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아닌 피보호자의 바이오로이드 - 목록


"봐라! 라이노, 라이노다! 저 멍청한 겁쟁이들이 저 따위 쇠상자에 숨어있는 저 꼬락서니를 봐라! 

저 놈의 쇠상자, 당장 날려 버려라!" 

-Warhammer 40,000: Dawn of War - Soulstorm 중에서, 카오스 로드 피라베우스 카론



 아무리 최첨단 기술로 만들었다고는 해도 비행선이 항공기나 비행 바이오로이드들만큼 빨리 날지는 못했다. 


 람다의 본거지가 있는 곳에 도착하기 전에 날은 어두워졌고, 불침번을 서는 바이오로이드들과 잠을 잘 필요가 없는 AGS들 및 컨스트럭트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잠에 빠져들었다.


 웃는 얼굴들 또한 잠에 빠져들었고, 괴물들과 같이 있느라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던 이들은 조금이나마 숨을 돌렸다. 


 시젠을 끌어안은 채로 잠든 티타니아와 에키드나,  눈 좀 붙이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잠에 빠져든 에바에게 이불을 덮어준 라비아타가 레모네이드들에게 다가갔다. 레모네이드 세타는 옥좌 형태의 케스토스 히마스에 앉아서 자고 있었고, 에타와 람다도 피곤해 보이는 것이 곧 자러 갈 것처럼 생겼다.


 "라비아타 님은 안 주무셔도 괜찮으신가요?"


 "저도 곧 자야 할 것 같아요." 


 에타의 질문에 답한 라비아타가 그녀의 옆에 서서 비행선 바깥의 풍경을 쳐다보았다. 


 1차 기업 전쟁 때에는 이런 게 있다는 이야기만 들어보았고, 2차 기업 전쟁 때에는 이 공중 전함으로 이루어진 공중 함대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 입장이었다. 최강의 바이오로이드라는 라비아타였지만 그녀의 신체적인 능력은 그녀가 달려들어 칼을 휘두를 수 있는 영역 바깥에 있는 공중 함대를 상대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비록 라비아타에게는 좋은 기억이 전혀 없는 물건이지만, 레모네이드 에타와 세타가 시젠의 편에 서겠다고 천명한 지금 이 공중 함대는 시젠 일행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저희 '자매' 사이가 어떤지 어느 정도는 아셨지요?"


 ".......굉장하던데요."


 안 좋은 쪽으로 굉장했다. 


 장난기와 더불어 약간의 씁쓸함이 담긴 에타의 질문에 대답한 라비아타의 입가에도 쓴웃음이 걸렸다.


 이 정도로 레모네이드들끼리 손발도 안 맞고 마음도 안 맞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남이 앞에 있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은 채 서로 대놓고 으르렁거리고 견제하기 바빴다. 이들이 보여준 추태는 정녕 그녀들이 멸망 이전 세상에서 세 번째로 강력한 세력을 이끌던 이들의 부관들이자, 멸망 이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이끄는 이들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인류 멸망 직후만 하더라도, 알파가 레모네이드들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엉망진창은 아니었다. 알파가 다른 자매들을 떠난 이후로 나머지 여섯 레모네이드들의 관계도, 이들이 이끄는 세력들 사이의 협력관계도 모두 다 엉망이 되었다. 


 "......시젠 님의 존재가 아니었더라도 레모네이드들의 관계도, 이 체제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을 거에요. 비록 시젠 님의 존재와 더불어 괴물들이 전세계적으로 난리를 쳐댄 것 때문에 더 빨리 붕괴되게 생겼지만요."


 ".......델타와 감마, 오메가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붕괴가 필연적이라 할지라도, 그 필연적인 붕괴를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겠지요."


  세 레모네이드들이 동원할 '온갖 방법'에는 다른 세 레모네이드들의 세력과 시젠 주변에 있는 이들을 이용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비록 에타와 세타, 람다가 시젠의 편을 들어준다 하더라도 앞으로의 일이 쉽지 않을 것임을 상기한 라비아타가 질문을 꺼냈다.

 

 ".......만일 오메가와 델타, 감마가 우릴 이용하려 든다면 어떤 식으로 이용하려 할까요?"


 "첫 번째로 북미 지역의 괴물들과 철충들을 소탕할 것을 요구할 거에요. 저희 셋도, 오메가도, 감마도 본거지가 북미에 있으니, 본진의 안전을 확보하는데 힘을 보태라고 한다면 거절할 수 없어요."


 "북미 지역은 괴물의 공격이 심한가요?"


