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   우리집 브닐라 모음집 - 라스트오리진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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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天帝)인지 뭔지 하던 할배는 지금 가슴팍에 커다란 구멍이 여러 개 난 채로 쓰러져있다. 소완에게 찔린 다리도 피로 흥건했지만, 붉게 물들어가는 놈의 하얀 로브가 내 시선을 더 크게 사로잡는다. 바닥을 적시며 퍼지는 피 웅덩이가 할배의 뒤통수에까지 닿았다. 이렇게 보니까 무슨 후광 같아 보이기도 한다.

 

나는 멍하니 그 광경만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 울린 총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갓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탓이기도 할 것이다. 잠시 그렇게 서 있었더니, 뭔가 묵직한 것이 내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주인님!”

 

총까지 던져두고 내게 안겨든 이비. 녀석,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는 꼴사나운 울상을 짓고 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예요....정말로...정말로 주인님을 잃어버리는 줄만 알았어요.”

 

그녀가 내 품에 고개를 묻고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두 팔로 폭 안아주었다.

 

“...와 줄 거라고 믿었어, 이비. 고마워.”

 

이비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다. 헤어진 지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온기와 목소리, 그리고 그 예쁜 모습이 이렇게 그리울 수가 없다.

 

우리는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에헴.”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을 돌려보니, 어딘가 못마땅하단 얼굴로 우릴 바라보는 바니와 하치코가 서 있다.

 

“얼싸안고서 온갖 청승 부리시는 걸 방해해서 죄송한데, 대체 우리 서방님은 언제 찾으실 건가요?”

 

“할아버지 할머니도요!”

 

...아.

 

....

....

....

 

우리는 강당 반대편 쪽에 위치한 문을 열고 들어갔다. 퀴퀴한 냄새가 폴폴 풍긴다. 아마 지하실 쪽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 했다. 거기다, 어지간해서는 남들 눈에 보이지 않을 곳이라서인지, 사방이 투박하게 마무리되어 있었다.

 

거친 마감새의 시멘트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널찍한 지하실에 가득한 수많은 의자들과 그 앞에 설치된 작은 모니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공간의 한구석에는 H와 노부부가 묶여 있었고.

 

뭔가 험한 꼴을 당한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꼼짝없이 의자에 묶여 있던 걸 제외하면 둘에겐 별일이 없어 보였다.

 

하치코가 꼬리를 흔들며 노부부에게 달려가는 사이, 바니와 나는 H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팔에는 무슨 약물 링거 같은 것이 꽂혀 있다. 주삿바늘을 제거하자 벌겋게 부어오른 그의 상처에 저절로 눈이 갔다. 

 

“좀 가렵긴 해도 괜찮아.”

 

H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지만, 가렵다는 말은 빈말이 아닌지 그는 자꾸만 상처에 손을 대고 있었다. 

 

....

....

....

 

예배당에서 벗어난 뒤, 우리는 정문을 향해 이동했다. 겸사겸사 납치 피해자들이 갇힌 컨테이너 문도 따주고 말이지. 이비는 이런 데 시간을 낭비하는 게 별로 달갑지 않다는 눈치였지만, 내 부탁에 못이기는 척 빠루와 손도끼로 자물쇠를 부숴주었다. 그대로 쏟아져 나오려는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고서는, 우리가 나가기 전에는 꼼짝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건 덤이다.

 

조금 더 뒤쪽에 위치한, 굴뚝이 달린 건물에는 굳이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H의 말로는 오리진 더스트 회수시설 (특히 바이오로이드의 시신에서 추출하는 종류) 같다는데, 그런 곳에 들어가서 보게 될 건 뻔했으니까. 사람이 오리진 더스트를 미량 섭취할 경우 신체 능력 강화와 더불어서 수명 연장 효과까지 있다고 하니...놈들의 목적은 결국 오리진 더스트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까지들 해서 아득바득 오래 살고 싶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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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나무 사이를 헤쳐가며 산을 올랐더니, 외딴 등산로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미와 다시 합류할 수 있었다. 이비의 말로는 그녀가 저 사이비 시설의 전력을 끊어 도움을 주었다나. 

 

그런데, 유미의 행색을 자세히 보니 어째 아까보다 눈에 띄게 꾀죄죄해진 느낌이다.

 

“그게....어디부터 손대야 할지를 모르겠어서....그냥 외로운 십자가로 다 튀겨버렸거든요.”

 

에헤헤, 하며 웃어 보이는 유미. 어쩐지 뭔가 그슬린 흔적 같은 게 보인다 했다.

