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겨울이라 그런지 6시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주변은 어두웠다. 난방도 가동하고 창문도 닫았지만 문 틈새로 새어 나오는 겨울바람만큼은 막기 힘들었다. 핸드폰 조명에 의지해 세면실로 들어간 내 눈에 조그만한 플라스틱 면도기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면도한 지 제법 오래됐다. 마침 면도기도 있는데 오랜만에 면도나 해 볼까. 

 


비누로 낸 거품을 문지른 얼굴에 막 면도날을 가져다 대려던 찰나,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블러디 팬서가 불쑥 들어왔다. 


 

“좋은 아침임다. 간밤에 잘 주무셨슴까?”


“노크 정도는 하고 들어와라. 깜짝 놀랐네.” 

 


긴 하품 소리를 내며 아침 인사를 한 그녀의 눈이 내 손에 들려있는 면도기로 향했다. 손에 쥐고 있는 플라스틱 면도기를 보자마자 졸음에 반쯤 감겨있던 그녀의 눈이 크게 뜨이더니 그녀의 얼굴이 목부터 새빨갛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재빨리 내 손에서 면도기를 뺏어 간 블러디 팬서는 면도기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이건 뭐지? 신종 괴롭힘인가? 압수해도 왜 면도기를 압수해? 아침부터 이상한 짓을 하는 블러디 팬서를 보자마자 화가 난다기 보단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면도중이잖아. 어서 줘.”


“민님은 수염 안 나시지 말입니다! 그거 다 솜털이지 말입니다!”


“솜털도 털이거든? 빨리 줘. 금방 쓰고 돌려주면 되잖아.”


“어, 어쨌든 이건 제꺼 지 말입니다! 민님은 다른 면도기 쓰시지 말입니다!”


 

면도기 하나 가지고 엄청 쩨쩨하게 굴긴 깨끗하게 쓰고 돌려주면 될 거 아냐. 그리고 어차피 블러디 팬서는 밀 곳도 없잖아. 남자처럼 수염 나는 것도 아니고. 설마 저걸로 다리털 미나? 


 

앞에 서 있는 블러디 팬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난 시선을 내려 슬며시 그녀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두꺼운 외골격을 두르고 다녀서 그녀의 외골격처럼 우락부락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그녀의 다리는 늘씬하게 쫙 잘 빠져 있었다. 피부가 티 없이 매끈매끈한 걸 보니 정말 따로 관리를 하긴 하나보다. 


 

다리털 제모용이라면 인정이지. 자신이 다리털 밀던 면도기로 남이 수염 미는 모습을 보는 건 좀..많이 껄끄럽지. 

 


“알았어. 너 써라 너 써. 깨끗이 씻고 돌려주려고 해도 그러네.”


“면도기는 제가 나중에 좋은거 찾아서 드리면 되지 말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밀 수염도 없어보이지 말입니다.”


 

아니 나중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필요한데. 저렇게 완강하게 쓰지 말라고 하니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다. 다리털 민 거라도 깨끗하게 씻어서 쓰면 되는데. 

 


결국 블러디 팬서의 기세에 밀린 내가 턱에 칠해놓은 비누거품을 물로 닦는 사이, 하얀 컵에 면도기를 꽂아놓는 블러디 팬서의 뒤로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브라우니가 배를 북북 긁으며 들어왔다. 

 


“에헤헤...좋은 아침임다. 간밤에 잘 주무셨슴까?” 


 

아직 잠이 덜 깬 나른한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던 브라우니는 블러디 팬서의 손에 들려있는 면도기를 보자마자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어, 이 면도기 어제 중령님이 쓰시던 그거 아님까? 그 제..”


“브라우니. 너 잠깐 나 좀 따라와봐라.”


“저 씻어야 하지 말입..아얏! 아픔다! 이거 부조리임다!!” 


"진짜 부조리가 뭔지 알려줘?" 


서늘해진 얼굴로 브라우니에게 어깨동무를 한 블러디 팬서가 데려간 곳에서 브라우니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침부터 애를 잡네. 작작 잡으라니까 그러네. 한숨을 쉰 나는 어느새 들어온 레프리콘을 빤히 바라보았다. 배꼽이 보이는 탱크탑 차림으로 양치질을 하던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양치질을 멈추고 조용히 경례를 하기 시작했다. 얘는 대체 언제 들어온 거야. 노크 좀 하고 들어오라니까.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전, 욕실 앞에 노크하라는 문구를 먼저 붙여야겠다.

