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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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요안나 아일랜드의 취사장에는 귀신이 살고 있다. 어느 익명의 게시자가 오르카 커뮤니티에 올린 문장 하나, 그 글에 담겨 있는 내용은 아우로라가 예상한 대로 그녀의 상관인 어느 주방장에 관한 글이었다.

 처음 그 글을 보았을 때의 쾌감이란, 아우로라는 아직도 그때의 흥겨움을 잊지 못한 채 생글생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헤헤. 우리 주방장님이 조금 무섭긴 하지!" 

 

"그렇죠? 저도 가끔 중식도 휘두르는 거 보면 깜짝깜짝한다니까요." 

 

"응응! 본대 소완님도 무섭다고 들었지만! 우리 주방장님도 못지 않지 않을까?" 

 

"음..동일 개체니까요. 아마 두 분 모두 비슷할 지도 모르죠?" 

 

덜그럭-! 덜걱! 

 

 곁에 있는 취사장 동료와 한마디씩 대화를 주고 받으며 아우로라는 미리 가져왔던 물건들을 하나둘 빈 식탁 위에 올려두기 시작했다. 세 벌의 녹색 디지털 패턴이 그려진 전투복들과 몇몇 장구류들, 평소에는 그녀들이 가까이 할 물건들이 전혀 아니었다. 

 

"음..이건 주방장님용. 이건 우리 둘이 입으면 되겠지?" 

 

바스락-! 

 

 곱게 개어진 전투복 한 벌을 들어올린 아우로라는 별빛이 반짝이는 두 눈동자로 전투복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갓 만들어진 전투복은 맞는지 어디 하나 구김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새옷 그 자체였으나 그것을 바라보는 아우로라의 입술은 어느새 살짝 뾰로통하게 튀어 나와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진 이유는 단순명확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녀의 현 복장 탓이었다. 아우로라는 시선을 전투복에서 떼고선 자신의 흉부로 돌렸다. 

 

"...히잉." 

 

 새하얀 도화지 위로 그녀의 머리색과 같은 색색의 꽃잎이 수놓인 심플하다면 심플한 얇은 천 한 장이 아담한 그녀의 체구에 걸맞지 않은 커다란 흉부 지방 위를 살짝이 덮어 놓고 있는 것이 그녀의 눈에 금세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이 입고 있는 복장을 확인한 아우로라의 입에서는 금세 작은 신음 아닌 신음이 터져 나왔다.

 오늘은 아우로라들의 바캉스날, 그렇기에 아우로라는 평소의 취사장 복장을 벗어던지고 자신들 딴에는 대담한 노출을 시도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모처럼 앞치마를 벗고 수영복으로 갈아 입었는데.' 

 

 지금 그녀들이 서 있는 이곳, 요안나 아일랜드의 취사장에서 그녀들은 규정에 맞는 복장을 입어야만 했다. 그 규정에 맞는 복장은 그녀들의 빼어난 몸매를 다 가려버리는 은빛의 기다란 앞치마와 섬섬옥수라 부르기 충분한 손을 완전히 가려버리는 빡빡한 고무장갑, 그것이 그녀들의 평소 복장이었다.


 그 규칙은 라붕이 작전관이라 불리는 남성이 온 이후로도 여전했기에 오늘만큼은 그녀들의 몇 없는 자유복장 타임을 만끽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즐거움도 잠시, 지금 요안나 아일랜드 취사장에 당도한 아우로라는 곧장 자신의 몸매를 또 한번 가려야만 했던 것이다. 

 

"아-! 대표로 간다고 하지 말걸 그랬어.." 

 

"다른 아우로라씨들이 오셔도 스쿼드 인원 제한은 4인이니까요." 

 

"포티아씨는 안 억울해? 우리도 나름대로 꾸미고 싶었는데 또 옷을 갈아입어야 하잖아.." 

 

"...헤헤." 

 

 울음 섞인 아우로라의 물음에 까무잡잡한 갈색 피부가 돋보이는 적발의 미녀, 포티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녀 역시 그녀의 머리색과 같은 적색의 대담한 비키니 복장이었으나 그녀는 내심 그것이 부끄러웠는지 전투복으로 갈아입기를 망설이는 아우로라와 달리 재빨리 전투복 한 벌을 집어들었다.

 그런 포티아의 반응에 아우로라는 어쩔 수 없이 입술을 삐죽인 채로 그녀 역시 비키니 위에 전투복을 걸치기 시작했다. 

 

부스럭-부스럭

 

 아무도 없는 조용한 요안나 아일랜드 취사장의 안에 두 여성이 옷을 갈아입는 소리만 들릴 때쯤, 먼저 옷을 갈아입은 포티아는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곁에 있는 아우로라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으으..그런데 아우로라씨. 우리 이 총기를 잘 쓸 수나 있을까요?" 

 

"그건 나도 조금 걱정이긴 한데.." 

 

 조금 당황스러움이 섞인 포티아의 눈빛에 아우로라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자신없다는 목소리로 뒷말을 흐렸다. 그녀들에게 있어 전장의 무기란 주방 도구들뿐, 이런 새까만한 플라스틱 총기는 쥐어본 적도. 쥘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물건들이었다. 

 

"이거 페인트 총이라고는 하던데? 그러면 어떻게든 쓸 수 있지 않을까?" 

 

"그..그래도 상대는 본대 분들이 반 정도 될 텐데요. 저희 같은 비전투 모델이 싸워봐야.." 

 

 비관적인 말만 계속해서 내뱉는 포티아의 지적에 아우로라는 오른 검지로 턱을 받친 채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상대의 절반은 전투의 프로들, 그녀들 같이 전투 모듈이 없는 생산 인원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를 처치하기도 벅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들이 믿는 구석이 아예 없던 것도 아니었다. 