 

....

....

....

 

 

유미와 다시 합류한 후 해가 질 무렵까지 계속해서 걸어간 우리는, 산중의 한 커다란 바위 굴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좁고 자그마한 굴이었지만, 이비 말로는 구조상 불빛이 크게 새어나갈 위험은 없단다. 

 

곧 우리는 H의 라이터로 작은 불을 피워놓고, 노부부가 챙겨온 접이식 방석으로 바람을 막을 가림막을 만들어두었다. 쌀쌀한 바람이 굴 안에 가득 들어오고 있었지만 작은 불이나마 있다 보니 아무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다리를 펴고 앉아 피로에 절어버린 몸을 동굴 벽에 기대고 있으려니, 담요를 어깨에 감싼 소완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까 소첩을 도와주셨던 것에.....감사를 드리고자 왔사옵니다.”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해주었다.

 

“그게 뭐 별거라고. 너도 고생 많았을 텐데 이만 좀 쉬어.”

 

그렇게 말해주고 눈을 감았지만, 계속해서 얼굴을 간질이는 알 수 없는 느낌 때문에 결국 눈을 다시 뜰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완은 아까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눈을 뜬 것을 확인한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간다.

 

“아까는 손님께 큰 은혜를 입었나이다. 당신 자신의 생명조차 위태로웠던 순간에, 소첩의 하잘것없는 목숨을 살리시고자 더 큰 위험을 감수하셨지요.

 

그래서....이리 오던 길에 고민을 해 보았지요. 어찌해야 이 하해와 같은 성은에 보답할 수 있을지 말이옵니다.

 

허나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소첩에겐 손님께 드릴 것이 없었사옵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가치를 잃어버린 몸뚱이와 죽어버린 마음이 손님께 무슨 소용이 있겠사옵니까. 다만....”

 

그녀가 우아한 동작으로 무릎을 숙여왔다.

 

“소첩, 비록 세상을 떠나신 부군께 주제넘게 수절을 다짐한 신세. 고로 소첩의 몸과 마음은 내어드릴 수 없사오나.....소첩의 재주만큼은, 소첩의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손님만을 위해 쓰겠나이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나와 눈을 맞추었다.

 

“하여, 이제부터는....손님을 ‘주인’이라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겠사옵니까? 소첩, 감히 손님을 ‘두 번째 주인’으로 모시고자 하옵니다. 소첩의 찢겨나간 몸뚱이만을 사들였던 소인배가 아닌, 진정으로 모실 가치가 있는 주인으로 말이옵니다.” 

 

소완의 눈동자에는 결연한 빛이 가득했다. 지금 꺼낸 말이 가볍게 건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마음이 전해져 오는 듯하다. 그녀의 오묘한 푸른 눈이 나를 계속해서 응시한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이었지만, 보석 같은 푸른색은 여전히 신비로운 빛을 발하고 있다.

 

.....이 분위기에 어떻게 거절을 할 수가 있을까. 뭐, 어차피 그럴 이유도 딱히 없긴 했지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소완은 머리까지 바닥에 대 가며 큰절을 올린다.

 

“불초 소완, 새 주인께 다시 한번 인사를 올리나이다.”

 

“....응. 나도 다시 한번 잘 부탁해.”

 

“...소완 씨.”

 

내 옆에서 가만히 있던 이비가 소완을 부르더니, 배낭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냈다. 

 

 

 

 

 

“I think it’s time I gave this back to you.”

(이젠 이걸 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소완이 지니고 있던 칼붙이들. 소완이 합류한 후 이비가 압수해놓고 있었던 주방칼 보관 가방이었다. 

 

“이젠 정말로 저희 식구시니까요. 같은 주인님을 모시는.”

 

소완은 말없이 두 손으로 가방을 받아들었다. 그녀의 표정은 여느 때처럼 읽기 힘들었지만, 완만하고도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그녀의 눈썹을 보니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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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삿바늘 때문에 생긴 H의 상처는 밤새 더 곪아있었다. H 본인도 상당히 편찮은 눈치였다. 미약하게나마 열까지 나고 있었던 데다, 한눈에 봐도 안색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갈 길이 멀긴 해도 저렇게 골골대는 녀석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으므로, 우리는 잠시 산길에서 벗어나 가장 가까운 약국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하필이면 인근 시내에 한두 곳 있는 게 전부라 상당히 긴장했지만, 이 작은 도시는 진작에 대피가 끝나있었던 모양인지 사람은 물론 철충까지도 보이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덕분에 수월하게 의약품을 챙긴 우리는, 잽싸게 시내에서 벗어난 뒤 강변을 따라 이어진 이 한적한 도로 주변에서 H의 상처를 돌보고 있었다. 

