 처음으로 구한 철충 유체를 일컫는 암호명이었죠.

팩스와 블랙 리버가 이걸 빼내기 위해 첩보전을 시작했고 그렇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2차 연합 전쟁이 터졌었죠.”

 

“2차 연합전쟁이라.”

 

“그 이후로 NW101이 어디로 갔는지 소식이 전혀 없었는데 설마 알래스카로 빼돌려 졌을 줄이야...

일이 이렇게 되어버릴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후우... 그래, 그건 그냥 그렇다고 하자. 이미 지나가버린 역사니까.

하지만 그 다음 내용들은...”

 

“... 우선은 그걸 이해하는 게 급선무죠.

유물이란 것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유물. 내가 모르는 여러 가지 중 하나.

원래 게임 세계관에서는 누군가가 NW101을 알래스카 앵커리지로 데려간 다음, 철의 왕자라 불리는 놈이 그걸 가지고 연구를 진행했었다고 나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알려졌다고 했다. 그 뒤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게임에서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아마 이 유물도 그렇게 모르는 것들 중 하나였겠지.

 

보고서의 내용들을 읽어보면 철충에서 나오는 파장과 유물에서 나오는 파장이 연결된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알래스카 연구원들이 땅을 120 m나 파서 유물을 꺼낸 것도 NW101에게서 나오는 파장이 뭔가를 감지해서 그런 거라 나와 있고, 유물의 부작용을 NW101의 파장으로 약화시킨 것도 그렇고.

 

철충에게서, 그것도 고작 죽은 유체에서 이런 파장이 나온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대체 어떤 물건이 그것에 반응하는 걸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니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가보자. 이 보고서에 적힌 내용부터 알아보면 되겠지.


 

 

“... 파장의 형태가 조금... 난해한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야.

라비아타 눈에는 어때?”

 

“저 역시 이런 연구 자료는 본 적이 없어요.

멸망 이후 제법 여러 연구 시설을 돌아다녔다 자부하고 있었는데...”

 

 

 

라비아타가 들고 온 자료는 단순한 대화 기록뿐만이 아니었다.

녹음된 자료에서 나오는 유물, NW101의 파장과 그 형태에 대한 사진 자료까지 담긴 온전한 보고서였다.

 

특히나 유물에서 나오는 파형과 NW101의 파형은 수십 차례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었지만 도통 연관성을 찾기가 힘들다.

그나마 문외한인 내 눈으로 바라 보았을 때 둘 다 생긴 꼴이 조금 비슷하다는 것 정도? 너무 복잡해서 그 이상의 판단을 내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놀랄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후우... 그래, 그렇다는 거지.

근데 여기 있는 이 노란색 광물은 대체... ...”

 

“... 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문제? 문제가 있냐고?

그래, 내가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겠지.

 

 

 

“아, 기록: 7932L478TDDF$ANCHO-1.253 에서 언급됐던 그 광물 말씀이시군요.

아마도 이 사진이 카터라고 불리던 연구원이 만든 드라이브로 생성한 광물인 것 같네요. 하지만 저도 이런 구조의 물질은 처음 봐요.

이런 분자식이나 형태도 처음 보고요.”

 

“닥터라면... 후우, 아니다. 일단은 한 번 살펴보자.”

 

 

 

노란색, 아니, 금색으로 반짝이는 광물. 언뜻 보면 금광석을 보는 듯한 착각까지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보고서의 내용을 조금만 읽어봐도 금은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아무리 금이 이곳 저곳에 쓰이는 만능 광물이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니까.

 

 

 

‘모든 종류의 금속과 반응하며, 그 성질을 개량하는 데에 적합한 모습을 보인다... 라.’

 

 

 

알터리움. 변화의 성소 이전에는 미확인 금속 광물이라 불리던 금속이다.

이 광물로 만든 장비들이 게임 속에서 얼마나 유용하게 쓰였는지를 나열하자면 정말 끝도 없이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광물을 만났으니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겠나. 이렇게 기묘한 만남이 아니었다면 말이지. 