 "저희 쪽은 그렇게까지 심하진 않았지만, 오메가와 람다의 영역 쪽은 괴물들의 습격이 점점 늘어나는 모양이에요."


 에타와 라비아타의 시선을 받은 람다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살아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을 자신의 껍데기이자 양분, 숙주로 삼는 괴물의 흉악한 모습과, 그 괴물을 죽이기 위해서 희생해야 했던 바이오로이드들, 그로 인해서 PTSD를 얻어서 전역해버린 바이오로이드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라비아타 님은 괴물들과 싸워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두 번 있었어요. 두 번 다 물리적인 공격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상대들이었지요. 한 번은 시젠과 다른 바이오로이드 분들이 도와주셔서 간신히 이겼고, 다른 한 번도 시젠과 다른 바이오로이드 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져서 도망칠 수 있었어요."


 최강의 바이오로이드인 라비아타가 다른 이들의 도움까지 받았는데 하나는 간신히 이기고, 다른 하나는 아예 도망쳐 나왔다는 말을 들은 에타와 람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천하의 라비아타라고 무적이 아닌 것도, 그녀보다 뛰어나거나 강한 존재가 이  세상에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녀조차도 도망을 치게 만들 정도의 괴물이라면 보통 상대가 아닐 것이다. 


 게다가 물리적인 공격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그 괴물에게 집중 포화를 퍼부어도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라비아타가 한 이야기 중에서 '시젠의 도움을 받았다'라는 이야기를 떠올린 에타와 람다가 시젠에게 어떤 능력이 있었기에 그녀가 라비아타와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로 하여금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 괴물을 쓰러뜨릴 수 있게 해 주었는지에 대해서 물어보려다 말았다. 


 아무래도 곧 자야 할 것 같았다. 대화를 오래 하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두 번째 가능성으로는 유럽의 델타를 지원할 것을 요구할 수도 있어요. 지금 상황에서는 그쪽으로 우릴 이용하려 할 가능성이 더 높아요. 자세한 것은....... 내일 설명해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물론이에요. 피곤하신데 실례했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라비아타 님."


 "아, 안녕히 주무세요오오오......."


 에타는 케스토스 히마스의 등받이와 다리받침 높이를 조정하자마자 잠에 빠져들었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침대로 향한 람다는 눕기가 무섭게 잠들었다. 라비아타도 시젠과 티타니아, 에키드나의 곁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바이오로이드들과 어린 용이 잠들어있는 동안 컨스트럭트들은 방금 라비아타와 에타, 람다가 나눈 대화 내용과 그날 하루 종일 들은 내용들을 주고 받으면서 이에 대해서 그들 나름대로 분석하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이에 대처할 방안을 모색했다. 


 

 시젠과 함께 놀러 나간 자매들에게서 하늘을 나는 기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웃는 얼굴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머리를 맞댔다.  


 시젠이 사는 집이 물 속을 돌아다니도록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들도 물 속을 돌아다닐 수 있도록 뭔가를 만들고 있었는데, 시젠과 같이 멀리 놀러나간 자매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무언가를 타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을 들으니 그것도 한번 따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물 속을 돌아다니는 물건을 만들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물건을 만들려고 계획을 짜려 했는데 자매들 중 몇몇이 이의를 제기했다.


 [물 속을 돌아다니는...... 물건은...... 그럼 땅 위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거야......?]


[하늘을 나는 물건은...... 물 속에 못 들어가?]


[......아.]


 그러고보니 시젠의 집도 물 속에서만 돌아다닐 뿐 물 바깥을 돌아다니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기껏 무언가 큰 걸 근사하게 만들기로 했는데 그게 물 바깥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면, 애써 하늘을 나는 무언가를 만들었는데 그게 물 속에 들어갈 수 없다면  좀 그렇다고 생각한 웃는 얼굴들이 고민하다가 단순무식한 결론을 내놓았다.


 [그러면....... 물 속도 돌아다니고...... 땅 위도 돌아다니고....... 하늘도 날아다닐 수 있게...... 만들면 되잖아?]


 [오.]


 조선업 관계자, 차량 설계자, 항공기 전문가가 들었으면 니들 떼거지로 돌았냐고 욕을 할 소리였지만 이 자리에 그런 사람은 없다. 있어도 웃는 얼굴들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웃는 얼굴들이 지금까지 열심히 만든 검은 덩어리를 마구 때려부수기 시작했다.


 새로 근사한 걸 하나 만들기 위해서.


 




 다음날 아침 해가 뜰 무렵, 공중 함대가 람다의 본거지인 아다만타인(Adamantine)에 도착했다.