 

“으으....이 정도는 침만 발라도 낫는다니까.” 

 

“말 같지도 않은 소릴....에휴, 소독도 해두고 드레싱도 붙여뒀으니 이제부턴 긁지 마세요.”

 

H에게 처치를 해주던 바니가 틱틱댔다. 

 

이비는 바니와 H 쪽을 기웃거리고 있고, 유미는 소완의 팔에 감긴 붕대를 다시 감아주고 있었다. 둘 다 신발을 벗고 있는걸 보니, 아무리 바이오로이드라도 걷는 게 힘들긴 한 모양이다. 저쪽의 하치코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대며 노부부에게 자양강장제를 건네고 있다.

 

그리고 나는 강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고. 저 멀리서 보이는 도시의 모습은 실로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사방에서 매캐한 연기가 날리고 있었고, 높다란 건물들은 마치 생쥐가 파먹기라도 한 듯한 모양새로 부분 부분이 사라져 있었다. 들릴 듯 말 듯, 아주 희미하게 울리는 총성도 귀에 들려온다. 

 

“바니 언니, 서방님은 이제 괜찮으신 검까?”

 

이비가 바니에게 묻는다. 녀석, 어젯밤에는 나를 꽉 껴안고 자더니만, 일어났을 땐 또다시 해맑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네, 괜찮으실 겁니다. 참, 이비 씨한테도 드릴 게 하나 있네요. 지금 바로 드세요.”

 

“오, 저 주시는 검까? 이건 무슨 약임까?”

 

둘에게 다가가서 바니가 이비에게 건넨 상자를 슬쩍 봤더니.....저거 피임약이다.

 

“A님도 이거 받으십시오.”

 

내 손에 바니가 올려놓은 건 초박형 콘돔. 그것도 꽤나 비싼 수입산이다.

 

“아무리 급해도 지킬 건 지키셔야죠. 이럴 때일수록 조심해야 한다는 걸 잊으셨습니까?”

 

“.....그래, 챙겨줘서 고맙다.”

 

누가 볼세라 잽싸게 콘돔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생수를 까서 피임약을 꿀떡 넘기는 이비를 바라본다. 

 

...쟤는 지금 자기가 먹는 게 무슨 약인지 알긴 아는 걸까.

 

누군가가 어깨를 톡톡 치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려보니, 바니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대뜸 한다는 말이....

 

“A님, 혹시 예전부터도 관계를 하실 때 생각 없이 안에다가 싸지르셨나요?”

 

“에? 어? 응? 아-아-아냐, 나도 그 정도 생각은 있어. 그리고 표현이 그게 뭐야, 징그럽게.”

 

“....우리 바이오로이드들도 엄연히 생식능력이 있습니다. 그걸 잊으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그렇게 자꾸 안에다가만 하셨다간 우리 서방님처럼-”

 

 

그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큰 총성이 몇 차례 울렸다. 버려진 차들로 가득한 도로 쪽이었다.

 

 

“바-방금 뭐였죠? 철충인가요?”

 

허겁지겁 소총을 들어 올린 바니. 하지만 이비는 고개를 젓는다.

 

“아님다. AGS들 총성이랑은 많이 다름다.”

 

또 한 번 총성이 울리고, 누군가가 크게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뒤따랐다.

 

“....저게 뭐가 됐든 휘말려서 좋을 거 없을 것 같지 말임다. 아무래도 주인님들 모시고 피하는 게 좋겠슴다.”

 

이비의 뒤를 따라 우리는 허겁지겁 짐을 다시 싸들고 자세를 낮춘 채 조심히 이동했다. 콘크리트 차단벽 뒤로 몸을 숨기고 어기적어기적 움직이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지만, 모두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우리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간헐적으로 울리는 총성은 점점 더 우리에게 가까워져 왔다. 이제는 가까워지다 못해 아예 두세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가는 발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저놈은 또 뭐야, 대체!”

 

“주인님! 저희가 시간을 끌 테니 어서 피하세요!”

 

어느 남자의 목소리에 이어 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는 바니와 완전히 똑같은 목소리였지만, 다른 하나는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콘스탄챠 언니?”

 

바니가 우뚝 몸을 멈추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찰나, 나의 귀에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아-! 그냥 얘기 좀 하자니까, 얘기만!”

 

 

너무나도 익숙하면서도, 너무나도 가증스러운 목소리가.