 

"우리 주방장님이라면 어떻게든 하시지 않을까? 주방장님은 전투 모듈이 있을 테니까." 

 

"우으..저는 짐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죠." 

 

"헤헤. 그렇게 너무 풀 죽지는 마! 거기다 대장님이랑 합류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아우로라의 입술 밖으로 대장님이라는 호칭이 흘러 나오자 그제야 울상이던 포티아의 입가에 싱긋이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그 호칭의 주인공에 대한 믿음보다는 그 주인공의 마지막 얼굴이 그녀들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된 탓이었다. 

 

"대장님도 이런 이벤트는 사전에 공지받지 못하던 눈치신 것처럼 보이던데요?" 

 

"응! 대장님이 그렇게 황당하다는 얼굴을 짓는 거 처음 오셨을 때 이후로 처음 보지?" 

 

"후후후. 그러게요? 그땐 정말 여기저기 다니시면서 골치 썩는다는 얼굴만 내비치셨는데." 

 

"히힛." 

 

 멀지 않은 옛일을 회상하던 두 여성의 시선은 자연스레 불꺼진 취사장의 어느 벽면에 걸린 팻말로 이동했다. 투박한 나무 팻말 위로 휘갈겨 쓴 날림체의 어느 한 문구, 매일 읽고 매일 보는 그 문구를 오늘 또 한번 읽어내린 두 여성은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새로운 인간님이 여기 나타나셨다고 할 때만 해도 무슨 이야기인가 했는데!" 

 

"네. 정말요. 저희 모두 반신반의 했죠? 그때." 

 

"에이-! 반신반의는 무슨. 다들 못 믿는 눈치가 한창이었잖아! 파견 애들의 질나쁜 장난 정도로 생각했지!" 

 

"후훗. 그리고 진짜로 오셨다는 전보를 실키분들에게 받았을 땐 소스라치게 놀랐고요." 

 

"응응!" 

 

 당시의 상황을 조목조목 짚어주는 포티아의 말에 아우로라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녀들만 있을 땐 보지 못했던 광경, 아우로라는 그 광경을 매일 같이 보고 있는 오늘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살짝 누그러진 얼굴로 창밖 너머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땡볕 아래서 반짝이는 얼음 조각상이 들어왔다.


 햇빛에 오래 방치된 탓인지 외곽 이곳저곳이 녹아내려 본래의 모습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조각상이었으나 아우로라에게는 그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진짜 문제는 그보다 앞에 있었다. 

 

"..대장님을 데리러 온 걸까?" 

 

"네?" 

 

"응. 본대 사람들. 여태껏 여기에 이렇게 몰려온 건 처음이잖아." 

 

"...네. 그랬죠." 

 

 어딘가 주눅이 든 아우로라의 중얼거림에 포티아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조금은 멀리하고 싶던 상상, 하지만 아우로라는 포티아와 달리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독백을 이어갔다. 

 

"헤헤. 안그래도 우리 대장님 유능하잖아? 사령관님처럼 상냥하고 훌륭한 사람은 아니라도." 

 

"본..본대 분들에게는 사령관님이 이미 계시잖아요? 그러면.." 

 

"으응. 혹시 모르잖아? 여기의 상황을 안 사령관님이 대장님을 여기로 보내신 걸지도? 여기 상황을 정상화하라는 목적으로 말이야. 응. 그쪽이 더 설득력 있다. 그치?" 

 

"..." 

 

 멸망한 세계, 정확히는 인류가 멸망한 세계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가치는 무궁무진했다. 바이오로이드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그녀들과 달리 그들에게는 한계, 혹은 제약이라는 것이 일절 따라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사령관과 그녀들의 대장은 인류재건이라는 하나된 목표 아래서 저항군이 지켜야 할 1순위 중의 1순위이었다.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는 포티아와 달리 아우로라는 담담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령관님도 아직 철충들을 피해서 잠수함에서 생활하시는데 우리 대장님이라고 이렇게 외딴 섬에 방치할 이유가 없잖아?" 

 

"...네. 그렇죠." 

 

"그러니까..응. 시간이 온 걸 지도? 대장님이 본대로 복귀하시는 날이. 히힛." 

 

 전등 하나 켜지 않은 취사장의 무거운 공기탓인지, 아니면 앞으로 닥쳐올 미래에 대한 불안감 탓인지. 아우로라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양손을 교차해 자신의 손가락들을 주물러대었다. 

 

"헤헷. 나 말이야. 사실은 저번에 새로운 디저트 레시피를 찾으러 중앙건물 지하 도서관에 가봤거든. 혹시 모르잖아? 우리도 저쪽 아우로라처럼 대장님한테 디저트 같은걸 선보일 기회가 올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주방장님 몰래 애들이랑 다같이 도서관에 가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어." 

 

"...네." 

 

 살짝 눈끝이 쳐진 아우로라의 독백에 포티아는 그저 씁쓸한 얼굴로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언제나 쾌활하던 그녀이기에 지금의 모습이 더 애처로워 보였던 탓이었다. 

 

"거기 가면 멸망 전 서적도 되게 많잖아? 응. 그래서 무슨 내용이 있을까 싶어서 아무 책이나 잡아서 펼쳐봤는데. 거기에 이런 문구가 있더라고." 

 

"문구요? 어떤 말이 적혀 있던 가요?"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대." 

 

"...? 그게 무슨 뜻이죠?" 

 

"응. 사람이 들어올 땐 몰라도 나가고 나면 빈 자리가 확 느껴진다는 옛말이래. 응." 

 

 아우로라가 무슨 말을 하고픈지 깨달은 포티아는 다른 이가 보기에는 조금 처량해보이기까지한 눈웃음을 지으며 옅은 웃음 소리를 내었다. 그건 아우로라 역시 마차간지였다. 

