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의 집이 갖고싶은 에이미쟝 

늒내(124.50)



남자는 담배를 물었다. 혼자만 피우기 무안했는지 옆자리에 앉은 여성에게 한 대 꺼내보였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은 눈을 돌려 남자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십자형 귀걸이가 대롱거렸다.


- 됐어. 돈이나 줘요.


- 원. 까칠하기는.


남자는 담뱃값을 주머니에 넣고 의자 뒤켠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검은 옷을 입은 수행원이 앞으로 걸어나와 돈다발을 꺼내들었다. 여자는 가지고 있던 비싸보이는 백에 세지도 않고 돈을 집어넣었다.


남자가 물었다.


- 그렇게 악착같이 모아서 어디 쓰려고?


- 집이나 한채 사려구요.



남자는 여자의 말을 듣고 체하듯 기침을 내뱉었다.


- 킬러가 집이라니, 멍청한 소리 마. 나중에 너한테 원한 있는 사람들이 하나하나 찾아갈껄? 충고하나 하자면, 그런 바보같은 생각 말고 평생 도망다니며 구경할 거리나 생각 해.


담뱃불이 필터를 향해갔다. 불씨가 입술에 닿기 전. 남자는 퉤 하고 남은 꽁초를 재떨이에 뱉었다.


- 어머. 그럼 당신 집에 방이라도 하나 비워주겠어? 서로 좋을텐데 말이야.


여자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남자의 턱을 향했다. 남자는 바로 그것을 밀쳐내고는 쏘아붙였다.


- 수작부리기는. 너를 어떻게 믿고?


- 너무하네. 당신이라면 날 받아줄 줄 알았는데.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창의 바깥쪽에서 기이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뒤편에서는 남자가 연달아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있었다.


- 듣고있어? 이봐, 에이미!


그녀는 하늘을 내다보았다. 하늘이 붉다. 구름이 붉은 적이 있던가? 처음보는 광경이 낯익었다. 아. 그녀는 깨달았다. 꿈이었구나.


눈을 뜨자 반라의 남성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 일어났어 에이미?


- 잘 잤나요 사령관?


- 안 좋은 꿈이라도 꿨나봐.


그는 셔츠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 그녀는 방을 둘러보았다. 사령관의 침실. 그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듯 옷가지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책상 위엔 스틱 꽂힌 커피가 증발하기만을 기다리듯 남겨져있었다.


- 이제는, 후후. 제 꿈까지 관심이 생긴건가요?


- 표정이 너무 안 좋길래.


전신거울 앞에서 제복을 챙겨입는 사령관의 등 뒤로 에이미는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는 슬며시 그를 안으며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 후후. 그러는 사령관 표정이 괜찮은 걸 보니 어젯 밤은 만족스러웠나봐요?



- 최고였지.


그녀는 그의 귀를 약하게 물었다. 움찔거리며 미처 참지못한 신음이 코에서 새어나오는 것이 귀엽다고 느꼈다.


- 에이미 사라...


사령관이 고개를 돌리며 말하려고 하자 에이미가 손가락으로 그것을 제지했다. 살포시 검지손가락으로 사령관의 입술을 밀어내며 그녀가 말했다.


- 어머. 자기. 우리 사이에 사랑이 있던가요?


한껏 긴장한 사령관의 몸이 풀어졌다. 그가 주위를 둘러봤을 때. 그녀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엘븐 포레스트 메이커가 합류한 뒤. 잠수함 내에 정원이 생겼다. 볕도 안드는 이 오르카 호에 음침한 밀림이 생겼어도 이상하지 않을 법 한데 꽤나 아름다운 정원이 생겼음에 그녀는 감사했다. 정원에서 쉬던 그녀의 눈앞을 닥터가 지났다. 그녀가 속한 080팀에서 코드네임으로 불리지 않은 것은 에이미 뿐이었다. 그녀는 닥터. 그것으로 빚어지는 소통의 장애는 일절 없었다. 먼발치에서 걸어오면서도 닥터는 그녀를 알아본 듯 맞지도 않는 하얀 가운에서 손을 꺼내 흔들었다.