 

“....저거, 주인님 전 상사분 아님까?”

 

이비가 내 쪽을 돌아보며 소근거렸다.

 

C부장. 삼안 본사에 근무할 때 매번 마주쳤던 그 기분 나쁜 인간. 

 

저 새끼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나는 콘트리트 블록 사이에 난 틈으로 도로 쪽을 엿보았다. 버려진 트럭을 등지고 멈춰선 한 남자와 두 메이드 바이오로이드 –하나는 바니와 같은 바닐라, 하나는 콘스탄챠라는 모델인 듯 했다-는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C부장의 모습도 보인다. 손에는 무슨 리모컨 같은 것을 들고 있었고, 놈의 옆에는 흑백이 뒤섞인 차림의 은발 여성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양 손에 큼직한 권총을 쥔 채였고, 푸른색 꽃잎 같은 것도 그녀의 곁에 둥둥 떠 있다. 분위기를 보니 저 여자도 바이오로이드인 모양이다. 

 

C가 짐짓 여유 있는 모습으로 한 걸음을 더 내딛자, 남자와 함께 있던 두 메이드가 C에게 총을 겨누며 앞으로 나섰다.

 

“더 이상 접근하지 마세요! 이 이상 다가오시면 위협으로 간주, 대응 사격하겠습니다!”

 

콘스탄챠, 안경을 끼고 갈색 포니테일을 한 메이드가 외쳤다.

 

“허허허헣, 야 짜장면, 들었냐? 돼응솨격화개씁니데에~ 지랄한다, 칵칵칵!”

 

C가 어이가 없다는 둣 웃어대며 그의 옆에 선 여자에게 고개를 돌린다. 아주 숨이 넘어갈 기세로 웃어대던 놈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자기 앞의 두 메이드에게 리모컨인지 뭔지를 겨누었다.

 

“그래, 쏘겠다고 혔냐? 쏴 봐 그럼.”

 

놈이 뚱뚱한 엄지로 리모컨을 꾹 누르며 비릿한 웃음을 흘린다.

 


“명령이다. 저 새끼 쏴 죽여.”

 


그러자 두 메이드가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며 온몸을 경련한다. 마치 누군가가 그들의 사지를 잡고 억지로 움직이기라도 하는 듯이. 

 

메이드들의 기괴한 움직임에 그들의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당황하는 사이, 그의 바닐라와 콘스탄챠는 갑자기 그 남자에게로 총구를 돌렸다.

 

“....얘들아?”

 

“주-주인님....어서....도망치셔야...”

 

콘스탄챠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총구를 남자에게 겨누었다. 

 

“씨발 뭐하냐! 쏜다며! 쏘라고 이 허벌년들아!”

 

C가 목청껏 소리친 순간, 콘스탄챠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첫발이 총구를 떠나 그녀의 주인을 맞힌다. 한 박자 늦게 피가 왈칵왈칵 터져 나오기 시작한 배를 부여잡고 그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 광경을 무력하게 지켜보며, 어떻게든 제멋대로 움직이는 자신들의 몸에 저항하던 두 메이드들의 표정은 정말이지 필사적이었다.

 

이내 경련하는 팔로 고풍스런 소총의 레버를 철커덕 당긴 콘스탄챠는, 천천히 자신의 주인에게로 총구를 다시 들어 올렸다.

 

“...대체...내가 왜.....이...무슨....주인님....제발....”

 

그녀의 손가락이 다시금 방아쇠를 당기던 찰나, 사지를 삐걱대며 뒤틀던 초록 머리의 메이드가 ‘안돼!“ 하고 고함을 지르며 주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두 번째 총알은 바닐라의 머리를 그대로 궤뚫어 버렸고, 이내 축 늘어진 그녀는 자신의 주인 옆에 기대어 움직임을 멈추었다.

 

“바닐라!”

 

“허허, 존나 눈물 나게 하네 씨발것들.”

 

콘스탄챠의 절망 어린 절규에 이어, 신이라도 난 듯 그들을 조롱하는 C.

 

“아...안돼! 안돼! 주인님은 안돼!”

 

콘스탄챠는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의 통제를 어떻게든 되찾은 것인지, 힘겨운 손놀림으로 연거푸 레버를 당겨 소총에 들어있던 탄약을 모두 빼내었다. 더 이상은 주인을 쏠 수 없게 하려는 노력이었을까.

 

“하- 씨, 거 참 말 안 듣네. 아니, 내가 지금 니 주인인데 어디서 또 주인을 찾냐? 개기는 거야, 지금?”