 투박한 회색의 쇠상자처럼 생긴 아다만타인의 옆에 정박한 유려한 디자인의 은빛의 함선, 오리칼쿰(Orichalcum)의 근처에는 람다로부터 연락을 받은 바이오로이드들과 AGS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정비 및 점검 작업을 한 다음 호위용 AGS들과 함께 오메가에게 보낼 계획이었다. 


 곧 다가올 우주 시대를 열 함선, 미래의 상징이라고 블라디미르 항공과 비스마르크 사, 오스키퍼 재단이 떠들어댈 만큼 유려한 오리칼쿰의 외형과 웅장하기는 하지만 삐딱하게 보면 쇠상자들을 이어붙인 것처럼 생긴 아다만타인의 외형은 언제나 사람들의 비교 대상이었고, PECS의 일곱 회장이나 간부들은 물론, 대중과 바이오로이드들에게서도 더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오리칼쿰 쪽이었다. 


 포세이돈 회장처럼 아다만타인의 투박한 디자인을 선호하는 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아다만타인을 쇠상자라고 부르며 조롱했고 이는 레모네이드 오메가와 감마, 델타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레모네이드 알파와 에타, 세타는 아다만타인의 설계를 맡았던 람다의 체면을 생각해서 아다만타인의 생김새를 깎아내리지는 않았지만, 그런 그녀들도 아다만타인보다는 오리칼쿰의 디자인이 더 낫다고 여기고 있었다. 


 람다가 불안해하는 눈빛으로 오리칼쿰과 아다만타인의 모습을 바라보는 손님들을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손님들마저도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아다만타인을 쇠상자 취급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나는 여객선 같은 느낌이고, 하나는 전함 같은 느낌이네요."


 "저 하얀 건 유려함에 중점을 두고, 저기 저 회색 함선은 웅장함에  중점을 두고 만든 건가요? 근사한데요."


 그녀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손님들은 딱히 아다만타인의 디자인을 가지고 흠을 잡지 않았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시젠 일행의 대부분은 그냥 두 우주선이 다른 디자인 철학에 따라서 다른 형태로 만들어졌다고만 생각했다. 시젠은 마냥 좋아서 뀨뀨거릴 뿐, 두 우주선의 모습을 비교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시젠 일행의 반응을 살핀 람다의 표정이 밝아졌다. 

 

 원래 아다만타인은 PECS가 우주 진출의 선두에 서기 위한 프로젝트인 '비프로스트 프로젝트'의 초석으로 만들어진 우주선이었다. 


 아다만타인의 건조 과정을 담당한 것은 항공산업의 강자인 블라디미르 항공도, SF나 우주 같은 주제라면 누구보다 앞장서던 비스마르크 사도 아닌 오스키퍼 재단이었다. 오스키퍼 재단은 겉으로는 비프로스트 프로젝트가 PECS뿐 아니라 전 인류의 미래와 희망이 걸린 사업이라고 포장했고, PECS 내부적으로는 오스키퍼 재단에서 프로토타입을 제작하는 것이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확실한 결과물을 뽑아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레모네이드 람다의 기획안은 돈과 자원, 시간을 무식하게 때려박아야 하는 비스마르크 사와 포세이돈 사, 오메가 사의 기획안은 물론, 그보다 더 현실적인 블라디미르 항공의 기획안보다도 훨씬 저렴했다. 


 혹시라도 싼 값에 쓸모없는 싸구려 만드는 거 아니냐는 의혹은 아다만타인이 완성되고, 성공적으로 시험 기동을 마쳤을 때 불식되기는 했다.


 혹자의 표현을 빌려 쇠상자를 덕지덕지 붙여놓은 것 같은 외형이 모든 긍정적인 평가를 말아먹었지만.


 어쩐지 값이 싸더라니 디자인을 이 따위로 해서 그런 거였냐면서 절규하는 블라디미르 회장과 이딴 게 인류의 미래와 희망을 책임질 대업의 신호탄이라니 있을 수 없다며 울부짖는 비스마르크 회장, 여기에 니네 돈만 들어간 게 아니라면서 당장 우리 돈 뱉으라고 람다와 오스키퍼 재단 이사장의 멱살을 잡는 클로버 회장과 오메가 회장, 그 자리에서 정신줄을 놓아버린 듯한 문리버 회장과 다른 레모네이드들의 표정은 아직도 람다의 기억과 모듈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비싼 돈 들여서 왠 쇠상자를 만들었다는 언론과 세간의 조롱은 덤이었다.


