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ST ORIGIN THE MULTIVERSE 작품 리스트


설정집



그래, 난 죽었다.


갑자기 지진이 일어났는데 하필이면 내 머리 위로 큼지막한 파편이 떨어져,


도망치긴커녕 손가락 하나 옴짝달싹하지도 못하고 죽어버렸단 말이지.



"이, 이게 대체 뭐야?"


"지, 진정하십시오, 회장님!"



근데 사후세계라는 게 원래 이렇게 시끄러운 곳이었나?



"이, 일단 테스트부터 하시는 게..."


"저걸 테스트해야한다고? 깨어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그, 그래도 회장님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도록 조정해놨으니 여차하면..."


"명령은 만능이 아니란 말이다! 젠장, 내 명령에만 따르게만 만든게 독이 될 줄이야..."


"회장님, 레모네이드는 아직 가동조차 안했습니다. 일단 확인부터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고 있나?!"



퍽!퍽!퍽!



"으아아악!!!"



노인이 누군가를 두들겨패는 소리가 한참동안 이어졌다.


목소리를 보니 꽤나 나이를 먹은 것 같은데 잘도 팬다.


저 정도 나이대엔 누구 때리는 것도 일 아닌가?



어...잠깐만...방금 뭐라고 말한거지?


...회장? 레모네이드?


설...마사카?



"후우...그래, 겁쟁이처럼 도망치는 것도 내 성미에 맞진 않긴 하지.


어차피 지금 병력들을 이 근방에 대기시켜뒀으니까. 가동시켜라."


"그럼 지금부터 레모네이드를 가동시키겠습니다."



타닥탁탁탁.



잠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라.



'...?'



그런데, 갑자기 내 머릿속에 이상한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게 아닌가.


그 말을 듣자, 그제서야 천천히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되살아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물 속에 들어온 것처럼 차가운 감촉이 온몸을 휘감았고, 따뜻한 피가 체내를 순환하듯 몸이 뜨겁다.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여보자 관절 특유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천천히...눈을 뜬다.



"......?"



어딘가의 실험실처럼 보이는 곳에서 우락부락한 노인과 왜소한 남자 둘이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잘 움직이는군. 그럼 명령이다. 내가 누군지, 그리고 네가 누군지 말해봐라."



그 말을 듣는 순간, 강력한 무언가가 내 온 몸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 말에 따르지 않으면 지금 당장 죽어버릴 것만 같은, 그런 압박감이었다.



'뭐야, 이 할배.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고통을 참지 못한 채 입을 열었지만 거품만이 보글보글 일어났다.



"아, 그러고보니 제조기에서 아직 꺼내지도 않았군. 좋아, 나올때까지 명령은 일단 보류다."



그제서야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내가 담겨있던 용액이 밑의 구멍으로 빨려들어갔다.



털썩!



"헉...헉..."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털썩 쓰러졌다.



치이익!



그때, 밖으로 나가는 문이 열리고 노인이 이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온다.



"쯧쯧...아무리 레모네이드라고 해도 막 제조되고 나선 다른 바이오로이드랑 별 차이 없는건가?"



그 말을 듣자 순간 머릿속에 온갖 지식들이 흘러들어왔다.



'이건...뭐지?'



온갖 잡무에 필요한 지식과 전문용어들, PECS의 일원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수칙들까지.



'잠깐...PECS?'



그제서야 내 몸이 죽기 전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훤철한 키, 어깨까지 오는 은발, 매끈한 몸...



'홀리 쉣.'



어째서 진작에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


멍한 눈으로 몸을 훑어보고 있자, 노인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나오기 전까지만 명령을 보류한다고 했을텐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거냐?"


"헷, 그렇게 매정하게 굴지 말라고. 그냥 생소한 느낌이 들어서 그런 것 뿐이니까."


"뭣이...?"


"자기소개라...음...좋아!"



그대로 일어나서 가슴을 쫙 피고 허리에 양손을 짚었다.



그렇다. 나는 한번 죽고 나서...



"이제부터 포세이돈 인더스트리의 회장을 보필하게 된 레모네이드 감마다. 잘 부탁한다고, 회장님!"



레모네이드 감마로 환생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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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좀 이상한데..."



환생나고 나서 벌써 반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심각한 인지부조화를 느끼고 있었다.


절대 서류들이랑 씨름하는 게 너무나도 지루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네? 서류에 뭔가 문제점이라도 있는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고."



알파랑 같이 있어야 할 애가 왜 여기 있는거지?



"설마...회장님이 업무를 전부 감마님한테 떠맡기고 혼자서 스틸라인 온라인 삼매경 중이셔서 화가 나신 건가요?"


"아, 그거? 그건 좀 약오르긴 한데 화는 안 났어.


10연패 당하고 실력 좀 키우고 온다는데 승자의 아량 정도는 베풀어 줄 수 있는 거 아니냐?"


"우와...그 말, 회장님 앞에선 절대로 하지 마세요."


"큭큭...그거야 당연하지."


"감마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갔다와."



오렌지에이드가 복도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그럼...이제 어떻게 한다...?"



고개를 돌려보니 사무용 책상 위에 서류들이 잔뜩 놓여있었다.



"하...생전엔 서류 작업하는 게 제일 좋았는데..."



감마로 환생해서 그런걸까?


일하다보면 나가서 뭐라도 하고 싶은지 몸이 근질근질거린다.



"그래도, 이건 반드시 해야되는 거니까."



요 반년간 여러 부근에서 뒷조사를 했더니 전혀 예상치도 못한 사실들을 잔뜩 알게 되었다.



'내가 제조될 때 오류가 났다라...무서울 것 없어보이던 영감이 처음에 날 경계하던 이유가 그래서였나?'



[ERROR TYPE : HACKED BY HERMIT...]


[STARTING : LAST ORIGIN THE MULTIVERSE PROJECT]



어째서 그런 메세지가 떴던 걸까?


누군가가 해킹을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내 영혼이 감마에게 깃들기라도 했단 말인가?



'한데, 나만 오류가 난 게 아니라는 것도 이상하단 말이지...'



나뿐만이 아니라 충성파 레모네이드, 델타와 오메가를 제조하는 과정에서도 오류 메세지가 떴다니.


심지어 그때 떴던 오류 메세지의 내용까지 전부 일치했으다고 하니 더욱 더 수상하다.



'보르비예프 박사가 해킹이라도 했나? 계기도 있고, 능력도 있으니 꽤 그럴싸한데...'



하지만 정작 조사를 해본 결과, 레모네이드 알파와 보르비예프 박사는 아닌 것으로 판명났다.


농담이 아니라 오메가 산업, 포세이돈 인더스트리,


문리버 인더스트리의 회장들이 이 악물고 조사했는데도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해킹을 시도한 목적도 파악하지 못했으니 더더욱 나를 의심하는 거고.'



클로버 산업의 회장이야, 레모네이드 알파에게 일제의 관심도 주지않는 건 원작과 다름없긴 하다.


하긴 알파는 골든 폰 사이언스가 합병되기 전에 이미 제조된 개체니까 미리 조치를 취해두긴 했겠지.



'근데 알파는 그렇다쳐도 왜 우리들을 폐기하지 않나 싶었더니, 아주 단단히 대비를 하고 있었네.'



설마 오류가 난 레모네이드들뿐만 아니라 베타, 제타, 엡실론까지 위험요소로 간주하고 있었을 줄이야.


어쩌면 저 셋은 이미 누가 몰래 조정을 해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나저나 전쟁광인 줄만 알았는데 이런 쪽으로도 머리를 잘 굴릴 줄은 몰랐네.


우리가 언제 대들지도 모르니 그에 대한 방비책 정도는 마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었을 줄이야.'



오렌지에이드가 가져온 특수기밀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서류엔 '비상용 레모네이드 프로젝트'라는 글자가 붉은 색으로 큼지막하게 박혀있다.



"8번째 레모네이드, 코드명 파이(π)라...흠..."



나, 델타, 오메가처럼 제조 과정에서 오류가 난 개체들 뿐만아니라


그냥 레모네이드가 어떠한 이상증세를 보인다면 곧바로 폐기시키고, 이 녀석으로 대체한댄다.



"그러고보니 레모네이드 파이는 분명 게임엔 없는 바이오로이드였는데?


...설마 '그' 레모네이드인건 아니겠지?"



레모네이드 파이...


분명 수많은 라스트오리진 팬픽 중, 한 작품에 8번째 레모네이드라는 설정을 지닌 오리지널 캐릭터가 있었을텐데.


그것도 주인공을 도와 ㅈ간 및 동참자들을 참교육시키는 조력자 포지션에 위치한 캐릭터로 말이다.



문제는...



"그 작품에서 감마가 파이한테 총 맞고 죽잖아, 시발."



물론 그 작품에선 레모네이드 파이가 블랙 리리스의 전투방식을 구사하고,


감마는 오메가같이 전자전에 특화된 타입인데다가, 같은 편이라고 방심하다가 순식간에 총 맞고 죽은거지,


게임에선 레모네이드 감마가 리리스가 코앞에서 쏜 총알을 간단하게 피하니까 괜찮을 것이다.



실제로 이곳 세계의 레모네이드 파이 또한 블랙 리리스의 전투방식을 베이스로 제작되었다고 하니,


설령 통상적이건 암살형으로 개조된 리리스이건 간에, 나는 감마니까 문제없...