- 찾고있었어 언니.


양갈래머리를 한 소녀가 에이미 옆에 앉았다.


- 무슨일이죠?


그녀는 가슴쪽 주머니에 달린 수첩을 꺼내 용건을 확인한 후 다시 말했다.


- 임무야. 별건아니고 정찰인데. 조용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나봐. 그래서 토모를 보내긴 좀 그래서.


- 아. 아침만 먹고 금방 다녀올게요.


말을 끝내고도 에이미는 벤치에서 미동도 않고있었다. 그녀가 움직인 것은 닥터가 웃는 얼굴을 그녀에게 들이밀며 말을 걸 때였다.


- 언니. 무슨 일 있지.


- 그래보이나요?


- 그냥. 옛날 꿈이라도 꿨나 싶어서.


에이미는 헛웃음을 뱉었다. 일으키려던 몸을 다시 벤치에 던진 채 말했다.


- 네. 맞아요. 옛날 기억만 떠오르면 좋았을텐데. 옛날 욕망까지 살아나는거 있죠? 그리고 옛날... 후후.



- 집 얘기야? 바깥엔 철충이 드글드글한데 어디에 집을 가지려고?


- 아주 작은 집이라도 좋아요. 이 배 안에라도 하나 만들까요?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탈의실을 향하며 닥터에게 손을 흔들자 그녀도 더 묻지 않고 에이미를 배웅했다.




그녀가 바깥으로 나선 것은 초저녁이 다돼서였다. 에이미는 가슴 부분이 꽉 죄는 배틀슈트를 입고 이제는 감출 필요도 없는 총을 들고 폐허를 걸었다. 건물 외관은 슬슬 콘크리트가 아닌 덩굴더미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높은 곳을 찾았다.


화이트셀이 몸을 박은 전과가 있는 기울어진 건물을 그녀는 거리낌 없이 올랐다. 내려다 본 광경에서 그녀는 지도를 꺼내 철충이 매복할만한 곳을 추려내 기록했다. 지도 위 붉은 동그라미와 x자 표시. 화살표가 늘어가고 지도가 전술지도가 되어가는 중에 그녀는 언젠가부터 상념에 빠져있었다. 반복적인 작업이 으레 그렇듯.


걸레 같은 년.


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처음부터 너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언제부터 속이고 있었어?


네 매 호흡 호흡이 고통스러웠으면 좋겠어.


밤하늘이 생각보다 밝았다. 지도를 그리기에 걸맞은 시간이 아님을 알기까지 시간이 꽤나 걸린 것은 그때문이었다. 그녀는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럼에도 꿈을 꾼다.


- 얼마나 욕을 들었는지 몰라요.


- 그딴 말에 상처받을 거라고 생각한다니. 그놈들도 순진하구만.


상처받지 않았을거라 생각해요?


- 오늘도 우리 자기를 위해 한바탕 하고왔어요.


같이 축하파티라도 할까요?


- 속을 알 수가 없는 여자구만.


그렇게나 보여줘도 모르겠나요?


- 기다렸어요 자기.


- 됐어. 저 시정 잡배들처럼 속을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집이 갖고싶어요.


- 튼튼한 집이.


그녀는 그녀도 모르게 소리쳤다. 환상에서 깰 때다. 눈 앞에 어른거리던 형상이 모두 사라졌다. 기억이라기엔 그녀의 감정이 개입되었고 상상이라기엔 객관적이었다. 찬바람에 이끌려 하늘을 보았다. 진한 보랏빛이었다. 그녀는 오한이 들었다.

춥다. 옷이 있었다면. 아니. 집이 있었다면.



- 언니. 수고했어.


닥터에게 지도를 건네고 그녀는 집무실을 지났다.


인사한 사람이 무안할 정도의 태도였지만 그런걸로 서운하다마다 할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다. 닥터는 에이미를 걱정했다. 또각거리는 소리. 걸음의 일정한 리듬감이 그녀를 진정케 했다. 조그마한 불협화음이 끼기 전까지는.



