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올 것이 왔군.'


나와 리디아는 페로의 안내를 받아 면담실에 도착했다. 페로가 노크하며 내가 왔다는 걸 알리자 문 너머에서 들어오라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락을 맡은 페로가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서자 정면의 소파에 앉아있는 사령관과 그의 양 옆에 불굴의 마리, 블랙 리리스가 서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방 안에 들어간 나는 사령관 반대쪽의 소파에 앉았고, 리디아는 앉는 대신 내 옆에 서서 마리를 마주보았다. 내가 착석한 걸 확인하자 사령관은 리리스에게 밖에서 기다려달라고 했고, 그녀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 밖으로 나간 뒤 문을 닫았다. 유사시엔 언제든 문을 부수고 들어와 사령관을 보호할 자신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이는 리리스가 두번째 인간을 전과 같은 위험분자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4명밖에 안남은 조용한 면담실, 무슨 말로 시작을 끊어야하나 생각하던 차에 사령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


"...? 갑자기?"


"널 추방해서 위험에 빠뜨린 건 전적으로 내 책임이야. 너는 멸망 전 인류와는 다른 사람인데도 내가 의심을 버리지 못해서..."


"치료도 해줬으니 정신 차렸으면 나가라고 할 줄 알았는데."


"아냐, 그런 게 아냐, 정말로. 너만 괜찮다면 이 오르카호에 얼마든지 머물러도 돼."


"...내가 여기 탈 자격이 되나?"


"당신은 그 가치를 증명해내셨습니다."


사령관 옆에 서있던 마리가 앞으로 한 발자국 나오며 말했다.


"저 또한 사죄해야만 합니다, 두번째 인간님. 그 날 지휘관 회의에서 당신의 퇴출을 가장 강하게 주장했던 건 접니다. 변명같이 들리시겠지만 멸망 전부터 인류가 바이오로이드를 어떻게 대하는 지를 봐왔기 때문에 두번째 인간님도 있는 그대로를 믿지 못하고 색안경을 낀 채로만 봤었습니다.


허나 당신은 당신의 명령권 밑에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를 뒀음에도, 그것도 저희의 감시와 견제가 없는데다 상시 위험에 노출된 상태였음에도, 당신은 그들을 부당하게 건드리기는 커녕 동등한 입장으로서 존중하고 대우해줬습니다. 당신과 같이 다녔던 이들이 입을 모아 증언해줬습니다."


"그랬어?"


"응."


리디아를 슬쩍 보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펙스의 본거지에 직접 들어가서 고통받는 난민들을 구해낸 업적은 결코 무시할 게 못됩니다. 당신은 행동으로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줬습니다."


마리는 모자를 벗어 한 손에 들고선 허리를 숙였다.


"인류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를 잊어버리고, 제 오판으로 무고한 시민을 위험 속에 던져넣어버렸습니다. 염치없지만 지금이라도 제 사죄를 받아주십시오, 두번째 인간님."


"...됐다. 구해줬으니 쌤쌤이지. 구인류 놈들이 저지른 짓을 생각해보면 너네집 식구들 지키려고 경계하는 게 당연하지, 이해는 한다. 그래서 나도 여기 있는동안 눈밖에 나지 않으려고 숙이고 다녔었는데."


"저흰 그것이 기만작전인 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다 지나간 일이니 신경쓰지 마셔."


"...날 원망하지는 않아?"


"당연히 처음엔 원망했지. 늦게 발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위험분자 취급을 받아야 하나 하고 말이다.

하지만 좌우좌가 말했던 대로, 밖에 나간 후 나는 트레저를 만났고, 리디아를 만났고, 히루메를 만났고, 애니를 만났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친구들을 얻고 결과적으로 전부 다 살아남았으니 더이상 원망할 이유가 없다.

또, 만약 그 날 사령관 니가 날 적극적으로 변호해서 여기 남게됐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나?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까? 아니지. 위험분자 주제에 사령관의 자비 덕에 목숨 부지하는 걸로 취급되어서 몇 달은 더 눈칫밥 먹으며 지냈어야 했을걸."


"아하하... 그나저나 네가 막 승선한 뒤 면담했을 때랑은 많이 달라졌네. 이젠 격식 차리지 않기로 했어?"


"너도 밖에 나가서 살아봐 이새끼야, 이 미친 동네가 사람 성격 다 버려놨어."


"...그, 진짜 미안."


"됐어, 사과 받으려고 꺼낸 말 아니니까.

아무튼 남아있어도 된다면 기꺼이 눌러앉어야지. 나도 하루 3끼 좀 먹어보자."


"물론, 더이상 너를 구인류같은 악인으로 볼 일은 없을거야, 내가 장담할게.

그리고 하나 더, 이번에야말로 부사령관직에 앉지 않을래?"


"...? 왜 얘기가 그렇게 되냐? 아 싫어요 안해요. 내가 전에도 거절했었잖아, 나한텐 무거운 직책이라고."


