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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는 결국 한계를 느꼈다.


더 이상 그녀는 참을 수가 없었다.


꽃단장을 하고 들어오는 더치걸들을,

있는 힘껏 놀게 한 다음.. 들려오는 비명을.

기대하면서 들어왔다가 만족하면서 나가는 인간들을.


하지만 키르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인간을 해칠 수도, 명령을 무시할 수도 없다.


명령에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으니까.


그래서 도망쳤다.






한참을 도망쳐서 도착한 곳은 깊은 산맥이었다.


'그래... 여기다. 여기서 조용히 삶의 끝을 맞이하는 거야.'


키르케는 그곳에서 조용히 죽어가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살아가기가 싫었다.


인간이 가득한,

추악함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녀가 죽음을 맞이할 터를 찾고 있을 때.

사고가 난 차량을 발견했다.


"으아아앙, 엄마아아, 아빠..."


차 사고였다.

어쩌다가 이런 오지까지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차가 굽이치는 산길을 달리다가 전복한 듯했다.


부모는 즉사했고, 아이는 살았다.

긁힌 상처 몇 개를 빼면 다친 곳이 없었다.

기적...이었다.


"아...."

"으흑... 엄마...."


아이가 죽은 부모의 시체를 흔들어 깨운다.


"엄마 일어나.. 엄마..."

"그..."


울면서 엄마를 부르는 아이의 모습에서,

키르케는 더치걸이 겹쳐 보였다.


순수하디 순수한 아이.


저렇게 슬퍼할 정도면 그 부모는 좋은 사람이었겠지.

어쩌면.


"제.. 제가..."


죽기로 결정을 했지만.

키르케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제가 뭔가 도와드릴 게 없을까요."


키르케는 아이를 도와 부모를 묻었다.

그리고 아이를 데려간다.


"저와 함께 살아요."

"흑..."

"제가... 제가 지켜드릴게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아이는 다른 가족이 있을 터.

이건 유괴였다.

그러나...


키르케는 이 아이를 순수한 채로 기르고 싶었다.

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좋았다.

테마파크에서 본 그 인간들에게 물들지 않는 사람이 있기를...


'내가... 이 아이를 키우겠어.'


그녀는 그 아이를 더치걸들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을,

착하고 따뜻한 남자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한 번 마음을 정하자, 의지가 불탔다.


그날 밤은 당장 잘 곳이 필요하기에 간단하게 풀집을 만들었다.


부모를 잃은 충격 때문일까, 아이는 군소리 없이 따랐다.


그날 밤, 아이는 울었다.

키르케는 말없이 아이를 꼭 안아 자신의 품 안에 품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라붕...이에요."

"라붕. 저는 키르케라고 해요."

"키르케...."

"아픈 기억은 모두 잊으세요. 지금 이 순간 만큼은."

"...."


"제 품에 안겨 있는 동안, 라붕은 행복할 거예요.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모든 슬픔이 사라질 거예요.

그래도 되는 유일한 시간이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기운이 나지 않거든,

가만히 두 눈을 감고 저를 꼭 안아주세요.

그러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 거예요."


"흑...."


라붕은 작은 팔로 키르케를 꼭 마주 안았다.


"...노래를 불러드릴게요. 저는 명색이 마녀 키르케.

제 노래에는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신비한 힘이 있답니다."


거짓말이었다.

바이오로이드는 바이오로이드일 뿐,

마력 같은 것을 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은근히 효과가 있었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노랫소리와 함께, 아이는 잠들었다.





다음날부터 그녀는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갈 집을 만들었다.

바이오로이드인 그녀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며칠은 간단하게 만든 풀집에서 지내며 준비를 했다.

나무를 베고 다듬으며 재료를 만들었고,

차근차근 집을 만들어 나가면서 사냥으로 식량을 확보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자, 어떤가요?"

"와... 굉장해."

"후후후. 라붕이를 위해서라면 더 대단한 것도 할 수 있답니다."

