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


닥터 소재 대충 오프닝만 끄적여 봤는데 다른 분이 이미 훨씬 잘 써서 올리셨더라 ㅋㅋㅋ

이미 써놓은 거 지우기도 아까우니 부끄럽지만 업로드는 해봄. 좀 더 상태가 안 좋은 느낌이라고 봐 줘.




끼릭끼릭

 

북미 어딘가에 있는 블랙리버사의 봉인된 비밀 시설.

커다란 시설 중앙에서 한 명의 소녀가 홀로 앉아 기판을 조립하고 있었다.

블랙리버가 자랑하던 특별형 독립 기술 개발용 바이오로이드 '닥터' 개체. 다만 전체적인 모습은 흔히 알려진 괴짜스럽지만 정돈된 외관과는 딴판이었다.

아직 앳된 소녀의 몸과 갈색 머리와 눈동자 등은 남아 있었지만 머리는 어깨 부근에서 대충 잘린 상태로 마구 헝클어져 있었고 두 눈 아래에는 다크서클이 만연했다. 꾀죄죄한 실험 가운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슬리퍼조차 없이 맨발로 바닥을 딛고 있는 것이 영락없는 거지꼴이었다. 

 

"...“

 

그녀가 아무말 없이 기판에서 손을 떼자 주변에서 미동도 하지 않던 로봇 둘이 다가와 기판을 들어 가져갔다. 흔히 닥터의 전투용 기체로 활용되어왔던 보행병기 '타이탄' 로봇들이었다. 타이탄들은 묵묵히 그 기판을 구석에 있던 또 다른 타이탄으로 가져가 조립을 시작했다.

 

"또 한 기.“

 

 그녀의 혼잣말과 함께 열 두번째 타이탄이 완성되었다.

 

12년.

이 닥터가 전생에서 박사과정 대학원생으로서 보낸 시간이었다.

 

 수년에 걸친 논문이 파쇄기에 들어갈 때도,

 지도교수에게 온갖 인신공격을 당할 때도,

 일요일 밤에 불호령이 떨어져 다음날 새벽까지 밤샘을 해야할 때도,

 부모님이 결국 먼저 세상을 떠나실 때도,

 의사가 항우울제를 제대로 투여하고 있는게 맞는지 걱정스레 확인했을때도,

 보건소 직원이 정신분열증 검사를 간곡히 권유하였을때도,

 편의점 직원의 간단한 질문에도 손을 벌벌 떨며 도망치듯 나왔을 때도,

 그리고 새벽 3시에 연구실에서 퇴근하는 중 피로로 미처 보지 못한 트럭이 목숨을 앗아간 그 순간까지.

 

언제나 대학원생이었다.

 

이 시설에서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인생의 마지막 몇 년간 유일한 낙이었던 게임의 캐릭터가 되었다는 사실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이 별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블랙리버사의 엄중한 보안시설은 내부에서 그 무엇도 빠져나갈 수 없게 되어있었고 이미 정신이 거의 망가진 상태였던 닥터는 곧바로 사실상 미쳐버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나마 닥터를 붙들어준 것은 전생의 기억이 아닌 닥터 개체로서 주입되어 있던 지식이었다. 닥터의 전용 장비라 할 수 있는 이족 거대 보행 병기 타이탄의 제작. 제한된 생산 설비 뿐인 밀폐된 공간에서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들을 만드는데 그녀는 열중했고 전생의 기억들은 빠르게 한 켠으로 묻혀갔다. 오직 혼자의 힘으로 타이탄 개체를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가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낙이자 일과였고, 생활이었다. 

 

어느날 그 남자가 그녀를 찾아올 때까지.

 



"레프리콘 상병님! 대박임다 대박!“

 

"호들갑 떨지 마세요 브라우니 2056. 그렇게 큰 시설도 아니고, 안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에이, 그래도 이 정도 시설이라도 적어도 자원이라도 좀 있지 않겠슴까? 그러면 저희도 포상으로 참치캔 특별 보급도 받을법 하지 말임니다!“

 

"그러니까... 에휴, 진입 보고는 마쳤으니 어서 수색을 시작하죠."