"두번째 인간님, 외람되오나 그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당신이 위험인물이 아니란 게 판명됐을 뿐만 아니라 당신을 명령권자로 설정하고 따르는 이들이 100명을 넘습니다. 또한 오르카호 내에서도 당신의 영웅적 행위에 다시 보는 이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에게 아무런 직위도 주지 않는다면 여론이 가만히 있질 않을겁니다."


"나 언제 그렇게 컸지... 근데 내가 데려온 난민들이래봤자 너네 식구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수 아냐?"


"그건 그렇습니다. 당신이 이끈 100여명의 난민들이 합류하기 전 오르카호 내부 인원 수만 약 500명이었습니다. 외부 주둔지에 있는 인원까지 합치면 더 많고요. 수적으로 따지면 당신을 따르는 이들은 소수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뜻을 묵살하는 건 각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식으로 부사령관 자리를 권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리디아, 니 생각은 어때?"


"저쪽에서 기껏 한 자리 주겠다는데 뭘 고민하고 있냐, 받아들여. 이제 형님도 셋방살이 끝낼 때도 됐잖아."


"그래 뭐 그럼... 밥값은 해야겠지. 네 제안대로 할게."


내가 말을 끝내자 사령관이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나 역시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를 나눴다.


"다시 한번 오르카호에 승선할 걸 환영할게, 부사령관."


"앞으로 잘 부탁한다. 사령관."



*



그렇게 해서 나는 정식으로 오르카호의 부사령관이 됐다. 처음엔 억울하게 좆간으로 의심받은 통에 밖에서 생고생했지만 이젠 이 곳에 정착하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다. 옛날에 라오챈에서 본 문학중에 두번째 인간이 사령관과 적대하지 않고 친구먹는 내용은 대체로 두번째 인간이 부사령관 하던데 나도 그렇게 됐네.

방도 하나 배정받았다, 필요할 땐 서너명 불러서 모임 가져도 될 정도로 은근 넓은 방이다.


우선 트레저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리디아와 같이 AGS 격납고를 방문했다.


"...그렇게 해서 앞으로 우린 여기서 살게 됐어."


"그렇슴까? 형님 안전만 보장된다면 상관없긴 한데, 설마 그 사령관 밑에 들어가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저희가 처음 만났던 그 날 형님이 쫓겨났단 얘길 들었을땐 사령관이란 양반 만나자마자 죽빵 한 대 갈기고 싶었는데."


"야야 그럼 안돼, 또 쫓겨나."


"이젠 그럴 생각 없슴다, 저도 형님과 같이 모험하면서 성장했지 말임다! 앞으론 머리보다 주먹이 먼저 날아가는 일은 없을검다."


"이야, 막내동생이 잘 컸으니 자랑스럽겠어 형님?"


"? 야 리디아 임마, 막내는 너지. 난 둘째고."


"제조된 지 1년도 안된 게 뭔 둘째 타령이냐? 형님은 무조건 첫번째지만, 그 다음부턴 나이순으로 따져서 내가 형님 다음이야."


"지랄하고 있네. 내가 형님이랑 먼저 만났으니까 내가 둘째야! 게다가 난 브라우니 원조격인 T1이고 넌 그 다음에 만들어진 T2잖아, 그러니 내가 먼저지."


"터미네이터 1은 평범한 명작이지만 터미네이터 2는 개씹명작이지. 따라서 T2인 내가 너보다 더 잘났다 이 말이야."


"우리 개체명에 붙은 T는 Trooper 잖아, 어디서 개수작을 부려. 그렇지, 형님이 한국인이니 가나다 순으로 정하면 되겠네!"


"니 이름 고블린이 아니라 트레저잖아..."


"아 맞다, 방금 건 취소."


"머리카락 길이 순서로 정한는 건 어때?"


"왜 아주그냥 눈가에 흉터 길이 순서로 정하자고 하지."


"까짓거 가슴둘레로 서열 가리자 그럼!"


"갑빠라면 나도 자신있어!"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전사와 거대 로봇이 애처럼 다투는 모습은... 참 어색하면서도 이상하게 친근했다.


"그만해 인석들아. 이제 애니랑 히루메한테도 가봐야해."


"좋아 그럼, 니가 둘째해! 난 더 좋은 자리 가져갈테니까."


"더 좋은 자리?"


트레저가 이해를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리디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와락 끌어앉았다.


"헤헤, 넌 평생 못얻을 자리지."



*



트레저와 얘기를 마친 뒤 AGS 격납고에서 나오고, 히루메와 애니에게도 알려주기 위해 내 방으로 초대했다.


"더이상 위험에 쫓길 일이 없다는 말이느냐... 참으로 다행이구나."


"그럼 앞으로 모험할 일은 없는 건가? 살짝 아쉽긴 하네."


"그나저나 그대여, 이 자리를 빌려 그대에게 확실히 말해둬야 할 것이 있느니라."


"응? 어떤 건데?"


"첩은 그대와 함께 이곳에서 탈출한 이래로 은혜를 갚기 위해 그대를 따랐느니라. 그리고 지금에 와선 첩은 충분히 은혜를 갚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네 도움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그런데 그 얘기를 왜 하는거지, 설마 이제 각자 갈 길 가자는...


