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까지 가서 데려온 포츈은 기계라고는 톱니바퀴도 모르는 우리들 중 유일하게 기계를 다룰 수 있는 기술자다. AGS들을 수리하고 정비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뭘 눌러야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를 공단 제어패널을 능숙하게 다루며 현재 공단의 상태와 벽 상태까지 점검해주었다. 


 

그녀들이 열심히 하는 만큼 나 또한 열심히 해야 한다. 브라우니와 레프리콘과 블러디 팬서의 힘을 빌려 그녀들과 함께 공단 앞마을을 주기적으로 순찰하며 나오는 철충을 격멸해 이 땅에서 철충의 세력을 조금이나마 걷어내고 구역을 안정화 시켜야 하며, 바깥에서 떠돌고 있을 바이오로이드들을 위해 탈론페더에게 그들을 위한 라디오 방송을 부탁했다. 지금은 아직 한 명도 오지 않았지만 라디오 방송을 듣고 생존자가 올 경우 그들을 위해 내어줄 거처와 식량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이 뭘 할 수 있고, 어디에 있었는지도 알아봐야겠지. 


 

규모가 조금 더 커지면 식량문제도 알아봐야 한다. 지금은 레아와 다프네가 공단 한 군데에 조그맣게 텃밭을 만들고 있지만 생존자들이 늘어나고 일행의 규모가 커진다면 구역을 통째로 뜯어낸 다음, 대규모 농사를 지어야 할 수도 있다. 항구인 점을 이용해 어업을 본격적으로 해봐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그물을 치고 물고기를 대량으로 잡을 수 있는 어선은 없지만 인류가 멸망하고 몇 년이 지났다고 하니 물고기가 많을 해안가에 그물을 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잡을 수 있겠지. 


 

그녀들이 바쁜 만큼, 나도 바빠야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이 시기에 난 왜 누워 있어야 하는 걸까? 침대에 누운 나는 내 입에서 온도계를 빼내는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주인님, 열이 있으세요...” 

 


감기에 걸렸으니 당연히 열이 있지. 온도계를 보며 걱정하는 다프네의 말을 들은 나는 한숨을 쉬며 뜨끈뜨끈하게 열이 오른 이마를 손으로 매만졌다. 목이 칼칼하고 몸이 슬슬 으슬으슬해지는 것이 영락없는 감기다. 요새 추운 곳에서 돌아 다니긴 했지만, 하루 비좀 맞았다고 바로 감기에 걸리다니. 바이오로이드라는 인간 제조 기술도 있고, 로봇 제작 기술도 있는 미래에도 감기는 질기도록 남아 아직도 인간을 괴롭히는구나. 

 


“민님은 괜찮은 겁니까?”


“다행히 증상이 심하시진 않으셔서 오늘 하루 푹 쉬시면 어느 정도 나아 지실거라 생각해요. 약도 있으니까요. 약을 계속 드시면서 향후 결과를 봐야 알 수 있겠지만..”


 

다프네와 블러디 팬서의 대화를 들어 보니 내가 걸린 병이 감기가 아니라 엄청나게 심각한 병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인플루엔자 같은 독감이면 모를까, 일반 감기 가지고 하루를 통째로 쉰다? 어림도 없지. 중학생 때도 그래본 적 없다. 대충 공단이라도 한번 둘러보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고 하자 모여있던 모두의 손이 날 억지로 침대에 짓눌렀다.


 

“일어나시면 안 돼요, 주인님. 하루 정도는 푹 쉬셔야 한답니다.”


“얘들아, 이거 그냥 감기야. 약 먹고 가만히만 있어도 낫는 감기라고. 죽을병도 아니고 심각한 병도 아니고 그냥 가벼운 감기라고.”


“그러면 하루 정도 푹 쉬시지 말입니다. 내부 순찰정도는 저와 애들만으로 충분하지 말입니다.”


“실내 정원 가꾸기는 저와 더치걸 둘만으로도 충분해요.”


“라디오 방송도 저 혼자만으로 충분하답니다!”


“공단 설비 점검은 이 누나 혼자서도 할 수 있거든.”