 람다는 분노한 오스키퍼 재단 이사장에게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맞았고, 그 이후로도 한동안 PECS 안의 인간과 바이오로이드들에게서 온갖 욕과 조롱을 듣는 신세가 되었다.


 이런 쇠상자 따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울부짖은 나머지 회장들과 레모네이드들이 다시 한 번 돈을 모아서 만든 두 번째 함선이 오리칼쿰이었다.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아다만타인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었지만 단 한 가지, 유려한 디자인 덕분에 오리칼쿰이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고, 아다만타인은 그 투박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금방 잊혀졌다. 


 멸망 전쟁이 터지자 그 아다만타인을 떠올린 수많은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려와서 우주선에 태워달라고 아우성을 쳤고, 이 따위 쇠상자가 뭐가 어쩌고 했던 오스키퍼 재단의 고위 간부들과 바이오로이드들은 그 쇠상자 안에 웅크리고 앉아서 우주로 날아갈 기회만을 엿보았다. 


 그럴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았고, 오스키퍼 재단의 이사장과 중역들은 지구의 대기권 안에서 영원히 눈을 감았다.  


 멸망 전쟁이 인류의 멸종으로 끝난 이후에도 아다만타인과 오리칼쿰은 PECS 바이오로이드들 사이에서 종종 비교의 대상이 되었고, 여전히 아다만타인은 쇠상자 소리를 들으면서 까이는 쪽이었다. 


 그런 와중에 그녀가 반한 대상인 시젠과 그 주변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아다만타인의 디자인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니 람다로서는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행복해하는 람다의 귀에는 다른 두 레모네이드들과 주변 바이오로이드들이 저렇게 좋을까, 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게 있는데도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전 주인님들은 우주로 나가지 않은 거죠?"


 "위험했으니까요. 당장 공중 함대도 못 띄우는 판에 이렇게 커다란 우주선 두 척을 우주 밖으로 날려보내는 것은 너무 위험부담이 컸어요. 특히나 이 우주선이 그냥 우주선도 아니고, PECS의 가장 높으신 분들이 타는 우주선이었으니까요."


 인류의 멸망을 예감한 아미나 존스가 발사할 수 있는 모든 우주선과 로켓을 박박 긁어모아서 화성을 향해 날려보낼 때에도 아다만타인과 오리칼쿰은 대기권 너머로 날아갈 수 없었다. 


 인류가 긁어모아서 하늘을 향해 쏘아보낸 우주선들의 대부분이 하늘을 뒤덮어버린 철충들과 땅에서 하늘로 솟구치는 대공 포화에 의해 하늘의 불꽃으로 변하는 상황이었다. 


 다른 우주선보다 훨씬 크고, 훨씬 느린데다 척 보기에도 중요한 표적으로 여겨질 것이 뻔한 오리칼쿰과 아다만타인이 하늘로 날아올랐다가는 요격당하거나, 침식당하거나 둘 중 하나의 운명을 맞이했을 것이다. 아무리 아다만타인과 오리칼쿰이 최첨단 기술과 중장갑,  강력한 방어막으로 떡칠을 했다 하더라도 하늘과 땅을 뒤덮은 철충들의 천라지망으로부터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지금이라면 우주로 나갈 수도 있을 거에요. 어쩌면 지금이 우주로 나갈 절호의 기회, 혹은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요."


 철충들은 지성이 없는 짐승이나 벌레가 아니다. 지금쯤이면 이들도 지난 수십년 동안 어딘가에 처박혀있던 PECS의 공중 함대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고, 머지않아 공중 함대를 요격할 부대를 편성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그 활동 영역도 점점 넓어지고 있다. 지브롤터를 통째로 박살낸 거대한 괴물, 감마의 함대를 작살낸 괴물들, 델타의 세력을 뜯어먹고 있는 괴물들과 같은 괴물들이 언제 어디서 얼마나 나타나서 어떤 식으로 날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이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도 더 크고 강한 괴물이 까꿍 하고 어디선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다 틀어진 다음 지구를 떠나려고 하면 늦는다. 


 멸망 전쟁 당시에 PECS 회장들이 우주로 나갈 기회를 놓친 것처럼.

 

 세타의 말을 들은 라비아타가 고민했다. 만일 오르카 호의 통령이었던 시절의 그녀였다면 거절했을 이야기였지만 시젠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지금은 가까운 시일 내에 우주로 나가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유사시 이 행성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라비아타뿐 아니라 주변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민하는 것을 본 레이라미아-122가 끼어들었다.