 

 

*

 

 

공단의 전력을 복구한 이후, 블러디 팬서는 현재 우리가 지내는 곳을 대피소에서 관리소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시설 전체를 관리하는 관리소에는 항상 사람이 상주해야 하는데 대피소와는 거리가 너무 멀고, 또 여기서 장기간 호화롭게 살다간 애들 군기가 전부 빠질 대로 빠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군기는 좀 빠져도 될 것 같긴 하지만 관리소에는 인원이 상주해야 한다는 지적은 타당했기에 우리는 그날 밤을 새 가며 필요한 물건들을 전부 관리소로 옮겼다. 

 


침대나 가전기구 같은 커다란 물건은 옮기지 못했지만, 여기도 직원들은 위한 생활시설과 기숙사가 존재했기에 먼지가 쌓인 걸 빼면 사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여기는 수영장이 없다고 브라우니가 입을 비죽 내밀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렇게 수영이 좋으면 바다에 빠뜨려서 실컷 수영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블러디 팬서의 협박 한 번에 금방 얌전해졌다. 

 


나중에 수영하고 싶다고 할 때 같이 들어가 줘야지. 제어실로 온 브라우니의 머리에는 블러디 팬서에게 무슨 짓을 당했는지 작은 혹이 하나 나 있었다.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는 브라우니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준 나는 어제 생각했던 대로 일단 인원수를 늘리기로 했다. 

 


천운이 따라줘서 일이 정말 잘 풀리긴 했지만 네 명으로는 시설을 지키지도 못하고, 생존자를 찾기 위해 수색하러 나가기도 힘들다. 시설을 돌아다니며 공장을 돌리는 AGS들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 공장 작업용인데다가 기계에 기생하고 감염시키는 철충 앞에서 이 로봇들은 숙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마침 어제 찾아놓은 유전자 씨앗도 있겠다. 이 기회에 바이오로이드의 인원을 늘리는 게 가장 좋은 수겠지. 생존자 수색을 위해 어제 발견해놓은 애들부터 깨워야지. 

 


그녀들과 함께 어제 봤던 바이오로이드 제작 시설로 가자, 텅 비어있던 원통에는 어디서 나온 지 모를 녹색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뽀글거리는 녹색 액체를 보니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마치 쥬라기 공원의 한 장면 같구만. 티라노도 복원시킬 수 있을 것처럼 생겼는데. 

 


보관기 맨 앞에 놓여있는 유전자 씨앗을 들고 기계 앞에 선 나는 메뉴얼을 펼쳐놓고 열심히 기계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복원하려는 개체와 유전자 씨앗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고, 오리진 더스트 확인하고..또 개체에 맞는 장비 여부도 확인하고..아무튼 확인할 게 많았다. 역시 인간을 만드는 것이라 그런가? 엄청 손이 많이 간다. 

 


보안인증서와 거의 맞먹는 수많은 확인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바이오로이드 제작이 시작되었다. 


 

-오베로니아 레아 장비 제작 연동 확인. 오리진 더스트 주입 확인. 부품과 전력 확인. 오베로니아 레아 개체의 제작을 시작합니다. 제작에 소요되는 총 시간은 6시간 25분입니다.- 


 

제작 확인 문구가 뜨자마자 옆 공장에서 무언가 생산되는 소리가 들렸다. 문구로 봤을 때 바이오로이드를 생산하면 그녀가 쓸만한 장비까지 같이 연동되서 생산되는 구조인가 보다. 누가 설계해놨는지는 모르지만 제작하는 내 입장에선 편리하긴 하다. 


 

그나저나 인간 하나 만드는 데 6시간밖에 안 걸린다니. 직접 제작하는 입장이지만 이 세계는정말 말도 안 되게 발전했구나. 보글보글 거품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유리관 안을 바라보았다. 액체가 주입된 유리관 안에는 골격으로 보이는 조각이 점점 만들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래서 멸망 전 인류가 바이오로이드를 물건 취급했을 수도 있겠다. 고작 하루도 안 돼서 생명을 만들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신인 척 계속 까불다가 철충에게 참교육 당했지. 


 

옆에 서서 신기한 듯이 유리관 안을 바라보는 브라우니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리 봐도 사람이다. 설령 그녀들이 유리관 안에서 만들어졌어도 내 기준에서 그녀들은 충분히 인간이다. 인간처럼 존중받아야 한다는 게 지금의 내 생각이고 앞으로도 변하진 않을 예정이다.