 

"..대장님은 든 자리가 모르기 어려운 분이던데. 헤헤." 

 

"그러니까! 우리 대장님이나 주방장님처럼 존재감이 확실하신 분들이 어디 있다고! 리리스씨나 리제씨도 말이야! 헤헤. 본대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은 가봐! 헤..헤헤.." 

 

 불편한 회화의 끝에 아우로라는 저도 모르게 교차시켜둔 양손을 있는 힘껏 꽉 오므렸다. 그 힘이 얼마나 쎈지 그녀의 새하얀 손바닥 피부가 순식간에 벌겋게 물들어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기만 하던 포티아는 고개를 숙인 그녀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세웠다. 

 

"...아우로라양." 

 

"...사해." 

 

"...여기는 지금 저희밖에 없어요. 네." 

 

 시끌벅적한 해변가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인지시켜준 포티아의 말에 언제나 웃고 있기만 할 수밖에 없던 아우로라는 금세 가슴 속에서 들끓던 제 불만을 입밖으로 토해내기 시작했다. 

 

"치사해. 치사하잖아? 응? 포티아씨들도 그렇게 생각 안 해?" 

 

"..." 

 

"우리, 어제 로비에서 본대 사람들 다 봤잖아? 다들 활기차고! 행복해 보이고! 응. 완전 대장님이 오신 이후의 우리처럼 다들 활기가 가득 넘쳐 있었잖아?" 

 

"...네. 그렇게 보였었요." 

 

"그러면-! 우리도 그렇게 행복해질 수 있는 거잖아? 그..그런데 왜..왜 대장님을 데려가려는 거야? 그러면 남겨진 우리는 또 웃음을 잃을 건데? 응? 그 사람들은 이미 사령관님이 있잖아! 그러면.." 

 

 그가 이곳에 부임한 날, 그의 팔에 엉겨붙던 그녀처럼. 아우로라는 마치 누군가에게 부탁 혹은 자비를 구하는 것처럼 절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자신의 소망을 피력했다. 어느새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의 끄트머리에는 작은 물방울이 맺혀 있어 포티아는 그저 숨을 죽인 채 그녀가 말을 끝맺을 때까지 가만히 그녀와 시선을 맞추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 

 

"그러면..우리한테도..대장님 한 명 정도는 나눠 줄수 있는 거잖아?" 

 

 명령에 따르는 것을 우선시 해야 하는 바이오로이드로서는 최악을 발언, 하지만 그런 발언을 이렇게 토로해야 속이 풀릴 정도로 아우로라의 속은 조용히 그리고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동료들도 마찬가지 일 터, 포티아는 앳된 그녀보다 조금 성숙한 얼굴따나 볼을 긁적이며 침착하게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대장님이 산에 올라가신 게. 어지간히 신경 쓰이긴 했나 봐요? 후후." 

 

"...응. 다른 애들도 주방장님 앞이라 내색을 안 해서 그렇지. 조금 많이 당황한 눈치였어." 

 

"저희도요. 설마 대장님이 오늘 같은 날에 본대 분들 훈련을 뵈러 갔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후후." 

 

 모처럼의 휴가날, 그리고 그 휴가날을 준비한 장본인이 정작 본무대에 들어오지 않자 아우로라들이나 포티아들이나 당황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다만 그녀들의 장인 은발의 요리사가 평소처럼 일을 맡긴 탓에 그녀들은 불만 한 마디조차 토로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침울해진 기분이 나아지는 일은 없었다. 

 

"...본대 분들 혹서기 훈련에 사령관님도 안 가셨는데. 대장님만 가신 거 보면 예전부터 잠수함 내에서 이런 일을 하신 게 아닐까?" 

 

"아마도요. 파견 분들 혼내는 거 보셨잖아요. 후후." 

 

"..응! 돌이켜 보니 하루 이틀 해보신 건 아닌 것 같네! 헤헷!" 

 

 연신 제 어깨를 토닥여주는 포티아의 덕분인지 아우로라는 조금 밝아진 어조로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꽉 쥔 양 주먹이 풀리지는 않았다. 

 

"...대장님이 본대로 돌아가시고 나면. 응. 우리도 따라갈 수 있을까?" 

 

"..어렵겠죠. 저희는 전투 모듈도 없을 뿐더러 본대에도 저희와 같은 동일 개체가 계실 테니까요." 

 

"...응. 그렇네." 

 

 나긋나긋하지만 현실을 깨우치는 포티아의 말에 아우로라는 여태껏 꽉 쥐고 있던 양 손가락을 천천히 풀어내렸다. 조금은 이른 이별이라고, 그녀는 조용히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것은 포티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장님이 가시고 나면. 쓸쓸해지겠다. 그치?" 

 

"네. 당연히요." 

 

"..." 

 

"..." 

 

 방금까지 아우로라의 격한 울분이 울려퍼지던 취사장의 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한번 적막만이 맴돌았다. 그런 분위기가 싫은 탓인지 아니면 자신의 바램 탓에 포티아까지 입을 다문게 미안해서 인지, 아우로라는 금세 밝은 표정으로 돌아서서 새로운 화두를 꺼내었다. 

 

"아, 근데 그거 들었어? 포티아씨? 대장님 숙소 인근 화장실에 팻말이 새로 걸렸다는 거? 헤헷. 총기 생산 쪽 애들이 무슨 사건을 터트린 모양이야." 

 

"네? 또 무슨 일을 터트린 걸까요?" 

 

"그러게! 나중에 한 번 구경하러 가보자! 대장님이 또 무슨 문구를 적어뒀을지 궁금.." 

 

"그거라면 이미 보고 왔나이다. 알려 드리옵니까?" 

 

"-히익?!" 

