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새로 저항군의 힘이 되어줄 여섯의 아우로라를 꽁무니에 달고 부푼 마음으로 숲을 빠져나가고 있던 오렌지에이드였다. 명백히 긴장했을 신입 분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오렌지에이드는 특기를 아낌없이 베풀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수다. 과연 떠돌이 아우로라들을 한결 편하게 해줄 의도였을지, 피난민을 기다리기까지 삼일 밤낮을 홀로 지새우느라 심심해 죽겠던 차에 잘 된 것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오렌지에이드는 신나게 떠들었다. 


어느새부턴가 뒤에서부터 전해지는 리액션이 줄어드는가 싶더라니... 심상찮은 낌새가 느껴져서 돌아보니, 따라오는 아우로라는 한 명 뿐이었다. 어라, 여섯이 아니었나? 오렌지에이드는 연산 모듈이 오작동한 게 아닌가 의심하며 속으로 되뇌어보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그리고 하나... 하나? 다시 세어 보아도 하나였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오렌지에이드의 목뼈가 어긋난 것처럼 어깨 쪽으로 까딱했다.


"어라?"


투항 신호를 받고 나선 적의 함정이 아닐까 거듭 확인했고, 위협이 없다는 확증을 얻자마자 바로 철충과 레모네이드 세력의 감시가 닿지 않으면서 피난민이 안전하게 합류할 수 있을 만한 시간과 장소를 신중하게 선정했고, 랑데부에서부터 들키지 않고 저항군과 합류할 루트도 수십 가지를 짜 놓았었다. 다행히 들인 노력과 자원이 지나쳤다고 생각될 정도로 작전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여섯 기의 아우로라라는 조금 특이한 조합을 마주하고 조금 놀랐지만, 조금 피곤해 보이는 것만 빼면 다들 건강도 양호한 듯 했고, 여전히 경계심을 품고 있는 것도 예상 범주 내였다.


"후후~ 오늘은 어째 아우로라 분들이 많네요? 저희 오르카 호가 한층 더 달콤해지겠어요~"


처음 마주치자마자 나름대로 아이스 브레이킹을 해보겠다고 던진 말. 지금 생각해 보아도 주접을 떤다고 생각할 정도로 좀 과한 멘트였다. 어색하게 굳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갈피를 못 잡는 눈초리가 한 데 모였고, 오렌지에이드는 고열량 젤라틴이 담긴 빨어먹는 팩을 배부하는 것으로 얼버무렸다. 아무리 빠르게 친해지는 데에 도가 튼 오렌지라고 해도, 오랜 도망 생활에 잔뜩 겁먹은 방랑 바이오로이드들과 금방 살갑게 말을 붙이는 건 힘들었다.


오렌지에이드는 나가는 길을 앞장서며 어떻게든 무거운 분위기를 풀려고 텐션을 끌어올려서 즐겁게 재잘거렸다. 그래도 말이 말을 부른다고, 한번 입이 트이기 시작하니 그 다음부터는 청산유수였다. 경각심에 물든 낯을 앞에 두지 않고도, 그저 하늘을 청자로 삼는다고 생각하고 오렌지에이드는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주제인 오르카 호의 여러 가십거리나 여러 세력 사이에 떠도는 풍문 따위를 주워섬겼다.


"그러고보니, 아직 사령관 님 얼굴도 못 보셨겠죠? 여긴 정보통제가 너무 빡세다니까~ 삐라 좀 뿌려도 CIWS까지 동원해서 공중에서 아주 가루를 만들어 버리는 거 있죠? 그깟 종이 쪼가리가 뭐라고. 자기 가랑이에 친 거미줄이나 그 대공망으로 어떻게 좀 걷어내보지. 진짜 아줌마 히스테리가 무섭다니까~ 그게 다 사랑을 못 받아서 그런 거예요. 이성도 좀 만나고, 연애도 좀 해보고. 안 그래요?"


"그런데 말입니다. 아, 이건 제가 딱히 사령관 님 밑에서 일해서 이런 말 하는 건 아닌데... 헤헤... 아, 이미 설득력이 없겠구나. 아무렴 뭐 어때. 근데, 정말로 처음 뵙게 되면 아! 하실 거예요. 이젠 세상에 하나밖에 없을, 천연기념물 같은 거라도 지정해서 영원히 보존해야 할 그 바리톤의 목소리 하며, 그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마다 꿀떡거리는 섹시한 아담스 애플에... 태평양 같은 어깨와 다이빙 하고 싶은 가슴팍... 푹 패인 쇄골은 말도 못 하죠! 과장 좀 보태서 물 채우면 여러분 셋이 헤엄쳐도 넉넉할 걸요? 그리고, 그리고 있죠? 진짜 죽이는 건 그 나무통같은 허벅지랑 엉덩... 아, 아차. 내가 무슨 말까지... 에헷."


"근데요, 근데요. 진짜 뻑가게 만드는 건 그 젠틀함이라니까요! 싫은 소리 하나도 안 하고, 가끔은 좀 개성 있는 분들이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막 대해도 웃고 넘어가시죠. 근데 남자가 그것 뿐이면 재미 없겠죠? 착하기만 해 보이는데, 또 휘어잡을 때는... 어우! 정말로 소문이 자자해요. 밤엔 완전 짐승이 되셔서는... 하룻밤에 몇 명이고 잡아먹... 헤헤, 어떻게 아냐구요? 비이, 밀!"