 

내가 없어도 알아서 잘할 수 있다는 모두의 능력을 대단하다고 여겨야 할지 아니면 내가 나설 구석이 없다는 현실에 슬퍼해야 할 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얘네들은 감기라는 병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하긴, 인간이 나 빼고 전멸했으니까 감기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모르면 설명해 주면 될 일이다. 내가 나설 구석을 원천 차단하는 그녀들을 보며 한숨을 쉰 나는 그녀들에게 150년 전 감기가 어떤 질병 취급받았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 150년 전까지만 해도 감기는 진짜 하찮은 병이였어. 12살 초등학생도 걸린 채로 놀러 다니고 그러는 병이였다니까? 감기로 하루 쉰다고 하면 진짜 다들 웃을 정도였어. 그러니까 나도 움직여도 괜찮아.”


“하지만 주인님..목이 꽤나 부으셨는걸요. 열도 좀 있으시고요.”


“다프네. 그게 감기의 증상이야. 하루 자면 나아질거니 너무 걱정은...”


“민님 말씀대로라면 그건 150년 전 이야기 아닙니까? 150년 동안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시지 말입니다.” 

 


그건..그렇긴 해..블러디 팬서의 논리를 뭐라고 받아쳐야 할지 모르는 나는 느긋하게 풍선껌을 씹어대는 블러디 팬서에게 원망이 섞인 눈빛을 보냈다. 내 눈빛을 받은 그녀는 짓궂게 미소 짓더니 침대 위에 앉아있는 내 머리 위로 이불을 덮어씌웠다. 

 


“딱 하루만 쉬시면 되지 말입니다. 고작 하루 쉬었다고 큰일날 일 없지 말입니다.” 


 

마치 말 안 듣는 어린애처럼 다뤄지자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지금 여기의 그 누구보다 나이가 많다는 건 알고서 하는 행동인지 모르겠네. 아직 증상이 제대로 올라오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머리가 지끈거려온다. 


 

“팬서야, 내가 여기 그 누구보다 나이 많다는 건 알고 있지?”


“그러면 연장자답게 행동하시면 될 일이지 말입니다.” 

 


팬서에겐 내가 진짜 뭐라 말도 못하겠다. 따박따박 옳은 말만 해가며 말대꾸하니 도저히 말로는 그녀를 이길 자신이 없다. 물론 힘으로도 못 이기지만. 블러디 팬서에게 말로 진 나는 포위하듯이 침대 주변을 에워싼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더 개겼다간 그녀들 손에 난 감기가 나을 때까지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실제로 그녀들은 그럴만한 힘도 있고 능력도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오늘 하루 정도는 그녀들의 말에 따라 푹 쉬자. 대신 나만 쉬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쉬는 걸로. 이 기회에 새로 온 포츈과 더치걸이 이곳에 적응할 시간을 가지면 좋겠네.


 

“알았어. 대신 나뿐만이 아니라 너희 모두가 쉬어. 알았지.”


“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털털하게 웃은 블러디 팬서가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을 데리고 나가는 것을 시작으로 방 안에 모인 바이오로이드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워주었다. 내 간호를 위해 남은 것으로 보이는 다프네만이 옆에 남아 내 안색만 차분히 살피고 있었다. 물을 적셔 꽉 짠 행주를 머리 위에 얹어준 그녀는 다른 바이오로이드들과 함께 수시로 들락날락하며 내 체온을 실시간으로 살폈다. 


 

그렇게 왔다 갔다 하지 않아도 때 되면 낫는 병인데. 모두가 걱정은 할 줄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크게 걱정할 줄은 몰랐다. 

 


아침부터 누워만 있자니 지루해 바깥공기라도 잠깐 쐬려고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다프네와 함께 약상자를 뒤적이던 오베로니아 레아가 득달같이 날아와 부드러운 손길로 날 만류하기 시작했다. 

 


“함부로 일어나시면 안 돼요, 주인님. 다프네가 오늘 하루는 푹 누워계셔야 한다고 했는걸요?”


“일하려는 게 아니라 잠깐 바깥 공기 좀 쐬려고..”