- 어, 에이미.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 사령관이 서있었다. 그녀는 상념에서 벗어나 은은히 웃었다.


- 벌써 내가 그리워진건가요?


- 아, 그게...


말끝을 흐리는 그를 보고 에이미는 다 알겠다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간 그녀는 그의 단전에서 허리까지 엄지로 훑어내렸다.


- 그렇게 부끄러워하면 말하지 않아도 알겠네요 자기. 마침 저도 오늘은 몸을 섞고싶었어요.


좀있다 봐요. 라는 말을 남기고 그녀는 탈의실을 향했다.






부엉이는 멸종하지 않았다. 우욱 우욱 하는 소리 사이로 들리는 풀벌레소리. 잠수함 안이라 달빛이 새어들지는 않았다.그럼에도 물결사이로 샌 작디작은 빛에 그는 에이미가 자신의 침실의 문을 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기다리다 지쳐 자는건 아니죠 자기?


- 아, 물론이지.


그녀는 구두를 벗고 사령관의 이불 안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그녀가 입은 비단옷결이 피부에 닿자 사령관의 몸이 달아올랐다.에이미는 흡사 뱀이었다. 아주 서서히 감겨들어갔고 저항할 수 없이 몸을 죄였다. 사령관이 사정을 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주도하는 살갗끼리의 교류가 끝나고 헐떡이는 숨이 진정되었을 때, 그녀의 팔 위에 누워있던 그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고 말했다.



- 이야기 해줘.


- 어떤 이야기요?


- 그냥 아무 이야기.


그녀는 사령관의 눈을 들여다보다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 세상이 멸망하기 3년 전에는 토모와 함께 학교의 잠입 임무를 맡았어요. 일년 내내 학교에서 교감선생님 일을 했답니다. 토모는 낙제생이었어요. 본인이 이런 말을 들으면 싫어하겠지만요.


- 다른 이야기는?


- 인류가 멸망하기 한 5년쯤 전에 저는 임무중에 총상을 입었어요. 고치려면 고칠 수도 있기야 한데, 기억이나 기능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하니까 결국 동면시켰죠. 5년 내내 잠만 자고 있었어요. 라비아타가 절 깨우기 전까지 말이에요.



- 또?


- 닥터가 저를 만들어줬어요. 바이오로이드에게 이런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닥터는 천재가 아닐까 싶어요. 3년 전에 만들기 시작해서 재작년에 완성되었답니다.


- 그게 끝이야?


그녀는 그의 눈을 읽었다. 말하려 하면서도 그녀는 거리낌이 있었다. 두려움일지도 몰랐다.


그것이 환상에서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 너무 깊이 알려고 하지 마요. 다 부질없는 짓이죠.


서로 필요해서 붙어있는 거잖아요?


그는 웃어보였다.


- 아니면, 자기. 우리 사이에 사랑이라도 있었나요?


그는 핫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 에이미의 머리를 감싸 가슴에 묻었다.


- 정말. 덩치만 커서는 아직도 이렇게 어린애라니.나이는 이것으로만 먹었나요?


에이미는 사령관의 고간을 움켜쥐었다. 움찔거리는 몸짓에 그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 아직. 뭐 밤은 기니까요. 힘내자구요 자기?


에이미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정원에서 깊게 생각하던 에이미는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피톤치드인가 하는 것 때문인가 싶었다. 아니다. 안락. 익숙하기에 편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 속에 묻혀있는 저항할 수 없는...그녀가 생각할때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어머 언니. 담배 끊은거 아니었어?


에이미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토모가 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자기가 담배를 물고있단 사실을 알아챘다.


- 그러게요. 뭔가 마음이 편해졌다 싶었더니 저도 모르게 물고있었나봐요.


- 정원에서 담배 피우면 엘븐이 엄청 싫어할걸?


- 후후. 이건 비밀로 해주세요.


토모는 알았어. 라고 말하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 언니. 또 언니앞으로 임무가 왔다? 분명히 이번 임무는 몽구스 팀 차례인데말이야.