 

 

“이걸... 이 연구원들이 직접 만들었다고?”

 

“네, 설계된 드라이브의 내용을 보면 철광석이나 구리 같은 일반적인 금속의 배열을 조정하여 이렇게 새로운 형태로 만들 수 있다 나와 있어요.

아예 원자 단위의 조정을 가한다고 나와 있던데, 대체 그 정도로 정밀한 기술을 가지고 어떻게 kg 단위로 생산을 할 수 있었던 건지는 저도 잘...”

 

“... NW101의 파장을 오랜 시간 쬐면 지성적으로 각성 효과를 느낄 수 있다고 하잖아.

아마 그런 것도 원인이 되었겠지.”

 

 


다행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보고서에는 알터리움을 만드는 드라이브에 대한 설계도도 함께 나와 있었다.

그 덕에 우리도 상당양의 알터리움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다. 설계도가 있으니 그냥 그걸 보고 만들면 되니까.


하지만 당장 양산할 생각은 없다. 

게임 속에 나온 광물이라곤 해도 이게 정확히 무슨 효과를 어떻게 내는 지는 미지수.

천천히 실험해서 나쁠 것 없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아니,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나저나 단순히 쬐기만 해도 사람 머리가 똑똑해진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파장이 세상에 존재하는 게 말이 되나?

하지만 그게 존재함을 지금 내 눈 앞에서 보았으니, 마음 같아선 내 머리를 쥐어 뜯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간 남아나는 머리가 없을 테니 참는 수 밖에.

 

 

 

“아무튼, 유물 얘기로 좀 돌아와보자.

이게 대체 뭐지? 혹시 삼안 기업이나 다른 곳에서 비밀리에 만든 물건 같은 걸까?”

 

“아뇨, 그럴 리는 없을 거에요.

애초에 이런 걸 만들 만큼 여유가 있던 시기도 없었어요. 

1차 연합 전쟁 이후에는 세력을 확장하는데 집중했고, 그 이후엔 2차 연합 전쟁, 철충과의 싸움에 온 힘을 쏟아야 했으니까요."


"... 쩝, 그럴 것 같긴 한데 그럼 이런 게 왜 지구에 있는 거겠어?

삼안, 펙스, 블랙 리버보다 기술력이 뛰어났던 기업이 지구 상에 있을 리가 없잖아. 군용 기술까지 개발하던 놈들인데."


"그렇죠. 하지만 이건 바이오로이드로 번창한 문명이 만들 만한 물건이 아니에요.

뭐랄까... 기술의 방향성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애시당초 기술이라 부를 수 있는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단순 파장만으로 AI를 오염시키는 경우는 난생 처음 봤어요."




라비아타는 내게 보고서를 내밀었다.

기록: 76892N223$ANCHO-3.008 라고 적힌 문서. AI-IB라 불리던 인공지능 코어가 자체적으로 내린 판단을 순차적으로 보여준 기록이다.


처음에는 뭔가에 대해 분석을 진행하던 것 같다. 유물 얘기를 하는 걸 보면 유물에 대한 판단을 내리던 것 같은데.

정신적 불안 증상에 대한 라이브러리 검색이니 뭐니 하는 걸 보니 대원들이 보이는 정서 불안 증상을 완화시키려고 대응책을 찾고 있던 것 같고.


그런데 오류가 발생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오류가.

어떤 프로토콜을 개시하려고 했는데 이상한 신호... 같은 것이 방해를 했고, 되려 심판 프로토콜이란 걸 그 자리에 집어 넣었다.

알파 DOC이라는 최고위급 직위의 서명도 필요하다 했는데 서명 절차도 뭔가에 의해 진행이 된 것 같고.


게다가 그 서명자라는 게, 뭔가 이상하다.




'CHILDREN OF STARS...

... 별의 아이."




AI를 오염시킨 건 별의 아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리고 왜? 인류에는 관심을 안 보이던 거 아니었나?