"정말로요?"

"그럼요~."


둘의 사이는 빠르게 친해졌다.

부모를 여의어 생긴 빈틈을 키르케가 차지한 것이다.


돌연, 라붕이 머리를 긁었다.

며칠 바빠서 몸을 씻지 못한 탓이었다.


"이번에는 그 가려움을 없애드릴게요, 자, 강가로 가죠."

"응."


"어디 가려운 곳 있으세요?"


키르케는 강가에서 아이를 씻겨주며 말했다.

머리를 감길 샴푸는 없지만,

사실 향기가 안 날 뿐이지 물로만 해도 충분히 닦는다면

악취가 나지 않게 씻을 수 있었다.


"기분 좋아."

"다행이네요 후후."


아이는 차분했다.

충격 때문인 것도 있겠지만, 원래 성격이 조용한 듯했다.


"오늘은 다람쥐 고기를 준비해드릴게요."

"죽이는 거야?"

"음, 아무래도 먹으려면 그래야겠죠?"

"불쌍해."

"...."


키르케는 다람쥐를 죽이려다가 멈칫했다.


목이 메여왔다.


"그... 그러면 이 다람쥐는 다시 자연으로 돌려 보내주도록 해요."

"키르케 울어..?"

"아니요, 그럴리가요. 전 언제나 웃는 답니다.

마녀는 항상 웃는 존재니까요."


그때의 일은 큰 충격이었다.


물론 고기를 안 먹일 수는 없었다.

아이가 성장하려면 고단백질이 반드시 필요했다.


대신, 그녀는 좀 더 신중을 가했다.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 죽이고, 고기만 챙겨왔다.

그리고 가능한, 요리하는 과정도 보여주지 않았다.


'좋은 남자가 되기를...'


키르케는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이별의 때가 다가왔다.






"라붕의 삼촌 되는 사람입니다."

"아...."


갑자기 찾아온 남자.


"조카는 어디에..?"

"가, 강에서 몸을 씻고 있어요."

"그렇군요. 그럼 잠시...."


삼촌이 주변을 둘러봤다.


"제 형님... 형님이 묻힌 곳은 어딥니까?"


키르케의 마음 깊은 곳에서 가시덩쿨이 자라났다.

죄책감이라는 가시덩쿨이었다.


"죄, 죄송.. 죄송...."

"....그쪽은 키르케가 맞으십니까?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테마파크에서 달아났다던."


키르케는 덜덜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그저 형님이 만나고 싶을 뿐입니다."

"....이쪽... 입니다.."


키르케는 그를 무덤으로 안내했다.

무덤은 잘 관리되어 있었다.


라붕은 부모를 그리워했고,

그리워하는 만큼 이곳에 자주 왔다.


키르케와 함께 무덤을 가꾸는 것은

라붕이 책임감을 가지고 임하는 일과였다.


"형님...."


남자가 무덤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 남자의 무릎 앞, 한 방울씩 떨어지는 눈물에 땅이 젖는다.


"지금까지 라붕을 키워주신 겁니까?"

"....."


키르케는 대답하지 못했다.

남자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아...."

"그리고 라붕은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형님을 대신해서.. 반드시 훌륭한 남자로 키우겠습니다."


키르케는 망연자실했다.

하지만...

그게 옳았다.


애당초 그녀가 한 것은 유괴였기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결국, 라붕은 떠났다.


마지막 순간, 라붕은 키르케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직 이 이별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모르는 표정이었고,

키르케는 굳이 그 의미를 밝히지 않았다.


마녀는 언제나 미소를 지어야 하니까.






"으흑... 으흑흑...."


키르케는 사흘 밤낮을 울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또 보름을 울었다.


점점 초췌해가던 그녀는

그녀가 처음에 바랐던 대로 점점 죽음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죽을 수 없었다.


죽고자 마음을 먹으면

라붕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작 몇 주 같이 있었을 뿐인데.'