 

타이밍 나쁘게 터져 나오는 기침을 손바닥으로 겨우 가린 나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내 옆을 지키는 오베로니아 레아를 바라보았다. 일어나지 말라고 아예 담요까지 덮어주며 몸을 토닥여주는 모습은 내게 누나가 하나 생긴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얘들아. 오래 누워있어서 몸이 좀 쑤신데 바깥 바람이라도 좀 쐬고 오면 안 될까? 정말 잠깐만 나갔다 올 거니까.”


“바깥 바람이 많이 차답니다. 오늘 하루만 참아주세요.”


“몸이 쑤신 거라면 제가 좀 주물러드릴까요?”

 


상냥하게 내 옆을 지키는 페어리 자매들은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팔을 뻗어 내 팔다리를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관절을 꾹꾹 누르고 저릿거리는 허벅지 근육을 풀어주자 감기 기운으로 인해 나른하게 풀려있던 팔다리에 힘이 점점 돌아오기 시작했다. 고작 감기 환자를 이렇게까지 챙겨줄 필요는 없는데. 팔을 타고 어깨까지 올라오는 손길에 얼굴이 붉어졌다. 


 

“고마워, 레아. 하지만 고작 감기 가지고 이렇게 유난을 떨 필요는 없는데..실내 정원에 조금 더 신경을 써도 돼.”


“저희에게 있어 주인님만큼 소중한 건 없답니다. 그리고 실내 정원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더치걸이 잘 돌봐주고 있을 거랍니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레아가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장본인인 더치걸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작은 고개를 내밀고선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피는 그녀는 탄광의 안전모 대신 앙증맞은 붉은 리본이 달린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포츈 언니가 전해 주랬어..감기에 좋을 거래..”


 

쟁반 위에 있는 하얀 그릇 안에는 닭고기를 찢어 넣은 치킨 스프가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었다. 내 옆에 먹기 좋게 그릇과 수저까지 놓은 더치걸은 레아와 다프네와 살갑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나 고마워라. 안 그래도 주인님의 식사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내가 한 게 아냐..포츈 언니가 만들었는걸.”


“그래도 정말 잘했어요. 언니가 칭찬해 줄게요.”

 


움찔거리는 더치걸을 품에 안은 레아는 그녀의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어주기 시작했다. 말 수는 없어도 페어리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니 그녀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면 어쩌나 했던 걱정이 싹 가시는 것 같았다. 그녀를 맨 처음 만났을 때는 인생N회차 겪은 것처럼 피폐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이렇게 보니 지금은 꽃을 돌보는 순박한 시골 소녀 같았다. 역시 그녀를 페어리들에게 맡기는 게 정답이었다. 


 

“레아 언니 말대로 화분에 물까지 다 줬어..이제 뭐 하면 돼?”


“오늘은 민님 말씀대로 푹 쉬시는 게 어때요? 언니가 맛있는 과자라도 구워줄게요. 주인님,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더치걸을 품에 안은 레아는 내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선 더치걸에게 과자를 구워주기 위해 바깥으로 날아갔다. 

 


“주인님, 죄송한데 잠깐 언니를 따라가 봐도 괜찮을까요? 언니는 가사 능력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거든요.”


“에이. 난 괜찮다니까. 난 신경쓰지 말고 편하게 다녀와.”

 


정말 괜찮다니까 왜 날 그렇게 불안한 눈으로 보는거야, 다프네? 내가 어디 나갈 것처럼 보여? 물론 네가 나가면 바로 바람 좀 쐬러 잠깐 나갔다 올 거지만. 


 

레아의 뒷모습과 미소짓는 내 얼굴을 불안한 눈으로 번갈아 바라보던 다프네는 내게 고개를 숙이더니 푹 쉬고 있어야 한다는 당부의 말을 남기고선 레아를 찾아 날아갔다. 이제야 방이 좀 조용해졌네. 맘 놓고 바람 좀 쐴 수 있겠어. 다프네가 나가자마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기지개를 펴 찌뿌둥한 몸을 한 차례 풀고선 문고리를 꽉 붙잡았다. 

 


문고리를 돌려 막 바깥으로 나가려고 할 때, 바깥에서부터 문고리가 확 열어젖혀지더니 브라우니와 함께 레프리콘이 방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민님! 이거 보시지 말임다! 개쩔지 않슴까?! 제가 잡았슴다!”