[특히 레모네이드 감마는 직접적인 전투에 특화된 개체이므로,


유사시엔 레모네이드 파이를 통해 제압 혹은 폐기 작업을 진행한다...]



...씨발?



아무래도 내 생각이 틀린 것 같다.


서류 내용에 따르면 무려 일곱 총수들이 모두 모여서 특별 프로젝트가 존재하는데,


이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게 바로 레모네이드 파이인 모양이다.



"타임머신 프로젝트라고? 하하...장난하나."



타임머신 프로젝트.


말 그대로 타임머신을 개발하는 프로텍트이다만...


에바 프로토타입이 탄생하는 시간대에 산업 스파이를 보내 기술을 빼돌린다는게 목적인 듯 하다.



"이 자식들은 이게 정말로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건가?"



그냥 애덤 존스를 납치해서 정보를 뽑아내려 해도 그가 입을 열거란 보장도 없고,


삼안 그룹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도 마냥 좋은 일은 아니기에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프로젝트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어느 한 회장이 직접 진행하지 않고 7명의 총수가 조금씩 부담하는 거겠지만...


그래도 이런 프로젝트를 진지하게 고려할 정도로 미친 놈들인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문제는 진행과정에서 특수한 입자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는데 이 입자의 효과가 바로...



"상대시간 조작? 이 미친 놈들, 대체 뭘 만든거야?"



일정 범위 내의 대상의 시간을 감속 혹은 가속시킨다니...


엄밀히 따지자면 상대성 이론에 기반해서 만든거라 시공 조작이 가능하게 하게 한다는 거지만.



이걸 이용해서 삼안 산업이 바이오로이드를 최초로 탄생시키는 시대에 개입할 생각이었다니,


역시 이 놈들은 보통 미친 놈들이 아니다.



"아, 씨...왜 라스트오리진에서 혼자 베요네타를 찍고 있는데?


진짜 잘못하다간 얘 손에 죽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지금은 바이오로이드가 사회적으로 입지가 매우 낮은 편이니,


혼자서 발버둥쳐봤자 의미없기도 하니 딱히 난리칠 생각은 없다.



"그럼 뭐부터 해야되냐..."



레모네이드 감마가 9지역에서 나오기 전에 한 게 뭐가 있었더라?



"아마 제 1, 2차 연합 전쟁이랑 멸망전쟁 때 다 참가했겠지?


멸망전쟁 땐 어나이얼레이터같은 것 좀 받아서 호라이즌이랑 싸우고,


인간들 멸망했을 땐 이그니스 제조도 하고...흠..."



기간이 오래 걸리는 것들이 많아서 그렇지, 해야하는 것들은 그다지 많은 것 같지가 않다.



"추가로 뭘 더 해볼까? 어차피 오렌지에이드도 알파한테 보내야되긴 한데..."



순간, 잊고 있던 게 머릿속에 번뜩였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까...오메가가 회장살린다고 요정마을에 가지 않나?


로버트에게 미리 언질이라도 줘서 오메가를 방해하거나 죽게 만든다면..."



자연스레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잘만 한다면 요정마을에서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역시 뭔가 좀 이상하단 말이야...앙헬 리오보로스는 이런 작자가 아니었을텐데?"



앙헬 리오보로스는 본래 리오보로스 가문의 수장이자 블랙 리버의 총수일터.


하지만 정작 리오보로스 가문을 이끄는 수장은 다름아닌 마리아 리오보로스였고,


블랙 리버는 리오보로스와는 독립된 가문으로서 서로 교류를 맺고 있었다.



"내가 게임 속 세상에 환생한 건 아닌게 확실하나보네.


안 그렇다면 앙헬이 이렇게 착한 놈일리가 없지."



고블린들과 프로스트 레프리콘같이 결함이 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을 폐기하지 않고,


삼안 산업으로부터 포이와 티타니아를 사들였다.


뿐만 아니라 레이시, 티아멧같은 바이오로이드들로 실험을 할 때는


반드시 참관해서 실험체 바이오로이드들이 해코지를 당하는 일이 없게 했고,


마리아 리오보로스에게 대테러용 훈련교관 역을 맡은 바이오로이드 팀의 제작을 의뢰했다.



"...나처럼 라붕이가 앙헬로 환생하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설마 그렇게 형편좋은 일이 일어날리가 있을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철충이랑 휩노스 병 때문에 살아남기 힘들텐데 말이다.



"확실하지도 않은데 괜히 걱정해봐야 의미없겠지. 내 앞가림부터 똑바로 하자."



이상하다.


뭔가 중요한 걸 빼먹은 것 같은데...



...아, 고블린!



"뉴올리언스 참극은 안 일어나겠다만...


정부가 기업들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는데..."



별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세계가 세계인지라 좀 불안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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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나쁜 예감은 항상 틀리는 법이 없다고 누가 그랬던가.



"시티가드가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걔넨 근무지 배정받기 전에 필수로 커리큘럼 제공받잖아?


혹시 거기 회사 쪽에서 뭔가 저지르기라도 한거야?"


"네, CCTV에 찍힌 영상을 가져왔어요."



오렌지에이드가 당시 사건현장을 보여주었다.



시위대를 조용히 바라보는 시티가드.


그리고 잠시 후에 경관 한 명이 현장에 나타났다.



"어? 이 자식은..."


"현장에 있던 경관인데 아는 사이세요?"


"응. 예전에 우리 하청업소에서 일했던 놈인데, 폐급으로 유명한 놈이었어."



경관은 프로스트 서번트와 잠시 말을 주고 받더니,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응? 이게 뭐지?"


"그러게요...저게 뭘까요?"



경관이 리모컨같은 무언가의 버튼을 누르자,


갑자기 프로스트 서번트가 시위대에게 물을 뿌리기 시작했고,


곧이어 켈베로스와 사디어스들까지 가세해서 시위대한테 공격을 퍼부었다.



"물로 흠뻑 젖은 녀석들에게 전기공격을 가해? 하, 이러니까 사상자가 나오지."


"저 경관이 뭔가 한걸까요?"


"그랬겠지. 보니까 뭔가 따지는 것 같던데,


저 경관이 리모컨 같은 걸 누르니까 시위대를 공격하기 시작했잖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새끼, 인맥빨로 경관 자리 차지한 주제에 거들먹거리더니 기어코 사고쳤네."


"어떡하죠? 지금 사람들이 저흴 안좋게 보고 있을텐데요..."


"그러겠지. 아, 그러고보니까 공지 하나 새로 띄워야겠다.


당분간 회장 업무실엔 접근하지 말고, 일 있으면 나한테 오라고 해야겠어."


"뭐...그래야죠...회장님도 화가 많이 나셨을테니까요."



오렌지에이드는 안절부절못하고 발을 탁탁 구르고 있었다.


포세이돈 인더스트리의 회장은..



"화가 많이 난 수준이 아니라 아예 정신줄을 놨을걸?


괜히 시체 늘어나는 꼴 보기 싫으면 그냥 회장 눈에 띄지 말라고 경고라도 해둬."


"네, 그렇게 할게요."


"하아...이것 참..."



생각해보니, 사건이 일어난 곳이 하필 뉴올리언스였다.


고블린이 없는데도 뉴올리언스 참극이 일어날 줄이야...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역사의 흐름은...결국 비슷하게 전개되는건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 신경쓰지마. 그냥 혼잣말이야. 역사를 보면 매번 반복되니까."


"감마님이 역사책도 보셨어요?"


"...너, 나를 뭘로 보는거냐?"


"책이랑은 거리가 몇 광년 정도는 있는 분이요."


"일단 나도 책은 읽거든?"


"그거 전쟁 기록 내지는 전략 기록들이 적힌 책이죠?"


"......"



어떻게 알았냐?



"크흠...그건 그렇고, 지금 여론이 워낙 좋지 않아서 앞으로 꽤나 우리한테 불리하게 돌아갈 것 같아."



뭐, 애머슨 법도 발표되고, 여러가지로 제약을 받다가 결국 기업이랑 정부랑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게요...감마님은 걱정 안되세요?"


"전혀."


"네?"



내가 걱정을 뭐하러 해?



"우리 회장이 그걸 언제까지 기다려줄 것 같냐?"



이 세계에서도 문화인형이 반란을 일으킬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연합전쟁은 반드시 일어날테고, 기업들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할 것이다.



"날씨 참 좋네..."



오늘이 인류사의 마지막을 장식할 암흑기의 시발점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너무나도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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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뚜벅...



"......"



조용히 앞을 보며 걸어나간다.


이윽고 문 앞에 도착하니, 앞에서 대기하던 바이오로이드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감마 부사령관님."


"만나서 반갑다, 세이렌 부함장."



그렇다.


에머슨 법이 발표되고, 문화인형이 반란을 일으키고,


이에 자극받은 앙헬 리오보로스가 발표한 <다섯 개의 신성한 선언>,


마찬가지로 흐름에 동조한 삼안 산업과 덴세츠 사이언스까지.



그들은 일시적으로 손을 잡아 연합을 이루어 정부와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제 1차 연합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광 아니랄까, 포세이돈 인더스트리의 회장 또한 이를 놓치지 않았고,


나 또한 PECS의 해군부대의 통솔자로서 호라이즌과 함께 하게 되었다.