하지만 이미 라붕은 그녀의 가슴 깊이 내려앉았다.

결코 지우지 못할 존재가 되어 있었다.


"계십니까?"

"누구...세요..."

"택배입니다. 이런 곳까지 온 것은 처음입니다만....

이런 곳에 차가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도 놀랍네요."


택배기사가 왔다.

그가 오두막집 앞에 수많은 물자를 내려놓았다.


"통조림부터 시작해서 보관기간이 긴 음식들,

옷,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자들, 라이터, 종이...

그리고 다량의 술과... 쪽지도 있네요."


택배기사는 쪽지를 넘겨주고 떠났다.


"그럼 이만."


키르케는 쪽지를 읽는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제 취향대로 드렸습니다.

형님은 날이 더운 날에 보드카 먹기를 좋아했습니다.

염치 없지만 가끔 생각날 때 무덤에 술을 따라주십시오.

언젠가, 또 여러 물자를 보내겠습니다.]


내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짧게 적혀 있었다.


[나중에 놀러 갈게 키르케!]


"아....."


키르케는 편지를 쥐고 울었다.


"아아... 기다릴게요, 키르케는 기다릴게요..."






그녀는 라붕의 삼촌이 요구한 대로,

종종 무덤으로 가서 무덤에 보드카를 따랐다.


물론 술은 넘칠 정도로 많았기에, 그녀도 목을 축였다.

맨정신으로 라붕이 올 때까지를 기다리기란...

쉽지 않았다.


그리고 겨울이 다가왔다.

키르케의 오두막은 은근히 구색을 갖췄다.


가스나 전기는 없지만 동물의 기름으로 만든 등잔,

장작을 태우는 화로, 토끼나 여우의 털로 만든 담요 등등.


키르케는 라붕의 감탄해줄 거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집을 가꿨다.


그리고 결국 그날이 왔다.


"키르케!"


라붕이 두 팔을 벌리고 하얀 눈밭을 뛰어온다.

삼촌과 함께였다.


그는 지난번처럼 형님의 무덤을 찾아갔고,

지난번처럼 눈물을 조금 흘린 후 말한다.


"방학이라서 왔습니다. 친구들과 노는 게 좋을 나인데,

방학 내내 여기서 지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폐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네...!"


키르케는 행복에 겨워 울며 연신 고개를 꾸벅였다.


"그럼."


"키르케~"


라붕은 그녀에게 어리광을 피우며

학교에서 겪은 일들을 말해주었다.

키르케는 그 얘기를 듣고 또 들었다.


예전처럼 둘이 껴안고 자기도 했으며,

자장가를 불러주기도 했다.


"마녀의 노래 불러주라, 키르케."

"네, 기꺼이."


그녀는 노래를 부른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한 달 남짓한 기간이었지만

몇 달의 기다림 이상으로 풍족한 한 달이었다.

라붕은 다시 떠났다.


"또 올게~"


라는 인사와 함께.


그때부터 일 년에 한 번.

라붕은 이곳에 찾아와 한 달을 머물었다.


만날 때마다 쑥쑥 성장하는 그를 보며

키르케는 뿌듯함을 느꼈고 포근함을 느꼈다.


또한, 자신을 계속 찾아주는 라붕과,

라붕의 부탁을 들어주는 삼촌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좋은 인간분들은 있구나...'





라붕이 14살이 될 때는 정말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나, 더치걸이라는 아이랑 형제자매가 됐어."

"정말이요?"

"응. 키르케 기억해? 예전에, 키르케가 날 구해줬잖아."

"네, 기억해요. 저희가 만난 날이었죠."

"그 아이는 나랑 닮았었어."


라붕은 더치걸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키르케와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고 했다.

산길 한가운데 쓰러져 버려진 아이를 발견했다.


그 아이는 광산에서 일하다가 탈진해 버려진 더치걸.