단순히 바다에 사는 괴생명체 아니었어? 머리 속이 점점 혼란스러워진다.


내 표정을 보고 걱정스러웠는지, 라비아타가 내 눈 앞에서 손을 이리 저리 휘저었다.




"저... 주인님? 괜찮으신가요?"


"으, 응. 난 괜찮아. 괜찮은데...

... 조금 어지럽네. 우리가 손댈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희가 여기서 발을 빼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 거에요.

아니, 어쩌면 최선의 선택일 지도 모르죠. 지금 오르카 호는 나날히 성장해가고 있으니까요."


"성장이라..."




라비아타는 두 팔을 쭉 벌려 내 시선을 주변으로 환기시켰다.

방 안에 이리 저리 쌓여 있는 자원함들. 제법 정돈이 잘 되어있는 것을 보니 안드바리가 여기까지 갔다 온 모양이었다.




"알고 계신가요? 원래 이 방은 전원이 들어오지 못해서 창고로도 쓰이지 못했던 방이랍니다.

습하고, 빛도 없으니 곰팡이가 슬기 딱 좋은 곳이었죠.

하지만 이제 이런 곳도 저희가 쓸 수 있게 됐어요! 모두 주인님 덕분에!"


"... ..."


"주인님이 아니었다면 제가 알래스카까지 갈 수도 없었을 거에요.

아니, 여전히 이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자매들을 구할 방법을 찾고 있었겠죠."




라비아타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듯했다.

살과 피가 난무하는, 그 끔찍한 과거를 자꾸만 습관처럼 회상한다.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저희는 주인님께서 주신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거랍니다.

오르카 호는 날이 갈수록 무럭무럭 커가고 있고, 한반도 근처 섬은 거의 다 점령했어요.

저희 세력에 들어온 바이오로이드도 수천은 넘을 거고, 아마 얼마 안 가 다섯 자리를 돌파하겠죠."


"그러면 좋긴 하겠는데..."


"제가 봤던 그 어느 때보다도 오르카 호에는 좋은 분위기가 흐르고 있어요. 

그러니 이런 보고서, 주인님께서 무시하고 싶으시다면 무시하면 그만이에요."




나라고 왜 안 그러고 싶겠나. 발키리를 못 찾은 게 내심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나도 마음 같아선 이 애들하고 탱자탱자 놀고 싶다.

먹을 밥도 매번 소완이 풍족하게 차려주고, 지치지도 않는 몸으로 심심할 때마다 복도에서 만나는 애 하나 붙잡고 섹스할 수도 있다.

오히려 그러는 걸 좋아하는 애도 있고, 한 주에 한 번씩은 스틸라인 부대로 납치 당해서 수십 명과 살을 부대끼며 놀 수도 있다.


말 그대로 지상 낙원. 모든 게 오케이다 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 걱정할 건 없는 상황이다.

어쩌면 인류 부흥을 위해 더 좆을 놀려야 하는 때일 지도 모를 시기. 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들이 눈 앞에 산적해 있다.




'레모네이드, 철충, 별의 아이...

이 애들이 떡 하니 버티고 있는데 눈 가리고 아옹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진짜... 하아.'




리제 일만으로도 지쳤다. 애들 대회 상품으로 데이트 권이 뿌려져서 거기에 응해주느라 시간도 쏟았다.

다프네 5명과 6p를 하기도 했고, 호드 애들이 카페테리아로 날 데려가서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게 하기도 했다. 그 다음에 섹스한 건 당연한 일이고.

쉬고 싶은 게 당연하다. 이런 거 싹다 무시하고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엔딩으로 끝내고 싶단 말이다.




"... 라비아타."


"네, 주인님."


"그래도 우리 아직 안 끝났어.

내일 당장 철충이 처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우린 바로 끝장이다.

알지? 지금까지 우리가 상대한 건 철충들 중에서도 가장 찌꺼기들에 불과하다는 거."


"... 알죠."


