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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저기 온다. 여어, 프란츠! 이쪽이야!''


내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저 멀리서 걸어오던 프란츠가 두 손을 머리 위로 들고 흔들었다. 옆에서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손을 흔드는 하치코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페로는 덤이다.


''안녕하세요, 그레고르 주인님!''


''직접 뵈는 건 처음이군요. CS 페로라고 합니다.''


''어어, 그래. 잘 부탁한다. 그나저나, 콘스탄챠 너도 왔어? 게다가 그건 뭐야? 해녀복?''


''제 전투 슈트에요. 평소라면 굳이 입진 않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이 꺼냈죠.''


''흐으음...''


콘스탄챠가 메이드복을 안 입으니 뭔가 어색하다. 메이드복을 입었을 때 가슴에 뚫려있던 구멍이 나름의 매력 포인트였건만. 


아니, 그래도 바디슈트도 그리 나쁘진 않을지도? 디자인은 좀 구리지만, 몸에 달라붙는 재질인 덕에 이런저런 신체부위가 더 도드라져 보이는 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하체 쪽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메이드복보다 더 낫냐고 묻는다면...


''...''


''그레고르 주인님?''


''...역시 난 가슴에 한 표.''


''지, 지금 무슨?! 그거 성희롱이에요!''


오. 반응 확실하군. 역시 바닐라보다는 이쪽이 놀리는 재미가 있다.


''응? 페로, 왜 그래? 아무것도 안들려~''


''듣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손이 모자라 제 귀를 막을 수 없다는 게 한이군요.''


콘스탄챠 옆에서는 페로가 하치코의 귀를 틀어막고 있었고, 프란츠 역시 이해를 못 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여간 내숭 떠는 것 하고는.


''자,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슬슬 가볼까? 몸 갈아끼우러. 아마 지금쯤이면 라비아타 누님이 세팅은 다 해놨을 거야.''


''그건 희소식이네요. 저도 빨리 일 보고 오르카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으니. 혹시 얼마나 걸리는지 아시나요, 그레고르 씨?''


''아니, 몰라. 라비아타 누님이 나한테는 기계 근처로 올 생각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아서. 그래도 길어봐야 3~4시간 아닐까?''


                                                                                               


''80시간이요?!''


신체 재건 장치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라비아타 씨의 말에 나도 모르게 큰소리가 나왔다. 옆에 계시던 콘스탄챠 씨와 그레고르 씨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그레고르 씨가.


''어어어...내 생각보단 좀 기네. 잠깐, 그럼 일수로 따지면 얼마야? 하루가 24시간이니까...3일 조금 더 되네?''


''정확히는 3일하고도 8시간이에요. 솔직히 저도 이렇게나 오래 걸릴 줄은 몰랐는데, 이건 좀 문제가 될 수도 있겠네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의식을 옮기는 게 80시간이나 걸리는 거예요? 육체가 준비되지 않기라도 한 거예요? 아니면 기계에 이상이 있다거나?''


''아뇨, 육체는 문제가 없어요. 다만, 주인님의 뇌 속에 있는 정보나 주인님의 성격, 무의식 속에 있을 수도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온전히 옮기려면 시간이 꽤 걸리는 거죠. 그나마 스카디 양의 도움 덕에 최대한 시간을 줄인 거지, 그것도 없었으면 꼬박 일주일을 기다렸어야 했어요.''


''나 참. 사람 몸 하나 갈아끼우는데 3일이라니, 멸망 전의 기술도 만능은 아니구만? 3일이면 1)잭 바우어가 세상을 3번은 구하고도 남을 시간이건만.''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뇌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니까요. 게다가 프란츠 주인님의 무의식 속에는 철충에 대한 정보와 대처법 같은 유용한 지식도 있잖아요. 자칫해서 그런 것들까지 전부 지워버리는 것만큼은 피해야죠.''


라비아타 씨의 마지막 한마디에는 나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 인생에 기억상실은 한번이면 족하다.


''뭐...그런 거라면 딱히 할말은 없네. 위험한 것 보다는 천천히 안전하게 가는 게 낫지. 그런 식으로 보면 3일이 그리 긴 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안 그래?''


''맞아요. 안전한게 최우선이죠. 그리고 3일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그 기간동안 쭉 잠들어 있을테니 별 문제도 아니고.''