 

콘스탄챠는 비어버린 총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덜덜 떨리는 몸을 겨우겨우 움직여 자기 주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느새 바닥에 떨어져 버린 안경이 가리고 있던 그녀의 초록 눈. 분노와 적개심으로 번뜩이는 그 눈이 C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다. 

 

“눈깔 보소 저거. 안 되겠다. 야, 짜장면. 저 새끼는 니가 마무리 해.”

 

그에게 짜장면이라고 불린 흑백 옷차림의 바이오로이드가 앞으로 나섰다.

 

“미안해요.” 

 

그녀가 한 손에 쥔 권총을 들어올려, 콘스탄챠의 뒤에 주저앉아있던 남자에게 쏘아버렸다. 아직까지 간신히 숨은 붙어있었던 그 남자는, 그 바이오로이드의 사격에 심장 부근이 궤뚫리며 그대로 즉사해버렸다.

 

 

 

 

 

삐걱거리는 몸으로 힘겹게 뒤를 돌아본 콘스탄챠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주인님?”

 

“이 대가리에 좆 박은 년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C가 그녀의 등에 대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내가 이제 네년 주인이야! 저 시체새끼가 아니라! 넌 이제 내 거라고! 왜, 잠깐 반항 좀 해봤다고 뭐라도 된 것 같냐? 지가 존나 대단한 년이라도 된 것 같지? 좆까네, 창년아! 몇 분만 있으면 넌 그 째째한 반항도 영영 못하게 될 거다. 곧 비상 권한 동기화가 끝날 테니까! 네 명령권은 이제 나한테 있단 말이야! 알아듣냐?”

 

“...지금임다. 다들 조용히 이동하십쇼.”

 

입가에 손가락을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이비. 그녀의 손짓에 우리는 몸을 낮춘 채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C는 여전히 성난 목소리로 고래고래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고, 덕분에 우리가 움직이며 나는 사소한 소음이 가려져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콰지직

 

누가 들어도 다분히 인위적인 소리가 우리의 뒤에서 울렸다. 나와 H, 그리고 바니와 이비가 잔뜩 당황한 채 등 뒤를 돌아보자, 노부부 중 할머니 쪽의 발아래 놓인 찌그러진 페트병이 보인다. 

 

....좆됐다. 

 

“바니 언니! 하치! 제압사격함다!”

 

C와 흑백 옷의 바이오로이드가 채 반응도 하기 전, 이비가 재빨리 몸을 일으켜 C가 있던 방향으로 소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비와 하치코까지 가세해서 각자 무기를 준비하고 몸을 일으킨다.

 

“뭐야 씨바!”

 

난데없이 총알 세례를 받은 C. 놈이 푸른색 장식을 띄워 올린 흑백옷의 뒤로 뒤뚱뒤뚱 몸을 피한다. 리모컨을 든 한쪽 팔을 우리 쪽으로 향한 채로. 새끼, 뛰는 폼이 무슨 징그러운 펭귄 같다.

 

흑백옷은 몸을 살짝 굽혀 싸울 태세를 갖추었고, 콘스탄챠는 떨어뜨린 총을 집어들어 빼냈던 총알을 다시 집어 넣고 있었다. 

 

“저 놈들 제압하는 동안 주인님하고 인간님들은 얼른 피하시는 검다! 가십쇼, 주인님!”

 

순식간에 비어버린 탄창을 갈아 끼운 이비는 서둘러 나와 H, 노부부를 앞으로 내보냈다. 전력으로 달리기 위해 몸을 일으킨 순간, 이비가 걱정되는 마음에 나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돌려 이비를 돌아보았다.

 

이비는 우리를 향해 총을 겨누던 콘스탄챠에게 냅다 소총을 갈겨 쓰러뜨렸다. 하지만 그녀의 뒤편에서 전투태세를 갖추던 나머지 둘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다.

 

“다들 안 쏘고 뭐하심까! 계속 몰아붙여야....”

 





....아까 놈이 겨눴던 리모컨 탓일까, 하치코와 바니는 저기 있던 콘스탄챠가 그랬듯 고통에 겨운 표정으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바니 언니? 하치?”

 

“야아아! 들리냐?”

 

그 순간 C가 큰 소리로 외친다.

 

“각자 주인새끼들 쏴 죽이고 이리로 온다, 실시!”

 

그러자 경련하는 팔로 서서히 총구를 우리에게로 향하는 하치코와 바니.

 

“.....Fuck me.”

(씨바 돌겠네.)

 

“죽이라고!”

 

“으...으아아아!!!”