 

 둘 밖에 없던 조용한 취사장 안에 조용히 울려퍼지는 낮게 깔린 음색, 그 음색을 들은 아우로라와 포티아는 방금까지의 어색한 웃음 소리를 집어치운 채 동그랗게 뜬 눈으로 인적없던 조리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곳에는 언제 안에 들어선 지 모를 은발의 요리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배식창구 너머로 자신들을 빤히 응시하고 서 있었다. 

 

"주..주방장님? 어..언제 오셨어요?!"  

 

"뭘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사옵니까? 소첩이 이곳에 있으라 하지 않았사옵니까." 

 

"ㄴ...네에. 그..그러셨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걸어오는 포티아와 달리 소완은 평소처럼 시큰둥한 얼굴로 서로 어깨를 부둥켜 안은 두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들의 행태가 우습긴 한 것인지, 소완은 살짝이 입꼬리를 올린 채 그녀들에게 턱짓으로 자신이 서 있는 조리실을 가리켰다. 

 

"거기서 청승떨지 마옵시고 소첩이나 도우소서." 

 

"아..아, 네! 네!" 

 

"으..응! 알겠어! 주방장님!" 

 

 그녀가 뭘하려는 지는 중요치 않았다. 어쨌든 그녀들의 상관이 무언가를 시키려고 하는 듯 하니 그녀들은 허겁지겁 자신들의 일터로 걸음을 돌리려 들었다. 그러나 그때, 아우로라만큼은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어 조리실의 안에 있는 소완을 다시 불러세웠다. 

 

"저..주방장님?" 

 

"? 무엇이옵니까?" 

 

"혹시..언제부터...거기에.." 

 

"...아. 그것 말이옵니까? 아우로라양이 치사하다고 외치는 순간부터였나이다." 

 

"-히에에엑!" 

 

 담담이 전투복을 입은 아우로라에게 비수를 날리는 소완의 작태에 아우로라는 무릎의 힘이 풀려 마치 녹아내리는 젤리마냥 그대로 취사장 바닥 위로 녹아내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포티아는 쓴웃음을 짓는 한편 조심스레 소완의 곁으로 다가가섰다. 그리고 그제서야 포티아는 그녀들의 주방장이 언제부터 이곳에 와 있었는 지를 깨달았다. 

 

"...와아." 

 

 오늘은 모두 해변가로 내려간 탓에 조리실에는 아무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왜인지 몰라도 이미 조리실의 테이블 위에는 이미 잘 손질된 주방도구들과 식재료들이 수납장에서 꺼내어져 나열되어 있었다. 이것만 봐도 지금 그녀 곁에서 묵묵히 칼에 묻은 물기를 천천히 닦아내리는 주방장이 이곳에 언제부터 와 있었는 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주방장님은 언제나와 같으시네요. 헤헤.'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전혀 관심없다는 듯 여느 때처럼 조용히 식칼을 정돈하는 이곳의 주방장, 그녀의 그런 모습에 포티아는 내심 존경하는 한편 그녀 역시 방금 전의 아우로라와 같이 자신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속내를 조금이나마 꺼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주방장님. 그런데..주방장님도 본대에서 오신 분인가요?" 

 

"..질문의 본의를 모르겠나이다. 그대들 역시 본대에서 온 것이 아니오리까?" 

 

"헤..헤헤. 그것도 그렇네요." 

 

 포티아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익숙치 않다. 선호하지도 않는다. 그 탓에 포티아는 금세 자신이 꺼낸 화두를 어색한 웃음으로 묻으려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소완의 손을 멈추게 만들었다. 

 

덜그럭-! 

 

"...묻고 싶은 건 그것으로 끝이옵니까?" 

 

"..예?" 

 

"소첩에게 묻고 싶은 건 그것이 전부냐고 묻는 것이옵니다. 그대의 속내는 무엇이나이까?" 

 

 기다란 속눈썹 아래서 번쩍이는 옥빛의 눈동자, 햇살마저 옅은 조리실 안에서도 확연히 들어오는 소완의 매서운 눈빛에 포티아는 식은땀을 흘렸다. 마치 잘 버려진 칼날과 같은 눈빛으로 자신의 굳게 닫힌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려는 소완의 눈빛에 압도된 탓에 포티아는 숨을 수차례 고르며 조용히 자신의 질문을 이어갔다. 

 

"...그게 말이죠. 그..주방장님은 혹시..대장님이 이곳을 떠나시면.." 

 

"따라갈 것이옵니다." 

 

"...그렇겠죠?"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즉각 자신의 말을 자르는 소완의 언동에 포티아는 불쾌하다는 듯한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은 채 어색한 웃음을 입가에 띄운 채로 자신의 볼을 긁적였다. 여기까지다. 그녀는 그렇게 결론을 짓고선 뒤로 물러서려 들었다. 하지만-사람 말이라는 것이 끝까지 듣고 볼 일이라는 걸 포티아는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헌데 어찌하여 그대들은 주군이 이곳을 떠날 거라는 망상을 품고 있는 것이옵니까?" 

 

"..에?" 

 

"주군은 이곳을 떠나지 않나이다. 어디서 들은 헛소문인지는 몰라도, 주방턱을 밟는 자들이 그러한 잡소문에 귀를 기울이다니. 소첩은 쉬이 이해하기 어렵나이다." 

 

 정말로 불쾌하다는 듯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눈살을 찌푸리는 소완의 말에 포티아는 입술을 벌린 채 눈을 껌벅였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방금까지 풀썩 주저앉아 있던 이가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달려와 섰다. 

 

쿠-당탕! 탕-! 탕탕! 

 

"-정말?! 대장님 여기 안 떠나?!" 

 

"..아우로라양. 소첩은 똑같은 말을 여러 번 하기 싫나이다." 

 

"그..그러면! 본대 사람들 혹서기 훈련에 참여한 건? 본대 사람들이랑 이미 친분이 있어서 그런.." 