 

주머니 속을 뒤져 찾아낸 초콜릿 하나를 브라우니에게 주던 도중, 그녀가 메고 있는 총이 보였다. 항상 곁에 있었을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녹슬어 있는 몸통과 반쯤 끊어져 있는 끈을 보자 새삼 그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레프리콘의 총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블러디 팬서의 무기는 상대적으로 깔끔했지만 철충의 공격을 받아 내던 외골격의 상태는 여기저기 긁힌데다가 피탄자국까지 있는 것이 좀 많이 심각해 보였다. 


 

뒤늦게 그녀들의 장비 상태를 체크한 나는 아군의 숫자를 먼저 늘릴 것이 아니었다. 있는 아군의 무기부터 챙겼어야 했다. 


 

“일단...장비부터 좀 어떻게 해 보자. 어때?”


“알겠슴다! 그런데 저희는 블랙리버 쪽이지 말임다..”


“그래도 총은 있지 않을까?”


 

낡은 총으로 싸우는 것보단 다른 회사 물건이긴 하지만 새 총으로 싸우는 게 낫잖아. 그녀들을 데리고 컨테이너 박스가 쌓인 곳으로 향한 나는 그녀들과 함께 컨테이너를 뒤져가며 그녀들이 쓸 무기들을 찾았다. 전투 식량과 차량들이 놓여있는 컨테이너 박스를 지나 붉은 컨테이너를 열자마자 소총을 포함한 각종 무기가 가지런히 쌓여있는 나무상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상자 하나를 열자 갓 만든 것처럼 반들반들 빛나는 소총 몇 자루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아래 달려있는 유탄 발사기 때문에 그런가? 무게가 제법 나갔다. 


 

“브라우니. 이거 한번 써볼래?”


“알겠슴다!”


 

놓여있는 총들 중 한 자루를 집어 브라우니에게 건네주자, 잠깐 몇 차례 둘러보던 브라우니는 바다를 향해 총구를 겨누더니 갑작스레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계속 사격하며 총을 몇 번 만지작거린 그녀는 건네준 총을 어깨에 맨 다음, 마음에 든다는 듯 해맑게 웃었다. 


 

“이 정도면 쓸만함다!”


“그래? 그럼 레프리콘은 어때? 브라우니와 같은 총으로 괜찮겠어?”


“저도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브라우니와 같은 총과 탄환들까지 알뜰살뜰 챙겨 든 레프리콘은 어느새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온 블러디 팬서를 바라보았다. 그래, 쟤가 문제다. 일반 보병인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은 총 몇 자루면 되지만 장교인데다가 중장갑병인 블러디 팬서는 그녀에게 맞는 바주카포도 모자라 외골격까지 찾아야 한다. 

 


“칫...”


 

혀를 차며 인상을 구기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일이 제대로 안 풀리나 보다. 슬쩍 그녀의 뒤로 다가가자 박살난 상자들과 함께 여러 총기들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다. 


 

“민님, 여기는 틀렸지 말입니다. 다른 곳을 찾아봐야 할 것 같슴다.”


“왜? 이것도 좋아보이는데. 좀 클래식한 디자인이긴 하지만 멋지잖아.”


“전 중장갑병이지 메이드가 아니지 말입니다.”


 

아니, 메이드도 이런 총을 쓰지는 않는데. 여기 메이드는 차나 커피를 따라주는 대신 총을 쏘고 다니나? 좀비 영화에서 본 윈체스터 소총 비슷하게 생긴 레버액션 소총을 다시 상자 안에 넣은 나는 다른 곳에 있는 상자를 까 보았다. 몇 자루씩 쑤셔 박혀있던 다른 상자들과는 달리 이번에 연 상자 안에는 멋들어지게 생긴 권총 두 자루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옛날 티 나는 아까 소총과는 달리, 이번에는 위에 레이저 조준경이 달려있는 제법 멋들어지게 생긴 권총이었다. 

 


블랙 맘바라. 정말 간지나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총이 맘에 안 들 리가 없지. 


 

생긴 것과는 달리 묵직한 무게를 자랑하는 권총 두 자루를 힘겹게 블러디 팬서에게 건네주자, 그녀는 떨떠름한 얼굴로 권총을 받더니 몇 번 둘러보고선 다시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전 중장갑병이지 말입니다..죄송하지만 이런 무기는 익숙치 않슴다.”