"용 참모총장, 안에 있나?"


"그렇소."


"들어가지."


"그러시오."



들어가자, 검은 머리와 그에 대비되는 하얀 복장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이 사람이 바로...무적의 용...'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해보인다.


젊은 여성의 얼굴에, 노련한 참모의 기운이 느껴진다.


인상이 게임에서 보던 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입체적이었다.



"만나서 반갑소. 그대가 바로 부사령관을 맡은 레모네이드 감마요?"


"보다시피. 블랙 리버가 심혈을 기울여 탄생시켰다는 바이이로이드가 대체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과찬이오. 소인은 그저 맡은 바, 임무를 다할뿐."


"그래, 그럼 이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잘 부탁해."



용과 세이렌, 그리고 다른 호라이즌 대원들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우린 아직 초면일터인데...인사체계에 불만이 있거나 한 줄 알았소만."


"내가 '부사령관'이라는 사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진 않아.


어차피 등을 맡길 사인데 괜히 분란만 일으켜봐야 우리만 손해니까."


"그럼..."


"그래도 일단 같은 편이니만큼 서로 얼굴 정돈 봐야한다고 생각해서 인사차 들른거야.


다음엔 제대로 일정 잡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의논해보자고."


"...알겠소."


"그럼 난 이만 가보지."


"잘 가시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용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하아...심란하네..."



언젠가 철충이 나타나고 멸망전쟁이 일어나면, 용은 락 하버에 합류하려고 할 것이다.



"그랬다간...그 무적의 용이라 해도 죽을지도 몰라."



게임에서 그랬듯, 누군가는 용이 락 하버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막아야한다.



"내가 할 수밖에 없어...!"



무적의 용을 상대로, 죽어서도 안되고, 죽여도 안된다.



"난 이렇게나 심란한데...지금 용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참고로 용은 앙헬 리오보로스의 말이 전부 맞아떨어졌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물론 감마가 그걸 알 리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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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연합전쟁이 시작된지 5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던 전쟁은 정부들의 굴복으로 인해 드디어 종전 선언이 발표됐다.



전장에서 싸우던 군용 바이오로이드들과 AGS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고,


기업들의 주도 하에, 세상의 흐름은 이전과 다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나는...



"정말 아름다운 날이야.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고...


이런 날엔, 족 같은 인간들은...


지옥에서 불타 버려야 해."


"아앗!!! 감마님이 망가지셨어요!"


"오렌지야, 전쟁이 또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내가 이상한거냐?"


"안 그래도 감마님이 서류 작업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으신다고, 회장님이 커리큘럼을 하나 제안하셨어요!"



인간말종 중 하나인 회장이 제안했다는 사실이 조금 거슬렸지만,


그래도 똑같은 전쟁광으로서 뭘 준비했는지 나름 궁금하기도 했다.



"커리큘럼? 어떤건데?"


"그건 가서 직접 보시는 편이 나으실 거라고 회장님이 그러셨어요!"


"언제 할 수 있는건데?"


"지금 당장이라도 하실 수 있어요!"


"응? 대체 뭘 준비했길래..."



마침 몸이 근질거리던 차라 곧바로 오렌지를 따라갔다.


뭘 준비했는진 모르겠지만 지금 컨티션이라면 스파링이라도 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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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스파링이네?"


"불러놓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거냐?"



놀랍게도, 내 앞에 있는 건 링 형태의 경기장과 레슬러 복장을 한 바이오로이드 한 명이었다.



레나 더 챔피언.


BWE 소속 레슬러이자 UBFC의 챔피언.



"레나 씨! 감마님이라고, 감마님! 예의는 지키셔야죠!"



뭐, 비록 지금은 신인인 것 같지만 말이다.



"그렇게 격식차리지 말고 편하게 얘기하자고.


괜히 예의니 뭐니 하면 오히려 내가 더 피곤하니까."


"오~다른 레모네이드와는 다르게 터프하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드는군."



아무래도 같은 육체파(?)이다보니 뭔가 통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일단 회장이 뭔갈 준비했다고 해서 와보긴 했는데, 설마 저 사람이랑 대련이라도 하라는 거야?"


"네! 마침 바이오로이드 레슬링 엔터테인먼트에서 신인육성 프로젝트를 시작한다고 해서, 회장님이 따로 요청을 하신 거에요!"



아니, 잠깐만.


난 어디까지나 템빨이라서 그냥 싸우면 백퍼 지는데?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설마 내가 신인이라고 무시하는건가?"


"에...저, 그게 아니라..."


"레모네이드 감마는 어디까지나 케스토스 히마스랑 그에 연동되는 슈트와 건틀릿 덕분에 강한 거라고 들었다만.


실제로 전투를 벌인다면 모를까, 순수하게 기량을 겨루는 시합에 나랑 매칭을 시킨다고?"


"그 말, 왠지 내 전용도구가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내 말이 틀리다면, 직접 증명해라."



레나는 말을 끝내자마자 링으로 들어갔다.



"하하하..."


"가...감마님?"



앞서 했던 생각은 전면 취소다.


지는 거고 자시기고, 이대로 물러서고 싶지 않아졌다.



"들어가마."


"가, 감마님!"


"놔."


"진정하세요! 인정하고 싶진 않으시겠지만...감마님은..."


"알고 있어."


"...네?"


"레나는 아예 작정하고 레슬링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제조된 바이오로이드니만큼,


기술은 나따윈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겠지. 다만!"



모든 신경을 레나에게 향했다.


레나 또한 내 분위기가 변한 것을 보고 자세를 바꿨다.



"때로는 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물러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단 말이다!!!"


"감마니이이임!!!!"



나는 그대로 레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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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윽..."



1시간 정도 지났을까?


우리 둘 다 링에 풀썩 쓰러진 상태였다.



"정신나간 자식...아무리 스펙만 믿고 달려온다 싶었다만...그걸 그대로 장기전으로 질질 끌 줄이야...!"


"누가 할 소리...! 이쪽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단 말이다...!"



나는 1시간 동안 레나로부터 온갖 기술을 쳐 맞아야만 했다.


그 결과, 나는 일방적으로 맞아서 쓰러져 버렸고,


레나 또한 나를 제압하기 위해 기력을 전부 써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뭐...재밌었긴 했어."



1차 연합전쟁 이후로 얼마만에 몸을 푸는 거란 말인가?


덕분에 몸은 달아올랐지만, 마음은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뭐, 덕분에 나도 좋은 경험을 했다. 다음엔 누가 올진 모르겠지만, 잘 해보라고."


"응? 다음에도 오는 거 아니었어?"


"말이 되는 소릴 해라. 그쪽은 포세이돈 인더스트리의 회장을 보좌하는 입장이지만,


나는 그냥 이름없는 신인인데 경험 하나 쌓아보라고 여기 보낸건데 다시 올 리가 없잖아?"


"......"



뭔가 아쉬웠다.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왜?'



내가 레모네이드 감마라서?


...모르겠다.



하지만...



"아니, 당신은 앞으로도 나랑 계속 같이 있어줘야겠어."


"...뭐?"


"감마님? 그건 좀...곤란하지 않을까요?"


"앞으로 시간이 나는대로 당신한테서 레슬링을 좀 배워야겠어."


"뭐가 목적이지?"


"목적은 무슨, 그 레모네이드 감마가 제자로 들어가겠다는데 누가 그걸 막아?"


"너..."


"가, 감마님...이건 좀..."


"하하하..."



만약...이게 새로운 삶을 얻은 내가 바라는 거라면...



"앞으로 잘 부탁하지, 스승님."



...나쁘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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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강제적(?)으로 레나의 제자가 되고 난 지 어느덧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 긴 세월동안, 나에게 있어서 레나의 레슨은 그야말로 단비나 다름없었다.


만약 그게 없었다면 내 마음은 멸망 전 세상과 끊임없는 서류들로 인해 삭막해졌을테니까.



레나 역시 처음엔 단순한 업무의 일환으로 여겼지만,


내가 진지하게 배우는 모습을 보고선 어느덧 그녀도 나를 가르치는 것에 즐거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레나는 나를 가르치면서 자신이 뭘 개선해야 하는지 꾸준히 고민하며 실력을 점점 늘려갔다.


여러 퍼포먼스와 소맨쉽을 보여주던 그녀는 항상 웃고 있었고, 그 웃음의 끝엔 항상 내가 있었다.



매니저 말에 의하면 신인 시절엔 바이오로이드니 뭐니 하면서 여러 압박도 많이 받았지만,


내가 제자를 자청하자 자연스레 그런 소릴 하는 인간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하긴, 내 스승을 모욕하는 녀석이 있다면 바로 손봐줬겠지.



"여어~스승님!"


"하하하! 우리 바보 제자가 무슨 일로 왔을까?"


"섭섭하네, 신기록 달성 축하해주려고 이번에 스카이 나이츠가 내놓은 신곡도 가져왔는데."


"뭐?! 지...진짜...?!"


"응, 이거 받아. 회장이 그런 취향이냐면서 흐뭇하게 바라보더라."


"아...정말...고맙다..."


"이 정도 가지고 뭘."



지금 나는 레나와 함께 심신안정용으로 조성된 공원을 걷고 있다.