닥터도 개입을 했겠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나가서 생각좀 정리하고 오라는 뜻이겠거니 짐작이 되자 너무하다는 생각까지도 드는 것 같았다.


- 뭐. 오늘 사령관은 피곤할테니까 헷갈릴 수도 있겠죠. 어젯밤에 꽤나 격렬했거든요.


- 뭐가 격렬했는데? 둘이 곤봉체조라도 했어?


에이미는 싱그럽게 웃었다.


- 맞아요. 사령관 곤봉으로. 재밌었죠.


- 그래? 나도 가르쳐달라고 할까?


- 그러세요. 저는 임무 다녀올테니 한번 이야기 해봐요.


토모는 응 하고 소리쳤다. 에이미가 뒤돌아 손을 흔들자 토모도 그에 맞춰 손인사를 보냈다.






에이미는 인근 해안에서 따라 걸을 벽을 찾았다. 엄폐수단이 하나 없는 길은 표적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번 정찰은 전과 다르다는 걸 느꼈다. 약하긴 하지만 풍겨오는 기름냄새. 풀잎이 바스락댄다고 생각하기에는 규칙적인 소리. 시가지에 다다르기 전에도 몇이나 모습이 보이는 철충들.

잡생각을 하며 다니기에는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닥터가 생각이나 정리하라고 보내준 것 같았는데.


  - 어쩜. 이러면 비번인데도 정찰을 나온 의미가 없는데.


그녀는 닥터가 표시한 포인트를 향해 갈 길을 모색했다. 강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기에는 근처에 철충의 표적이 되기 쉬웠고 숲길을 따라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었다. 그녀는 그냥 다리를 건너자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공격을 당한다는 불안감이 없었다. 맞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아닌, 맞아도 상관없다 라는 느낌이었다.


다리를 건너 시가지에 들어설 때부터 그녀는 가슴이 무거워졌다. 처음보는 상호와 건물들. 그럼에도 그녀는 그곳이 와봤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포탄을 맞아 한 입 베어 문 것처럼 속이 훤히 보이는 건물에 다다르자 그녀는 끌리듯 그 안을 향했다.

꿈에서 봤던 의자. 일전에 와봤던 그 곳에서 그녀는 홀린 것 터럼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혔다.


- 수고했어 바네사.


- 이제 바네사의 임무는 끝났어요. 에이미잖아요. 당신.


- 어차피 에이미도 가짜이름 아니야? 뭐가 됐든간에 무슨 차이가 있겠어.


- 너무하네요. 당신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했는데. 아직 절 못믿나요?


에이미가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남자는 내미는 에이미의 손을 쳐내고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 내가 아니라 돈이겠지. 빨리 모아서 집이나 사라고.


에이미는 웃었다. 쳐내진 손을 매만지며 눈을 내리깔고있자 남자가 물었다.


- 돈이라.


- 뭐해? 안받고.


- 궁금한 게 있어요.


남자는 에이미를 쳐다보았다. 빨리 말하라는 듯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 우리 사이에 사랑이 있었나요?


- 헛소리 하는군. 우리 사이에 믿을 건 계약밖에 없잖아? 당신은 거짓 뿐이고.


- 그랬나요? 후후.


에이미는 문을 향해 걸었다. 그녀의 뒤통수를 향해 남자가 말했다.


- 이봐. 돈 안받을거야?


- 이런 사람이 집을 어떻게 구하겠나요. 이번 임무 끝나고 다시 봐요.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가자 남자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 허 참. 속을 모르겠네.






에이미는 총을 들었다. 환상에서 깨어날 때다. 상념에 빠져서도 철충이 오는 소리는 확인할 수 있었다. 빅 칙이 문턱을 넘자마자 철충의 센서는 에이미의 권총에 산산조각났다. 포위당하기 전에 정찰을 끝내고 탈출해야한다. 하지만 그녀는 탈출하고싶지 않았다.

진실된 것이 계약 뿐이라면. 그녀의 마음을 표현할 수단이 그것이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임무중에 죽어버리고 싶다고. 그렇다면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도 나도 진심일텐데.