"그러니까... 하아... 나도 당장은 못 쉬겠다.

네가 들고 온 보고서만 봐도 이 행성에 뭔가 일이 터지고 있다는 게 눈에 선한데 쉴 수는 없는 노릇이지."


'... 알겠습니다. 제가 실언을 해버렸네요."


"실언은 무슨, 유물 얘기나 다시 해보자.

기업에서 만든 것도 아니고, AI를 오염시키는 걸 보니 고대 인류가 만든 것 같지도 않고, 그럼 뭐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졌나?

그거 언제 만들어졌는 지에 대한 정보는 안 적혀 있어?"


"잠시만요. 제가 한 번 보고서를 읽어볼 게요."




라비아타의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보이지도 않는 속도에 눈동자의 궤적은 검은 선을 이루었다.

과연 저렇게 읽으면 뇌에 뭐가 들어올까 싶기도 하지만 그러는 게 라비아타는 되려 믿음직스럽기만 하다.

나도 얘랑 너무 오래 있다 보니 얘가 어떤 바이오로이드였는지 자꾸 까먹게 되네.


그렇게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라비아타가 안경을 고쳐 쓰며 나를 슬쩍 흘겨 보았다.

하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어째 조금 이상하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문제가... ...

... 글쎄요. 문제라면 문젠데 조금 아리송하네요."


"아리송?"


"이 보고서에서 말하기로는 최소 세 팀 이상이 유물의 나이 측정을 진행했다고 해요. 독립적으로 말이죠.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의 측정 결과에 대해 모른다는 거에요.

어쩌면 그래서 그런 걸 지도 모르겠는데... 내용이 너무 이상하네요."


"왜, 뭐가 어때서 그런데?"




라비아타는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팀은...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을 썼어요.

그거에 따르면 적어도 1000만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네요.”

 

“... 몇 만?”

 

“1000만 년이요.”

 

“... 무리수 던지는 거 아니지?”

 

“보고서에 그리 적혀 있었으니까요.”

 

 

 

라비아타는 말 대신 보고서 종이를 넘기며 나를 쳐다보았다. 

라비아타가 내게 펼쳐 보인 곳에서는 정말 1000만이란 숫자가 적혀 있었다.

 

1000만년. 인류는커녕 제대로 된 지성체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만큼 오래된 시기.

점점 차원이 달라지는 사건의 스케일에 나는 아득해져만 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아야만 했다.

 

 

 

“... 아무래도 연구팀에서 뭔가 착오가 있던 모양이죠.

탄소 연대측정법은 깊게 따지고 들어가면 여러 모로 논란 거리가 있는 측정법이니까요."


"그럼... 다른 팀은?"


"그게 더 이상해요.

다른 팀은 좀 더 발전된 방법을 썼다고 하는데,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라 측정된다 하네요."


"... 최근? 뭐, 얼마나 최근?"


"글쎄요, 대충 몇 년에서... 짧으면 몇 개원 내?

애초에 천만년이나 되었다고 하기엔 겉 표면이 너무나도 매끈해요. 

아니, 매끈하다 못해 상처 하나 나지 않는다 하더군요.”


"... ..."


"다른 팀에선 아예 몇 억년 전 유물이라 판단했다 해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제가 말하고도 이해가 잘 안 되네요."

 

“... ... 하, 참..."

 



머리가 어질어질하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걸까? 1000만 년만 해도 머리 아픈데 최근에 만들어졌다고 하질 않나, 몇 억? 억 단위까지 간다고?

몇 억이 어디 장난도 아니고 지구 나이가 45억년이다. 45억. 연구를 제대로 할 생각은 있었던 걸까?


... 그래, 설마 장난 한 번 해보겠다고 이렇게 기다란 보고서를 만들었을 리는 없다.

자기들은 자기들 딴에 열심히 했다고 했겠지. 게다가 이 때만 해도 철충이 인류를 거의 박살내기 직전이었는데 장난질로 시간을 보냈을 것 같지도 않다.