 

"그것에 관해서는 일급 기밀이오니. 알려드릴 수 없나이다."  

 

"헤..헤헤." 

 

 긴말을 즐길지 않는다. 해야할 말만 하고 멈춘다. 언제나 보던 그 귀신 주방장이 맞다. 포티아는 앞선 자신의 질문에 대한 그녀의 대답과 지금 그녀들을 달래는 주방장의 냉담한 추가 설명을 이어 하나의 결론을 지었다. 

 

"그럼 주방장님도 여기 계속 계시겠네요? 헤헤." 

 

"물론이옵니다. 여기는 소첩의 부..아니. 주군이 계시는 곳이오니. 소첩은 여길 떠나지 않.." 

 

"-주방자앙니이임!" 

 

와-락! 

 

"읏-!" 

 

 방금까지 축 늘어져 있던 아우로라가 금세 소완의 곁으로 달려와 그녀의 허리춤에 매달리자 소완은 여태껏 잘 유지하고 있던 포커 페이스를 무너뜨리며 제 허리춤에 달라붙은 아우로라의 정수리를 밀어내려 들었다. 

 

"이익! 일전에도 이야기했나이다! 소첩에게 달라붙지 마옵소서!" 

 

"싫어! 안 놔! 우리 주방장님 못 놔!" 

 

"시끄럽나이다! 소첩의 허리춤에 손을 얹을 수 있는 이는 부군 밖에 없나이다! 비키시옵소서!" 

 

"싫어! 대장님한테도 못 줘! 싫어! 주방장님은 우리 꺼야!" 

 

"드디어 미쳐버린 것이옵니까?! 소첩에게는 그런 취미 없나이다! 떨어지옵소서!" 

 

"...헤헤헤." 

 

 평소와 같은 주방이다. 떠들썩하고, 우는 소리가 터져 나오고, 당혹스럽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그런 발랄한 주방이다. 비록 여느 때처럼 많은 인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포티아에게는 지금 눈앞의 장면 하나로 충분했다.

 하지만 아우로라를 내려다 보는 소완의 옥빛 눈동자에 서서히 살기가 번득이려 들자 포티아는 황급히 엉엉 울어재끼는 아우로라를 그녀에게서 떼어내었다. 

 

"아..아우로라양. 주방장님 칼 들어요. 어서 나오세요. 네?" 

 

"...킁."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걱정을 한 탓에 감정표현이 격해진 아우로라를 소완의 허리춤에서 떼어낸 포티아는 평소와 같은 쓴웃음을 머금은 채 시선을 돌려 여전히 씩씩-거리는 소완을 올려보았다. 언제나 얼음장 같은 그녀를 이리도 당혹케 만들 수있는 개체는 아우로라뿐일 것이리라.

포티아는 어떻게든 흥분한 소완을 잠재우기 위해 재빨리 화제를 돌려 조리실 식탁 위에 놓인 조리도구들을 가리켰다. 

 

"주방장님? 그런데 이건 왜 꺼내신 건가요?" 

 

"..후우. 칼을 꺼낸 것에 별다른 이유가 있사옵니까? 칼을 뽑아들었으면 당연히 해야할 일이 정해져 있거늘." 

 

"어, 음. 그런데..밖에는 지금.." 

 

지금 그녀들이 이렇게 여유롭게 떠드는 와중에도 바깥은 시끌벅적할 것이다. 아마 조금만 지나면 이 조용한 취사장 주변 역시 총성이 난무할 터였다.

그런 와중에 요리라니, 포티아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눈치로 소완의 의중을 살폈다. 

 

"밖에 지금 그..이벤트 중이잖아요? 주방장님."

 

"알고 있사옵나이다. 그래서 준비하는 것이옵니다."

 

"예?"

 

 물으면 물을 수록 오리무중이 되어가는 회화에 포티아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우로라는 그저 코를 훌쩍댈 뿐이었지만. 소완은 그런 두 여성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싱긋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 식사를 미리 한 이가 몇이나 되오리까?"

 

"킁-! 아..아마 거의 대부분 아침은 안 먹었을걸? 다들 조금이라도 일찍 백사장에 나간다며 들떠 있었으니까."

 

"네. 애당초 계획대로라면 지금 즈음에 백사장에서 바베큐를 할 예정이었으니까요."

 

"그렇나이다. 다들 아침을 쫄쫄 굶은 채, 지금 이벤트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옵니까?"

 

"에..아. 설마 주방장님. 이거.."

 

 아까부터 계속된 스무고개의 끝에 소완의 행동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포티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소완은 그녀의 뒷말을 알고 있다는 듯 아까 내려 놓았던 식칼 한 자루를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자고로 먹이를 사냥해야 할 땐 덫을 놓는 게 상책이옵니다."

 

스-릉!

 

"그리고 소첩에게는 덫을 놓는 재주가 제법 있나이다. 후후."

 

"아..하하하.."

 

 은은한게 빛나는 식칼의 겉면을 빤히 바라보는 소완의 모습이 어쩐지 사냥꾼보다 귀신에 가깝다고 느끼는 것은 포티아만의 착각은 아닐 터. 포티아는 뺨을 씰룩대다 금세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저..저는 그럼 먼저 냄비들부터 가열해둘게요!"

 

"알겠나이다. 오늘 중식 메뉴는 향이 강한 중식으로 할 터이니. 다른 도구들도 다 꺼내두옵소서."

 

"네..네! 알겠습니다!"

 

 소완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포티아는 종종 걸음으로 다른 도구들을 찾아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여태껏 자리에 주저앉아 있던 아우로라 역시 동료를 돕기 위해 바닥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주방장은 그녀에게 따로 말을 덧붙였다.

 

"아우로라양."