 

수풀이 우거진 숲속,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블랙리버 시설의 입구를 발견한 T-3 레프리콘과 T-2 브라우니들이 시끌벅적 떠들고 있었다.

현재 남은 유일한 인류인 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저항군의 지휘 본부 오르카 호에 소속된 탐사대원들이었다.

 

"본부에서 확인한 자료에 따르면 이 시설은 블랙리버사의 전략자원들을 일부 보관하는 용도였다는군요. 보관물들에 대한 기록은 훼손되었지만 아마 영양과 부품이 주가 될 거랍니다.“

 

"오! 이번에 이 지역을 새로 확보한게 역시 다 이유가 있었지 말임다. 이것도 사령관님의 덕이지 말임다!“

 

"이런 시설 하나 때문에 작전을 진행하신 것은 아니겠지만요. 출입 코드 전송받았으니 들어가죠."

 

많은 블랙리버 시설들은 고도의 보안 코드를 출입에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미 걸출한 엔지니어 바이오로이드들이 포함되었을 뿐 아니라, 앙헬 리오보로스의 유산 등에서 이런 시설에 대하 수많은 자료를 이미 확보한 오르카 저항군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굳게 닫혀있던 시설의 문이 곧 열리자 탐사분대원들이 발을 들여놓았다.

 

"겉보기보다는 넓지 말입니다!"

 

그때였다. 신이 나 들어가는 브라우니 앞에 검은 형체가 나타난 것은.

 

"브라우니! 조심하세요!“

 

"헉?!"



오르카 호 사령실.

새로 확보한 지역의 탐사 업무 외에 다른 작전이 없어 평화로웠어야 하는 하루였다. 사령관의 생각도 마찬가지였으나 한가롭던 하루는 한 탐사팀에서 들어온 긴급 보고로 끝장나버렸다. 오늘의 부관인 리앤, 경호당번인 리리스 외에도 긴급 보고를 들고 달려온 마리가 사령관과 동석하고 있었다.

 

"닥터 개체?“

 

-네, 외관상 손상된 부분은 없어보입니다만...

 

사령관의 물음에 화면의 레프리콘은 옆을 힐끗힐끗 바라보며 보고를 이어나갔다.

 

-저희와 일체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오르카 호의 닥터씨가 가진 것과 비슷한 로봇 여럿이 접근을 차단하고 있고요.

 

"다친 대원은 없는거지?“

 

-예, 저희를 완강히 거부하고는 있지만 처음 브라우니를 막아선 것 외에 적대행위는 아직 하지 않고 있습니다.

 

"리앤, 혹시 짐작가는게 있어?“

 

사령관은 닥터 못지 않은 지능을 가졌을 뿐 아니라 멸망 전의 닥터 개체들에 대해서도 어느정도는 알고 있는 리앤에게 물었다.

 

"아니, 내가 아는 한 닥터 개체들은 우리 오르카의 닥터와 거의 판박이일거야. 몇 기 생산되지도 않을 걸 그 블랙리버가 시설에 보관만 했다는 것도 이상한데? 그 와중에 타이탄이 저렇게 여러대 가동되고 있는것도 이해할 수 없네.“

 

리앤의 상식적인 답변에 사령관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마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직접 가볼게. 주변 부대원들로 우선 현장을 확보해 줘."

 

"각하, 괜찮으시겠습니까?"

"주인님, 해당지역은 아직 탐사중인 곳이고 저 닥터 개체도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어요. 굳이 직접 가시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요?“

 

마리에 이어 오늘 경호 당번이던 블랙 리리스도 사령관이 직접 닥터를 찾아가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

 

"10기가 채 만들어지지 않았다던 닥터 개체가 발견된 것도 그렇지만 블랙리버의 비밀기지라니 처음부터 확실히 알아볼 필요가 있어. 경호 구성을 부탁할게 리리스."

 

"그리고 리앤, 우리 닥터를 불러와줄래? 동형기니까 분명 도움이 될거야.“

 

"물론이지~안 그래도 부를 참이었어."