“브라우니!! 민님은 지금 환자십니다!! 멋대로 들어가면 어떡해요!!”


 

둘에 의해 몰래 나가는 바깥 외출이 망쳐졌다는 실망감도 잠시, 브라우니의 손에 들려있는 50cm는 족히 되어 보이는 물고기를 보자 순식간에 물고기를 향해 시선이 쏠렸다. 바다에서 갓 잡아 올렸는지 검은 몸통에 하얀 줄무늬가 인상적인 물고기는 간헐적으로 펄떡이며 브라우니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와, 진짜 쩔잖아? 저런 건 대체 어디서 무슨 수로 낚았대?

 


“야, 진짜 개쩐다. 어디서 잡았어?!”


“헤헤. 저기 컨테이너 있는대서 잡았지 말임다. 지금 블러디 팬서 중령님이 안주로 쓰겠다고 엄청 잡아대고 계시지 말임다!”


“뭐야, 나도 잡을래. 나도 낚시하고 싶어. 나도 데려가.”


“브라우니! 이제 그만하고 어서 돌아가요! 민님도, 그렇게 서 계시지 말고 어서 자리에 누워주세요! 민님은 지금 환자십니다!”


 

레프리콘의 잔소리에 브라우니는 너무한다는 말과 함께 입을 비죽 내밀고 잠깐 항의해봤지만 그녀의 깐깐한 눈빛과 마주치자 얌전히 생선을 들고 레프리콘과 함께 문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브라우니가 나갈 때까지도 그녀의 손에 들린 생선은 힘차게 퍼덕이며 살길을 도모했지만인간보다 훨씬 힘이 강한 브라우니의 손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고놈 기운찬 게 매운탕으로 끓여 먹으면 딱이겠구만. 나중에 몇 마리 남으면 직접 매운탕이라도 끓여볼까? 생선 국물과 진하게 배어 나온 매콤한 국물을 떠올리자 입맛이 사라진 와중에도 군침이 돈다. 


 

바깥 바람도 쐴겸 신나는 낚시를 즐기기 위해 브라우니의 뒤를 따라 바깥으로 나가려고 할 때, 블러디 팬서와 함께 레아가 방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거, 그 새를 못 참으시고 나가려고 하심까.”

 


내가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는 걸 안 블러디 팬서는 날 어깨에 번쩍 들쳐메더니 다시 침대에 눕혀놓았다. 감히 날 여기 눕혀놓고 너네들끼리만 즐거운 갯바위 낚시를 즐겼다 이거지? 


 

“나 여기 눕혀놓고 너희들만 재미난 거 하기야? 나도 낚시할래.”


“낚시한 적 없지 말입니다. 대체 제가 낚시한다는 말은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브라우니가 아까 물고기까지 들고 왔거든? 시치미 때봤자 소용없어.”


“뭐, 물고기 먹고 싶어서 안 쓰는 자동차 배터리 가지고 바다 몇 번 지진 적은 있어도 낚시한 적은 없지 말입니다. 아, 혹시 그것도 낚시라고 부릅니까?”


“야, 너 그거 불법...”

 


잠깐, 불법이 아닌가? 150년 전에는 불법이었긴 한데..지금은 해양수산부도 없고, 불법 조업에 대한 법도 없으니 따지고 보자면 불법이 아닌것도 같은데..

 


태연한 얼굴로 바다를 전기로 지졌다는 블러디 팬서의 말에 뭐라 답해야 할지 내가 헷갈려 하는 동안, 침대에 누운 내 옆으로 다가온 레아는 다 식은 치킨 스프를 한 스푼 뜨더니 내 입에 들이밀기 시작했다. 

 


“자~ 주인님 아 해보세요. 아~”


“그렇게 먹여주지 않아도 나 혼자 알아서 먹을 수 있어. 너희는 대체 날 뭘로 아는 거야?”


“아프신 분이니 보살핌 받는 건 당연하지 말입니다.”


“실제로 어리기도 하시잖아요.”