아무튼... 생각을 정리해보자.

오래 전에 만들어졌다고 하기엔 유물의 상태가 너무 깨끗하다.

하지만 최근에 만들어졌다고 하기엔 정부도, 기업도 이런 걸 만들었을 리가 없다.




“하아... 일단 결론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거네. 그럼 나중에 생각하자. 라비아타."

중요한 건 그 다음에 있는 거 같으니까.”


"네, 주인님."

 

 

 

맞는 말이다. 지금 이런 자잘한 것들에 집중하기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시험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예로 들자면, 여기 나와 있는 이 단어가 있겠지.

 

 

 

“FAN 파. 혹시 들어봤어?”

 

“...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그렇게나 많은 연구 시설을 돌아다녔다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어?”

 

“그 인간을 찾기 전에는 인간을 찾기 위해 돌아다녔고, 그 인간을 찾은 후부터는 의식을 바꿀 기술을 찾기 위해 돌아다녔으니까요. 

주인님께서 오시기 전엔 이런 걸 기억할 여유가 없었어요."


"... 맞다. 그랬겠네."


"휩노스 병을 이용해볼 생각이 있긴 했었고, 그래서 어떠한 파장이 휩노스 병의 원인이 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게 FAN 파라는 파장이었는지는 처음 알았어요.

애초에 그런 얘기를 쉽게 믿을 수도 없었죠. 여기에 FAN 파의 파형이 찍힌 사진 자료가 있지 않았다면 지금도 쉽게 믿을 수는 없었을 거에요.”

 

“후우... 그래. 나라도 휩노스 같은 게 파장 때문에 겪는 증후군이라고 했으면 믿기 힘들었을 거야.

... 애초에 FAN이란 이름도 누가 붙인 건지 모르지만.”

 

 

 

보고서에 따르면 연구원들은 자신들이 FAN 파가 휩노스의 원인이라는 것을 밝혀냈다고 했다. 그것도 유물을 이용해서.

1000만 년 전의 유물, 그것을 통해 알아낸 휩노스 병의 진실. 

 

 

 

‘... ...’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꾸만 손가락으로 책상을 쳤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휩노스 병이 별의 아이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주식으로 삼는 건지, 아니면 그냥 장난 삼아 그러고 다니는 건지는 몰라도 FAN 파는 별의 아이가 만들어내는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FAN 파의 정체에 대해 힌트를 준 유물. 정확한 연대 측정마저 불가능한 기이한 물체.

그렇다고 한다면 생각해볼 만한 것은 단 하나뿐이다.

 

 

 

‘이 유물은 별의 아이와 연관이 있다.’

 

 

 

생긴 것도 그렇고, 색채도 정확히 게임 속에서 그려졌던 별의 아이의 피부색과 동일하다.

옅은 파란색에 살구색이 섞여 있는 기묘한 유물. 텍스쳐는 마치 광물처럼 반짝이지만 그 색은 사람의 피부와도 같다.

 

하지만 별의 아이가 이 지구에 원래부터 살았다는 설정이 있던 것도 아니고, 대체 뭔 일이 있었기에 1000만 년 전의 유물이 지구에 남아 있던 거지?

아니, 몇 억년이라고까지 하지 않았나. 그 때도 별의 아이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냥 게임 속에서 별의 아이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던 건가? 내가 기억을 못하는 건가? 머리가 자꾸만 지끈거린다.

 

 

 

‘... 그래, 일단 진정하자.

이 자료가 들어온 이상 닥터에게 전달을 해주면 뭐라도 알아낼 것들이 있을 거야.

중요한 건...

...

... 씨발, 뭐가 이렇게 중요한 게 많아.’

 

 

 

우선 내 개인적인 의문들은 집어 넣어야 한다. 그런 것들에 정신을 쏟기엔 라비아타의 눈이 마지막 문장에 지나칠 정도로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철충만이, 그리고 오직 철충만이 너희의 구원이 되리라.

...