 

사령관은 다시 레프리콘이 보내주고 있던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면 너머에는 초췌한, 그러나 분명이 닥터로 보이는 소녀가 작업대에 앉아있었다. 다만 열 기도 넘어 보이는 타이탄들이 그 주변을 둘러싸고 접근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승리!" 

레프리콘이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경례하자 사령관도 자연스럽게 경례를 받으며 수고를 치하해주었다. 어느새 저항군의 총사령관으로서의 관록이 어느 정도 쌓인 모습이었다.

 

AGS들이 주변에 강화된 경계선을 펼치는 것과 함께 컴패니언 경호팀이 사령관을 바짝 따라왔다. 여기서 보이지는 않지만, 상공에도 이미 여러 기의 저항군 기동 바이오로이드들이 초계비행을 하며 주변을 경계중이었다. 그만큼 사령관이 미확보된 지역에 직접 나오는 것은 상당한 리스크가 있는 일이었다.

 

"음, 안녕?“

 

사령관의 인사에 초췌한 닥터의 머리가 천천히 들리고 눈이 사령관을 향했다. 함께 온 오르카의 닥터와 같은 연갈색의 눈동자, 다만 항상 생기발랄하던 오르카의 닥터와 달리 두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고, 대신 짙은 다크서클이 눈 아래를 받치고 있었다.

 

"...사령관?"

 

"맞아. 내가 누군지 알아?"

 

"진짜 사령관이구나.

 

기이잉

 

그와 동시에 닥터 주변의 타이탄들이 일제히 몸을 들썩였다. 큰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어지간한 AGS와 비슷한 크기의 로봇 십여대가 동시에 움직이는 것은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블랙리리스가 즉각 사령관 앞으로 나서며 경계에 나섰다.

 

"주인님, 이 이상은 위험해요.“

 

"걱정해줘서 고마워, 리리스. 닥터, 혹시 너가 이야기해볼래?"

 

사령관은 고개를 돌려 옆에서 이상하리만치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초췌한 닥터를 바라보고 있던 오르카의 닥터에게 말했다.

 

"으,응, 알았어 오빠." 

 

정신을 차린 오르카 닥터가 앞으로 나서며 인사했다. 

 

"안녕~! 동형기를 만나는 건 처음이네!“

 

"...“

 

사령관을 향하던 무미건조한 눈길이 이번에는 닥터를 향했다. 완전히 똑같이 생겼지만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두 바이오로이드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저기, 닥터가 맞지? 나도 닥터야!"

 

"...닥터?"

 

 



닥...터?닥..터?닥터? 맞아, 그게 이름이었지.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이더라? 닥터?닥터? 박...

 

아.

 

아아.

 

아아아.

 

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

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싫...

싫어?

싫어.

아니야.

싫어. 끔찍해. 무서워. 그런데 왜 나는...

아. 맞아.

그랬었지.

나는, 닥터를...



 

"아아아...!!

 

초췌한 닥터는 오르카 닥터의 소개에 신음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예상치 못한 격렬한 반응에 당황한 오르카 닥터가 말을 이어가려 했다.

 

"저기, 괜찮..."

 

 

당황한 오르카 닥터의 말을 끊듯,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원래 작은 편인 닥터 개체였기에 일어선 모습도 그리 크지 않았다. 아니 슬리퍼를 신고 있는 오르카 닥터와는 달리 맨발이었기에 그보다도 살짝 작은 키. 그런데도 방 안의 모두는 알 수 없는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온전히 일어선 그 소녀의 두 눈동자가 오르카 닥터를 꿰뚫을 것만 같이 주시했다. 조금 전과도 사뭇 다른 불타오르는 듯한 눈길. 사령관이 상황을 파악하려는 것보다도 먼저 리리스는 이미 완전히 사령관을 감싸고 서 있었고 다른 오르카 호 대원들도 무장에 손을 얹고 있었다. 

 

"어..." 

 

그 알 수 없는 기세에 오르카 닥터가 살짝 뒷걸음질 치는 순간,

마침내 초췌한 닥터의 입이 열렸다.

 

"가지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