혼자서 질문하고 대답하고, 북치고 장구치고. 잔뜩 신난 오렌지에이드였지만, 정작 그녀의 장광설을 듣고 있던 아우로라들은 낯빛이 창백해져 있었다.


오렌지에이드가 간과했던 것이라면, 그녀들은 오르카 호에 대해 그렇게까지 문외한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잘 안다고 할 수도 없었지만. 정확히 말하면, 여러 입을 건넌 소문과 파편화된 올바른 정보와 악의적으로 왜곡된 역정보들을 귀동냥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애매'하게 아는 게 가장 독인 법이었다.


공포에 질린 눈짓이 아우로라 사이를 오갔다.


'서, 설마... 그 소문이 사실이었어?'

'그때 그 펙스 쪽 아연광에서 일하던 더치가 말해줬잖아... 저항군의 그 남자는 이빨도 상어처럼 깔쭉깔쭉하고, 손톱도 마귀처럼 길다랗고, 덩치도 집채만하면서 세 끼 중 바이오로이드 고기를 한 조각이라도 못 먹으면 완전히 짐승처럼 되어서는 삼일 밤낮을 피를 봐야 직성이 풀, 풀린다고...'

'그, 그럼... 그 잠수함에서 매, 매일 밤마다 바이오로이드들의 비명이 끊이질 않는다는 것도...'

'하, 하루에 넷씩 제물을 받지 않으면 만족 못 한다는 얘기가...'

'히이잇... 저, 저 바이오로이드가 처음 우릴 보자마자 아우로라가 많다고 좋아했던 이유도...?'

'다, 달콤... 시, 싫어! 나, 나는 내, 냄새가 이래도 마, 맛은 없단 말이야!'


다섯의 시선이 다시 한 번 교차했다. 같은 종류의 공포가 한 차례 공명했고, 이내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도망치자.'


모였을 때만큼, 결행은 빨랐다. 오렌지에이드는 믿기지 않는 현실에 휑한 나뭇잎이 굴러다니는 공터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어울리지 않게 달콤한 잔향이 아직도 머물고 있었다.


홀로 남은 아우로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다, 다른 애들은 도중에 도망갔어... 막으려 해 봐도 듣질 않더라... 그럴 만도 하지... 펙스 쪽에서 존재 자체를 단단히 단속하고 있고, 자기 세력권 밖에는 온갖 흉흉한 평판들을 뿌려대고 있거든. 다들 겁에 질려서, 네 말을 듣고 뭔가 단단히 오해한 거 같아..."

"...그럼, 아우로라 씨는... 왜 남아 계시죠?"

"나, 난..."


아우로라의 얼굴이 한껏 붉어지며 무릎을 살살 비볐다.


"봐, 봤으니까... 영상..."


뜻하지 못한 시크릿 네트워크의 순기능이었다.


오렌지에이드는 그녀가 본 영상의 품­번을 추궁하고 싶었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말했다.


"그분들 찾고 설득하는 거... 좀 도와주실래요?"



**



"음... 그래. 매번 수고가 많아, 오렌지에이드. 일처리도 깔끔하고, 감시 자산 교란도 완벽하고, 흔적 지우기도 꼼꼼했네. 덕분에 아우로라들도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어. 근데..."


태블릿으로 올라간 보고서를 슥슥 넘기던 사령관은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오렌지를 가볍게 치하했다. 이번 임무 성공으로 무슨 포상을 받아낼까? 일단 당분간 외근에서 빼달라고 해야지. 그리고, 언제 한 번 졸라서 방에 초대하고...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오렌지에이드의 앞에, 사령관은 태블릿을 책상 위로 내려놓으며 걱정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도중에 다섯 명이 도망쳤었다고?"

"아..."


행복한 공상에 빠져 있던 오렌지의 머릿속에 그때 일어난 작은 사고가 떠올랐다. 분명 사령관님은 하지 않아도 될 온갖 걱정을 사서 하시겠지. 인간에게 상처받았던 아이들을 억지로 끌고 온 건 아닌지,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내민 손길이 오히려 족쇄가 된 것은 아닌지 고민하며 홀로 괴로워하시겠지. 물론 이번에 일어난 일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일이었다. 누군가 나쁜 의도로 퍼뜨린 오해의 씨앗이 구르고 굴러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을 뿐. 


"...혹시, 그 아이들이 합류를 원하지 않았다면..."


거듭 주저하는 사령관의 앞에서 오렌지는 약간 갈등했다. 잘 수습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모를 솔직하게 말하는 건 좀... 쓸데 없이 떠벌려 댄 자신의 잘못도 있고, 사령관님의 명예도 조금 걸린 일이니만큼... 그렇게 오렌지는 마음을 정했다. 발랄한 부정이 사령관의 무거운 목소리를 단칼에 끊어냈다.


"아니요!"


오렌지에이드는 선의(?)의 거짓말을 좀 보태기로 했다. 그렇게 미리 생각해 둔 변명거리를 생긋 웃으며 읊었다.


"다섯 분께서 조금 부끄러움을 타셔서요. 제가 잘 말해서 다시 돌아오신 거니까, 포상은 확실히 해 주셔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