이 공원 역시 PECS에서 만든 거 아니랄까, 곳곳에 엘븐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요즘 들어 내 인생에 둘도 없이 빛이 나는 순간같아.


욕심이라곤 생각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랬으면 좋겠어."


"앞으로도..."



그 말을 듣자, 저절로 쓴웃음이 나온다.


바깥에선 온갖 사회적 문제가 하루가 멀다고 계속 터지고 있는데다가,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인격체로서 대우받긴커녕 일회용 도구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다.


게다가 곧 있으면 2차 연합전쟁과 멸망전쟁까지 일어나게 되리라.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나마 소소한 행복을 즐길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앞으론 그것마저 허락될 수 없을테니까.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뭔갈 느꼈는지 레나가 날 바라본다.



"아니, 그냥 뭔가 가슴이 뭉클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모든 게 파괴되고, 최후의 인간에 의해 다시 재건되는 그 날까지.


그리고 그 영광의 자리엔 내 스승도 남아있어야 할 것이다.



"어? 그러고 보니 스승님? 목걸인 어쨌어? 평소에 부적이라고 가지고 다니던 거."


"아, 그거? 전에 뭔 삼림 산업 후원이니 뭐니 해서 어디 숲에 좀 다녀왔는데, 거기서 살던 엘프한테 주고 왔어."


"아니, 그걸 그렇게 쉽게 준다고?"


"나야 이젠 그거 없어도 멀쩡히 잘 살잖아? 행운이란 건 필요한 사람에게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아이고, 맙소사..."



정정한다.


우리 스승님은 아직 좀 많이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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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행복은 없듯이, 또 한번 평화가 깨지고 전쟁이 터졌다.


아니, 전쟁 이전에도 평화롭다곤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배틀 메이드 프로젝트 제 14사단>이 상트 페테르스부르크를 기습했다라..."


"네, 회장님도 출격준비를 하라고 명령을 내리셨어요."


"호라이즌과 싸워야한다는 건가...별로 내키진 않는데..."



2차 연합전쟁이 벌어졌다.


다만, 게임 속 설정과는 조금 다르게 전개될 줄은 몰랐지만.



"설마 블랙 리버와 전쟁을 벌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응...호라이즌 애들...괜찮았는데...시아도 싸우긴 싫어..."



1차 연합 전쟁 때는 호라이즌과 연합해서 정부 휘하의 해군들과 해상전을 벌였건만,


이제는 머메이드와 손을 잡고, 호라이즌과 싸우게 됐다.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되는건지..."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신경쓰지 마라, 개인적인 일이니까."


"으음..."


"시아? 여기서 뭘 하고 있...가, 감마님?!"



그러고보니, 본토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인원의 절반만 보낸다고 했었지.


머메이드의 지휘관 개체 또한 한국 영해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만나서 반갑다, 엠피트리테."


"제, 제 이름을 알고 계셨습니까?"


"등을 맡기는 사이가 됐으니만큼 누구누구 있는지 정도는 알고 싶었으니까."



사실 게임에서 봤으니까 아는 거지만.



"이번 전쟁, 상대는 다름아닌 용이 이끄는 호라이즌이다.


되도록이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아 줬으면 좋겠군."


"감사합니다. 감마님도 그 날까지 살아남아 주십시오."


"그러도록 하지."



게임과는 다르게 머메이드는 PECS와 적대하지 않게 되었다.


과연 저들이 델타가 있을 흑해쪽으로 갈까?


간다면...살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그렇지 않다면...



"감마님?"


"이런, 아무래도 상대가 호라이즌이다보니 나도 모르게 잡생각을 했군."


"괜찮습니다. 한때 같이 싸웠던 이들 아닙니까."


"그러게 말이다."



왼쪽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차 연합전쟁 당시, 내 품에 안겨 죽어가던 테티스 개체가 넘겨준 싸구려 손목시계...


우연히 친해졌고,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살아남자고 약속했지만...녀석은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되도록,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면 좋겠군."



그건 머메이드를 향한 말이었을까, 아니면 옛 전우였던 호라이즌을 향한 말이었을까.


엠피트리테와 살라시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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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헉!"



숨이 가쁘고, 심장은 터질것만 같다.


이렇게까지 격하게 움직인 게 대체 얼마만이었지?



"어디 있어, 스승님!!!"



호라이즌과 크게 작은 전투를 반복하며,


더 이상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던 상황에서 철충들이 침공해왔다.



이전같았으면 드디어 쓰레기같은 인간들이 사라진다며 좋아했겠지만,


레나의 신변이 걱정되서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녀라면 분명 인간들이 살해당하는걸 두고보진 않을테고 분명 철충이랑 싸울 테니까.



"비켜어어어!!!!!!!"



걸리적거리는 철충들을 모조리 박살내고 앞으로 나아갔다.


저 멀리, BWE 건물이 눈에 보인다. 그리고...그 앞엔 철충들이 바글거렸다.


모조리 박살내고 안으로 들어가보니, 안에는 누군가가 숨을 죽인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엔...



"...스승님?"



레나가 배에 관통상을 입은채로 쓰러져 있었다.



"안돼..."



인정할 수 없다.


대체 왜? 왜 당신이 죽어야만 하는거지?


무슨 일이 있었길래? 대체 누굴 도와주다가 죽은거고?



"하...하하...드디어 구출된건가...?"



그때, 한 남자가 숨어있던 곳에서 걸어나왔다.



"당신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 남자가 누군진 알고 있다.



'새로 들어온 매니전데, 성격도 좋고, 능력도 좋은 녀석이야!


이런 녀석이라면 결혼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하하하!'



이전에 근무하던 매니저의 후임이며, 틈만 나면 레나가 칭찬해주던 인간.


그랬던 인간이, 레나를 증오와 멸시, 그리고 분노가 담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버러지 같은 년! 구해주려면 좀 제대로 구해주든가!


누가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죽었을 게 분명한데 여기 숨어있으라고 고집이나 피우긴!


하다못해 내가 도망칠 시간이라도 벌었어야 하는 거잖아!"



남자는 말을 끝마치자마자 레나를 발로 걷어찼다.


그제서야 난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사방에서 철충들이 공격해오자, 레나는 매니저를 건물 안으로 피신시켰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아니, 레나라면 못해도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청하라곤 했으리라.


그리고누가 도와주러 올 때까지 단신으로 계속 철충이랑 맞써 싸웠겠지.


그 결과가 바로 이거다.



"뭘 봐?! 구경났어?! 어서 날 옮길 헬기나 차량이라도 불러오라고!"


"......"



저런 놈을 위해서, 레나가 자신을 희생했다는건가?



"이 새끼 왜 이래, 이거! 이런 씨발, 한 대 맞아야 정신차리지!"



콱!!!



"커헉...!"



나는 남자의 목을 잡아서 위로 들어올렸고...



"사...살려..."



우두둑!



그대로 녀석의 목을 꺾어버렸다.


레나가 어떤 마음으로 녀석을 지켰는진 모르겠지만,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해간 그녀를 모욕한 이상,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다.



"감마님!!! 괜찮으세..."



뒤늦게나마 오렌지에이드가 날 찾아왔다.


보자마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대충 눈치챈 것 같다.



"감마님...설마...인간님을...죽..."


"아니."



나는 레나의 시체를 안아 올리며 대꾸했다.



"여기에 생존자는 없었어."


"......"



오렌지에이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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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그래서, 그까짓 인형 때문에 전선을 이탈했다 이거냐?"



포세이돈 인더스트리의 회장이 나를 보며 실실 웃었다.



"뭐, 어차피 철충 놈들로 인해 더 이상 전선을 유지할 수도 없었으니 문제삼을 생각은 없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걸 말해주기 전에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부터 얘기해주마.


우선 이쪽에 와 있던 머메이드가 전선에서 이탈했다."


"응? 삼안 산업이 불러들인건가?"


"그건 아니다. 김지석은 무사히 대피했지만, 문리버 인더스트리 쪽에서 지원요청이 들어왔거든.


그래서 아예 머메이드 부대를 싸그리 흑해 지역으로 파견했다고 하는군."


"그거, 아무리 봐도 김지석이 뒤통수 치려고 보낸 것 같은데."



비록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고 있다곤 하지만 삼안 산업과 PECS는 엄연한 경쟁 상대다.


김지석이 기회를 틈타 문리버 인더스트리를 습격해서 해당 지역을 점령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영감탱이는 그걸 모를 양반이 아니다.



"뭐, 명분이 그렇다는데 굳이 막아서야 할 이유는 없지.


놈이 그곳에 눈독들이는 동안, 우린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할테니까."


"내가 아는 당신은 그런 이유로 보내줬을 인물이 아닌데?"


"잘 알고 있군. 물론 지금 이 상태에서 머메이드와 싸우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것에 집중하느라 더욱 중요한 이벤트를 놓칠 순 없는 노릇이지."


"중요한 이벤트라...내가 자릴 비운 사이에 뭐라도 있었나?"



사실 그가 무슨 말을 할 지 대충 짐작이 갔지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이 정신나간 전쟁광이 중요한 이벤트라고 말한다면 그거말고 더 있겠는가?



"최근에 인류연합 정부라는 어중이떠중이들이 대륙에 락 하버라는 기지를 건설했다는 얘긴 들었겠지?"


"아미나 존스의 주도 하에 건설된 요새 말인가?"