... 이게 정말 사실일까요? 주인님?”

 

 

 

라비아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궁금하다기 보다는, 뭔가 가소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철의 왕자라는 존재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면, 그리고 정말 그 녀석이 남은 생존자를 위해 조언을 한 것이라 생각한다면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물론 보고서에 나온 대로 이 미치광이는 자신의 협력자를 철충으로 모조리 죽여버렸다.

설마 그런 새끼를 보고 라비아타가 현혹되었을 리는 없으니 저건 그냥 내 의견을 물어보는 것일 것이다.

 

 

 

“그럴 리가 없잖아. 애초에 자기 동료 연구원들을 모조리 죽인 미치광이의 말이야.

심지어 자기 입으로 자기가 구원자라고 칭하는데, 내 경험 상 지 입으로 지가 재림 예수라 하는 새끼들 중에 정상인 놈 하나도 없어. 그건 과학이야.”

 

“주인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니 다행이네요.

하지만 여기 나와 있는 정보는 너무 위험해요. 하물며 철충과 전쟁을 하고 있는 저희 자매들이 보기엔 안 될 정보들이죠.

우리가 죽이고 다닌 자들을 보고 구원의 열쇠라고 하다니. 만약 이런 얘기가 자매들 사이에 돌면 사기가 꺾여도 이만저만 꺾이는 게 아닐 거에요.”

 

“그렇게 되기엔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 같지 않아?”

 

“아무리 그대로 만사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나쁜 일은 아니겠죠. 

제가 닥터에게 정신 오염의 가능성이 있다고 주의를 준 것도 다 그것 때문이고요.

그리고 가능성은 없지만 만약 실제로 이 얘기를 믿게 된다면 그것도 내분을 일으킬 요소가 되겠죠. 칸 대장 같이 백 년 간 철충에게 동료들을 잃은 분들이 이런 보고서를 보게 된다면...”

 

“... 그래, 네 말이 맞다.”

 

 

 

이러나 저러나 해도 지금 우리는 철충과 싸우고 있는 입장.

허무맹랑하든 말든 이러한 얘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게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애초에 들려줘서 좋을 게 하나 없는 내용이다.

칸의 귀에 이걸 보여주는 거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게 구원이다 라고 지꺼리는 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굳이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똥을 퍼먹이고 싶진 않다.


너무 과보호라 할 수도 있겠지만,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방심하고 있다가 만에 하나 일이 터지기라도 하면 손 쓸 새도 없이 당해버릴 것이다.

생각의 확산을 막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무언가를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만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없으니까.

 

 

 

“후우... 그래, 일단 이런 귀중한 정보를 얻어 오느라 수고했어.

당분간은 쉬어. 나는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고민을 좀 해봐야 할 것 같거든.”

 

“네, 감사해요. 주인님께서도 너무 몸 상하지 않게 해주세요.”

 

“... 그래, 노력은 해볼게.”

 

 

 

라비아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인사를 한 다음 방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 밖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나를 보며 싱그럽게 웃었다.

 

 

 

“후후, 이러고 있으니 정말 주인님께서도 많이 성장하신 게 느껴지네요.”

 

“나? 뜬금 없이 나는 왜?”

 

“지금까지는 계속 저희가 하자고 요청한 대로 해주셨잖아요.

전술도 저희가 짰고, 전략도 저희의 회의에서 나온 걸 주인님께선 도장만 찍어주셨죠."


"... 지금 나 놀리는 거야?"


"후후, 그럴 리가요. 그럴 때마다 저희를 걱정해주시는 주인님의 눈빛이 얼마나 안쓰럽고 사랑스러웠는지 주인님께선 모르실 거에요.

다만 조금 걱정되긴 했죠. 주인님께서 너무 저희에게 의존하시는 거 아닌가 해서."


"평소에는 제발 그래달라고 애원 애원을 했으면서..."


"저희야 저희의 품 안에 안겨 계신 주인님의 얼굴을 보는 게 소원이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주인님께서 제대로 사령관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시니 저는 정말 더할 나위 없이 기쁘네요.