"그러니 앞으로 첩이 그대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은혜를 갚기 위함이 아닌, 순수히 첩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지어니 절대 사양하지 말아다오. 이 천향의 히루메, 배틀 메이드이자 컴패니언으로서, 천명이 다하는 그 날 까지 그대의 곁을 보좌하겠느니라."


"어... 나도 뭔가 말해야 되나? 난 이런 건 잘 못하는데... 크흠!

나도 마찬가지야! 나 혼자였음 평생 그 시골에 갇혀살다가 죽었을텐데 보스와 만난 덕에 그곳에서 빠져나와 평생 못이룰 업적을 해낼 수 있었어. 나를 데리고 와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해, 보스?"


창고 털다가 마주쳤던 히루메, 폭발을 보고 달려왔던 애니, 우연으로 시작된 인연이지만 지금은 리디아와 트레저 못지않은 내 사람이다.


"...응. 고마워, 다들."


말주변이 없어서 이런 식으로 밖에 감사를 표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그녀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직 바깥엔 잡아넣어야 할 나쁜 녀석들이 남아있으니, 언젠가 또 다같이 모험하자!"


"예끼! 또 그이를 위험속으로 던져놓을 셈이냐!"


그러고보니 오메가랑 원수지긴 했어도 그간 한 번도 그 년 얼굴을 못봤다, 전화만 해봤지.

죽기전에 한번만 엿먹여보자는 심보로 그 년 뒤통수 치고 집에 깽판치고 나왔지만 모처럼 살았으니 한번 더 엿먹여보고 싶네. 트레저 건도 있으니 줘팸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기기도 했고.


"뭐 그건 됐고. 형님, 이제 남은 일정 없지?"


"아직 만나야할 사람들이 있어. 내가 펙스에서 데리고 나온 애들한테도 얼굴 한번 비춰야 하고, 좌우좌나 하치코하고도 인사해야 하고..."


"나중에 해. 그보다 나하고 형님 사이에서 처리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그게 뭔데?"


리디아가 대답 대신 히루메와 애니에게 눈짓하자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갔다.


"응? 어? 뭐야, 어디가?"


"조금 이른 감이 있긴 하다만... 미리 얘기해둔 일이다. 첩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마."


"아핫, 좋은 시간 보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문이 닫히자 방 안엔 나와 리디아밖에 안남았다.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에 함 뜨자고 했을땐 거절했었지, 가뜩이나 배고픈데 더 힘 빠지는 건 하기 싫다고, 언제 위험이 닥쳐올 지 모르니 기운을 온존해두고 싶다고. 하지만 이젠 밥 문제도 해결됐고, 안전도 보장됐지."


"너 설마..."


"내가 형님을 따라왔던 이유는 심심해서 만은 아냐. 흔해빠진 브라우니 중 한명이 아닌, 특별한 한 명의 브라우니가 되고 싶었어."


리디아가 가까이 다가와 양팔로 내 목을 끌어앉자 얼굴이 맟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평소와는 명백히 다른 분위기에 내 심장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트레저 그 녀석이 절대 얻지못할 자리... 형님의 마누라 자리는 내가 가져가도 되겠지?"


로맨틱함과는 거리가 먼 고백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솔직한 그녀다운 고백이었고, 그것만으로도 내 머릿속을 하얗게 만드는 덴 충분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 지 갈피를 못 잡다가 심호흡을 한번 한 뒤 내 대답을 기다리던 그녀와 살며시 입술을 포갰다.


"...이거면 대답이 됐을까?"


"헤헷... 그래, 형님은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지."


지금 그녀의 얼굴에는, 평소 보여주던 능글맞은 웃음기가 아닌 해맑은 미소로 가득했다.

...이윽고 그녀의 눈은 먹이를 노리는 포식자의 눈으로 돌변했다.


"...리디아?"


"이제부터 내 애정 가득한 성욕 다 쏟아부을테니까, 각오해 형님."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숱한 고난도 넘겨왔으면서 뭘. 앞으로 상대해야 할 사람이 줄을 섰는데 이 정도야 버텨야지."


"아직 오전인데..."


"알아."


"...살살 부탁드립니다."


내가 라오 세계관에 들어온 지 열흘째, 마침내 아다를 뗐다. 꽤나 하드하게.

점심도 건너뛰고 한계까지 쥐어짜인 나는 저녁시간이 되서야 배고프단 이유로 풀려날 수 있었다. 생채재건장치로 오리진더스트 듬뿍 넣은 몸이 확실히 튼튼하긴 하더라.


아무튼 여기까지가 나의 오르카호 밖으로 추방되었다가 살아남아 돌아온 이야기다. 괜히 또 오르카호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게 되지 않는 이상 이 이야기가 이어질 일은 없을거다.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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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붕이 파티 2.0

의외로 셀주크 크기가 존나 커서 단체사진에 넣으니 안어울리는거 같음


에필로그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