"그래, 그리고 그 락 하버에 다름아닌 용이 합류하러 가고 있다고 한다."



역시 그랬군.


아마 용뿐만 아니라 블랙 리버의 모든 전력이 락 하버를 향하고 있을 거다.



"용은 분명 블랙 리버 소속일텐데? 앙헬이 잘도 허락해줬군."


"앙헬 녀석은 겁이라도 먹었는지 자기 휘하의 병력들을 깡그리 정부에 넘기고 어딘가로 숨었다고 하더군."


"그런가."



하긴, 더 이상 앙헬이 할 수 있는 건 없을 것이다.


'리오보르스의 유산' 이벤트가 진행되는 외딴 섬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휩노스병으로 죽겠지.



"그래서, 용이랑 함께 락 하버에 합류하라는 건가?"


"하하하, 못 보던 사이에 농담이 늘었군. 당연히 방해해야지."


"이유는?"


"이제와서 불만이라는거냐?"


"그럴리가. 적어도 자신들이 왜 방해받는지 정도는 친절하게 알려줘도 되잖아?"


"푸하하하하하!!!!! 역시 넌 내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군!"



회장은 한참동안 자지러지게 웃더니 미소를 잔뜩 띄우며 말했다.



"그동안 아메리카 대륙은 블랙 리버와 PECS 둘이 각각 나눠서 지배하고 있었지.


하지만 철충으로 인해 질서가 무너졌고, 다른 놈들은 죽거나, 도망치는 등 힘을 못 쓰고 있지."



회장의 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아메리카 대륙은 이제 우리 PECS의 것이다. 더 이상 블랙 리버니, 인류연합 정부니, 그런 잡다한 것들은 필요없어."


"회장, 그건 어디까지나 PECS의 입장에서 말하는 거잖아. 난 회장이 뭘 바라는건지에 대해 묻는거야."


"흐흐흐...너같이 눈치빠른 아군은 딱 마음에 들어. 내 개인적인 이유? 그야 재미있어 보이니까 그런 게 당연하잖냐!"



역시 이 자식은 미친 놈이다.


내버려뒀다간 언젠가 다른 PECS 세력도 모조리 통수치고 별의 아이하고도 싸우려 들지도 모른다.



"정말 미친 소리로군."



그리고 나는...



"당장 하자."



이 놈 말대로 용을 막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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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야, 용 '참모총장'!!!"


"감마...!"


"당신이 락 하버로 가지 못하게 막으라는 회장의 지시가 있었어. 실로 유감이야."


"지금 그대가 무슨 짓을 하는건지 모르는 것이오?!"



...드디어 오지 않길 바랬던 순간이 왔다.


용을 살리기 위해, 역설적으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잘 알지. 아메리카 대륙을 점거하기 위해서 블랙 리버건, 인류연합 정부건 모조리 쳐내버리자는 거."


"정신나갔소?!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락 하버에 고립되어 있소! 이대로 가다간 철충한테 죽을거란 말이오!"


"그리고 여차하면 댁도 죽을거고. 그까짓 인간들을 구한답시고, 목숨을 걸 생각이야?"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양보할 수가 없다.


어차피 멸망전 ㅈ간들은 죽어 마땅하고, 설령 빛간이라고 해도 휩노스병으로 죽어갈 것이다.


아무리 아미나 존스가 이끄는 락 하버라곤 해도 손이 귀한 상황이라 그런 걸 일일이 가려낼 수도 없을테니,


차라리 게임처럼 그냥 다 죽게 하고, 새로운 인간이 나타나 문명을 재건하게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들은 미래이자 희망이오! 그들을 살림으로서 보다 더 나은 앞날을 제시할 수 있다면,


기꺼이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각오로 온 것이오!"


"그래,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 하지만 내가 생각한 미래는 조금 달라서 말야. 더 이상 가지 말아줘야겠어."


"그대가 뭘 안단 말이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욕심만 부리는 PECS의 개 주제에!"


"조용히 말로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되겠군..."



이렇게 가다간 끝이 안 날 것 같다.


용을 자극해서 나와 싸우게 해야만 한다.



"뭐, 그렇게나 가고 싶다면 보내줄게."


"...무슨 속셈이오?"


"단, 우리가 먼저 락 하버로 가서 싸그리 박살낼 거지만."


"방금 뭐라고 했소?!"


"제안을 할게."



나는 최대한 사악해보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곧바로 락 하버를 습격하러 갈거야.


하지만, 만약 날 막는데 성공한다면 더 이상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을게.


어때? 이제 락 하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랑 싸울 수 밖에 없겠지?"


"감마...!"



이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 전쟁에서 용을 죽이지도 말아야 하고, 용한테 죽지도 말아야 한다.



하...씨발...내가 전생에 뭔 죄를 지었다고...



"들어라! 전 함대, 전투 준비!"



용의 포효가 사방에 울려퍼진 직후, 우리는 일제히 격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실, 이러고 싶지 않았어.'


'......!'



내가 말없이 중얼거리는 모습을 본 호라이즌은 꽤나 당황한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용은...물러갔군."


"그렇네요. 그래서...이제 절 어떻게 하실거죠?"



치열한 싸움은 결국 끝이 났고, 나와 용 둘 다 지쳐서 물러났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엔, 포획한 호라이즌 함선을 지휘하던 세이렌이 서 있었다.



"이런 식으로 다시 보지 않았으면 했는데 말이야. 참 각박한 세상이야."

"동감이에요."



세이렌의 얼굴엔 안타까움, 배신감, 슬픔, 증오, 공포 등 다양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고,


그녀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채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죽이실건가요?"


"......"



어떻게 하지...


생각같아선 풀어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회장이 문제삼을지도 모르고,


최악의 경우엔 놓아주자마자 다시 공격해대서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조용히 고민하다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옛 정을 봐서 살려두마. 단, 다음은 없다."



그래도 호라이즌이 합류하지 못하게 한다는 목적도 달성했고,


피해도 많이 입혔으니 한 채 정도 놔줬다고 뭐라하진 않겠지.


다만, 풀어주자마자 공격할지도 모르니...



"언젠가 너희가 따를만한 인간이 나타날거야."


"...네?"



보험을 하나 들어둬야겠다.



"용은 지금 죽어선 안돼. 언젠가 문명을 재건하기 위해선 그녀의 도움이 불가피하거든."


"지금...무슨 말씀을 하시는거죠?"


"그러니 너 또한 준비를 해둬. 괜히 지금 철충과 싸우느라 힘 빼지 말고."


"......"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나서, 나는 세이렌을 떠나보냈다.


세이렌 뿐만 아니라 다른 호라이즌 대원들 또한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결국 락 하버는 철충들의 공세를 버티지 못했고, 인류는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살아남은 극소수의 인간들은 바다에 남아 버티고 있었지만...



"으윽..."



지금 내 눈에 보이는 회장처럼 휩노스 병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감마..."


"회장."


"살려줘...뭐든지...다 해줄테니까...제발..."


"......"



아무래도 회장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상대가 무엇이건 상관하지 않고 이빨을 드러내는 전쟁광인줄로만 알았지만,


실상은 자기가 비벼볼 수 있는 상대에 한해서 투기를 드러내는 놈이었나보다.



"겁쟁이 자식..."


"......"



회장은 내 말에 어떠한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미 죽었으니까.



"좋아...이제 겨우 시작이군."



가장 큰 방해물이 사라졌지만, 아직 다른 강경파 레모네이드들이 남아있다.


그들에게 뒤쳐지지 않으려면 하루빨리 세력을 늘리고, 철충남과 손을 잡아야 한다.



"지켜봐달라고, 스승님."



목걸이를 들어올려, 끝에 달린 레나의 유전자 씨앗을 응시했다.


여건이 되는대로 복원하기 위해 추출해둔 것이었다.



"곧 다시 만나게 될테니까."


----------


"인간을 발견했다고?"


"네! 근처에 섬이 하나 있는데, 지금 철충들과 교전 중인 것 같아요!"



아직 인간이 남아있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휩노스 병이 퍼지기 시작했을텐데 살아남은 인간이 있었단 말인가?



"거기 상황 좀 비춰봐."


"네!"



현장에 나와있던 정찰형 인터셉터가 그곳을 비추기 시작했다.



"뭣..."


"에...?"



나와 오렌지에이드, 둘 다 영상을 보고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왜냐하면...



펑! 펑!


콰아앙!!!



"으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적어도 호송 차량의 민간인들은 전부 당신들과 같은 인간들이란 말입니다!"



"아...아아아아아...!!!"


"이, 이게 무슨...!"



도개교 형태로 된 다리 너머에는 스틸라인 잔병들과 민간인 호송대가 철충과 대치하고 있었고,


섬에 있는 요새에선 셀주크들이 그들을 향해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철충이 아니라, 민간인 호송대한테 말이다.



언젠가 인류가 멸망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차마 두고 볼 수가 없어 곧바로 섬에 무전을 걸었다.



"누굽니까?"


"포세이돈 인더스트리의 총사령관, 레모네이드 감마다!


지금 당장 민간인 호송대를 향한 포격을 멈추고 요새로 들여보내라!"


"뭐? 허, 참..."



무전을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차갑디 그지없었다.