 

C의 재촉에 방아쇠를 당기려던 바니는, 악에 받힌 절규를 내뱉으며 총구를 옆으로 돌려 애먼 차량들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금세 비어버린 소총을 우리에게 겨누며 소리치는 바니. H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얼어붙고 말았다.

 

“끄으윽....서방님....도망치세요!”

 

“바니....”

 

“뛰라고, 이 멍청아!”

 

그렇게 H에게 고함을 지른 바니는 제자리에서 몸을 기괴하게 꺾어대고 있었다. 상상도 가지 않을 정도로 괴로운 얼굴을 하고. 그녀는 자꾸만 우리에게 달려오려고 움직이는 다리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

 

“...주인....속히 몸을 피하소서..”

 

소완의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더니, 내 옆에 있던 소완까지 그로테스크하게 몸을 비틀고 있었다. 양손에 보기만 해도 섬뜩한 칼 두 자루를 쥐고 말이지. 내 머리 바로 옆으로 칼을 휘두른 그녀는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빨을 갈더니 나를 힘껏 밀쳐냈다. 

 

“흐갸아악!”

 

그리고 그대로 새된 비명과 함께 옆에 있던 전봇대에 세차게 머리를 들이받는다. 아주 빠른 속도로. 연거푸. 몇 번씩이고 퍽퍽퍽. 그 광기 어린 행위를 끝낸 소완은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한편, 노부부와 나를 향해 큼직한 총을 들어 올리던 하치는 크르르거리며 잔뜩 사나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힘이 잔뜩 들어간 주름이 그녀의 순하고 맹한 인상을 뒤바꿔버린다. 

 

“....안돼! 절대로 안돼!”

 

그러더니 갑자기 자기 오른팔을 콱 물어버린다. 

 

하지만 무력한 저항이었다. 총을 든 그녀의 오른손이 이빨 사이를 억지로 비집고 나온 뒤, 하치코의 머리를 세게 쳐 버리고는 다시 우리를 향했으니까. 몸과 머리가 아예 다른 존재인 것처럼.

 

그러고 보니 저거, 그냥 권총이 아니라 무슨 유탄 같은 걸 쏘는 거였지. 

 

....이야 좆됐네.

 

“할아버지....할머니...안돼.....”

 

하치코의 절망 섞인 절규를 들으며 생을 마감하겠다 싶었던 그 때, 이비가 대뜸 달려와 하치코의 팔을 붙잡았다. 

 

하치코에게 매달린 채로 그녀의 등으로 달려들려던 바니를 걷어찬 이비. 힘겹게 하치코의 손을 당겨가며 몸싸움을 벌이던 와중, 그녀가 여전히 바닥에서 경련하던 바니의 머리를 세차게 걷어찬다. 툭, 하고 머리를 뉘인 바니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이비는 마침내 하치코의 손을 돌려 총구를 C에게로 향하는데 성공했다. 이윽고 부들부들 떨리던 하치코의 손가락이 마침내 굽혀지더니, 펑펑하는 폭발음이 연달아 울렸다.

 

C와 흑백옷의 바이오로이드가 있던 자리에 남은 것은 자욱한 흙먼지와 사방에 흩뿌려진 파편뿐.

 

유미는 그 틈을 타 노부부를 부축해 그들을 피신시켰다. 다른 메이드들과는 달리 멀쩡해 보이는 그녀. 그녀가 저멀리에서 나와 H를 애타게 부른다.

 

H는 의식을 잃은 바니 옆에 쭈그려 앉아, 그녀를 깨우기라도 하려는 듯 바니의 몸을 처량하게 흔들고 있다. 

 

나는.....충격적인 광경 탓인지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고.

 

잠시 후, 약간이나마 손아귀 힘이 풀린 듯한 하치코에게서 총을 빼앗아 저 옆으로 던져버린 이비. 눈을 까뒤집으며 부들부들 떠는 하치코를 바닥에 뉘여둔 이비는 아까까지 C가 있었던 곳을 소총으로 겨누고 있다. 

 

그곳을 조준한 상태로 몇 발짝 앞으로 걸어가던 그녀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선다.

 

“.....They’re still up.”

(아직 살아 있습니다.)

 

“뭐?”

 

이비의 나직한 혼잣말에 멍청한 소리를 낸 나. 그와 동시에 흙먼지가 점차 옅어지며 C 놈의 모습이 흐릿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아직까지 서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이비는 그 희미한 실루엣을 향해 가차 없이 총알 세례를 퍼부었다. 그러나 총성이 멎고 난 뒤에도 C의 형체는 여전히 두 발로 잘만 서 있을 뿐이었다.