“그래? 그러면 내가 쓰지 뭐. 호신용으로 한 자루 정도는 가지고 다녀야지.”


“그거 바이오로이드 용이지 말입니다. 인간분이 바이오로이드용 무기 쓰시다간 손목 나가시지 말입니다.”

 


블러디 팬서의 말을 들은 나는 권총 두 자루 중 하나를 챙겨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손잡이 부분이 쑥 튀어나오는 데다가 뚜뚝 하고 섬유 뜯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손목 나가기 vs 철충한테 총 맞아 죽기 중 고르라면? 당연히 손목 쪽을 골라야지. 이렇게 된 이상 아까 그 레버액션 소총도 챙기자. 쏘는 법은 잘 모르지만, 총구를 상대 쪽으로 겨누고 방아쇠 누를 줄만 알면 반 정도는 먹고 들어가겠지. 적어도 없는 것보단 백배는 나을 것이다.


 

졸지에 블러디 팬서가 쓸 무기 대신 내가 쓸 무기를 가지고 나와버렸다. 유일하게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빈손으로 나온 블러디 팬서를 위해 다른 컨테이너들도 열어 보았지만 그녀에게 맞는 무기는 없었다. 하긴, 아무리 군수공장이라곤 해도 바주카포 같은 물건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이 더 이상하잖아. 그녀의 무기가 어디에서 생산되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그녀에게 줄 만한 장비가 없다. 


 

탄약은 주지 못하니 하다못해 외골격 수리라도 해주고 싶지만 수리를 하는 법조차 모른다. 공장 생산라인에서 할 일 없이 가동되어 있기만 한 기계들이라면 수리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수리할 물자가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나중에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알맞은 장비를 찾아줄 때까지는 일단은 최대한 아껴 쓰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블러디 팬서, 미안한데 너에게 맞는 장비가 없으니 당분간은 최대한 탄약을 아끼는 쪽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에이. 민님이 미안하실 일이 아니지 말입니다. 정 급하면 스틸라인 애들처럼 아무 총이나 집어서 쓰겠슴다. 제 총을 찾기보단 슬슬 신입이나 보러 가는 게 어떻슴까? 슬슬 시간 됐지 말임다.”


“어, 진짜?”


 

손에 찬 손목시계를 살펴보니 정말 블러디 팬서의 말대로 이미 7시간이 지나있었다. 6시에 수색을 시작해서 1시가 되도록 건진 것이 이것밖에 없다는 게 좀 슬프긴 했지만, 우리 형편에 이곳을 꿰차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행운이다. 나중에 저 컨테이너 안에 들어있는 차량을 하역할 수 있으면 그걸 타고 도시를 한번 돌아다녀 봐야지. 


 

생산이 끝난 공장의 문을 열자, 새로 복원된 바이오로이드가 옷가지까지 차려입고 나와 있었다. 배를 훤히 드러낸 메이드와 드레스를 합쳐놓은 듯한 옷을 입은 그녀는 겉모습만 보면 블러디 팬서와 동갑으로 보였다. 블러디 팬서가 깐깐한 군인같은 인상이라면 오베로니아 레아는 순하고 상냥한 누나 같은 이미지다. 


 

머리에 달린 꽃장식을 매만지던 그녀는 우리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며 이쪽을 향해 날아오더니 날아다니는 조그만한 로봇 머리같이 생긴 기계 두 개를 데리고선 내 앞에 둥둥 뜬 채 내게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어머, 안녕하세요. 전 페어리 시리즈의 맏이인 ‘오베로니아 레아’라고 해요. 그 쪽분이 제 주인님이시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레아라 소개한 그녀는 느긋해 보이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지만 내 시선은 그녀의 등 뒤로 향했다. 그녀의 등 뒤에는 동화 속에서 나올 법한 커다란 요정 날개 같은 날개가 있었는데 그걸 이용해 그녀는 날고 있었다. 날아다닌다는 바이오로이드가 있다고 블러디 팬서의 입으로 듣긴 했는데 이렇게 직접 보니 정말 신기하다. 


 

“주인님? 제 날개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날아다닌다는 게 신기해서..”


“후훗. 날아다니는 건 저 뿐만이 아닌걸요. 저희 페어리 자매들은 전부 날개를 이용해 날아다닐 수 있답니다.”