물론 중간에 철충이 쳐들어온다던가 하는 일은 있을 수 있겠지만, 지금 이곳에 배치한 병력의 수를 고려하면 어지간한 규모는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나 대신 지휘를 맡아주실 분도 세 분이나 계시지 않은가?


''이미 준비 다 해놓고 오르카 밖으로 나온 마당에 다시 돌아가는 것도 웃기겠죠. 라비아타 씨, 장치 지금 사용 가능한가요?''


''네. 일단 어떤 신체로 재건하실지 정하시고, 저쪽 포드로 들어가시면 나머지는 저와 스카디 씨가 알아서 할 거예요.''


신체를 정한다는 게 무슨 말인가 싶어 의아해하던 찰나, 장치 내부의 시험관에 세 사람의 몸이 둥둥 떠다니는 걸 보고 눈치를 챘다. 요컨대, 내가 어떤 나이대의 신체를 원하는지를 묻는 것이리라.


''소년 신체로 할게요.''


내 원래 몸이 소년이기도 하고, 애초에 내 나이가 10대 언저리(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렇다)인 마당에 다른 선택지가 고려대상일 턱이 없다.


''알겠습니다. 그럼 적당한 체형의 소년 신체로 설정해드리겠습니다.''


라비아타 씨가 패널을 몇 번 두드리시자, 시험관 속에서 떠다니던 소년의 신체에 케이블이 연결되었다. 그와 동시에 포드의 덮개가 열리며 건조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의식 전이 프로세스를 시행합니다. 대상자를 포드 내부에 위치시켜 주십시오.]


나는 걸치고 있던 보호구를 벗고는 포드에 주섬주섬 들어갔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내부에 쿠션이 있어서 꽤 편안했다.


[프로세스를 시작합니다. 뇌파 분석기를 착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아, 이건가?''


포드 내부에 달려있던 헬멧같은 걸 쓰자 포드의 덮개가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는 모양이다.


''행운을 빌게요, 주인님! 좀 이따가 봬요!''


''2)혹시 꿈에서 대머리 흑인이 알약을 주면 빨간색으로 골라!''


콘스탄챠 씨와 그레고르 씨의 응원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대답했다. 3일 동안 의식을 잃는다는게 솔직히 무섭긴 했지만, 그래도 저분들이 있으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 것도 사실이다.


[포드 작동 이상 무. 프로세스를 개시합니다. 마취 가스 살포까지 3...2...]


                                                                                               


''엄지손가락은 뭐하러 치켜들었대, 쓸데없이 비장하게. 누가 보면 3)용광로에 다이빙하는 줄 알겠네. 라비아타 누님, 이거 괜찮은 거 확실하지? 아니, 뭐, 누님 실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바이탈 사인에는 이상이 없으시네요. 아직까진 순조로워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구만. 그럼 앞으로 3일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누님? 난 저 앞에서 입구나 지키고 있을테니까 뭔일 있으면 부르지 말고.''


''네, 알겠...네?''


''부르지 마쇼, 바쁠 예정이니까. 마리나 레오나 불러, 가뜩이나 할 말도 많아보이던데. 콘스탄챠 너도 따라올래?''


''네. 어차피 프란츠 주인님이 다른 분들에게 전해달라고 하신 말도 있으니, 같이 가는 김에 전해드리면 되겠네요.''


''하치코랑 페로는? 같이 안갈래?''


''전 괜찮아요!''


''저도 사양하겠습니다. 저흰 프란츠 주인님의 호위로 온 거니까요.''


''직업정신 투철해서 좋네. 오케이. 그럼 나중에 보자고.''


그렇게 나와 콘스탄챠는 시설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단둘이서 말없이 걸어가는 게 어색하긴 했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그래서, 전해줘야 할 말이라는게 뭐야?''


''별 건 아니에요. 그냥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으니 대비해놓아라' 정도의 조언 정도? 솔직히 마리 대장님이나 레오나 대장님이나 이미 한참 전에 대비해 놓았을 것 같긴 한데, 혹시 모르니 전해달라 하시더라고요.''


''쓸데없는 걱정이 많은 게 걔 장점이자 단점이지. 네가 고생이 많다.''


''하루가 멀다하고 리제 양과 다투는 바닐라보단 낫죠. 그나저나, 그 둘은 어디 있나요?''


''걔들은 오르카에 가져갈 게 좀 있어서, 그거 손보는 중.''


''혹시 또 지난번처럼 철충 잔해는 아니겠죠?''