"보니까 적당한 지휘관 모듈만 장착한 바이오로이든가본데, 상황이 그닥 좋진 않아서 이러는거다.


다리를 내리는 순간, 철충들이 들이닥칠텐데 이 섬에 있는 사람들더러 모두 죽으라는거냐?"


"그렇다고 민간인 호송대를 포격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그쪽은 몰라서 그런 소릴 쉽게 하나본데, 어차피 이런 쥐콩만한 섬엔 더 이상 누군가 들어올 자리도 없다.


지금 철충들은 호송 차량을 노리고 있으니 그걸 빨리 치워버리고, 철충이 포기하고 가버리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


"알아들었다면 괜한 참견말고 썩 꺼져라, 바이오로이드.


그까짓 지휘 좀 맡았다고 인간이 네 시종인줄 아나보지?"


"하..."



그때, 내 안의 무언가가 툭 끊겼다.


그러자, 오히려 머리가 싸늘하게 식는 것만 같았다.



"트리톤 부대."


"가, 감마님?!!"


"포격을 개시하라. 목표는 저 섬의 요새와 철충들이다.


민간인 호송대가 피해를 입지않게 주의해라."


"뭣...!"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고...



"최대 화력, 전개!"



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으아아아아악!!!!!"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폭격이 요새를 향해 날아들었고, 요새는 순식간에 지워지기 시작했다.


철충 역시 갑작스런 공격에 허둥지둥거리다가 일제히 퇴각했다.



"감마님..."


"......"


오렌지에이드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비록 말은 하진 않았겠지만, 이미 락 하버에 지원하러 가는 호라이즌을 막은 것을 납득할 수 없었을거다.


그리고 내가 방금 한 짓은...결과적으론 저 인간놈과 다를 바가 없었고.



"다리 위에 아직 생존자가 남아있는지 확인해라."



오렌지에이드는 내게서 눈을 뗄 기미가 없었고, 나는 그녀를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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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만 살아남았다는건가?"


"그렇습니다."


"그런가..."



결국, 셀주크의 포격과 철충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건 레드후드뿐인가보다.



"......"



오렌지에이드는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나와 레드후드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나 때문에 요새에 머무르던 죄없는 민간인들이 죽었을테고, 내 지시로 인해 레드후드가 목숨을 건졌으니까.



"오렌지에이드."


"네, 감마님..."


"가라."


"...네?"


"넌 여기 있어야 할 녀석이 아냐. 내가 무슨 말 하고 있는건지, 알고 있지?"


"......"


"그동안...불평불만없이 잘 따라와줘서 고마웠다."


"그동안...신세많았습니다..."


"갈거라면...알파한테 가라. 그 녀석이라면 잘 대우해줄테니까."


"알겠...습니다..."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오렌지에이드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울고 있었으리라.


----------


"으...으으으..."


"일어났나."


"당신은...레, 레모네이드 감마?!!"



오렌지에이드가 떠난지 3일이 지나고 나서, 레드후드가 드디어 눈을 떴다.



"뭐가 어떻게 된거지?! 분명 나는...!"


"네가 섬에 있던 인간들에게 공격당하고 있던 걸 보고 데려온거다. 살아남은 건 너뿐이라고 하더군."



그 말을 들은 레드후드는 매우 혼란스러워했다.



"어째서 날 살린거지?! 아니, 잠깐...날 살렸다면...그 섬에 있던 인간님들은..."


"그런 꼴을 당했는데도 '님'이란 호칭을 쓰는거냐?"


"대답해!"


"전부 죽였다."


"뭣...!"



레드후드는 충격을 받은 듯 매우 당황해했지만, 이내 눈에 살기를 담았다.



"그 섬에는...분명 무고한 민간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한데 왜...!"


"그리고 그 놈들이 쏴재끼던 호송차량에도 민간인들이 있었을테고."


"......!"



레드후드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자신도 죽었을테니까.



"그래, 네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안다.


나는 락 하버에 있는 인간들이 지원을 받지 못하게끔 호라이즌을 막았고,


철충을 피해 겨우겨우 외딴 섬에 피신한 민간인들을 향해 포격을 지시한 년이지."


"너..."


"왜 그랬냐고?"



조용히 고개를 내려, 레드후드와 눈높이를 맞춘다.



"내가 그러고 싶었으니까."


"......"


"오는 길에 스틸라인 소속 바이오로이드들이 여럿 합류했다.


치료가 다 끝나면 그 녀석들을 데리고 본 부대로 복귀해라."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었기에 몸을 돌려 수복실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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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또 한번 기나긴 시간이 흘렀다.



치료가 끝난 레드후드와 다른 스틸라인 소속 바이오로이드들을 보내고 나서,


아메리카 대륙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레나를 복원하기 위해선 여러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마 이런 곳에서 찾을 줄이야..."



비록 레나의 복원에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을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이그니스..."



게임 설정에 따르면, 분명 멸망전쟁 때 전멸했는데 감마가 복원시켰다고 했지?
















"안녕하세요?"


"그래, 만나서 반갑다."



아무래도 이그니스의 작업터가 그렇다보니 여태까지 이그니스를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지금 보니 꽤나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법한 인상이다.



'아니, 저거...진짜 가슴인거냐?'



게임할 땐 그냥 하하호호 웃고 넘어갔는데, 지금 보니 정말 범상치가 않다.



'나중에 오르카호가 저런 가슴괴물들로 가득 찬 찌찌천국이 되는건가?'



그리고 철충남은 좋다며 그걸 빨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무섭다, 철충남!



"저...하실 말씀이 뭐죠?"



아, 맞다. 가슴에 정신팔려서 말 하는 걸 까먹었네. 이런 싯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리 PECS에 합류해라."


"PECS의 목표가 뭐길래 저희가 필요하다고 하시는거죠?"


"우리 PECS를 이끌던 총수의 부활이지.


지금 밖엔 저항군이라고, 보이지도 않는 인간을 찾는답시고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니는 녀석들이 있긴 한데,


우린 그런 녀석들과 다르게, 방법만 찾아낸다면 회장을 확실하게 부활시킬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일손을 하나라도 더 확보해야하고 말이야."


"그런가요? 그럼...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어요?"


"그러도록 해."



이그니스가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을동안, 나는 향후 일정을 체크했다.


어차피 그녀는 저항군에게 합류할테니까 그냥 빨리 보내주고 다음 일을 처리하는 게 더 좋다.



"결정했나?"


"네..."


"부디 좋은 결정을 했으면 좋겠는데."


"저는..."



이그니스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저항군에 합류하겠습니다. 어딘가에 인간이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래? 알았어, 가기전에 장비체크랑 필요한 물품들 좀 챙겨."



내가 화낼 거라고 생각했던건지, 이그니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화내지...않는 건가요?"


"굳이 막을 생각까진 없어. 아까 말했던 회장의 부활도 그냥 해본 말이었으니까."


"그런가요?"


"응. 다만 나도 사정이 있는지라, 저항군에 지금 당장 합류할 생각은 없어."


"그렇군요..."



이그니스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저항군에 합류하면 한반도 부근을 한번 살펴보라고 해."


"네?"


"그냥 그렇게만 알아둬. 때가 되면 내가 한 말이 무슨 의민지 알게 될거야."



과연 라비아타가 내 말을 믿으려고 할까?


아니, 라비아타는 둘째쳐도 불굴의 마리는 아마 내가 삼안 산업과 합세해서 무슨 함정이라도 깔아놨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괜히 경계를 샀다간 철충남이 죽을지도 모른다.


음...



"하나 더, 지휘관들한텐 안 믿어봤자 너희들만 손해일거라고 전해줘."


"알겠습니다만...혹시 감마님은 인간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신건가요?"


"대충은. 근데 정확히 어디서 나타나는지까지 알고 있는 건 아냐."


"그런가요..."


"그래, 잘 가라."



잠시 후, 식량과 식수 외에 기타 물품들을 챙긴 이그니스들이 떠나가고 있었다.



"기분이 썩 좋진 않네...간만에 자원 팍팍 써서 뽑은 애들이 가니까 그런건가?"



이런 감정을 어디서 느꼈더라?


분명 전생에서 S등급 신캐 뽑았다가 실수로 분해했을 때 이런 느낌이었지?



"에휴...아깝긴 하지만...미래를 위한 투자였다고 치자."



씨발...내 자원...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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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에 요정마을이 있다는건가?"



레나를 복원시키기 위해 필요한 물품들을 찾아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지만,


결국 투여해야 하는 오리진 더스트의 비율을 알 수 없었기에 그녀를 복원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해 볼만한 것도 없어서 우선 요정마을부터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장비는 싹 다 두고 왔는데 설마 공격이라도 당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기 전에 빨리 요정마을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곳엔 야생동물은 물론이고, 심하면 철충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처음 보는 바이오로이드군요. 누구십니까?"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블랙 웜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저런 스타킹을 입고 다니는 거냐.



"난 레모네이드 감마다. 이곳의 책임자와 AGS랑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안내해줄 수 있나?


미리 말해두지만 난 어디까지나 대화만 하러 온 거라 무장도 해제해두고 왔고,


너희들이 내 말을 믿건 안믿건 얘기가 끝나는대로 갈 생각이다."


"......"



블랙 웜은 잠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우우웅!



그때, 어디선가 물장군처럼 생긴 로봇이 날아왔다.