“진짜 요정같네..만나서 반가워, 레아. 앞으로 잘 부탁할게.”


 

살포시 웃는 그녀의 모습은 자상해 보이는 누나 그 자체였다. 레아와 간단히 인사를 마친 나는 블러디 팬서에게 상황 설명을 부탁한 다음, 그녀 양옆으로 돌아다니는 드론 비스무리한 기계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이게 오베로니아 레아의 장비 같은데..복장을 보나 드론을 보나 아무리 봐도 군용이라기보다는 가정용 같단 말이지. 그래도 지금 상황에는 더운밥 찬밥 가릴 때가 아니니까. 


 

그리고 가사라면 지금 있는 우리 모두가 사이좋게 못 하는 일이다. 여기서 가사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와준다면 정말 다행이지. 

 


“블러디 팬서씨에게 현재 상황은 들었어요, 주인님. 정말 고생이 많으셨겠네요.”


“어..근데 그렇게 고생하진 않았어. 운이 좀 많이 따라줬거든.”


“후후. 그래도 좋으신 분을 주인님으로 만나서 다행이네요. 기회가 된다면 제 자매들도 소개시켜 드리고 싶어요.”

 


아 맞다. 자매들 하니까 생각났네. 얘 말고도 두 명인가 더 있었지. 다..뭐시기라고 불리는 애와 타이타니아라는 간지나는 이름을 지닌 애 하나. 보관소에서 붉은 라벨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유리병을 하나 꺼낸 나는 레아를 바라보았다. 오늘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우니와 레프리콘과 살갑게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사교성마저 좋은 것 같다. 


 

역시 페어리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구나. 여기 타이타니아라는 애도 사교성이 좋으려나. 가사에 쥐약인 우리에게 가사요원들은 정말 소중한 인원들이니 부디 우리와 잘 지낼 수 있도록 사교성이 좋았으면 좋겠는데.


 

“주인님, 지금 뭐하시고 계신가요?”


“네 자매들을 복원하려고 해. 혼자면 쓸쓸하잖아. 여기 타이타니아라는 이름이 적혀있는데 아는 애야?”


“주인님. 그 자매의 이름은 ‘티타니아 프로스트’라고 해요. 그리고...죄송하지만 그 아이의 복원은 멈춰주셨으면 합니다..”

 


말을 마친 그녀의 푸른 눈은 매우 슬퍼 보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검까, 레아씨. 지금 저희는 한 명이라도 급한 상황이지 말입니다.”

 


옆에 서 있는 블러디 팬서의 말에 푸른 눈을 몇 차례 깜빡인 그녀는 내 손에 들려있는 유리병을 향해 안타깝다는 시선을 보냈다. 아마도 무슨 슬픈 사연이 있어보이는데. 그녀의 말을 듣고 결정해도 늦지는 않아 보인다.

 


“레아, 혹시 거절하는 이유라도 알 수 있을까?”


“제 쌍둥이긴 하지만 그녀의 성격은 매우 위험해요..자칫하면 주인님께 해를 끼칠수도..”


“민님, 걔 복원은 포기하는 게 좋겠슴다.”

 


괜히 붉은 라벨을 붙여놓은 게 아닌가 보다. 해가 된다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블러디 팬서는 거의 우디르급의 태세 전환을 보여줬다. 내게 해가 된다고? 어디 애비 셋 가진 놈과 비슷한 성격인가 보네. 시간이 충분하다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설득에 좀 노력을 기울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한시가 바쁜 상황이다. 나중에 혹시 여유가 생긴다면 그때 복원해도 늦지는 않겠지. 



티타니아의 이름이 적힌 유리병을 깨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보관소에 놓을 때까지, 레아는 그 유리병을 향해 안타깝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그녀의 유리병을 옆에 놓은 나는 옆에 있는 유리병을 꺼내 레아에게 보여주었다. 


 

“다..뭐시기라고 하는 앤데..얘는 어떤 애야?”


“어머나. 다프네군요. 정말 상냥하고 착한 아이랍니다. 가사 능력도 정말 뛰어난 아이에요.”


 

그럼 얘는 안전한 거구나. 그럼 복원해야지. 무엇보다 가사요원이다. 복원이 아니라 네발로 기어서 모셔 와도 부족한 인원이니까. 