그녀는 복도를 거닐며 보이는 철충을 하나씩 제거해나갔다. 다섯 마리정도의 철충을 쏘았을 때. 그녀의 옆구리에 총탄이 박혔다. 뒤를 돌아보자 맞은 편 건물에 나이트 칙이 그녀를 조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슬프지 않았고,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새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수복실이었다. 여기 온게 얼마만이더라. 그녀는 헤아리다 말고 일어나 앉았다. 복부에 통증이 있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팔에 붙은 주삿바늘을 떼어버리고 수복실 구석에 서랍을 열어 쾌속 수복캡슐을 찾았다.

살아났구나. 신기하게도 그렇게까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캡슐을 먹은 뒤부터는 흉터조차 남지 않았다. 방금 아팠던 것이 꿈인 것 처럼 흔적조차 남지 않았지만 몸이 적응하지 못했는지 살짝 걸음이 절뚝였다. 모퉁이를 돌자 그곳에 사령관이 있었다.


- 어머나. 자기. 어딜가고 있나요?


- 에이미. 누워있어야지 벌써 일어나면 어떡해.


- 괜찮아요. 수복캡슐을 먹었으니까. 후후. 허락도 없이 먹은 절 혼내실건가요?


- 됐어. 무사했으면 그걸로 된거지. 대체 이번엔 왜 그렇게 무리한거야?


- 글쎄요. 그런것보다. 오늘 밤에 시간 있나요?


사령관은 당황했다. 언제든 괜찮다라는 분위기를 풍기는 말을 남긴 적은 있었어도 에이미쪽에서 요구한 적은 처음이기 때문에 그는 한번 더 에이미의 상태를 살폈다.


- 무슨 일 있어?


- 자기. 여자한테 무슨 말을 하게 할 생각인건가요?


능청스레 웃는 그녀를 보고 사령관은 고개만 까닥였다. 그녀는 좀있다 봐요. 라는 말을 남기고 복도를 지나쳤다.



짙은 새벽이 되어서 그녀는 사령관을 찾았다. 언제나처럼 헐벗고 언제나처럼 몸을 섞었다. 쾌락에 몸을 기댄 것 치고는 기품있는 교성이 새어나왔다. 누운 그녀와 사령관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 이야기 해줘.


- 또요?


- 듣고싶어.


- 어차피 거짓말일텐데요.


- 괜찮아.


그녀는 가슴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믿지 못할것이라면. 이라고 생각하던 그녀는 말을 준비했다.


- 별거 아닌 얘기에요.


- 응.


- 집을 갖고 싶어요.


- 집?


에이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 정말 별거 아닌 얘기네.


- 후후. 말했죠?


두사람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오갔다. 에이미가 사령관의 목을 혀로 핥고 살짝 물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킬 때에 사령관이 말을 던졌다.


- 그럼 내 방에서 같이 지낼래?


에이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가슴을 채 가리지도 않고 사령관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밤이라 잘 보이지 않았지만 웃음기도 없고 장난같다는 느낌도 없었다. 에이미는 무언가 복받쳐 올라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곧 그녀는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떨려오는 것을 느끼고 숨을 다시 골랐다.


- 자기? 하나 물어봐도 돼요?


그녀는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마저 환상이라면. 그것이 깨져버린다면 그녀는...


- 응.


그녀는 밖이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그녀의 눈시울에 방울이 맺혔다.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이 그에게는 보이지 않길 바라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평생토록 그녀는 그 질문에 사령관이 대답하지 않기를 바랐다. 이번은 아니었지만.


- 우리 사이에, 사랑이 있었던가요?


- 아니었어?


그녀는 사령관에게 와락 안겼다. 들키지 않길 원했지만 눈물은 그녀의 볼에서 그의 등까지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눈물이 그칠 때까지 그를 안고있었고 사령관도 에이미를 안은 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목이 잠겨버릴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 한번 잘 생각해봤는데요 자기.


- 응.


- 역시 집은 필요 없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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