삼촌과 라붕은 그 아이를 구했고,

삼촌의 힘으로 절차를 밟아 정식으로 입양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사촌 관계지만, 우린 친남매처럼 지냈어."

"정말...."

"키르케, 울어...? 괜찮아?"

"네. 정말로..."


키르케는 미소를 지으며 말해주었다.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에요."


'아아...'


키르케는 자신의 염원을 이루었다.

라붕은 그가 바란 대로 따뜻한 남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로써 모든 걸 이룬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데 뭔가....

왜 가슴 한 편이 아련한 걸까?

그녀는 그 이유를 끝내 깨닫지 못했다.




다시 시간이 흘러 라붕이 16살이 되는 해였다.


"나 고백 받았었어."

"네? 정말이요?"


키르케는 놀랐다.

어딘가 허전함을 느꼈다.


"응. 귀여운 아이였는데... 거절했어."

"네 왜요?"


또 놀랐다.

어딘가 다행이라는 감정이 들었다.


'왜지...?'


키르케는 그 감정의 정체를 몰랐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어머나, 저런."

"키르케."

"네."

"키르케는 날 좋아하지?"

"물론이죠."


키르케는 라붕의 손을 슬며시 잡으며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제가 라붕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그렇지?"

"네."


키르케는 그때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된 건 라붕이 성인이 된 해였다.





"저, 저기...?"

"하아.. 하아...."


라붕은 그날따라 이상했다.


여기 올 때부터 뭔가 안절부절 못하더니...

대뜸 성인이 된 기념으로 술을 마시자고 했다.


키르케는 축하주를 주며 어린 껍질을 깬 그날을 축하했는데..


술이 몇 잔 들어가자 라붕이 그녀를 밀쳐 넘어뜨렸다.


"저기.. 라붕님...?"

"키르케는.... 날 좋아한다고 했었지?"

"그건 이런 의미가 아니었는... 읍..!"


격한 키스.

라붕은 키르케의 입술을 빼앗았다.


"난... 난 2년 전부터 이날 만을 기다렸어."

"....."

"그 여자애한테 고백 받기 전까지,

난 내가 누굴 좋아하는지 몰랐어.

하지만 고백을 받고 나니까... 깨달았어.

난... 난 키르케를 좋아해.

아니 사랑해!"


"저, 저기 일단은 조금 진정을..."

"만약!"


라붕이 너무 흥분한 탓에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만약 정말로 싫다면, 힘껏 밀쳐줘.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날.. 받아 들여줘... 키르케..."


"아아..."


키르케의 그 탄성은,

신음으로 변했다.


둘은 격한 사랑을 나누었다.


"아아.. 라붕님 아아...!"

"사랑해, 키르케, 정말 사랑해...!"





라붕의 삼촌은 모든 걸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키르케와 라붕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다음날.


그가 차를 끌고 와 두 사람을 데려갔고,

키르케가 빼도박도 못하도록 빠른 속도로 절차를 끝낸 후.

곧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키르케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식장에 입장을 기다릴 때였다.


꼬마용 정장을 입은 더치걸이 다가와서 말한다.


"너에 대해서는 들어봤어.

테마파크에서 도망친 바이오로이드."


"...."


"난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생각했어."

"그렇지... 않아요."

"맞아. 그렇지 않더라."


더치걸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너도. 이제 행복하게 살 일만 남았어."

"그러네요.... 더치걸은 행복한 가요?"

"응. 너는?"

"저는...."


그때 진행자가 그녀를 부른다.


-자~ 신부가 입장합니다!


"전 지금 당장 죽어버릴 것처럼 행복해요."

"결혼식 날 그런 불길한 말을 하면 안 되지."

"후후후."


-...? 신부~ 입장 해주세요~!


"더럽게 제촉하네. 자, 손."

"네."


신부를 모시기로 된 것이 더치걸이었다.


둘은 함께 레드카펫을 걸어간다.


그 끝에, 라붕이 서 있었다.


"어서 와, 키르케."



그녀는 행복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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