뭐랄까... 정말 우월한 수컷 앞에 무릎 꿇은 암컷이 된 기분이랄까요...?"

 

“... 무슨 비유가 그렇게 야릇하니."


"주인님께선 야한 걸 좋아하시잖아요. 그것도 엄청."


"틀린 말은 아니다만... 크흠.

애초에 난 딱히 그런 사령관이 됐다 어쩐다 하는 인식이 없었는데 말이야.”

 

“주인님만 그러시겠죠. 여기 있는 모두가 주인님의 그런 모습을 손 꼽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모두를 이끄는, 믿음직한 사령관으로서의 주인님을 말이에요.”


"... 라비아타가 그렇게 말한 거면 틀린 말은 아니겠지.

그럼 난 믿음직한 사령관이 되기 위해 보고서 좀 더 읽어봐야 할 거 같으니 먼저 올라가 있어.

여기까지 오는데 제대로 쉬지도 못했을 게 뻔한데."


"후후, 감사합니다. 믿음직한 주인님♥"

 

 


다시 한 번 인사를 한 채, 라비아타는 복도로 걸어갔다. 또각 또각 움직이는 발자국 소리가 방 문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사령관으로서의 모습이라... 주인공처럼 뭐 능력이 있던 것도 아니고 애들 심리 치료해주느라 바빴던 내가 그런 모습을 보일 거란 생각은 추호에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 참, 사람 사는 인생 모르는 거라고, 나도 꼴에 아는 게 있다고 뭐라도 해보겠다 이렇게 발버둥치고 있다.

 

 

 

‘그럼 발버둥 치는 김에 아주 제대로 쳐봐야지.

뼈 속까지 쪽쪽 빨아먹을 기세로 말이야.’

 

 

 

정보를 얻었다. 그것도 아주 유용한 정보 말이다.

몇 개는 좀 걸러 듣긴 해야 하지만 휩노스 병의 원인에 대한 정보, 별의 아이에 관한 내용, 더 나아가 이 세계에 대한 내용까지 다 빨아 먹었다. 


분명 이 정도라면 어지간한 기업들도 모를 만한 내용들이다. 괌의 블랙 리버 연구 시설에서도 이 정도로 연마된 정보를 찾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니 이제는 이걸 최대한 활용할 때다.

철의 왕자. 그걸 찾아낸 철의 교황. 그리고 이 사실을 내게 알리며 알래스카로 오라 부추기는 수상한 존재까지.

내가 아는 게임 속의 내용들과 이 요구 사항들을 총합하여 최대한 이득을 볼 수 있는 만큼 보아야 한다.

 

 

 

‘철충 잔해에서 나온 녹음기의 여자도 그렇고, 오메가도 알래스카에 관심이 있다고 하고,

...

... 잭팟을 터트릴 기회일 지도 모르겠군.’

 

 

 

그 동안 그렇게 운이 없다 운이 없다 투정을 부렸는데, 이제 운이라고 불릴 만한 것들이 좀 쌓인 걸까?


안 그래도 마침 내 손에 쥐어질 카드가 하나 둘씩 쌓이고 있다. 치명타를 날리기 위한 떡밥들 말이다.

 

 

 

“아, 아, 로버트, 내 말 들리나?

내가 전에 요구했던 기술 개발은 어디까지 진행됐지?”

 

“... 사령관이로군. 개발은 이미 완료된 지 오래다.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좋아. 그럼 너 나랑 일 하나만 하자."


"일? 무슨 일을 말하는 거지?"


 

 

그래, 기회야, 기회.

내가 진짜배기 사령관으로 변할 기회 말이야.




"오메가한테 음성 파일 하나만 보내자.

짧고, 굵은 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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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 데리고 오면 할 만한 일들 추천 받습니다


그리고 감질난다는 의견을 반영하여 다음화는 오늘 내로 올라갑니다.

... 아마도?




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