“레아야. 내가 비록 외모가 이렇긴 하지만 생년월일로 나이를 따지면 170살이 넘어간단다. 그리고 블러디 팬서. 내가 말하지 않았어? 나 여기 날아오기 전까지도 스무살이었다고. 어엿한 어른이란 말이다.”


 

나이로 들먹이긴 싫지만 나이로만 따지면 너네는 전부 내 증손녀뻘이라고. 대 놓고 애취급을 하는 그녀들을 향해 한 차례 툴툴거린 나는 얌전히 입을 벌려 레아가 떠 다주는 치킨 스프를 받아먹었다. 착하다며 머리까지 쓰다듬는 걸 보니 아까 내가 한 말은 귓가로도 듣지 않았나 보다. 어쩌겠어. 받아들여야지. 


 

얌전히 말 듣는 동생을 바라보듯이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는 둘을 향해 뭐라고 한마디 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하던 도중, 곳곳에 달린 스피커가 한 차례 지직거리더니 핸드폰에 저장해놨던 노래 중 하나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Fly Me to the moon~And let me play among the stars~’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재즈의 선율과 감미로운 목소리를 듣자마자 새삼 감동적인 기분이 든다. 간주 때마다 베이스로 깔리는 색소폰 연주와 트럼펫 소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히고 저절로 손발을 까딱이게 만든다. 

 


이게 바로 시대를 초월한 명곡이지. 괜히 몇 십년 동안 회자되는 노래가 아니야. 탈론페더가 점심시간 때마다 라디오 방송을 하겠다고 했는데 한밤중에 어울리는 노래라는 걸 제외하면 정말 완벽하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재즈의 선율을 흥얼거리며 레아가 건네주는 스프를 얌전히 받아먹었다.

 


“전혀 못 들어본 노랜데 대체 언제 적 노래입니까?”


“60년대 노래야. 제법 유명한 노래지.”


“어머나 100년 전 노래라니. 감동이네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레아. 내가 말한 60년대는 2060년대가 아니라 1960년대야. 내가 2060년대의 노래를 알 리가 없잖아.”

 


순간 모두의 말이 사라졌다. 하긴 좀 오래되긴 했지? 2022년에도 듣는 사람만 듣던 옛날 노래 취급받았으니 2170년대에는 당연히 그럴만하지. 아마 얘네들은 프랭크 시네트라가 누군지도 모를 거다.


 

“그래도 명곡은 명곡이니 한번 들어봐.” 


“그래도 좀 너무 오래된 노래 같지 말입니다.”


“에이. 그런 말 하지 말고 들어봐. 이래뵈도 저 노래 인류가 최초로 달에서 들은 노래라고.”


“어머, 정말요?”

 


신기한 듯 스피커를 바라보는 레아에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소련과 미국의 우주경쟁이 극에 달하던 60년대에 NASA출신 우주비행사가 카세트 테이프로 달에서 맨 처음 튼 노래가 바로 저 노래다. 달로 보내달라는 내용의 재즈를 들으며 달에 첫발을 디뎠을 때, 과연 우주비행사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주비행사들이 달에 깃발을 꽂는 장면을 티비 앞에서 보던 그때 사람들은 200년 후 인류가 멸망한다는 상상을 하기나 했을까? 아마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계속 쭉 발전이 계속된다면 언젠가 인류는 지구를 넘어 우주에까지 진출하리라 믿고 있던 때였으니까. 우주에 대한 진보와 경의의 의미로 보이저호에 골든 레코드까지 집어넣어 날려 보냈으니 오죽할까. 

 


우주이야기를 하니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작고도 창백한 푸른 점을 찍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항해자는 인류가 멸망한 지금도 인류의 흔적을 담은 황금 원판을 가지고 우주 저편을 여행하고 있을까?

 

 

*

 

 

‘네. 그런 노래라고 하더군요.’

 


화면 너머로 보이는 탈론페더의 보고를 받아본 오르카호의 사령관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다음, 탈론페더가 방송하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오래된 노래인 줄은 알았지만 설마 인류가 처음으로 달에 진출했을 때 최초로 들었던 노래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대체 저 남자는 어떤 인물이기에 지금은 흔적조차 남지 않은 노래들을 잘 알고 있는 걸까? 문득 궁금해진 사령관은 탈론페더가 수집한 자료들을 바라보았다. 