 


다프네라는 바이오로이드의 복원 절차를 실행한 우리는 바깥으로 나와 레아와 함께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캔콜라를 까 한 모금 마신 나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날 빤히 바라보는 오베로니아 레아를 바라보았다. 요정과 비슷해 보이는 날개로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보면 사람이보단 네버랜드에서 온 팅커벨의 성장판 같아 보인다. 


 

“보면 볼수록 레아는 정말 요정 같단 말이야.”


“후훗. 칭찬해 주셔서 고마워요, 주인님. 첫 만남서부터 이렇게 칭찬해 주시는 분은 주인님밖에 없을거에요.”


“그래서 미안한데 앞으로 가사를 좀 맡겨도 될까? 우리 전부 가사가 쥐약이거든..”


“가, 가사요? 죄송한데 저 가사는 자신이 없어요..”


“어 눈옴다..”


 

레아의 말을 듣던 도중, 눈이 온다는 브라우니의 말에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정말 회색 하늘 아래 함박눈이 머리 위로 펑펑 떨어지기 시작했다. 멸망한 세계에서 이렇게 모두 모여앉아 첫눈을 보다니. 이거야말로 낭만이 아닐까? 


 

“와, 눈임다. 민님, 나중에 저랑 같이 눈사람 만드는 거 어떻슴까?”


“어머, 재밌겠네요. 저도 같이 해요.”


“브라우니..저흰 지금 놀러 온 게 아닙니다.”


“레프리콘 말이 맞슴다. 눈이 오면 제설작업 해야 하지 말입니다. 여기 있는 인원으로 이 넓은 곳 제설하려면 몇 일은 족히 걸리지 말입니다.”

 


제설작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헤실헤실 웃던 브라우니가 웃는 모습 그대로 굳어버렸다. 인터넷에서 악명높던 제설작업을 여기와서 해야 할 줄이야. 블러디 팬서는 하늘을 노려보며 한숨을 쉬었다.


 

“팬서야. 꼭 제설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눈 내린 공장의 풍경도 멋지지 않을까? 그냥 냅두면 햇빛이 알아서 녹여줄 것도 같은데.”


“지금 1월이지 말입니다. 녹기는커녕 전부 얼지 말입니다. 분명 미끄러지실 검다.”


“그럼 AGS들 보고 시키면..”


“로봇이라고 만능은 아님다. 사실 걔네들 자기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거 별로 없지 말입니다.”


 

결국 우리가 넉가래 들고 일일이 밀어야 한다는 거구나. 그런데 여기 넉가래가 있기나 한가? 기왕이면 넉가래 말고 불도저 같은 게 있으면 좋겠는데. 


 

코 앞으로 다가온 제설작업의 공포에 떠는 동안, 내가 타준 커피를 한 모금 홀짝 마신 레아는 날 바라보며 생긋 웃더니 하늘을 빤히 바라보았다. 

 


대체 뭘 하려고 하냐며 물어보려던 도중, 그녀의 양옆에 둥둥 떠다니던 로봇 두 개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눈이라면 걱정마세요, 주인님. 저는 농업용 모델로써 신경전기를 마음대로 이용해 기상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거든요. 인공강우와 천둥번개를 불러오는 것이 제 주특기지만 공장위의 눈구름 정도는 금방 걷어낼 수 있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회색 하늘이 맑게 개더니 땅에 떨어진 눈이 점점 녹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눈을 멈춘 그녀는 잘했냐는 듯 상냥하게 웃으며 날 바라보았지만 상식을 훨씬 벗어난 광경을 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그녀에게 뭐라 해줄 말이 없었다. 

 


내가 뭘 잘못 들었나? 기상 조작? 사람 혼자의 힘으로 기상조작을 할 수 있다고? 인공강우? 천둥번개? 아무리 150년 후라지만 이게 말이 되나? 사실 이거 과학이 아니라 마법 아냐? 

 


그래.이건 마법이다. 마법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어. 아무래도 우리에게 온 레아는 요정이 아니라 마법사인 것 같다. 



------------------------------------------------------------------------------------------------------------------------------------------------------------------


마법임. 암튼 마법임. 


탱커에 이어서 마법사까지 영입성공. 왠지 레아라면 비바람 불러오듯이 흐린 날씨도 맑게 만들 수 있을듯?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 설정오류 지적도 언제나 환영. 


1화 https://arca.live/b/lastorigin/44976706

2화 https://arca.live/b/lastorigin/44999112

3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036211

4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120694

5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159204

6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239531

7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275420

8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373070

9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402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