 

"응? 뭔데? 주방장님?"

 

"...아까 잘 들었사옵니다. 소첩의 주군에게 디저트를 대접하려 했사옵니까?"

 

"에..헤헤헤. 그..그게."

 

 설마하니 그것도 들었을 줄이야. 아우로라는 어색한 웃음을 지은 채 소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직 미숙한 자신의 실력을 질타하려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서 있는 소완은 그 어느 때보다, 방금 자신을 타박하려던 그 순간보다 더 서늘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서 있었다.

 

"-히익!"

 

 한 자루의 칼을 든 채 입꼬리를 살며시 올린 소완의 기백 탓일까, 아니면 그 어느 때보다 가늘게 뜬 그녀의 눈매 탓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녀의 주변을 감싼 냉동고의 찬바람 같은 한기 탓일까. 아우로라는 얼굴을 시퍼렇게 질린 채 자신에게 고개를 들이미는 주방장의 옥빛 눈동자와 마주했다.

 

"후후. 무얼 그리 떠시는 것이옵니까? 소첩이 뭘 했사옵니까?"

 

"아..아니..요."

 

"별 것 아니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사옵니다."

 

"..."

 

"주군의 입에는 소첩이 허락한 음식만이 들어갈 수 있나이다. 그러니..소첩 몰래 그러한 행동은 자제해주십시오. 아시겠나이까?"

 

 아무것도 하지는 않는다. 다만 눈으로 혹은 목소리로 다가오는 소완의 엄포에 아우로라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자 아우로라를 감싸던 강렬한 살기가 언제 있었냐는 듯 금세 모습을 감추었다.

 

"좋사옵니다. 이제 그만 포티아양을 도우러 가보시옵소서."

 

"-네에에!"

 

 가슴 아래서 터져나오는 힘찬 기합과 함께 아우로라는 후다닥 소완의 곁을 떠나 포티아가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소완은 잠깐 후-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고선 시선을 다시 테이블 쪽으로 돌렸다.

 창틀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은은하게 빛을 반사하는 여러 도구들 중, 두 자루의 중식도만이 플라스틱 덮개 탓에 빛을 내뿜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두 자루의 식칼을 바라보는 소완의 입가에는 조금 전보다 더 확연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소완은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두 자루의 중식도를 바라보다 이내 중식도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은빛의 체인을 툭툭-건드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군에게 오늘은 어떤 식사를 내야 하오리까. 후후."

 

잘그락-

 

"아아. 아니옵니다. 오늘은..부군께 선물을 드려야 할 날이 아니겠사옵니까?"

 

잘그락-

 

"후후후. 소첩이 다시 한번 부군의 간택을 받는 날이 이리도 일찍이 올 줄이야. 상상도 못했나이다."

 

잘그락-

 

"...그 여자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할 터. 좋사옵니다. 오늘만큼은.."

 

잘그락-!

 

"오늘만큼은 동맹 파기이옵니다. 누가 부군의 첫 부인이 되는 지는. 각자의 역량에 달린 것이 아니겠나이까? 후후후."

 

 오늘, 요안나 아일랜드의 취사장은 평소보다 차가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챈 이들은 조리실의 코너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우로라와 포티아 단둘뿐이었다.


151) 

 

 요안나 아일랜드라 불리우는 이 섬은 생각보다 넓다. 거대한 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널따란 녹음(綠陰)과 그 아래로 펼쳐진 넓은 토지. 그 넓은 땅은 아무리 개간하고 또 여러 시설을 설치해도 남아도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처음 방문하는 이들은 그 섬의 규모에 놀라고 또 그 넓은 땅을 개간한 현장 인원들에게 두 번 놀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리고 그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 이프리트는 이 드넓은 섬의 중턱에서 벌어지는 광기의 현장에 눈살을 찌푸렸다. 

 

"사령관님이 잡힌다-!에 걸 인원 손!" 

 

"참치캔 3개!" 

 

"나는 2개!" 

 

"초코바도 돼?" 

 

"물론! 아무거나 상관없어! 걸 수 있는 건 뭐든 걸라고! 그래야 내기하는 재미가 더 커지니까!" 

 

 방금까지 강행군을 치루던 인원들이 연설장의 한가운데 오밀조밀하게 모여 앉아 단상 위에 서 있는 실눈 여성의 지시에 따라 손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단상의 거대한 스크린 위로는 그녀가 익히 봐왔던 두 남성의 프로필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한쪽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백의의 남성, 다른 한쪽은 반대로 반쯤은 광인처럼 웃고 있는 선글라스의 남성. 둘 모두 그녀가 익히 봐오던 얼굴이었다. 

 

"저거..대장님이랑 사령관님이잖아." 

 

 그리고 그 점이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이프리트는 금세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그녀는 타고 다니던 연대장의 기동장치에서 내려와 땅 위에 딛고 서 있었다. 

 

"본대는 저 두 인간님을 두고 내기를 한다고? 제정신이야?" 

 

"헤헤..각 부대 대장님들도 별말씀 없으시고. 본대는 생각보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아닐까요." 

 

"자유로운 것도 정도가 있지. 우리가 대장한테 깝죽대는 거랑 비교가 안 되잖아." 

 

 곁에 서서 어색한 미소를 짓는 후임의 대답에 이프리트는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중얼거렸다. 

 

"이건 미친 짓이야. 진짜." 

 

"언니. 그것보다 오다가 대장님 못 뵈었어요?" 

 

 노움의 물음에 이프리트는 고쳐 썼던 선글라스를 콧등 아래로 밀어내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그 양반 여기 있었던 거 아니야? 너는 여기서 열외 인원들 상대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물어볼 질문 같은데." 

 

"네. 분명 다른 대장님들 하고 같이 계셨는데..후우." 

 

"그새 어디로 튀었나 보네. 하긴." 