 

“....the fuck?”

(...뭔 씨발...)

 

마침내, 연기가 걷히고 놈의 모습이 선명히 드러난다.

 

 

 

 

 

“와 씨, 진짜 뒈지는 줄 알았네.”

 

놈은 흑백 옷의 바이오로이드에게 안겨 있었고, 아까 보았던 푸른색 꽃잎 같은 것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제보니 무슨 방어막 같은 거였나보다.

 

“....어, 이게 누구야 씨바.”

 

놈이 내 얼굴을 알아본 듯, 그의 작은 눈이 동그랗게 벌어진다.

 

“백마도 있네? 하, 역시 타사 제품엔 안 통하는 건가.”

 

이어서 C는 픽, 콧소리를 내더니 기분 나쁜 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새끼, 넌 꼭 내 손으로 죽인다고 했지. 야 짜장면.”

 

놈이 옆의 흑백 차림에게 말을 걸었다.

 

“싹 다 조져버려.”

 

“.....명령 수행하겠습니다.”

 

흑백 옷차림의 그녀가 큼직한 권총을 우리에게 쏘아댔다. 퍽, 퍽, 하며 묵직하고도 위압적인 총성이 우리를 향해 날아든다. 그녀의 총격은 공교롭게도 우리의 주변에만 날아 들었지만. 뭐랄까, 마치 일부러 주변에다 빚맞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어쨌든 총격은 총격, 위협적이긴 매한가지였다.

 

주변 땅바닥으로 총알이 계속 날아들고 있었음에도 H는 바니를 몸으로 감싸 보호하고 있었다. 나도 내 어깨 주변으로 날아든 총알에 번뜩 정신이 들었고. 나는 부랴부랴 옆에 있던 자동차 뒤로 몸을 피했다.

 

그새 차단벽 아래로 몸을 숨기고 허겁지겁 소총을 재장전한 이비는 냅다 바닥에 드러눕더니, 상체만 옆으로 빼꼼 내밀어 C에게 사격을 가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아든 총알에 기겁하는 C.

 

“흐으아악! 이 병신이 뭐하냐! 나부터 지켜야지!”

 

“.....분부대로.”

 

“어, 어, 야, 뭐해! 저 새끼들은 끝장내야지!”

 

흑백 옷의 바이오로이드가 총을 거두더니, C의 항의를 무시하고는 곧바로 놈을 품에 안아들고 뛰어올라 자동차 지붕 사이를 내달렸다. 한번 도약할 때마다 적어도 십 수 미터는 날아가는 게, 어째 한 백 년 전 무협 영화 같은 데서나 보던 장면 같았다. 그것도 자기 몸보다 훨씬 크고 육중한 C 놈을 안고서.....

 

초현실적인 광경에 넋을 놓고 있기를 잠시, 그들을 향해 조준을 유지하고 있던 이비가 내게로 다가와 어깨를 흔든다.

 

“주인님, 정신 차리세요. 지금 주인님까지 무너지시면 안 됩니다!”

 

그제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도 바니를 감싼 채로 신음을 흘리는 H. 그의 다리에서는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육중한 방패에 눌린 채로 바닥에 누워있던 하치코. 얼마나 세게 깨물고 있었던 건지, 그녀의 입술과 오른손에는 새빨간 핏자국이 선명하다. 그녀의 하얀 장갑이 짙은 붉은색으로 흥건하다.

 

주변의 나무들 사이로 몸을 피한채 이쪽을 바라보던 노부부와 유미. 그들의 표정은 경악과 공포 등으로 형언할 수 없이 복잡해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 눈 앞에는 잔뜩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이비와 바닥에 쓰러진 소완이 있다.

 

“주인님!”

 

“....아, 응. 나 괜찮아.”

 

하얗게 비어버린 정신을 어떻게든 정신을 수습한 나는, 부상을 입은 H를 가리켰다. 

 

“일단 H랑 바니부터 도와줘, 이비. 소완은 내가 챙길게.”

 

“알겠습니다.”

 

허리 뒤편에 매달린 구급낭을 뒤적이며 이비가 그들에게 뛰어갔다.

 

노부부도 숨어있던 곳에서 나와 다급히 하치코에게 달려간다. 토토토, 가볍게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유미도 내 곁으로 와 있었다.

 

“관리자님! 괜찮으세요? 셰프님은요?”