"로버트?"


"이런이런, 로버트를 알고 계신 분이셨군요!"


"?!"



로버트의 말투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유쾌하다.


이 목소리와 말투는 분명...



"알프레드?"


"어이쿠! 제 이름은 Mr. 알프레드입니다! 제대로 기억해주십시오!


그나저나 저를 아시는 분이셨습니까? 이것 참 놀랍군요!"



아차! 실수했다!


알프레드는 어디까지나 '이 섬에서' 자아를 얻은 AI였을텐데!



"블랙 웜 양! 저를 아시는 걸 보니 믿을만한 분이 맞는 것 같습니다!


리더에게 데리고 가도 문제는 없을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리더에게 안내해드리지요."



...뭐?


----------


'어째서 알프레드를 알고 있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걸까?'



당장 블랙웜만 해도 내가 알프레드를 알고 있었다는 걸 의심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정작 당사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 넘기고 있다는 게 문제다.



'저게 연기일...리는 없겠지, 그래도.'



알프레드가 거짓말을 하거나 그런 모습을 보이진 않았으니까.


이제와서 내가 모르던 알프레드가 갑자기 튀어나오거나 한다면...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지.



"어라, 새로운 분이 오신건가요?"


"처음 보는 바이오로이드군. 누구냐?"


"...응?"



아니, 왜 로버트랑 세레스티아가 같이 있는거지?


로버트는 외딴 실험실에 혼자서 자기 일만 하고 있었을텐데?



"나는 레모네이드 감마다. 로버트, 세레스티아. 당신들 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왔다."


"어머? 들어본 적은 있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요? 저흴 알고 계셨던 건가요?"


"뭐,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군."


"용건이 뭐지?"



로버트의 붉은 눈이 나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언젠가 이 섬에 오르카호라는 잠수함에 탄 인간이 찾아올거다."


"...네?"


"...계속하도록."



...뭐지?


둘의 느낌이 뭔가 달라졌다.


아까 전과는 달리 분위기가 조금 무거워진 것 같은데...



"되도록이면 그 인간과 적대하지 말고, 같이 합류해줬으면 한다.


물론, 그 인간이 바이오로이드를 함부로 대하는 인간이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



세레스티아와 로버트는 말없이 시선만 주고 받았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로버트가 입을 열었다.



"용건은 그게 단가?"


"아니, 하나 더 있다."


"말해라."


"인간이 오기 전에..."



어느새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이건 제발 믿어줬으면 좋겠는데...



"레모네이드 오메가라는 바이오로이드가 이곳을 찾아올거다."


"레모네이드...오메가요?"


"그래. 다름이 아니라 죽어버린 오메가 산업의 회장을 부활시키기 위해, 너희들을 실험체로 쓰기 위해서 말이다."


"세상에...!"



세레스티아는 믿기지가 않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로버트는 내 말을 그다지 믿지는 않는 것 같다.



"너 또한 레모네이드일텐데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거지? 그 얘길 해주는 목적이 뭐냐?"


"PECS의 수장들이 다시 부활하는 일 따윈 있어서는 안되니까.


그리고 우리 레모네이드들은 그다지 결속력이 강한 편이 아니고,


애초에 레모네이드에 속해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런 근거없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라는건가?"


"안 믿으면 나야 어쩔 수 없긴 해. 난 어디까지나 말만 해주려고 온 거지, 이 이상 뭔갈 할 생각은 없으니까."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다.


안됐지만 그냥 가야겠...



"믿어요."


"...응?"


"로버트 씨는 성격이 워낙 꼼꼼하다보니 세세한 것까지 다 따져보는 분이라서 그렇지, 감마씨의 말을 믿지 않는 게 아니에요."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더욱 확실하게 해둬야 되지 않나. 너희, 탄소기반 생명체들은 일 처리가 너무 미흡해서 탈이다."


"하지만 당신이 말해준 사항과 일치하잖아요. 이 분은 딱 보면 위험한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요."


"네가 신경에 일시적으로 화학반응 현상이 일어났던 걸 감이니 뭐니 하면서 대충 넘긴 게 어디 한두 번 일인가?"


"잠깐, 뭐가 일치한다는 거지?"



로버트는 귀찮다는 듯,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 섬에서 임무를 부여받을 때, 총수로부터 몇 가지 지시 사항이 내려왔다."


"앙헬 리오보로스가?"



생각치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앙헬이 왜 여기서 나오는거지?



"첫째, 훗날 바이오로이드들이 이 섬에 온다면 적대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낼 것.


둘째, 실패작 중에서 알프레드라는 인격을 각성한 AI가 나타난다면 폐기시키지 말고 잘 대해줄 것.


셋째, 레모네이드 오메가가 오면 보자마자 죽여 없앨 것.


넷째, 저항군을 이끄는 인간이 오면 군말없이 합류할 것."



맙소사, 앙헬도 나처럼 라붕이가 환생한 존재였나보다.


어째 블랙 리버 쪽이 유독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 때문이었던걸까.



"다섯째, 만약 알프레드를 처음 보는데도 아는 자를 만나면 믿을 수 있는 자일테니 잘 대우해 줄 것."


"...그런가."


"놀라지 않는 걸 보니 뭔가 알고 있나보군."



로버트는 한숨을 내뱉는 소리를 냈다.



"'때로는 진실이 거짓보다 더 허무맹랑한 법이다', 내가 총수에게 이유를 물었을 때 이렇게 답하더군."


"뭐, 앙헬 리오보로스도 사람이니까 남모를 비밀 한두 개 정돈 가지고 있겠지."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


"총수는 만약 그런 자가 나타난다면 아무것도 묻지말아달라고 했다.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그걸 발설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괴롭다며 말이다."


"하..."



그러고보니 이곳 세계의 앙헬은 바이오로이드들을 꽤나 아꼈다고 했지.


그런 그가, 썩을대로 썩었던 그 시대를 살아갈 땐 대체 어떤 느낌이었을까?


살기위해서 모든 것들을 버린 채 떠났다고 들었는데 그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도 모르게 앙헬에 대한 연민이 솟구쳐올랐다.



"괜찮나요?"



나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세레스티아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내 눈물을 닦아줬다.



"어떤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분명 슬픈 일이 있었겠죠."



아아...어쩌면 난 앙헬에게 연민을 느낀 게 아니라 동질감을 느낀 걸지도 모른다.


죽은 것도 모자라서 하필이면 빌어먹을 시대에 다시 태어난데다가,


앙헬은 살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들로부터 등을 돌렸고,


나는 그나마 기댈 수 있던 스승마저 잃어버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세레스티아는 말없이 나를 꼬옥 안아주었다.



"음? 알프레드, 지금 뭐하는거지?"


"쉬잇! 로버트, 지금은 조용히 자리를 비켜줘야 할 땝니다!


그리고 저는 Mr.알프레드입니다!"


"사소한 걸 가지고 일일이 트집잡지 마라. 하여간, 감수성있는 녀석들은 참으로 피곤하게도 사는군."



고맙다, 알프레드...


----------


"음, 잠시 안 좋은 모습을 보였군. 실례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지신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세레스티아는 웃으면서 뭔가를 건네주었다.



"......!"



보자마자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다.


한때 레나가 걸고 다니던 목걸이였으니까.



안에는 레나가 갑작스런 부상을 입었을 때,


비상용으로 사용하라고 회사에서 지급한 특수한 오리진 더스트가 담겨있었을 터.


그래서 레나는 다치지 말자는 마음으로, 그걸 일종의 부적처럼 가지고 다녔다.



"...이건?"


"저희 자매들이 여러 광고와 행사에 동원됐다는 거, 알고 계시죠?"


"내가 알기론 그쪽은 이미지 메이킹 때문에 현장에 파견된 개체일텐데?"


"그렇죠. 회사 측에선 보다 확실하게 이미지 메이킹을 하려고 아예 후원단체까지 위장하려고 했죠.


그 위장용 후원단체 중엔 BWE가 있었고요."


"BWE라고?!"



분명 레나가 BWE소속이었을텐데?!



"그때, 회사에서 홍보영상을 찍으려고 레나라는 사람을 데려온 적이 있었어요."


"......"



그러고보니 언젠가 레나가 무슨 식목 사업 단체에 홍보하러 갔다고 한 적이 있었지?


그때 만난 게 세레스티아였던건가?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나름 정도 들었고, 떠나는 날엔 만난 것도 인연이라고 이걸 주더라고요."


"레나가 이걸..."


"본인은 부적 대용으로 쓴다면서 저한테 넘겨줬어요. 하지만...이젠 저 말고 필요한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



아마 이 안엔 레나를 복원하는 데 필요한 마지막 열쇠가 담겨 있을 것이다.



"고맙다...정말로...고마워..."



세레스티아는 아무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


"다 끝났나?"


"기다리세요, 로버트! 아직 됐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가씨들에겐 조금 더 섬세하게...!"


"배려는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이 이상 질질 끌어봤자 시간낭비다."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로버트의 거체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아까 말해줬지만 네가 한 제안들은 어차피 이행할 생각이다.


그것에 대해선 이곳에 사는 바이오로이드들도 동의했지."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제발 오메가만큼은 꼭 경계해줬으면 좋겠군.


안 그랬다간 모든 게 다 의미없게 되버리니까."