 

 짧은 한숨을 내쉬는 노움의 모습에 이프리트는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하늘 한가운데 대문짝만하게 얼굴이 걸린 마당에 어디 안 도망치고 버틸 재간이 그 토끼에게 있겠나. 이프리트는 주머니 속에서 담뱃갑을 찾아 뒤적이며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 뺀질이 대장님, 이런 일이 터질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는 얼굴이었는데." 

 

"그러게요. 대장님이 많이 당황하신 눈치였어요." 

 

"맨날 사고만 치던 양반이 사고에 휘말리는 꼴이 되어버리다니. 히힛." 

 

 군복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든 이프리트의 입꼬리가 위로 솟아오르자 노움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떠올랐다. 

 

"즐거워 보이네요. 이프리트 언니." 

 

"나랑은 관계없는 일인걸? 관계만 없다면야 나로선 즐길 일밖에 더 있겠어. 킥킥." 

 

"대장님은 괜찮을까요?" 

 

 염려가 섞인 노움의 물음에 이프리트는 입에 담배 한 대를 물곤 이죽이죽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칙-! 

 

"...후우-! 우리 대장이야 뭐. 자기가 파놓은 흙구덩이 한번 신나게 구르지 않을까?" 

 

"하하.." 

 

 선임의 걱정 하나 없는 대답에 노움의 입가에 걸린 쓴웃음이 더욱더 짙어져만 갈 때, 그녀들과 한참 떨어진 연설장에서 누군가 그녀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그녀들에게 다가왔다. 

 

터벅-! 터벅! 

 

"야-! 이프리트!" 

 

"응?" 

 

 기다란 은발을 선선한 바람에 휘날리며 걸어오는 전 상관의 부름에 이프리트는 물고 있던 담배를 입에서 떼었다. 

 

"임펫 중사님. 왜요?" 

 

 그녀들의 앞까지 걸어온 임펫은 이프리트의 손가락에 걸려있던 담배를 자연스레 집어 제 입술로 가져가 물었다. 

 

"왜긴. 너희 혹시 이 게임에 참가 안 하냐?" 

 

"..저희요?" 

 

 담배 연기를 입안 가득 채워 넣는 임펫의 물음에 이프리트와 노움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쩔 거냐는 눈빛이 오고 갔다.

 

"노움. 너 할 거야?"

 

"음..저는 별로 내키진 않는데요." 

 

"그렇다네요? 저도 별로. 그냥 어디 구석에 박혀서 쉴래요." 

 

"...후우. 그래? 아쉽네. 너희가 우리 쪽에 오면 특상은 따놓은 당상일텐데." 

 

 자신들의 시큰둥한 대답에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눈살을 구기는 임펫의 말에 이프리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전역한 부하들을 예전처럼 또 부려먹을 생각이에요?" 

 

"전역하고 재입대한 마당에 못 부려먹을 이유가 어딨어?" 

 

"저..중사님." 

 

"응? 왜? 노움. 그새 생각이 바뀌었어?" 

 

 개체 특유의 머뭇대는 어투로 조심스레 말을 걸어오는 노움에게 임펫은 눈을 번쩍였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 반대로 노움은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 혹시 본대 쪽에서 저희 대장님을 노리고 계신가 싶어서요." 

 

"응?" 

 

 노움이 검지를 들어 자신의 뒤로 손가락을 가리키자 임펫은 등을 돌려 자신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느새 라붕이 대장의 사진이 걸린 스크린을 두고 아까의 실눈 여성이 목청을 세우고 서 있었다. 

 

"이번에는 라붕이 대장님! 자자-! 잡힌다에 걸 사람들은-" 

 

"참치캔 100개!" 

 

"참치캔 30개!" 

 

"초코바 한 박스!" 

 

"..아. 저거." 

 

 연설장이 떠나가라 목소리를 높이는 여성 무리의 모습에 임펫은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다들 저기 있는 인원 태반은 대장이 잡히길 원할걸?" 

 

"대장 잡아봐야 뭐 별 건수가 있어?" 

 

 임펫의 말에 이프리트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의 담배를 들고 있는 임펫의 손가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대장을 잡아봐야-읏! 대장 신체 연령 뭐 시기 밖에-! 없지 않아?!" 

 

"뭐, 그게 주목적이 아니지." 

 

 임펫은 담배를 뺏으려 드는 그녀의 손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뭔가 귀찮은 일이 있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 그녀의 미묘한 대답에 둘의 투닥거리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노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상으로 걸려있는 반지 때문인가요?" 

 

"아마도 대다수는? 아아, 물론 저 특상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말이 좀 나오기는 하던데." 

 

"저런! 탐나는 물건을! 제한까지 걸어둔! 게임에! 아이씨! 내 담배 돌려줘!" 

 

"이 녀석 보소. 이제 자기가 계급이 더 높다고 전 상관한테 말 놓네." 

 

 씩씩거리는 이프리트의 모습에 두 여성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임펫은 뺏었던 담배를 다시 이프리트의 입에 물려주곤 끊어졌던 뒷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사령관님 주최라고? 적어도 저 반지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을 거란 말이지. 다들 노리는 건 반지 아니면 그쪽이란 거지." 

 

"그래서 저희 대장님도 위험한 거군요." 

 

"뭐. 그런 셈이지..사실 반쯤은 이 혹서기 훈련을 지옥으로 만든 주체를 향한 분노도 있겠지만. 큭큭." 

 

 임펫은 방금까지 담배를 쥐고 있던 검지에 아까까지 모든 장병에게 걸려있던 검은 마스크를 빙글빙글 돌려 보이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제야 모든 이유를 파악한 노움은 머쓱한 얼굴로 제 뺨을 긁적였다. 

 

"대장님은 큰일 나셨네요." 