 

“난 괜찮은 것 같아....아마도. 소완은 모르겠네. 머리를 조금 다친-”

 

그러자 갑자기 숨을 허억 들이쉬며 벌떡 일어나는 소완. 유미는 꺄악, 비명을 질렀고 나 또한 ‘으아 씨발’하며 자지러졌다.

 

“주인께선 무사하시온지요.”

 

“...너 때문에 놀란 것 빼곤.”

 

“다행이옵니다. 혹여 소첩이 주인을 해치진 않았을까 염려했사온데....”

 

“그럴 뻔하긴 했는데....뭐 나만 멀쩡하면 된 거지. 지금은 좀 괜찮아?”

 

“그렇사옵니다.”

 

아직도 의식이 없는 하치코를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하는 노부부, 그리고 이비의 응급처치를 받으며 나 죽는다, 하며 엄살을 피워대는 H가 보인다. 

 

아까 겪었던 일들이 문득 머리를 스친다. 메이드들이 C의 지시를 따라 우리를 공격하려고 했고, 그것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려고 했던 것이.

 

“....대체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이지.”

 

“아마 그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야.”

 

이비에게 부축을 받으며 우리에게 다가온 H가 불쑥 입을 열었다.

 

“바이오로이드 애호 커뮤니티 사이에 돌던 소문이 있거든. 옛날 1차 연합 전쟁 때, 정부 인사들이나 민간에서 유통되던 삼안제 바이오로이드들에 어떤 코드를 심어둬서....필요하면 명령권을 삼안 이사회로 강제 재설정할 수 있게 했다고 말이야.”

 

그가 목으로 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각국 정부가 생각보다 일찍 무너져서 그것까지 쓸 일은 결국 없었다고 하는데, 어쨌든 소문으로는 그 코드가 현재까지도 모든 삼안 제품군에 남아있다고 하더라.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할 목적으로.

 

뜬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아주 터무니 없는 얘기는 아니었나봐.”

 

“...삼안 제품군이라.”

 

그래서 블랙리버 출신에 인간의 명령도 듣지 않는 이비는 멀쩡했던 건가. 

 

“그러고 보니 유미는? 너 멀쩡해 보이던데?”

 

“아, 저는 여기서 근무하긴 하지만 생산은 펙스 컨소시엄에서 돼서요...헤헤.”

 

허.

 

“하으으윽.....끄으윽....꺽....”

 

근처에서 누군가의 신음이 들렸다. 다급히 고개를 두리번거렸지만, 그것은 바니의 목소리도, 하치코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여기 계세요.”

 

이비는 H를 두고, 소총을 앞으로 겨누며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비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충동적으로 자리를 일어나 이비의 뒤를 따랐다. 

 

그곳에는 몸 곳곳에서 피를 흘리며 숨을 껄떡이는 콘스탄챠가 있었다. 우리를 올려다 보는 그녀의 볼 위로 눈물이 흐르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 가장 복잡한 표정을 지은 이비. 그녀가 콘스탄챠를 겨누던 총구를 내렸다. 

 

“끄흑...끅...”

 

콘스탄챠는 힙겹게 손을 움직여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트럭에 기댄 채 숨을 거둔 그녀의 주인과 바닐라가 보인다.

 

“...옮겨드리면 되겠습니까?”

 

이비가 그녀에게 나직히 물었다. 

 

콘스탄챠는 제대로 대답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 간절한 눈빛과 미약한 끄덕임에서 그녀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나와 이비는 조심스럽게 콘스탄챠를 그들의 곁에 옮겨주었다.

 

주인의 싸늘한 어깨에 힘겹게 몸을 기댄 그녀가 우리를 보며 피를 토해낸다.

 

“...큽...크흡.....케헥.......”

 

눈물로 촉촉한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우리를 비추었다. 그 속에 슬픔과 후회를 가득 담고서, 음울하면서도 또렷하게 빛나고 있다.

 

“....It’s not your fault.”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이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None of it is. You did what you could.”

(당신 잘못은 없어요. 최선을 다하셨잖아요.)

 

목에서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인지, 콘스탄챠의 고개가 주인의 어깨를 향해 점점 더 기울어졌다.

 

“....Rest well, ma’am.”

(....이젠 편히 쉬세요.)

 

힘겹게 고개를 돌려 푹 숙여진 주인의 얼굴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콘스탄챠.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던 듯 입술을 달짝이던 그녀는, 마침내 스르르 눈을 감고 차갑게 식은 주인의 어깨에 머리를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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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들을 저렇게 만들어 버렸더니 마음이 조금 아프네요.

저 장면을 만들어낸 제 꿈이 원망스럽습니다.


매번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