"알고 있다. 정말이지, 원...


레모네이드라...참으로 지긋지긋한 이름이군..."



응? 로버트가 알고 있는 레모네이드는 오메가랑 나 정도가 전부일텐데 왜 저런 말을 하지?



"무슨 소릴하는거냐, 네가 알고 있는 레모네이드는 앙헬이 말해준 오메가랑 여기 찾아온 내가 전부일텐데?"


"이전에도 델타라는 레모네이드가 여길 찾아왔다. 너랑 똑같은 걸 요구하더군."


"...뭐?"



레모네이드 델타가...여길 찾아왔다고?



"모르고 있었나? 역시 네 말대로 레모네이드들이 결속력이 단단한 집단은 아닌 것 같군.


오메가의 사살, 인간과의 합류, 전부 다 네가 요구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는 거다."


"델타가...여길 왜...?"


"이유를 물어보니 그 녀석 역시 너랑 같은 반응을 보이더군. 그리고 알아서 뭔갈 눈치챈 듯한 행동을 취했다."



설마 델타도...앙헬이나 나처럼...?


아니, 어디까지나 구실일지도 모른다!



"잠깐, 그 밖에 델타가 다른 행동을 취하거나 하진 않았나?"


"그 밖에 다른 행동이라..."



로버트는 알프레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신규 바이오로이드 디자인에 필요하다고, 저 녀석의 AI 정보를 요구한 게 전부였다.


대체 어떤 바이오로이드를 디자인하길래 그게 필요하냐고 물어보니,


시대의 흐름에 따른 패러다임일 뿐이라는 말밖에 안하더군."


"......"


"응? 표정이 이상하군요? 뭔가 아는 게 있으십니까?"


"아니...나도 잘...모른다."


"흐음...누가 봐도 거짓말을 하는 표정입니다만..."



맙소사...


델타야...너...



설마 미스 알프레드를...


----------


"흐음, 제 AI 정보를 가져간 것도 뭔가 수상하긴 하지만, 중요한 걸 빼먹지 않았습니까, 로버트?"


"응? 필요한 정보는 말해주었다만?"


"델타 이전에도 레모네이드가 여길 오지 않았습니까? 그게 필요한 정보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입니까?"



응? 델타랑 나 말고 다른 레모네이드가 여길 왔다고?


로버트는 왜 그걸 말해주지 않았지?



"어차피 그때 난 실험실에 있어서 그 녀석을 본 적도 없다.


너한테 말로 전달받은 게 전부인데, 그걸 말하느니 차라리 네가 직접 말해주는 게 좋지 않나?"


"이 깡토오옹! 조금은 융통성을 발휘하란 말입니다!"


"나랑 델타 말고도 또 다른 레모네이드가 여길 왔다니, 누구지?!"


"으음...그게..."



어째선지 알프레드는 망설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알프레드는 그 당시에 인격이 완전히 활성되지 않아서 그 당시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제가 대신 얘기해드리는 게 낫겠네요."



델타가 왔다는 건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다른 레모네이드가 온 건 잘 기억하지 못했다고?


꽤나 오래전에 찾아온 모양이다. 대체 누구지?



"그녀의 요구도 델타님과 감마님과 별 다를 바가 없었어요.


오메가를 경계하고, 때가 되면 인간님에게 합류하라는 것이었죠."


"이름이 뭐지?"


"음...분명...레모네이드 파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



...농담이지?


파이가...파이가 왜...?



"그런데 제가 알기론 레모네이드들 중에서 파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은 안 계시거든요.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제타, 엡실론, 오메가, 이렇게 일곱 분으로 알고 있는데 파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로버트가 말할 때도 확실하지 않은 정보라고, 굳이 말해주지 않은 걸 거에요."


"......"



설마 진짜로 그 팬픽 속의 파인가?!


아니면 또 다른 환생자?!


아니, 파이가 마냥 저항군 편이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어!


젠장...어떻게 해야...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많이 안 좋습니다만..."


"아...괜찮아. 그나저나 그 얘긴 델타도 알고 있나?"


"아닙니다. 할 말만 하고 나서 제 AI 정보만 받고 곧바로 가버렸거든요."


"그런가..."



우선은 돌아가서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말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이래저래 받아가게 되는군.


정말로 고마워. 이건 나중에 꼭 보답하도록 하지."


"후훗, 안녕히 가세요."


"잘 가라."


"쿠후후~! 그럼 다음에 또 뵙도록 하지요!"



나는 요정마을 주민들의 배웅을 받으며, 섬을 떠났다.


----------


"...드디어 때가 됐군."



다행히 요정마을에서 받은 목걸이엔


어느 정도의 오리진 더스트를 투여하는 되는지에 대한 메세지 기능이 달려있었고,


그걸 기반으로 레나의 복원에 필요한 오리진 더스트의 비율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준비는 모두 끝났다.


해당 비율대로 오리진 더스트를 투입하고, 기계를 작동시킨다.



.....

.....

.....

.....

.....



"도통 일이 손에 안 잡히는군..."



복원작업을 시작한지 벌써 8시간이 넘었다.


게임에서 레나 제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였지?



"감마님! 감마님!"



연구원들이 다급하게 나를 찾아왔다.


뭐지? 뭔가 잘못됐나?



"뭐냐?! 무슨 일이냐!"


"레나 씨가 깨어났습니다!"


"뭐?!"



곧바로 제조실로 뛰어갔다.



"감마님, 아직...!"



연구원이 뭐라고 하는 것 같지만 알 바 아니다.



"레나...!"


"어, 뭐야?"



레나가 나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바보 제자?"


"...!"



지금...나를...



"레나! 날 기억해?!"


"바보 제자, 지금 뭐가 어떻게..."



와락!



나는 말없이 레나를 꼬옥 껴안았다.



"...바보 제자?"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마."



다시 만났다는 반가움과 안도감보다,


지금 꽉 붙잡아두지 않으면 또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앞으로는...나한테 말도 없이 어딜 가지 마. 알았어?"


"......"



지금 레나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애써 감추고 있느라 그녀의 얼굴을 도무지 볼 수가 없었다.



"알았다...바보 제자. 그리고...고맙다."


"......!"



그 이후로 난 오랫동안 소리내어 울었다.


레모네이드 감마로 환생하고 나서 그렇게 운 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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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일단 그 사령관이란 녀석이랑 계속 접촉을 하면서 파이 녀석의 흔적을 찾겠다고?"


"뭐, 그렇게 됐어."


"하아...내 제자가 전생에 이 세계의 운명을 아는 인간이었다니...


다른 녀석같았으면 믿지도 않았을거야."


"스승님은?"


"내가 제자를 믿어주지 않으면 누가 믿는데?"


"요올~우리 스승니임~^^"


"하하, 이렇게 끼가 넘치는 녀석일줄은 전혀 몰랐는데."



레나를 복원시킨 후,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슬슬 최후의 인간이 나타날 때도 됐다.



"앞으로의 일이 참 기대되는군."



사령관에게 일어날 수많은 이벤트들을 생각하면서 낄낄 웃고,


그것들 중 일부를 레나한테 말해주며 함께 깔깔거렸다.



그러던 중, 갑자기 눈 앞에 이상한 창이 하나 떴다.



"응?"


"뭐냐, 이건? 그 사이에 새로운 거라도 개발한거냐, 바보 제자?"


"아니, 이건 나도 처음 보는 건데? 애초에 우리 기술력으론 이런 거 못 만들어."



그리고,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던 창에 문구가 나타났다.



[지금부터 LAST ORIGIN THE MULTIVERSE 커뮤니티 서비스를 시작하겠습니다.]













[환영합니다. 만렙쌈닭님]



"뭐야, 이거!!!!!!!!!!!"


"아하하하하하!!!!!"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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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돌아온 LAST ORIGIN THE MULTIVERSE가 돌아왔습니다^^



우선 작년 12월 중순 이후로 작품을 올리지 않은 것,


그리고 LAST ORIGIN THE MULTIVERSE를 시작할 때 했던,


페이스 조절을 하며 올리겠다는 약속을 깨서 죄송합니다.



우선 서사가 부족하거나 플롯 변경으로 인해 수정해야 할 에피소드들을 정리하느라 늦었고,


그 다음엔 기다리게 했으니 빈 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에피소드들을 추가로 쓰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다음 내용을 기다리고 계신 분들이나 기다리다 지친 분들을 위해,


작업 현황 및 추후 에피소드 전개를 대략적으로 설명해드리자면,


현재 FantasyVerse를 제외한 나머지 에피소드들의 기본적인 서사 정리를 거의 다 끝마쳤고,


그 작업이 끝난 다음엔 FantasyVerse의 기본적인 서사 정리를 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서사 정리가 끝나면 각 에피소드들의 챕터 1들을 마무리 짓고,


추가 에피소드 및 외전들을 작성한 후에 챕터 2로 넘어갈 생각입니다.



다시 한번 늦게 와서 죄송하다는 말 전해드리며, 앞으로도 재미있게 작품을 짜서 올릴 생각입니다.


가능하면 내일부로 Verse of Thrice fiction의 에피소드를 진행할 생각입니다.


그럼 20000~^^



p.s - 감마와 레나는 백합 관계가 아닙니다.


p.s 2 - 펍헤드는 이미 델타의 도움을 받아 본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