 

처음 탈론페더와의 연락이 끊겼을 때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부하를 사지로 보냈다는 죄책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줄 알았다. 앵거 오브 호드를 위주로 한 구조대를 편성해 구출해 와야하나, 아니면 그와 인질 협상을 해야 하나 무던히 고민하고 회의했다. 

 


때마침 타이밍 좋게 들어온 탈론페더의 보고가 아니었더라면 사령관은 앵거 오브 호드를 공단 안으로 침투시켰을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두 번째 인간과의 관계는 파토가 났겠지. 아찔했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사령관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탈론페더가 보내오는 보고 자료를 검토하고 오르카의 기술을 담당하고 있는 닥터에게 자료를 건네주었다.

 

다행히 두 번째 인간은 멸망 전 인간들과는 달리 탈론페더를 인격체로 대해주고 생존자들을 위한 라디오 방송까지 맡길 정도로 그녀를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령관이 신나는 재즈 음악을 들으며 자료를 검토하는 동안 사령관 옆에 앉아있는 신속의 칸은 탈론페더의 안부를 물어보기 시작했다.

 


“탈론페더. 그쪽은 요즘 좀 어떤가?”


‘포츈과 더치걸이 합류했다는 것만 빼면 별일 없어요. 두 번째 인간분이 맡긴 방송도 잘하고 있고요. 오베로니아 레아의 감시가 좀 심한 것이 문제긴 하네요.’


“그렇군. 그녀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일일이 보고하지 않아도 되니까 안전하게 돌아오는 일만 생각해라.”


‘그리고 두 번째 인간님이 좀 아프세요. 휩노스 병은 아닌 것 같고 단순한 감기지만요.’

 


휩노스 병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사령관과 신속의 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오르카 내부에 있는 지휘관 회의 결과 만장일치로 그들을 돕기로 결정은 했지만, 어떻게 도울지가 문제다. 아예 처음 조우하는 상황이면 모를까, 이미 첩자까지 보내놓은 상황이다. 지금은 두 번째 인간이 탈론페더를 우호적으로 대해주고 있지만 탈론페더가 스파이라는 것이 들키는 순간, 탈론페더와 그의 관계는 물론이고 오르카와의 관계도 틀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가 일반인인 이상 휩노스 병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게다가 철충과 별의 아이들 말고도 레모네이드들이 버티고 있는 PECS라는 적이 있다. 레모네이드들의 귀에 두 번째 인간이 멀쩡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들린다면 그들은 분명 그를 얻기 위해 온갖 수를 다할 것이 분명하다. 

 


그들보다 한발 앞서 두 번째 인간을 보호하고 그들의 세력을 저항군에 합류하게 해야 하는데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들의 신뢰를 얻으며 그들을 오르카 호의 보호 아래 둬야 할지 모르겠다. 한참을 고민한 사령관은 함 내에 있는 모든 지휘관을 호출했다. 오늘의 회의 주제도 역시 두 번째 인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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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카호 사령관과 제갈민의 트루먼 쇼 on


그리고 전 화에서 구출한 건 더치걸 한명과 포츈 이렇게 둘인거 맞음. 내가 묘사를 이상하게 해서 헷갈렸을텐데 ㅈㅅㅈㅅ


그리고 체력이 ㅄ이라 그런지 야로나 후유증 장난 아니네. 3년 동안 안 앓고 있었던 편두통 예토전생함 ㅅㅂ


그리고 작중 최초로 달에서 들었다는 노래는 이 노래임. 지금은 틀노래긴 하지만 나름 명곡이니 시간날 때 한번 들어봐.  https://www.youtube.com/watch?v=ZEcqHA7dbwM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 설정오류 지적도 언제나 환영. 


1화 https://arca.live/b/lastorigin/44976706

2화 https://arca.live/b/lastorigin/44999112

3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036211

4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120694

5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159204

6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239531

7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275420

8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373070

9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402274

10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599944

11화 https://arca.live/b/lastorigin/45709272

12화 https://arca.live/b/lastorigin/46158758