''철충 잔해는 아니니까 걱정 마. 바이오로이드 관련 샘플인데, 혹시 몰라서 들여놓으려고. 공방에.''


''아, 그렇군요. 의심해서 죄송해요. 워낙 바닐라에게 들은 게 많아서.''


''에이, 내가 아무리 그래도 거짓말은 안하지.''


거짓말은 아니다. 다만 그 바이오로이드 샘플이 고블린, 그것도 변이된 고블린의 샘플일 뿐이지.


''흠, 흠! 그나저나, 프란츠가 고른 신체, 그거 소년 체형이었지? 마리가 들으면 환호성을 지르겠네. 그리고 보니 콘스탄챠 넌 내심 아쉬워하는 표정이더라?''


''아, 아니에요! 아쉽긴 누가!''


''에이, 거짓말 하기는. 딱 보니 엄청 기대한 표정이더만. 넌 무슨 취향인데? 무난한 청년? 아니면 중년? 어차피 며칠 뒤면 쟤랑 너랑 물고빨고 다 할 건데, 취향 알아서 나쁠 건 없잖아?''


''물고 빤다니, 단어를 고르셔도 그런...!''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내심 상상하고 있었는지, 콘스탄챠의 얼굴이 점차 붉게 물들어갔다. 역시 농담에는 이런 리액션이지. 바닐라가 자기 언니를 반이라도 닮았으면 좋겠건만.


''진정해, 진정. 어우, 야, 얼굴 빨개진 거 봐. 누가 보면 술 마신 줄 알겠네.''


                                                                                               


그렇게 콘스탄챠와 잡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입구에 가까워졌다. 30분이 넘도록 계속 걸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을 정도로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와, 시간 참 빠르게 가네. 앞으로 3일 정도만 이렇게 흘러가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러게요. 프란츠 주인님은 철충의 습격이 있을 수 있다고 하셨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예측이 빗나갔으면 좋겠어요.''


''그건 나도 매한가지야. 어우, 총소리는 이제 지긋지긋해. 총소리도, 포탄 터지는 소리도, 고함소리도, 싹 다. 이젠 아예 환청이 들린다니까? 지금처럼.''


''환청이요?''


''어. 환청. 지금처럼 생생한 건 처음이지만. 보아하니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거 같은데, 약이라도 먹어야 하나?''


''어...아뇨, 제가 봤을 땐 그러실 필요 없을 거 같아요. 오히려 정상이신 것 같은데요?''


''뭐, 리제도 그렇게 말하긴 했긴 했다만...어? 뭐야, 너도 의료지식 있었어?''


''아뇨, 그런 건 아닌데...저 총소리, 저한테도 들리거든요.''


''...''


''...''


콘스탄챠가 한 말을 이해하는데 5초. 그리고 지금 들려오는 소음의 정체를 짐작하는데 5초. 그리고 상황을 받아들이는데 10초. 총 20초 동안 나와 콘스탄챠는 말없이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그냥 환청인 거로 하면 안될까?''


''...안되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그렇겠죠.''


그렇게 답하는 콘스탄챠의 표정도 그리 밝지는 않았다. 아마 내 표정도 그리 좋진 않을 것이다. 우리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보리만이 잔뜩 흥분한 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하여간 눈치없기는.


''후우...''


''기운 내세요, 그레고르 주인님...''


그렇게 말하는 콘스탄챠의 목소리에도 피곤함이 뚝뚝 묻어나왔다. 사돈 남 말 한다라는 말은 이때 쓰라고 만든 말이겠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입구로 항하자, 익숙한 소리와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방어선을 만들어놓고 총을 쏴대는 아군, 그리고 그 건너편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철충. 어찌나 익숙한지 토가 나올 지경이다.


''...어째 하루가 멀다하고 싸움이냐, 이 (곱지 못한 말)들아!!!''


                                                                                               


패러디 목록


1)미국 드라마 '24'의 주인공. 매 시즌마다 세계적인 위기를 24시간 안에 해결하는 능력자.


2)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이 가상 세계에서 깨어날 때 붉은 알약을 먹는다.


3)영화 '터미네이터 2'의 마지막 장면.


요새 게임 하느라고 바빠서 글 쓸 시간이 없다.


덕분에 글 다 쓰는 시간이 조금씩 늦어지고 있다.


이러다가 토요일에 올리지도 못하는 거 아닐까.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