 

 [웃는 얼굴들 님들과 저희, 유갈리안티들 그리고 세피리아크들이 힘을 쓴다면 유사시 이 함선을 행성 궤도 밖으로 공간전이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준비 과정이 좀 걸릴 것으로 예상되며, 행성 궤도 바깥에 대한 정보 또한 필요합니다.]


 "......어머나."


 [반대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시젠 아가씨의 보호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레이라미아의 말에 바이오로이드들이 반색했지만 다른 레이라미아들과 세피리아크들이 즉시 반박하고 나섰다. 여기서 이들이 토론을 벌이게 내버려두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판단한 라비아타가 이들을 제지하자, 컨스트럭트들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토론하는 대신에 자기들끼리만 의사소통을 하는 방식으로 토론을 계속해 나갔다.  


 지금 당장은 컨스트럭트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리는 모양이지만, 나중에라도 지구를 떠날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안 바이오로이드들의 기분이 한층 가벼워졌다. 


 시젠 일행이 탄 비행선이 아다만타인 근처에 착륙하자, 기쁜 표정을 얼굴 가득 띄운 람다가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아다마,  아다만타인에 오신 것을 화,  환영합니다아아아...... 제, 제가 안내해 드, 리겠습니다아아......"


 "되게 들떠 보이네요."


 "......시젠 아가씨를 비롯한 손님들에게서 아다만타인이 좋은 평가를 받아서 굉장히 기쁜 모양이에요."

 

 기분이 좋아진 람다가 그녀답지 않게 앞장서서 안내역을 자처하는 모습을 본 레모네이드 에타와 세타가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게다가 시젠이 자기 집에 왔으니, 자기가 직접 안내해주고 싶을 것이다. 오늘은 람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면서, 혹시라도 그녀가 지나치게 들뜬 나머지 실수하거나 어버버거리면 옆에서 도와주는 게 오늘 자신들의 일이라고 생각한 두 레모네이드들이 람다의 뒤를 따라갔다.



 시젠 일행이 세 레모네이드들과 함께 아다만타인 안팎을 구경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델타는 그리 즐겁지 못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다 만들어진 마리오네트들이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마리오네트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폐기처분한 마리오네트들까지 괴물로 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화가 되었다. 


 온몸이 연기와 불꽃으로 이루어진 괴물이 날뛰면서 손으로 추측되는 부속지에 닿는 모든 것들을 불태우거나 훈제시켰다.

 

 불행 중 다행히도 프로스트 서펀트를 비롯한 소방 바이오로이드들과 AGS들이 쏟아내는 물과 소화액은 이 괴물들에게도 유효하게 작용했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괴물은 쏟아지는 물벼락과 소화액의 급류 속에서 사라졌다. 괴물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도 바이오로이드들과 AGS들은 한동안 물과 소화액을 쏟아부었다.


 갑자기 생겨난 괴물에 의해 죽은 바이오로이드들과 파괴된 AGS들, 시설이 입은 피해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방으로 돌아온 레모네이드 델타가 있는대로 신경질을 부리다가 자기 윗옷을 종이처럼 쫙쫙 찢어발기는 모습을 본 오드리와 올리비아가 마음의 각오를 굳혔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했지만 오늘은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넝마가 된 옷을 두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집어던진 델타가 무자비하게 이들을 걷어차고 짓밟다가 갑자기 멈췄다. 


 한참 잘 나가고 있었을 때에야 두 바이오로이드들을 두들겨 패고, 학대하고, 가지고 놀다가 죽여버린 다음 다시 만들어도 문제될 게 없었지만 지금은 이들을 만드는데 자원을 낭비할 수 없었다. 오드리를 방 한쪽으로 집어던지고, 올리비아를 걷어차서 반대쪽 구석으로 날려버린 델타가 입술과 손톱을 깨물면서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려고 해도 오르카 저항군은 아시아에 있어서 오려면 한참 걸린다. 감마가 이끄는 포세이돈 함대는 두 차례나 괴물딱지들에게 쥐어터진 탓인지 자기 본진에 처박혀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 오메가는 곧 도와주겠다고 이야기만 해 놓고는 별다른 지원을 해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람다 그 구두쇠는 마구 쪼아대지 않는 이상 지원군을 보내주지 않을 것이고, 에타와 세타가 지원군을 보내주길 기대할 바에야는 차라리 오메가나 감마가 도와주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아냐. 잠깐만......."


 그렇게 생각했던 델타가 라비아타와 시젠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무엇을 생각했는지 보기에도 기분나쁜 미소를 지은 델타를 쳐다본 오드리와 올리비아가 덜덜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