 

"흥! 어차피 자업자득이지. 뭐. 으..돗대였는데." 

 

"보급품 생산하는 애가 담배 하나에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네. 그래. 너희가 없으면 없는 대로 출발해야지." 

 

"응? 임펫 상사님도 참가하세요?" 

 

 꽤나 오랜 경력을 자랑하는 부사관인 그녀도 참가할 줄은 몰랐다는 듯 노움은 그녀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러자 임펫은 귀찮다는 기색을 내비치며 자신의 은발 머리 아래를 긁적였다. 

 

"우리 대대에 따로 보상이 걸렸거든. 무려 마리 대장님이 거신 거라 내빼기도 어려워." 

 

"대장님이?" 

 

"그래. 라붕이 대장님을 잡은 후 연령을 소년으로 건의하면 전체 포상휴가 6박 7일이라고 하더라. 덕분에 우리 대대가 난리도 아니야." 

 

"...으겍." 

 

 오르카 저항군 내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스틸라인, 그만큼 기강과 규율이 최우선시되는 부대였기에 소속 인원에게는 가벼운 1박 2일의 휴가도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이유를 불문하고 민간인을 잡으면 6박 7일의 전체 휴가라니, 이프리트와 노움은 그제야 눈앞의 노련한 고참이 게임에 참가하게 된 경위를 깨달았다.

 

"..대장님 취향이 아주 확고하셔." 

 

"헤헤. 라붕이 대장님이 들으시면 기겁하시겠네요." 

 

"뭐, 일이 그렇게 된 거니까. 나도 이제 가 본다. 너희가 없으면 여기서 근무 좀 해봤던 녀석들을 갈궈야지." 

 

 본대 출신의 병사 중 이미 몇몇은 선발해둔 것인지 임펫이 말을 끝맺자마자 저 멀리서 브라우니 개체 하나가 그녀를 향해 큰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중사님! 저희 이제 출발해야 함다! 이 이상 출발을 미루면 실격이람다!" 

 

"오. 알겠다. 그래. 수고해. 간다." 

 

 임펫은 그렇게 옛 부하들과 한참 사담을 나눈 후에야 그녀들을 떠나 자신을 기다리는 스틸라인 참가 소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이프리트와 노움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대장은 이제 끝났네." 

 

"그러게요. 언니. 이번에는 아무리 대장님이라도 못 도망치시겠네요."

 

 스틸라인은 사령관과 가장 먼저 합류한 고참 부대다. 그리고 남은 개체 하나 없이 전멸한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와 달리 불굴의 마리는 산하에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고참 병사가 자신들을 제외하고도 수두룩했다.

 그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들이었기에 둘의 머릿속에는 이미 임펫의 오른손에 데롱데롱 매달려 오는 라붕이 작전관의 얼굴이 그려지고 있었다.

 

“아-몰라. 이제 우리 손은 떠난 문제야. 뭐.”

 

툭-!

 

“대장님의 신체 교체 연령 선별권이라..음.”

 

“..뭐야. 너 관심 없는 척하더니 대장을 어려지게 만들고 싶기라도 한 거야? 킥킥.”

 

툭-!

 

“옛?! 아..아뇨. 헤헤헤..저는 조금 중년이었으면 어땠을까..싶기도 해서..”

 

 까무잡잡한 볼을 붉게 물들이며 자신의 개인적인 소망을 조용히 읊는 후임에게 이프리트는 입꼬리를 이죽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헹-! 그 대장이 중년이 되어봐야 뭐 달라질 게 있어? 뺀질대는 청년에서 뺀질거리는 아저씨가 되는..”

 

 자신의 상관이 중년이 된 모습을 상상하며 감상평을 늘어놓던 이프리트는 굳이 그의 연령을 바꿀 필요는 없다는 것처럼 냉소적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뒷말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누군가 그녀의 발치 아래로 짱돌을 집어 던졌기 때문이었다.

 

딱-!

 

“으왓?!”

 

 갑작스레 자신의 군화 옆까지 날아 들어온 짱돌 탓에 이프리트는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이내 이 돌이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날아 들어온 것임을 파악한 이프리트는 얼굴을 한껏 구긴 채 등을 홱 돌렸다.

 

“누구야?! 이 동네 장교한테 돌을 집어 던진 간땡이 부은 놈이?! 씨이-! 당장 튀어 나왓!”

 

 씩씩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고개를 좌우로 홱홱 돌리는 이프리트와 달리 노움은 날아 들어온 짱돌을 빤히 응시하다 문득 자신들의 군화 근처에 돌맹이가 여럿 놓인 것을 눈치채었다.

 

“응?”

 

 본래 연설장이란 명목하에 사용하는 공간인 만큼 구보 혹은 이동에 방해가 되는 돌들은 미리 치워뒀을 텐데. 하나도 아니고 서넛의 돌맹이가 모여있자 노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니. 여기에 돌맹이가..”

 

“...”

 

“언니?”

 

 기이한 현상에 노움이 선임을 부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곳에는 방금까지 얼굴을 붉히던 선임이 볼살을 씰룩이며 황당하다는 얼굴로 뭔갈 빤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녀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에 노움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가 빤히 바라보고 있는 우거진 수풀 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대체 무얼 보고 계신..”

 

탁-!

 

 물음이 채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 노움은 어디선가 자그마한 돌맹이가 자신의 발아래로 날아 들어오자 그제야 이 돌맹이들을 던진 주범이 있는 곳을 눈치채었다.

 

“...”

 

“...헤?”

 

 그리고 그 범인이 누군 인지를 인식하는 순간, 노움은 그 주범을 바라보고는 헤픈 숨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너희. 5초 준다. 텨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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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연중 한 달하고 오면 항상 막글에 내 초상집이 열려 있냐. 나 안 죽었어. 애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